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제 494호)에 "베트남의 악몽이 날 밀어간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예비역 군인이든, 현역 군인이든 간에 '반전평화'라는 말만 꺼내면 동료 군인들로부터 집단 테러를 당하는 지금의 현실에서 베트남 참전군인 출신인 김영만씨의 행보는 참 용기있어 보인다. 반전평화를 위한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대표, 코리아평화연대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데다 베트남 평화마라톤 대회까지 참석한다니 군인집단으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내가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은 얼마전 있었던 '예비역 준장의 별들의 모임 강제탈퇴사건'때문이다.

 얼마전 한 예비역 준장이 일간지에 '이라크 파병 반대'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가 예비역 별들의 모임에서 '강제탈퇴'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저 자신의 소신을 밝혔을 뿐인데 그것을 꼬투리로 삼아 모임에서 강제탈퇴까지 당하다니...

 대통령은 바뀌었을지언정 군인집단은 바뀌지 않음을 실감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비록 이라크 파병이 결정되긴 했지만(사실 이것도 특정언론과 한나라당의 확정되지도 않은 파병에 대한 기정사실화 발언으로 인한 언론플레이가 작용한 바 크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개인으로서 반대의 의견을 내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그는 '왕따'를 당했다. 군인으로써 "파병을 하라" 라고 말하는 것은 허용되면서, 그 반대의 의견은 무시당하는 이 현실이 참 개탄스럽다.

 군인사회가 아무리 개인의 의견은 없고, 집단의 의견이 중시되는 사회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옛 군인사회의 모습이고,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는 발전불가능한 사회다.

 볼테르의 관용론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당신의 말 할 권리를 위해서는 함께 싸우겠다."
 
 비록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못하더라도 말 할 기회는 부여해주는 것이 기본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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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 역 출구에서 한 여학생을 만났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있던 내게 다가오더니 "저기요, 혹시 교회 다니세요?" 라고 물으며 입을 뗐다. 순간 '앗! 이런 걸렸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 여학생이 귀찮게 느껴졌지만 참기로 했다. 몇 년전 수유리에서 "혹시 도에 관심있으세요?"라고 말했던 여학생에게 너무 짜증스럽게 대했다가 오히려 그 여학생의 말빨에 내가 기가 죽었던 적이 있었고, 당시에 나도 참 미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솔직히 도에 관심있냐고 물은 것이 뭐 잘못인가? 단지 나는 걸렸구나 하는 생각에 귀찮음을 느꼈을 뿐이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이번에는 이 여학생을 함부로 대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녀는 내게 요 앞에 xx교회에 다니는데 이번 일요일에 거기에 한번 와보지 않겠느냐, 좋은 말씀 한번 들어봐라 라는 식으로 말을 했고, 나는 모든 종교를 거부하지도 않되,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나는 특정 종교에 구속되고 싶은 생각이 없으며, 따라서 나를 기독교인으로 만들려고 하지는 말라 라는 등의 내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면서 나는 종교로서가 아니라 철학으로서 당신이 말하는 세상의 문제들과 우리 자신의 문제, 진리를 찾아나가는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여학생은 자신과 나의 관심사와 가치관이 동일하다는 것을 공감하며 기됵인으로 전도하려는 것은 그만두고 그저 일요일에 좋은 말씀을 전하니 한번 와바라 라는 식으로 나를 설득했다.

 추운 겨울에 그렇게 서서 나를 설득하는 그녀를 보니 참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차라리 매몰차게 말했으면 찬바람 맞지 않고 그냥 갔을텐데 괜히 내가 제대로 응하는 바람에 서로의 말을 들어주고 또 말하고 하느라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

 결국 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서 전화가 와 그 자리를 뜨고 말았지만, 그녀는 내게 꼭 한번 와보라 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취직을 하고, 돈을 벌고, 차를 사고, 집을 사고, 애를 낳고, 기르고 하는 일련의 인생의 과정들이 아주 평범해보이지만 사람들은 이것조차도 겨우겨우 따라간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다 해도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어떤이는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모르고 산다. 물론 그 행복이라는 것이 본인이 느껴지는 바에 따라서 결정된다면 아마도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 또한 그 행복을 느끼면서 무언가 비어있다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난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그런 생각을 해봤을 거라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이 틀렸기 때문에 공황을 맞이하는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등등의 소위 말하는 철학적 물음들은 바로 우리가 느끼는 공황이 무엇인가를 대변해준다. 그녀가 말하는 바도 그러한 것. 아무리 청년실업이다 뭐다 하면서 먹고 살기 힘들더라도 그것을 논하기 이전에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정신적 공황을 메꿔야한다는 것이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서 말이다.

 결국 나도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다가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이렇게 사회준비인이 되어버렸지만 그렇다고 내가 찾던 것들, 고민하던 것들이 가치없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것은 삶을 살아가면서 꾸준히 묻고 대답하는 과정을 거치며 찾아야하는 것들이고, 다른 한편으로 나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준비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나는 나의 물음들을 접어놓은 채 사회준비를 하련다. 삶의 안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숨을 쉴 작은 구멍 하나만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물음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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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많고 시끄럽던 의-약 분업이 시행된지도 꽤 지나 이제는 국민들조차 새 제도에 적응한 모습이다. 약을 구입하기 위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처방전을 받아 다시 약국에 가서 약을 구입하는 귀찮은 과정은 새로운 것에 빨리 적응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는 그다지 큰 불편은 아니었나보다.

 나 역시 이러한 귀찮은 과정을 거쳐 어렵게 연고 하나를 구입했다. 병원에 가서 진료예약을 하고 며칠 뒤 진료를 받고 약국을 찾아 연고를 구입했다. 다음은 약국에서의 대화이다.

 (처방전을 들이밀며) "이 연고 있어요?"
 "네 여기요. 1,500원이에요."
 (돈을 주며) "네. 수고하세요"

 참으로 간단한 대화이지만 이 안에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다 들어있다. 의-약 분업 이후의 약사는 과연 의료진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지금 '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하고 있는가'를 물었다면 나는 지금의 약사에 대해 질책을 하려 하는 것이지만, '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면 약사의 잘못을 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서 문제점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지금의 약사는 슈퍼주인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참 건방지고 당돌한 질문이다. 하지만 현실이다.
 물론 슈퍼주인이 소비자가 원하는 아무 상품이나 소비자에게 팔 듯이 약사가 아무 약이나 소비자('환자'가 아니라 '소비자'다)가 원한다고  해서 팔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슈퍼주인과 다를 바가 없다. 약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게 우리네 약사의 현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약사인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약사회에서 뭘 받아먹거나 한 것도 없다. 내가 약사를 옹호한다고 해서 비난하지는 말라.

 그렇다고 의-약 분업을 예전으로 돌려놓자는 것도 아니다. 그럼 뭔가? 내가 말하고픈 것은 무엇인가?  약사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난 심정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훗...  그러기엔 너무나 장황했나.

 약사 너무 불쌍하지 않나요?




여담 하나.

우리 국민들은 그렇게 말많던 의-약 분업이라는 새로운 제도에 쉽게 적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새로운 것에 빨리 적응한다는 것은 그만큼 변화에 잘 적응한다는 것이며 생활력이 강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의 단점은 뭐든 한번 굳어지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드는 일이라면 물불 안가리고 누구나 달려들어 스스로 적응한다는 것이다. 자발적 복종. 무서운 국민성이다.


여담 둘

우리네 국민의 면역성 약화를 우려하여 함부로 약을 조제하지 못하도록, 약을 팔지 못하도록 의-약 분업을 실시했지만,  면역성 약화 면에서 볼 때 과연 예전과 얼마나 달라질지 의문이다. 어차피 약을 사는 것도, 진료를 받는 것도 환자인데, 굳이 예전에 약사가 잘못했기 때문에 국민의 면역성 약화란는 결론이 도출된 것이 아니라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바는 없다. 단지 약에 대한 실권이 의사에게 넘어갔을 뿐. 그렇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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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에 실린 冊 에세이 '숨어사는 외로움'에서 김수열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나눔 이전의 나눔이며, 가장 큰 나눔의 실천입니다.
  나눔이 무소유의 소극적 실천이라면 자발적 가난은 적극적 실천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가난해지려고 노력할 때, 이 세계의 모든 가난은 끝나게 될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문장이다. 내 자신이 부를 소유함으로써 그것을 타인에게 나누어주는 삶이 아닌 스스로 가난을 자청해 사는 적극적인 무소유의 삶. 우리 모두가 가난해질때 우리 모두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역설적인 문장은 확실히 옳다.
 
 부를 소유한 자들이 아무리 나누어준다고 한들 그들은 여전히 부유할 것이요,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가난할 것이다. 모두가 똑같이 가난해진다면 가난의 평준화가 이루어져 극도의 가난은 사라지고 만다. 마치 지금의 교육 평준화처럼 말이다. 교육이 평준화되니까 뛰어난 천재도 뒤떨어진 바보도 생겨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영재를 죽이는 정책이라고 하지만 어떤면에서 이 정책은 바람직하다. 적어도 환경에 의해 바보가 되는 이들은 없으니 말이다.

 부의 소유를 교육에 빗댈 수 있을까만 그저 떠올라서 지껄여봤을뿐이다. 이걸 가지고 부자와 천재를 동일시할 수 있느냐 라고 따지지는 말기 바란다. 나도 그 쯤은 아니까... 천재와 영재가 줄어드는 문제는 기본적인 평준화 정책 위에 후천적인 제도적 보완을 하면 될터. 기본틀인 평준화 정책 자체를 허물 필요는 없다.

 나는 적극적 가난을 실천할 수 있는가?
 아니다. 난 그러지 못한다. 그러기엔 난 너무나 세속적 인간이다.
 그렇다고 부를 극도로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벌리는대로만 쪼들리지 않게 살아갔으면 하는 소박한 바램뿐이다.
 그러나 나는 나눔의 미덕은 실천할란다. 적극적 가난을 통해 무소유를 실천하지는 못할 망정 소극적 무소유는 실천해야하지 않겠는가?
 그게 세상사는 맛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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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최근 곤두세우고 있는 문제인 자국 테러대비와 관련하여 드디어 시행하겠다고 일방통보했던 美 입국자에 대한 지문채취와 사진촬영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 또한 미국인에 대해서만 지문채취와 사진촬영을 하는 등 같은 방식으로 대응해 나름대로 미국을 엿먹이고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함무라비 법전처럼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라는 복수주의(復讐主義) 원칙에 따라 제대로 맞선 것이다.

비록 미국이 테러리스트들로부터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시행한 조치라고는 하나 그들의 이익을 위해 타국 국민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대외적으로는 인권중심주의를 표방하면서 정작 자기네 필요할 때는 자신의 인권만 존중하고 타인의 인권은 무시하는 행태를 보이는 그들에게 "아전인수(我田引水)" 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나라를 믿고 어찌 세계평화를 논하고, 인권을 논하겠는가! 자신들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미사일방어정책(MD)을 실시하고, 다 함께 살아보자며 지구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 온실가스 감축비율을 협의한 교토의정서를 일방적으로 탈퇴한 그들이다. 이제는 미국으로 들어오는 타국민의 인권마저 무시하니 그야말로 자신들이 세계의 왕인줄로 착각하는 것 아닌가!

지문채취는 주민등록증을 카드로 신규발급하면서 결국 국내에서 전 국민의 철저한 자발적 복종에 힙입어(나 또한 여기 속한다) 아주 빠른 시일내에 효과적으로 끝마친 정책이지만  논란이 많았던 부분이다. 오죽하면 한쪽에서는 인권을 무시하는 정책이다 외치며 지문채취 반대 운동을 벌였겠는가? 미국에 발을 디디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의 인권마저 그들에게 빼내주고 고압적인 출입국 사무소 직원의 사무적 태도에 억눌려 꾸벅꾸벅 거리며 복종을 해야할 것이다. 이제는 미국 안가기 운동을 해야할 판이다. 그들의 나날이 늘어가는 횡포에 이제는 너무나도 무감각해진 우리들을 본다. 매도 자꾸만 맞으면 안아픈건가?


여담이지만, 난 미국을 한자로 표기할 때 아름다울 '美'자를 쓰는 것이 영 불쾌하다. 작을 '微' 나 아닐 '未'로 하면 안되나? 저 한자 표기는 과연 누가 정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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