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종로에서 택시기사들이 '택시요금 인상 철회', '연봉제 대신 월급제를' 등등의 팻말을 들고 시위를 했었다. 그리고 최근 한나라당과 자민련 의원들의 짜고치기 고스톱으로 교원정년 1년 연장이 성립되어 학부모와 젊은 교사들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큰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위에 대해서,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다수는 교통이 막히고 거리가 시끄러움에 불만을 표하며 시위를 못마땅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시위 내용을 보면 실질적으로 일반 국민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지나는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불평불만이다. 분명 거리에서 불평을 토로한 시민들은 나중에 대선공략으로 택시요금 인하, 교육정년 원상복귀를 외치는 대선후보들에게 지지의사를 보낼 것이다. 왜 이토록 생각과 행동이 다른가.

택시 요금이 내리고, 농업이 안정되면 그 이득은 결국 일반 국민들에게 오는 것인데, 사람들은 당장의 불편을 토로하기만 하고 멀리 내다보지를 못한다. 만약 농업이 안정이 안돼 우리나라 농가가 모두 망한다면 외국의 쌀을 먹고 살아야 할 것이고, 외국에서 쌀 값을 기존의 우리의 농가 쌀 값보다 훨씬 높게 책정하면 우리는 그때가서 말없이 비싼 쌀을 받아먹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일이 현실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농민들의 시위, 택시 기사들의 시위를 지지해도 모자란데 오히려 이들을 탓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보다 모순적인 경우가 없다. 실질적인 목소리를 같으나 밖으로는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매우 못마땅하다. 시위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은 시위현장이 그들에게 주는 시각적인 이미지만을 받아들여 그것을 실질화시킨다. 마치 겉으로 보이는 허상이 본질인 것 처럼 말이다. 본질은 오히려 그것과 정반대되는 것임에도... 일전에 나도 노동자들의 시위나 파업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적이 있지만, 그때 내 고민은 시위나 파업을 통한 방법 밖에 없었던 것일까 하는 문제였지 시위 자체에 대한 부정은 아니었다.

자본주의를 도입해 산업화 사회를 거쳐 정보화 사회로 가면서 우리는 물질적으로 매우 풍족한 상태에 있다.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있고, 다양한 문화생활을 영위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사회의 외적인 안정감에 자신의 정신까지도 안정시켜 놓았다. 정신을 놓고 다니니 그저 내 자신에게 오는 직접적인 피해만 아니라면 나와는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시위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모습은 이렇게 해석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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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내가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이유'라고 제목을 달려고 했으나 혹시 제목이 길어서 본문을 다 쓰고 거부당해 본문이 날아가는 사태가 빚어질까 '두려워' 제목을 짧게 줄인다. 그러나 '빨리 읽지 못하는'과 '늦게 읽는'은 분명히 뉘앙스가 다르다. 책을 늦게 읽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말이 안되는 것 같기도 하다. 책을 늦게 읽는다? 책을 늦게 읽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나 '책을 빨리 읽지 못한다' 라는 말은 가능하다. '빨리 읽지 못한다' 는 말은 '빨리 읽는다'를 부정하는 말이고, 그와 반대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쨌건...
잡소리 그만하고...

나는 책을 매우 '천천히'(차라리 '늦게'라는 단어보다는 '천천히'라는 말이 어울릴 듯 하다) 읽는 편이다.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일일이 다 읽는 것도 아닌데 난 책장을 빨리 넘기지 못한다. 내가 나의 책읽는 속도에 답답해서 짜증이 날 지경이다. 읽고픈 책은 많은데 속도가 이렇게 느려서야 어떻게 그 많은 책을 다 읽을 수 있겠는가.

나의 책 읽는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동안의 책 읽을 때의 내 모습을 떠올려 보며 나는 내가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분석을 해봤다.

일단 나는 책상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는 경우가 거의, 아니 아예 없다. 책을 읽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난 이미 누워있다. ㅡㅡ; 비스듬히 베게에 의지해 책을 읽다가 자세가 불편해 베게에 머리를 얹는다. 그리고는 두 팔을 들어 책을 본다. 팔이 아프면 옆으로 기울기도 한다. 그렇게 꾸준히 책을 잘 읽다가 어느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 글귀를 눈으로 받아들이고 머리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머리 속에서 갖가지 생각들이 얽히고 설키기 시작한다. 이래저래 생각이 꼬리를 물고 확장되면, 나는 어느새 잠이 들어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이유이다. '책을 읽는다 -> 생각한다 -> 잔다'라는 도식이 성립되는 한 나의 책읽기는 느릴 수 밖에 없다. 책만 읽으면 자니 어디 진도가 빨리 나가겠는가. 그래도 다행히 중간에 '생각한다'의 과정이 있기에 나의 책읽기가 헛되지만은 않다. 책을 읽으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일면 당연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 당연한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생각의 생각으로, 생각의 생각으로,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사고가 확장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은 사고를 넓고 깊게 하기 위함이다. 비록 나의 책읽기가 결과적으로 잠으로 빠져들기는 하지만 중간에 '생각하기'의 과정이 있어 다행스럽다. 내가 책을 빨리 읽기 위해서는 생각에서 잠으로 빠져드는 통로를 어떻게든 막아야한다. 그 방법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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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에 들어와 동아리를 찾던 중 가입한 곳은 '노래패'였다. 당시 나는 학교 식당 앞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록동아리 인줄 알고 찾아갔으나 알고 보니 민중가요를 부르는 '노래패'였다. 나는 대학 새내기라면 으레 그렇듯 '운동권'이나 '민중가요'라는 단어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기왕 가입했으나 열심히 해보자 하고 마음 먹었다. 그곳이 록동아리였건 노래패였건 내 목적은 드럼을 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드럼이 목적이었던 나는 그 노래가 민중가요던 록이던 별 상관없었다. 그저 드럼을 친다는 것으로 행복했다.

#1
시간이 흘러 노래패 공연을 할 때였다. 선배들과 나는 공연곡을 놓고 어긋나기 시작했다. 민중가요에도 장르가 다양하기에 나는 민중가요 중 다소 록적인 노래들을 연주하고 싶어했고 선배들은 쨍가를 넣고 싶어했다(쨍가는 너댓명이 앞에 나와 주먹을 쥐고 손을 흔들며 부르는 노래라고 보면 된다). 민중가요에 적대적인 나는 쨍가를 매우 싫어했다.

#2
노래패에 있다보면 선배들이 함께 집회에 가자거나 교양교육을 하자는 제의를 하곤한다. 어떤 곳에서는 후배들을 강제로 집회장소에 데리고 가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집회를 나가지 않으려는 나와 선배들은 보이지 않는 벽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1과 #2를 통해 본 나는 운동권과 민중가요, 집회, 시위 이런 단어들에 매우 적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그저 노래패에서 드럼만 치고 싶었다. 그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대학 4학년인 나는 이상하게도 운동권, 민중가요, 집회, 시위 라는 단어에 매우 친숙하다. 아는 민중가요도 별로 없고 집회나 시위에 참석해본 적은 더더욱 없는 내가 이 단어들에 친숙한 것은 왜인가. 지금의 나를 보면 나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시각이라는 것은 천상 운동권이다.

1학년때는 그토록 적대적이었던 내가 4학년에 와서 친숙하게 된 것은 바로 '철학' 때문이다. 1학년 당시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의미도 모르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2학년에 철학과로 전과한 이후 동서양의 위대한 사상가들과 만나면서 또 나의 사유함의 범위가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나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나름대로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생겨났다. 사회 제도의 모순들에, 사회의 약자들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결국 나는 운동권의 시각을 갖게 됐다. 운동 한번 안해본 책상물림 운동권이 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운동권과 내가 다른 것은 그 시작에 있다. 대개의 운동권은 민중가요를 부르고, 집회에 나가고, 선배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나름대로의 시각을 형성하는 반면, 나는 그러한 과정없이 오직 철학으로 지금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현재의 나를 볼 때 결과적으로 운동권의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 시각의 '본질'은 다른 것이다. 나의 시각은 사유함에서 비롯되고, 그들의 시각은 자신의 눈으로 현실을 봄에서 비롯된다.

나는 내 스스로의 생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배들의 말이나 제의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내 스스로가 공부하고 생각하면서 그 시각을 형성하고 싶었다. 강요받지 않은 자기주체성에 기반을 둔 사유를 통해 나는 세상에 눈을 떴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의 사유함을 토대로 현실에 뛰어드는 것이다. 운동권에 비해 나의 행동은 한참 늦었지만 그들에 비해 나는 깊이있는 사고를 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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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릴적부터 무언가를 수집하는 것에 집착하곤 했었다. 과자안에 들어있는 판박이나 스티커 혹은 딱지 같은 것들을 수집하기도 했고, 책갈피를 수집하기도 했다. 언젠가부터는 레스토랑이나 커피숍에 갈 때면 나올 때 항상 그 가게의 성냥갑을 하나씩 들고 나오곤 했는데, 성냥을 수집한다기보다 성냥갑을 수집한다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성냥갑을 수집하는 것은 내가 이곳에 왔었다는 어떤 증표를 남기고 싶었기 때문인데,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성냥갑이라고 다 똑같은 성냥갑이 아니다. 냇물가의 자갈들이 모두 똑같은 돌덩이가 아니듯 성냥갑도 모두 똑같은 성냥갑이 아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수많은 돌덩이 중에 유난히 나의 눈에 들어오는 이쁜 돌덩이가 있을 수 있듯, 성냥갑 중에서도 모양새와 빛깔이 매우 고와 꼭 가지고 싶은 성냥갑이 있다는 말이다.

영화관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는 난 영화표를 모으기 시작했다. 나중에 모은 이 영화표들을 꺼내보며 나는 그때를 회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이때 이 영화를 누구랑 봤는데 어땠다 라든가, 이 영화가 그 당시 한창 화제를 불러일으켰었지 라는 식으로 개인적 경험이나 당시의 문화적 풍토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학에 들어와 나는 씨디와 책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고, 더불어 시사주간지도 수집하기 시작했다. 또 나는 대학 4년간 수업시간에 사용되었던 발제지(혹은 발표지라고도 한다)와 교수님께서 나눠주신 핸드아웃을 각 분야별로 모아서 서류봉투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 외에도 나는 얼마 안되는 양이지만 영화포스터나 음반포스터를 수집하고, 악보를 수집했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나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수집하고 있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일전에 나는 다른 글에서 나의 주변의 모든 것과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문자화'시킨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모든 것들을 문자화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수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수집경험에 비추어 수집에 대한 나의 몇가지 생각들을 말하고자 한다.

첫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수집하는 사람에 대한 오해이다.
수집벽이 있는 사람은 낭비벽이 심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왜 그런고 하니, 주위의 모든 경험하는 것들을 수집하는 사람은 돈을 들여 그것을 사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본래 나의 것이 아닌 길거리에 널려 우리 모두의 것이었던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개입하게 된다. 수집을 하자면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고 어쩔 수 없이 돈을 들여 사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을 수집해도, 음반을 수집해도 돈이 들어간다. 어떤 사람은 책갈피나 성냥갑은 돈이 안들어가지 않느냐 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보면 책갈피를 얻기위해서는 책을 사야하고, 성냥갑을 얻기 위해서는 레스토랑이나 커피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레스토랑이나 커피숍에서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지 않더라도 성냥갑을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냥갑을 수집하는 본래의 의미를 사라져버리게 한다. 내가 성냥갑을 수집하는 것은 내가 방문했던 장소들을 기억하기 위함인데 그러한 '경험'이 배제된 채 얻어낸 성냥갑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이래저래 돈은 들어가기 마련이고 수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돈을 헤프게쓰는 사람쯤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수집의 즐거움이다.
수집은 수집하는 사람에게 일종의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수집을 하면서 겪게되는 어려움은 나중에 내가 수집한 물품들을 볼 때 흐뭇함을 느끼게 해준다. 쉽게 수집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만큼 가치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무엇이든 어렵게 얻어낸 것이 값진 것이다. 희귀한 음반을 하나 구하고자 할 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한다. 내가 자주 찾던 동네 단골 레코드점부터 시작해서 수입 레코드점, 중고 레코드점 심지어는 인터넷의 외국 쇼핑몰까지도 뒤진다. 이렇게 해서 얻어낸 음반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음반들의 격을 한껏 높여주게 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오직 나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음반이기 때문이다. 나의 씨디 진열장에 구하기 힘든 음반이 하나 들어옴으로써 전체적인 위상이 한껏 높아지는 것이다.

수집의 즐거움은 또 있다. 오랜 세월 한가지 물품만을 수집하다보면 쌓이고 쌓여 음반의 경우 소규모 레코드점을 차린 것 같은 수준에 이르기도 하고, 책의 경우 작은 헌책방을 하나 차린 듯한 수준에 이르기도 한다. 나만의 작은 레코드점이자 헌책방인 것이다. 푸근한 쇼파에 비스듬히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내가 수집한 책들 중 하나를 끄집어내 책장을 넘긴다. 귓가엔 감미로운 재즈선율이 흐른다. 과히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귀한 물품을 수집하며 겪는 어려움을 수집 과정의 즐거움이라 한다면, 오랜 세월의 수집으로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언제나 끄집어내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수집의 마지막 즐거움일 것이다. '경험의 문자화'와 함께 '경험의 수집화'는 나의 생애가 다하는 날까지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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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이지만 가장 미국을 혐오하는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인 노암 촘스키. 이미 우리에게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불량국가'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숙명의 트라이앵글' 등의 책으로 알려져있는 노암 촘스키는 반세계화 운동과 신자유주의 비판, 미제국주의의 비판의 선두에 서서 가장 진보적이고 치열한 사고를 하는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노암 촘스키는 어느 글에선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세상에 알려야하며, 정부의 명분과 동기 이면에 감춰진 의도들을 파악하고 비판해야 한다"

 나는 촘스키의 이 말이 매우 마음에 든다.  촘스키의 이 말대로 지식인이 정부의 거짓말과 명분, 동기 이면의 감춰진 의도들을 파악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지식인은 주류의 입장을 대변하기 보다는 소수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줄 알아야하며, 항상 사회의 억압받는 이들에 대해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지식인은 남들이 모두 '예스'라고 말하는 것에 '노'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하고, 남들이 모두 '노'라고 말하는 것에 '예스'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지식인은 또한 해야할 말을 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지식인은 또한 소수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 뿐 아니라 '소수의 삶'을 행동으로써 보여줘야 할 것이다.

 나는 지식인인가? 나는 지식인의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햇병아리 지식인이라고 보면 될 듯 하다. 이미 지식인의 삶을 걷기로 한 이상 나는 지식인의 영역에 발을 내딘 셈이다. 이제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나는 내가 한 말을 행동에 옮기는 것만이 남아있다. 말을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나는 지식인의 영역에 비로소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동의 첫번째는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되는 길이다. 나의 양심, 나의 신념에 비추어 분명 전쟁은 악이다. 인류는 전쟁을 막을 수도 있었다. 우리는 전쟁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인류는 끊임없이 전쟁을 해왔고 그 끝을 모르고 있다. 전쟁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과 힘없는 노인들, 여자들을 무차별 살육한다. 또한 수많은 군인들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는다. 그들은 왜 싸워야하는가. 나는 반전평화주의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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