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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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렬한 이상주의자였던 적이 있었다. 정답만을 강요하는 사회/학교에서 자유를 찾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거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시절. 스무 살이 되면 공부나 기타 행동에 대한 강요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낭만을 쫓는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시절. 교과서 속 지식이 아닌 진정한 앎의 세계를 찾아 헤매며 글을 쓰겠다는 신념으로 충만했던 시절. 그때의 나는 아마 주변 또래들과 내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남들과 달리 수능을, 좋은 대학을 넘는 진정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돌이켜보면 그저 책 몇 권을 더 읽었던 사람이었지만.


『인간 실격』을 읽으면서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된 것은, 그때의 내가 요조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시기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성전처럼 떠받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였다. 그때의 나도 요조가 품었던 질문 중 일부를 앓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가 아니어서, 그의 삶이 마냥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 역시 "인간"이라는 종의 질서에 편입되었기 때문일까?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19쪽)


어린 시절부터 요조는 자신이 '인간'과 다른 종(種)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요조는 인간에 대한 "최후의 구애"의 방법으로 익살을 선택한다. 익살은 스스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타자의 경계심을 풀어주는 것이다. "음산한 도깨비 같은" 자신을 받아줄 수 없는 인간 세계에서 요조가 살아남는 방법은 스스로를 낮추는 익살이라는 연기였다. 하지만 요조가 동질감을 느꼈던 다케이치는 그의 연기를 알아채고, 그 앞에서 요조는 자신과 가까운 모습을 내보인다.


"나도 이런 도깨비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기를 바라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케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낸 것입니다. (40쪽)


그리고 호리키가 있다. 요조는 자신의 정체를 알아챈 사람으로 다케이치와 검사를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호리키도 요조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 것 같다. 다만 그는 "인간"답게 요조를 이용했을 뿐. 어쨌든 호리키와 만난 덕분에 요조는 자신에게 공포를 주는 "이 세상의 합법"에서 "비합법"으로 도피한다. 하지만 세상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를 질책하고,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파멸로 치닫는다. 달리 말하자면, 그의 파멸은 끊임없이 죄가 쌓이는 과정이다.


요조의 여성 편력은 그가 여자를 다른 인간만큼, 아니 그들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생물로 여겼다는 점에서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가 두려워하는 인간 세상의 원형이 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납득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그가 창녀를 묘사한 부분을 보면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 혹은 미치광이"처럼 느껴져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에게 항상 실체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세상의 남성성이 그를 여자와 "동류"라고 인식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언제나 인간과 세상에 몸을 움츠리고 있던 요조가 변한 것은 세상에 대한 인식이 변하면서부터다. 호리키와의 대화 도중 그는 문득 세상이 실체 없는 것이 아닌 개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야비한 술꾼"으로 전락해 무뢰한으로 파멸해간다. 세상이 부여하는 억압과 멸시를 못 이긴 나머지 세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그가 무뢰한이 되어가는 과정 역시 자신을 '인간'으로 받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반항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97쪽)


요조의 파멸은 자신의 구애를 받아주지 않은 인간에 대한 도피 또는 반항처럼 읽히기도 하고, 소속될 수 없음에 대한 죄의식이 쌓이는/쌓는 과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요조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요조가 보여주는 끊임없는 자기비하와 죄의식의 밑바탕에 나르시시즘이 깔려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난 요조가 아니라 요조 너머에 보이는, 자의식으로 충만한 다자이 오사무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언뜻 그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죄와 벌을 반의어로 생각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닷말, 썩은 연못, 난마(亂麻)의 그 밑바닥...... 아아, 알 것 같다. 아냐, 아직...... 하며 머리에서 주마등이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115쪽)


죄와 벌을 반의어라고 생각한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자신에게 내려진 벌이 자신의 죄와 무관하다는 이야기일까? 그렇다면 요조의 죄의식과 그의 삶에 부과된 비극은 별개라는 뜻인가? 여러가지 생각들이 뒤엉키지만 명료한 답을 내기는 어렵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그에게 커다란 벌이 닥쳤다는 것, 그에게 있어 "무구한 신뢰"의 상징이었던 요시코가 강간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그가 의탁했던 마지막 희망마저 더럽혀지면서 그의 몰락은 끝을 향해 간다. "신뢰는 죄인가요?"부터 "무저항은 죄입니까?"까지. 그리고 그 끝에는 "인간 실격"의 낙인을 찍는 정신병원이 있다. 인간 실격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요조를 바라보며, 요조가 끝내 속할 수 없었던 인간이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이 세계에 의문을 갖는 순간이 오지만(카뮈의 말을 빌리면, "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순간이다), 요조처럼 세상의 모든 것에 민감해지고 그들과 어울릴 수 없음에 고통받다가 결국 파멸에 이르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요조처럼 앓는 듯하지만 결국 세상과 타협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신을 별개의 종으로 인식했던 요조를 자의식 과잉이라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격리시켜 버린 세상과 인간이 과연 옳았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이 소설에서 보게 되는 것은 끝없이 추락하는 요조가 아닌, 그를 끝없이 낙하하게 만드는 세상, 인간, 나, 우리다.


요조의 수기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오랫동안 그를 불안과 공포 속에 가두었던 세상이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세상이라는 이름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를 받아줄 생각이 없다. 요조의 깨달음처럼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이 '인간' 세상의 진리지만, 지나가기만 할 뿐 세상의 폭력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런 세상을 향해 작가는 말한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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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8-2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의 이 책을 오래 전에 읽었습니다. 어빙 고프만의 저서를 보면서 오사무가 새삼 대단해 보였습니다. 고프만이 하고 싶은 페르소나 얘기....이미 오사무가 이 책에서 요조를 통해 극명히 보여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저는 이 책을 3번 읽었는데, 첨에는 왜 이따위 책을 작가가 썼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 책의 가치가 돋보였습니다. 아무 님의 리뷰로 다시 보니 새롭네요!^^

아무 2016-08-28 01:1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는 읽으면서 고등학생 때가 많이 생각나더라구요 ㅎㅎ 고프만의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읽으면서 인간실격과 비교해보면 이 책이 새롭게 보일 것 같아요. 별점이 더 올라갈 수도..ㅎㅎ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