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
조너선 울프 지음, 김경수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11월
품절


"우리가 인생에서 인류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선택한다면, 어떤 짐도 우리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만인의 이익을 위한 희생이기 때문이다. 인류를 위해 일할 때 사소하고 제한된 이기적인 기쁨 대신, 모든 사람과 함께 하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행적은 조용하지만 영원히 살아 움직이며, 우리의 유골 위에는 고결한 사람들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릴 것이다."
(<직업 선택에 관한 한 청년의 고찰>, 17살의 마르크스)-16쪽

많은 경우, 행위자들은 그들이 '타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또 만나지 않는 한, 자기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신은 다른 행위자(동인)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신이 아닌, 외부 사물의 관점에서 규정할 필요가 있다. 세계에 관여하고, 상호작용함으로써 신은 비로소 자기자신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30쪽

포이어바흐는 많이 다루어졌던 주제를 부활시키면서 인간이 왜 신을 닮았는가 하는 이유에 대해 신이 인간을 자신의 이미지대로 창조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인간의 이미지대로 창조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P32)

포이어바흐는 우리 인간은 사유 속에서 인간을 무한한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어떤 힘을 스스로 지니고 있는데, 이를 통해 모든 완벽함을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를 우리 밖에 창조했다고 보았다.(P33)

마르크스는 근본적으로 인간 존재가 종교를 고안해냈는데, 그 이유는 단지 그들의 지상에서의 삶이 너무 형편없고, 빈곤에 찌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악명 높은 주장,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란 말의 맥락이다.(P35)

본질적으로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포이어바흐가 퇴락에 대한 깊은 불안의 징후를 전해주고는 있지만, 불안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종교를 고안해낸 것은 단순히 불행한 실수가 아니라, 지상에서의 삶이 보여주고 있는 빈곤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32-37쪽

마르크스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와 의식에 따라 고정 틀을 벗어나 의식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로운 생산을 할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인간 존재가 생산할 수 있는 물건들의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런 유적 본질의 측면을 향유할 수 있다. 그곳에서 인간은 생산 행위를 통해 자신의 본질을 표현하기보다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생산할 뿐이다. 이때 그것은 향유가 아니라 고문이다. -55쪽

시민사회와 국가를 구별한다. 국가는 시민의 영역이다. 정치적으로 해방된 국가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한 시민들로, 법 앞에서 평등하고, 풍부한 권리 목록의 자랑스러운 소유자들이며, 서로 자유로우면서도 평등한 국가 구성원이요, 동료이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수준에서 보면 - 일상적인 경제 활동의 수준 - 사물들은 매우 다르게 보인다. 우리들은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필요한 만큼 경쟁하고 착취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다른 이들의 성공을 질투하면서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에 집착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각자 이중생활을 한다. 즉, 평등한 공중 시민과 원자적인 사적 개인으로 말이다. -65-66쪽

"철학자들은 세계를 오직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왔다. 문제는 그것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마르크스의 묘비명이자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의 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75쪽

"코뮤니즘 사회에서는 누구도 배타적인 활동 영역을 가지지 않으며, 사람들마다 자신이 원하는 분야라면 어디에서도 학문과 기예를 배울 수 있고, 또 사회는 생산 일반을 조절한다. 이를 통해 나는 오늘 이 일을 하고 내일에는 다른 일을 하며, 또한 내가 사냥꾼이나 어부 혹은 목동이나 비평가가 따로 될 필요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낚시질을 하며, 밤에는 가축을 돌보고, 저녁식사 뒤에는 비평을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독일 이데올로기> 中)-133쪽

마르크스의 종교 분석은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인류는 신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였다. 둘째, 그 신은 현실 세계에서의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안을 얻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셋째, 인간의 불행의 원인은 일상생활에서의 소외이다. 넷째, 오직 코뮤니즘 사회만이 이런 소외를 극복하고, 종교를 초월할 수 있다. (P144)

종교의 모든 측면들을 하나의 위안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당연히, 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대답들에는 다음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현대의 어떤 사회들은 물리적 재화는 풍요롭지만, 아직 계급이 나뉘어 있으며, 그 때문에 소외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위안을 필요로 한다. 둘째, 계급 사회에서 종교의 존재는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천국에 대한 생각에 미혹되어 노동자들은 지상의 지옥에 대해서는 저항을 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 이론과 직결된다. (P145)

-144-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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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의 몽타주
박찬욱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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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잘 모르지만, 영화에 관심이 있는 나는, 우리나라에 좋아하는 몇몇 감독들이 있다. 그 중 딱 두명만 뽑으면 박찬욱과 허진호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철학과를 나왔다는 것이고, 내가 이 둘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철학과를 나와서는 아니다. 두 사람을 먼저 좋아했고, 나중에 뒷조사를 하다보니 철학과 출신이더라. 좋아하는 다른 감독도 더 있다. 하지만 말이 많아지면 어수선해지기만 하니 그들은 나중에 따로 언급할 기회가 있음 이야기하기로 하자. 오늘의 주인공은 박찬욱이니.

  난 영화를 좋아하지만 하지도 않는 영화를 굳이 찾아다니며 보는 편은 아니다. 부천영화제, 부산영화제 한번도 안갔고, 소위 말하는 예술영화들이 개봉할 땐 그 소식도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홍보물이 내 시선에 들어올 때 비로소 한번 볼까, 하고 움직이는 스타일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영화를 좋아한다 라고 말할 때는 적어도 좋아하는 감독이 있고, 좋아하는 영화장르가 있고, 남들 안보는 예술영화들도 발벗고 찾아다니며 볼 수 있는 정도의 열성이 있어야 영화를 좋아하는거라고. 개봉 때마다 몇몇 영화들 골라서 보러 다니는 건 영화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데이트하기 위해 영화를 선택한 거라고. 하지만 난 말한다. 아니 영화적 장치에 대해 논하고, 예술 영화 찾아다니고, 특정한 배우나 감독에 대해 시시콜콜 알아야 하고, 그 감독들이 논하는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영화를 좋아하는거야? 아니다. 그냥 영화보는걸 좋아하면 영화를 좋아하는 거다. 나름 나는 좋아하는 감독도 있고, 좋아하는 배우도 있으며, 좋아하는 장르도 있다. 그것이면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딴지 걸지마시라.

   <공동경비구역 JSA> 이전의 박찬욱의 영화는 모른다. 많은 이들이 박찬욱을 알고 있을 땐 이미 저 영화를 통해서였을 터. 나 또한 그 '대중'을 구성하고 있는 한 명의 영화팬이다. 이 영화 때도 박찬욱을 제일 좋아하는 영화 감독 리스트에 올리지는 않았다. 이후 그가 <복수는 나의 것>을 내놓았을 때 난 그를 욕했다. 이런 잔인한 영화같으니라고. 잔인하다고 욕먹을 필요는 없지만 난 이 영화가 너무나 불쾌했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봤을 때 난 그에게 열광했다. 이전에 아마 내가 써놨던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한 영화감상문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흠. 생각난김에 찾아봤더니 없다. 이런.

  그가 복수 3부작 시리즈를 내놓았을 때 난 또 열광했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작품. 첫번째는 잔인했고 불쾌감을 느꼈지만 이내 그것은 쾌감이 되었고, 두번째 또한 그 잔인함에 한표를 던졌지만 역시나 열광을, 세번째는 생각만큼 잔인하진 않았지만 또다시 열광을 보냈다. 그의 머리 속엔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는지.

  <박찬욱의 오마주> <박찬욱의 몽타주>라는 책이 지난해 말 나왔다. '몽타주'는 컷과 컷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영화 장르의 핵심적 특성을 드러내는 용어이다. <박찬욱의 몽타주>에서는 그가 지금껏 써온 칼럼, 에세이, 셀프인터뷰, 제작일지, 그의 영화에 대한 생각들을 모아모아 짜깁기했다. 사실 기대한 만큼의 책은 아니었다. 나는 짜깁기 책보다는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다시 쓴 그만의 영화이야기를,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지나친 기대였던 것일까. 이 책은 모두 짜깁기다. 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매체에 글을 기고했다는 자신이 쓴 이런저런 글들을 모아모아 만든 짜깁기 책이다. 그래서 조금 실망했다. 그의 글을 보고 싶었으나 그런 글을 기대한 것은 아니므로.

  그는 영화감독 이전에 평론가로 활약했다고 한다. 이 역시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 이 책에도 그의 평론이 조금  실려있다. 책의 뒤쪽에 그가 말하는, 그가 좋아하는 B영화에 대한 평론들. 하지만 그건 읽어도 도통 그 영화들을 본 적이 없으므로 알 수 없어 넘어갔고. 그냥 그의 쿨한, 솔직하게 써재낀 칼럼과 에세이가 좋았다. 글발이 있는 사람은 아닌 듯 하다. 아니면 글발이 있지만 귀찮아서 막 쓴 듯이 보이는 그 글들. 처음엔 좀 불쾌했다. 그의 영화를 접할 때도 불쾌했지만 그것이 쾌감으로 변질되었듯, 그의 글을 통해서도 난 불쾌감으로 시작해 쾌감으로 끝났다. 그것은 어쩌면 그에 대한 나의 호의적 감정이 만들어낸 쾌감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칼럼이나 인터뷰 글들은 뭐랄까 너무 가볍다. 진지함이 묻어있지 않다. 물론 모든 칼럼이나 에세이가 진지할 필요도 없고, 그는 그런 것을 싫어한다고까지 밝혔으므로 그는 무죄. 그걸 기대한 나는 유죄. 마치 우리가 어느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자기소개 형식으로 100문 100답을 쓰는 듯한 귀차니즘과 억지성의 압박심리가 느껴졌고, 아마도 뜨기 전의 그는 밥벌이의 수단으로, 혹은 알려지기 위한 수단으로 글을 썼기에 그와 같은 느낌이 오는지도 모르겠다.   <몽타주>를 통해 박찬욱을 알기엔 많이 부족했지만, 조금이나마 내가 좋아하는 그에게 더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동시에 나온, 하지만 조금 더 비싼, <박찬욱의 오마주> 도 곧 사보지 않을까 하는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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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6-02-04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꼭 장르와 감독, 영화의 기술적인 문제들에 대해 시시콜콜히 알고 있어야 매니아인가요. 영화 나올때마다 불법다운로드 받지 않고 꼭 개봉관에 가서 보시는 아프락사스님같은 분이 진짜 매니아죠.^^

마늘빵 2006-02-04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네 감사합니다. 어제도 영화 하나 보고 왔어요. 이따 글 올려야지. 요즘 개봉한 것 중에 보고픈게 꽤 있는데 흠 다 보긴 힘들거 같구 골라서 몇 개 더 보려구요. 전 불법다운로드는 안해봤어요. 어캐하는지도 몰라요. ㅋㅋ
 
박찬욱의 몽타주
박찬욱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12월
품절


이데올로기적 편향성 면이나 계몽적 태도에서 절제를 했다는 점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큰 미덕이 아닌가 합니다.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족주의를, 특히 한국인의 과도한 민족주의 성향을 몹시 두려워하는 쪽입니다. 그래서 <아나키스트> 각본에서도 의열단원들이 독립운동의 차원을 넘어 무산자 혁명을 추구하는 무리임을 강조해던 것이고요. 그렇다고 본능적으로 우러나는 민족 감정까지 억눌러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통일의 당위성을 강변하기보다는 논리적으로, 현실적으로 분단 상황을 몹시 불편한 것이라는 사실을 설득하는 방향으로 풀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통일을 논하기에 앞서 전쟁의 회피가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싶군요. 잘 못 느껴서들 그렇지, 한반도는 언제라도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지역이거든요.

('나를 죽이다' 中)-163쪽

각자의 개성을 평가한다면?
이영애는 관찰자 역할에 잘 어울리는 크고 아름다운 눈을, 이병헌은 대한민국의 가장 건강하고 평범한 젊은이를 연기하는 데 적합한 건치를 가졌죠. 송강호의 매력은 복잡하고 모순적인 캐릭터임을 단박에 드러내 줄 수 있는 짝짝이 눈에 있구요. 김태우의 그 커다란 귀는 유약하고 섬세한 성격을 표현하는 데 제격이고, 신하균의 송아지 같은 눈망울에는 선량함과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이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다는건 내게 있어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었죠.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中)-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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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6-01-25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샀는데 아직 읽지는 않았어요. 워낙에 밀린 책들이 많아서리..^^
 
자유의 감옥 올 에이지 클래식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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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의 감옥> 리뷰를 쓰려고 컴퓨터를 오늘 세번째 켜고 있다. 켤 때 마다, 쓸 때 마다 이놈의 노트북이 벅벅 예고도 없이 전원이 꺼지는 바람에 미치고 환장하지만, 이제 이런 것도 적응 됐다. 그냥 응 꺼졌구나 그래 그래. 다시 켜면 되지. 괜찮아. 자식. 많이 열받았나보네. 근데 오늘 너 별로 쓰지도 않았는데 열받고 그러니 속으로 그렇게 달래며, 다시 전원을 켜고 또 켜고 그런다. 날리면 어떠니. 아까 그 글이 그대로 나오진 않겠지만 뭐 내가 언제 대단한 글이나 썼니. 그냥 허접하게 다시 쓰면 되지. 이번 또 꺼지면 가만 안둔다아아.

  환타지. 환타지. 환타지. <자유의 감옥>은 환타지 소설이다. 그러나 중고딩들이 교실에서 몰래 몰래 훔쳐보는 그런 환타지가 아니라 약간은 고급스런 환타지라고나 할까. 뭐가 고급이고 뭐가 저급인지 따지는게 참 우습긴 하지만 말야.

  내가 지금껏 읽은 환타지 소설은 <꿈꾸는 책들의 도시>가 전부였다. 흠. 문제있나? 너무 편식했나. 편식이라고 할만큼 다른 분야의 책들을 열심히 읽은 것도 아니니, 이것 찍접 저것 찍접 했달 밖에. 드라마 삼순이가 지난해 시상식을 화려하게 휩쓸어버리고, 약 한달이 못지났다. 삼순이 때문에 뜬 책이 바로 <모모>라는 환타지 소설인데, 이 책이 아마 <자유의 감옥>의 저자와 같다고 하지? 미하엘 엔데. 1995년 그가 세상을 떠난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출판사들은 그의 사망 10주기를 기념하여 작품 복간에 들어갔다. '독일 문학의 마지막 낭만주의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미하엘 엔데.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모모>를 보기 전에 <자유의 감옥>을 접해 순서가 뒤바뀐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일단 읽었으니 어쩌랴. 아마도 <모모>가 더 재밌고 쉬운 모양인데, <자유의 감옥>은 너무나 어렵고 좀 지루하고, 결과적으로 재미 없었다. 미안하게도.

  <자유의 감옥>안에는 여덟개의 각기 다른 작품들이 숨어있다. '긴 여행의 목표' '보로메오 콜미의 통로' '교외의 집' '조금 작지만 괜찮아' '미스라임의 동굴' '여행가 막스 무토의 비망록' '자유의 감옥' '길잡이의 전설' 이렇게 여덟개. 많은 이들이 이 책을 보았고, 그의 기발한 상상력과 무궁무진한 아이디어에 찬사를 보내는 반면, 나를 포함한 일부 몇몇 사람들은 재미없어, 지루해 라는 반응으로 일관. 아니 도대체 머리 속에서 어디에 이상이 있길래 많은 이들의 감상과 나의 감상이 다른 거지? 흠. 내가 아직 환타지 입문자이기 때문인가. 나도 인정한다. 미하엘 엔데의 그 순수함과 기발한 상상력, 끊임없이 뽑아져나오는 아이디어. 좋아 인정해. 그런데 재미는 없어. 이야기가 너무 어려워. 혹자는 철학적인 환타지라고도 하는데. 음 맞다. 철학적이다. 그가 이 짧은 환타지를 통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바가 분명히 있고 그것은 비판이기도 하며 교훈이기도 하다. 동화 같은 이야기 속에 그런 의도들을 숨겨놓았다는 점에서 분명 가볍게 볼 수 없고, 철학적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냐고. 난 재미가 없다고.

  굳이 재밌는 작품을 골라보라면 '긴 여행의 목표' 와 '교외의 집'이 괜찮았다. '긴 여행의 목표'에 등장하는 순식간에 갑부가 되어버린 부도덕한 싸가지 없는 녀석이 과연 어떤 행동을 할까 궁금증을 가지며 읽었고, '교외의 집'에서는 공간을 차지 하지 않는 집이란 기발한 상상력, 그리고 이를 풀어가는 과정이 괜찮았다. 어려워서 후딱 읽고 끝내야지 하는 마음으로 정말 후딱 읽어버렸지만, 전 국민이 본 그의 또다른 작품 <모모>는 좀 더 기대를 해봐야것다. 나에게 재미를 선사해줘. 보니깐 초등학교 5학년 이상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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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 마마 자마
야마다 에이미 지음, 김난주 옮김 / 북스토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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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각적으로 두 눈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저 멋드러진 표지. 내가 이 책을 손에 들고 있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어머 표지가 너무 이쁘네요. 빨간색으로 시선을 확 잡아끄는게..." 정말 내가 봐도  표지 이쁘다. 검정색으로 육감적인 여성을, 빨간색 드레스를 길게 늘어뜨리며, 나 섹시해요, 나 당신을 원해요, 라고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비록 말은 없어도.  

  "사랑? 그런 식으로 솔직해지면 안되지." <배드 마마 자마>의 표지 문구다. <배드 마마 자마>는 솔직한 사랑, 솔직한 성을 이야기한다. 옮긴이 김난주는 책의 맨 앞에서 작가 야마다 에이미에 대해 이런 설명을 붙여놨다.

  야마다 에이미 -

  여자의 성을 누구보다 아름답고 당당하게 그려내는 작가. 새로이 선보이는 작품집 <배드 마마 자마>는 육욕에만 허우적거리는 천박한 성이 아니라,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 사랑하고 그 육체를 찬미하고 즐길 줄 아는 성숙한 여자의 성을 이야기한다. 

  야마다 에이미의 작품을 접한 건 이 책이 처음이며, 매우 육감적이고, 자극적이며, 당당하다. 이 책 안에는 세 가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책의 전체 제목인 '배드 마마 자마'라는 소설, 그리고 '캔버스관' '입냄새'. 앞의 '배드 마마 자마'가 너무나 강렬했던 나머지 뒤의 두 작품을 읽으면서도 머리 속에서는 검정, 빨강, 땀, 육체의 이미지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색깔을 참 잘 활용한다. 머리 속에서 그녀의 글은 그림이 되어 나타난다. 검정은 빨강과 매우 잘 어울린다. 둘다 자극적이고, 비밀스러우며, 때로는 천박하기도, 때로는 고급스럽기도 하다. 흑인과 빨간 옷을 입은 여자도 잘 어울린다. 작가 야마다 에이미의 소설에는 외국인 남성이 등장한다. 그것도 흑인이. 대개 외국남성을 등장 시킬 때는 외모가 멋드러진 이탈리아나 프랑스 남성을 끌어들이는데 비해, 그녀는 흑인을 선호한다. 흑인은 너무 육감적이고, 섬세하며, 부드럽다. 그것은 곧 여성이다. 여성을 잘 이해하는 남성의 대표적인 유형으로 그녀는 흑인을 손꼽은 것이다. 실제로 흑인이 그러한지 어떤지는 모를 일. 흑인과 대화를 하고, 함께 어울리고, 섹스를 해보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일. 또한 한 명의 흑인과의 경험을 전체 흑인의 일반화로 단정지을 수도 없는 일. 하지만 실제로 경험하지 않더라도 흑인 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그렇다.

   이 책의 제목이자 책 속의 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배드 마마 자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어로 '배드'는 '나쁜'이라는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쓰이지 않는다. 작가에게 있어 배드는 '얄미운'에 더 가깝다. 소설 속에서 '배드 마마 자마'라는 클럽에서 틀어주는 노래가 있다고도 했지만, '배드 마마 자마'가 의미하는 것은, '남자의 혼을 쏙 빼놓는 얄미운 여자'를 의미한다. 춤을 추며 클럽에 들어서고 추파를 날린다. 섹시하고 육감적인 몸매와 의상, 나 작업걸어주세요, 라고 써붙였다. 남자들의 시선이 집중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여자 당차다. 직접거린다고 받아주지 않는다. 쿨하게 거절하고 나오는 당당함. 당연히 얄미울 밖에. 실컷 혼을 빼놓고는 내빼다니. 그런 여자가 즐기는 인생을 살다가 한 외국인 남자를 만났고 결혼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 남자가 지겨워질 밖에. 여자는 이 남자를 사랑하지만 다른 남자에게도 필 꽂혔다. 안돼 안돼 하며 친구에게 소개해주고선 자기가 만나며 결국 섹스를 했다. 하지만 어 이런 느낌이 아닌데, 몸은 느꼈으나 마음은 느끼지 않았다. 아 '키스'는 아냐, '데이빗'이 보고 싶다. 결국 그녀는 하룻밤의 불놀이로 끝내고 마음으로 사랑하는 데이빗에게로 돌아간다.  

    여성의 성에 대해, 여성의 사랑에 대해 솔직하게 까발린 소설이다. 쿨하긴 했지만 가슴으로 와닿는 감동은 없는, 어쩌면 쿨하기 때문에 그런 감동을 배제한 소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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