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일요일에 공연을 마쳤기에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그가 다시 무대에 오를 날이 언제인지는 나도 알 수 없습니다.


   "내 사랑을 말하기엔 하룻밤은 너무 짧습니다."
   "오! 스무살 난 아내는 어쩌면 그렇게도 애절하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요?" 
  아내를 혼자 버려둔 채 이렇게 당신들 앞에 끌려와야 했던 오늘밤은
  정말이지 내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악몽이 될 것입니다.
  아! 아내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강신일의 진술> 

 

  대단한 공연이었다. 연극의 묘미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모노드라마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좋았다. 참으로 좋았다. 이런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종로, 대학로 길거리에 지나다니다 보면 공연 포스터 참으로 많이 붙어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좋은 공연인지 아닌지 구별하기란 까막눈인 나는 모른다. 영화를 많이 보면서 영화에 대한 취향과 나름의 안목이 생겼지만, 연극을 본 것은 내 인생 스물 여덟 해에 있어 딱 네 번. 한번은 대학 2학년즈음이었나. 당시 수강했던 한 교과의 교수님께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오너라 했고, 처음 연극을 접했을 때, 더군다나 그것이 <고도를 기다리며>였다는 것이 내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무엇이든 처음이 중요하다. 첫 경험이 어떤가에 따라서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된다. 그런 점에서 연극의 첫경험은 매우 탁월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연극은 영화보다 비싸다는 이유로, 항상 돈에 쪼들려 살던 나는 언제나 영화를 택했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쉽게 선택할 수 있기에는 연극보다는 영화였다. 솔로 시절이 길었던 내가 더군다나 오봇하게 누군가와 함께 연극을 보러가기란 어려웠다. (연극은 연인끼리 봐야한다는 편견을 버려. 그래 맞다. -_- )

  내 생에 경험한 몇 안되는 연극은 모두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강신일의 진술>은 처음 내가 연극을 접했던 <고도를 기다리며>와는 또다른 색다른 감동을 선사해준다. 난 이렇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좋다. 책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어떤 형태로 전해지든 간에 뭔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은 언제나 환영이다. 하지만 생각거리를 던져준다고 하여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불친절하게 툭 던져놓고는 인사도 없이 가버리고, 어떤 것은 친절하게 메세지를 전달해주려 노력한다. 또 어떤 것은 나름의 줄거리를 가지고 진행하지만, 중간중간 대뇌피질에 찌릿찌릿 전기가 흐르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모두 좋다. <강신일의 진술>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봤기 때문에, 그저 이름과 제목과 포스만 알고 봤기에 더욱 좋았지 싶다. 함께 본 이가 내게 작품에 대한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의도였다.

***

  연극은 매우 철학적이다. 또 매우 흥미롭다. 마치 소설을 한편을 읽은 것처럼. 또 스릴 넘친다. 찌릿한 지적 자극과 함께 짜릿한 섬뜩함을 느끼게도 해준다. 딱 내가 좋아하는 그런 작품이다. 적당히 지적이고, 적당히 흥미롭고, 적당히 짜릿한.

  환상과 실제. 철학에서 매우 흥미롭고 흔한 주제이면서 언제나 많은 생각거리를 선해주는 주제이다. 내가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는가, 사물을 인식하는가의 인식론적 문제. 많은 영화와 책에서 써먹히는 주제이면서 다루기 힘든 주제이기도 하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실제세계와 가상세계를 다루었고, 어떤 것이 실재하는 세계인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실재하는 세계와 상관없이, 우리는 어떤 세계를 실재세계라고 믿는다. 그리고 또 무엇을 원하는가, 를 다루었다.

  믿고 싶은 것과 믿어야 하는 것은 다르다. 믿고 싶은 것은 나의 희망이 가미된 환상이며, 믿어야 하는 것은 불행이 그곳에 있더라도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환상은 무엇이고 실제는 무엇인가. <강신일의 진술>에서 주인공이  '환상과 실제'라는 책을 썼다고 했을 때, 이미 난 눈치챘다. 내 마음 속에서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머리 속에서 번개가 쳤다. 사랑하는 여인이 살아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여행을 왔다고 믿고 싶었다, 그녀와 전화통화를 했다고, 처음 그때를 떠올리며 다정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죽었다. 그녀와 함께 여행을 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녀와 전화통화를 하지도 않았다. 다정한 대화는 없었으며, 모든 것은 내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했다. 믿고 싶었다 하지만 믿어야 했다. 인정해야 했다.

  어쩌면 환상 속에 살며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더 나은 삶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매트릭스'에서 리얼세계로 나올 필요도 없고, 그것을 탐구한다는 것 자체도 무의미하다. 현실 속의 불행감보다 환상 속의 행복감이 낫다면, 깨지 않는 것도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좋은 방법일 터이다. 이건 아니야 어서 인정해 괴롭겠지만 눈을 떠, 라고 말리고 다그치고 윽박지르며 두들겨봐야 소용없다. 그 사람은 이미 행복한걸. 우리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이 아니던가. 행복하기 위해 돈을 모으고, 행복하기 위해 큰 집을 사고, 행복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행복하기 위해 책을 보지 않던가. 단지 모두에게 행복에 대한 관심과 관점이 다를 뿐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누구도 불행해지길 원하지 않는다. 만일 나는 불행해지길 원해 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또한 객관적인 불행의 조건을 통해 주관적인 행복을 획득하려는 것이다.  

  존재하는 실제와 존재하지 않는 환상은 결국 삶을 살아가는 주체의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환상 속에 살며 현실을 사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객관적인 도덕규칙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행복감과 상관없이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차원에서 어떤 제제를 가해야 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 속에서 보여지는 '그'의 환상에 때로 가슴저리게 아프고, 욱신욱신 쿡쿡 통증이 오며, 공감하고픈 것이 나의 현실이다. 그의 행각(?)과 별도로 내가 그가 되어 그를 느끼고 싶었다. "오늘 밤 아내 곁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래. 그러고 싶었다. 세상에 없는 아내를 불러내고 싶었다.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가슴 아픈 사랑의 이야기이며, 환상과 실제의 이야기이며, 섬뜩 놀래키는 추리물이기도 한 이 연극을 연출하고 열연한 박광정씨와 강신일씨에게 박수를. 두 분 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다.

***

하나. 5년만에 무대에 다시 올린 이 연극을 종료 하루 앞두고 본 것은 정말 잘 한 일이었다.
하나. <공공의 적>을 통해 강렬하게 다가왔던 그의 힘이 연극에서 또다른 더 큰 빛을 발했다.
하나. 박광정과 강신일을 다시 주목하게 된 작품이었다.
하나. 연극의 원작이 된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하나. 나중에 다시 무대에 올린다면 이 연극을 또 한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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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s678 2006-07-16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일지의 소설 <진술>을 토대로 만든 연극인가 봐요. 5~6년쯤 전에 정신없이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책도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의 진술로만 이루어져 있는 독특한 구성이랍니다. 연극이 끝났다니 아쉽네요.

이잘코군 2006-07-17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아요. 소설을 바탕으로 했어요. 소설도 보고 싶어요.
 
하얀 강 밤배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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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홍빛 이쁘장한 표지를 달고 있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하얀 강 밤배>. 1989년에 쓰여졌지만 우리나라 말로 번역이 된 것은 2005년이다. 그러니 매우 오래전에 쓰여진, 하지만 이곳에서는 얼마 나이를 먹지 않은 갓난 아기인 셈이다. 그녀의 많은 소설들 중 이 책은 가장 안팔렸다. <키친> <하드보일드 하드럭> <하치의 마지막 연인> <티티새> <도마뱀> 심지어는 가장 나중에 나온 <불륜과 남미>의 판매량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물론 그녀의 이름을 달고 나온 소설은 다른 책들에 비해 많이 팔리지만.

  외면 받은 작품 치고는 참 느낌이 괜찮았다. 그녀의 모든 소설들은 가볍게 말하자면, 다 거기서 거기인 내용에, 거기서 거기인 감성을 건드리고 있다. 그런데 불구하고 비슷비슷한 환경에 처한 등장인물들에 비슷비슷한 줄거리, 그리고 비슷비슷한 글의 구조와 느낌, 사실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책들 중 어느 하나만을 집어 골라 봤다면 그만 봐도 좋을 법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손이 가는 것은, 내가 그녀의 소설을 모조리 읽어버릴테다, 라고 말한 것과는 별도로, 그 감성에 취하고 싶기 때문이다.

  아픈 구석을 바늘로 콕콕 찔러 괜찮다 싶으면 또 두 눈 젖게 만들고, 방 한 구석에 벽 보고 앉아 흑흑 울고 있으면, 아무 말 없이 뒤에서 살며시 안아주며 토닥여주는, 병 주고 약 주는 소설들. 하지만 앓던 병 나 자신 조차 모른 척 하며 살기보다 아파도 한번 더 찔러주고 건드려주며 마음 속 딱딱한 응어리 쪼개어주는 그 아픔이 싫지 않다.   한번 와락 눈물 쏟고 나면 상쾌해진단다. 다 털어놓아보렴. 울어도 괜찮아. 그것이 그녀의 소설에 자꾸만 손이 가는 이유일게다. 그런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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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강 밤배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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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다들 누가 옆에서 그냥 자주기를 바라는 존재인가봐. 여자도 있고, 외국인도 있어. 하기야 나, 그냥 적당히 잠들 때도 있지만. ...... 어쩌면 지친 사람들 옆에서 자면서, 잠든 사람의 숨결에 내 숨결을 맞추면서 그 사람의 마음 속 어둠을 빨아들이는 건지도 모르겠어. 자면 안돼 하고 생각하면서 그만 꾸벅꾸벅 졸다가 무서운 꿈을 꾸곤 하거든. 초현실적인 꿈. 침몰하느 배에 타고 있는 꿈, 모아놓은 동전을 잃어버리는 꿈, 창문으로 어둠이 들어와 숨이 막히는 꿈...... . 숨이 막혀서 놀라 잠이 깨지. 무서워, 그런 때는. 그런데 옆에서 자는 사람을 보면, 아아 지금, 이 사람의 마음의 풍경을 봤구나. 이렇게 외롭고 괴롭고 황량한 풍경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왠지 무서워져."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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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모른다. 그를. 클림트라는 이름과 그의 몇몇 작품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 그것이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이다. 음악엔 관심 있지만 - 그것도 장르가 한정 되어 있지만 - 그림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았다. 철학을 했어도 해석학, 분석철학,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철학에는 관심을 보였지만 미학을 들을 땐 거의 졸았다. 하긴 다른 수업에서도 졸았긴 마찬가지구나. 보통 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림에 대한 관심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에 생초짜인 내가 미학에 관심을 갖기는 환경상 어려웠다. 이것은 내가 처음 악기를 배우고자 할 때 피아노나 기타를 배우지 않고 드럼을 배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피아노나 기타는 원래 어릴 때부터 해서 좀 치는 녀석들이 많다. 그래서 20살 먹고 남들보다 빠르게 뛰어난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잘 선택하지 않는 악기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고, 드럼이 간택(?) 되었던 것이다. 나의 선택은 적중해서 밴드 결성시 가장 희귀한 파트가 드러머였고, 나는 안되는 실력에도 초반부터 괜찮은 밴드를 잡아 그 생활을 시작했었다.

  영화 <클림트>를 보기 위해 오는 관객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나와 같은 부류. 즉 클림트가 어떤 인물인가를 영화를 통해 알기 위해 오는 사람들, 그리고 또 하나는 평소 클림트와 그의 그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영화가 개봉되자 그것을 확인하고 어떤 식으로 삶을 그려냈는가를 보기 위해 오는 사람들. 그의 작품이 그려진 과정과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 오는 부류도 넓은 범주의 후자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영화는 나와 같은 부류에게도, 후자의 부류에게도 만족감을 주지 못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삶에 촛점을 맞춘 것도 아니고, 그의 작품 활동에 촛점을 맞춘 것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놓여있는 듯한 인상이다. 양자 모두를 잡으려 했던걸까, 아니면 양자 모두 초월하여 스치고 지나가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의 삶에 있어서, 작품에 있어서, 특정한 시기를 잘라내 그 평면을 비춤으로써 클림트란 인물을 관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오히려 그의 삶도, 작품도 한 편의 짧은 영화로 보여주지 못하느니 더 낫겠다는 판단이었을지도.



   그가 미술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성향과 파를 조성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1862년에서 1918년까지를 살아간 그가 죽은지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지금, 클림트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왜 지금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그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어떤 시도나 그를 기념할 만한 뭔가를 찾지 못하겠다. 난 그저 누군가가 그의 그림이 좋다고 하여 보게 된 것이고,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 뭔가 조각조각 짜맞춘 듯 하면서 그것이 묘한 아름다움을 구성한다는 것 정도 밖에는 알지 못한다. 

  영화를 봄으로써 되려 그림에 대한 나의 무지와 그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차버렸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그림을 접했을 때의 그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듯 했다. 순차적으로 뭔가를 보여주기 보다는 그의 삶의 중간중간을 잘라내어 하얀 도화지 위에 툭툭 던져놓고 멋대로 짜깁기 한 듯한 느낌이다. 영화를 봄으로써 그의 그림을 본 듯한 이 느낌. 그것으로 만족한다.

 * 함께 본 이의 덕분으로 영화 속의 또다른 인물 에곤 쉴레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녀' 가 아니었다면 클림트 말고는 등장인물들을 그저 엑스트라 쯤으로 여기고 봤을 터.



* 이 사람. 에곤 쉴레. 손가락 제스쳐가 참 인상적이었다. 얼핏 본 어느 책에서 그가 클림트를 존경하며 따르고 교류했다는 글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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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6-07-07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은데... 클림트 그림 마음에 드는데... 존 말코비치도 마음에 드는데... 끄응~

이잘코군 2006-07-07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나침반님 클림트 모르고 가면 그냥 막 던져주는 먹이 구경만 하고 그냥 오게 되는거 같아요. 제가 그랬어요. 따옴표까지 신경쓰실건 없는데. ㅎㅎㅎ 나침반님은 너무 눈치가 빠르셔.

프레이야 2006-07-07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림트 읽고 봐야겠어요.. 담아갑니다~~
 



   새로운 액션을 선보인다. 액션영화 매니아라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 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화면만 쳐다보고 있고 싶은 사람에게도 적절한 선택. 영화는 뻔히 보이는 전통 액션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고 있다. 약자가 당한다. 그리고 분노한다. 영웅이 나타나 그들을 제압한다. 뻔히 보이는 스토리지만 그래도 이런 전통 액션 영화를 찾는 것은 영웅의 무용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소룡과 성룡이 쿵후를 했다면, 이연걸은 우수로, 그리고 이제는 토니 자의 무에타이다.

   토니 자는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영화 세트장에서 요리사, 스탭, 심부름꾼 등 잡다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5년 후 한 영화에서 스턴트 대역을 맡았고, 이후 <옹박>으로 일약 액션영화계의 스타로 떴다. 그의 나이 28살. 나랑 동갑이군. 녀석. 17년 동안 닦은 무에타이 실력으로 그는 그동안 영화 속에서 보여진 와이어액션에 대한 불만을 실제로 재현함으로써 촬영장 스탭들의 입을 쩍 벌어지게 했다한다. 그간의 무술훈련이 빛을 발한 영화다. 17년의 경력과 7년의 준비과정이 있었기에 갑작스런 발탁에도 그는 동요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무술을 선보일 수 있었다. 오랜 인내의 결과.

  * 많은 무술영화들이 있지만, 또 무술영화를 별로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굳이 그중에서 내 취향대로 하나를 꼽아보자면, 난 이연걸식 영화를 선택하겠다. 이소룡, 성룡은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지만 난 그다지 그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이 무술의 달인이라는 것은 인정하나 영화로서 보여지는 재미는 별로. <옹박>을 통해 선보인 무에타이는 신선하긴 했지만, 영화 스타일이 옛날식을 고집해서인지 얘도 별로. 이연걸이 나오는 영화는 무술만 보여주기보다는 스토리를 중시한다. 짜임새있고 알찬 스토리가 바탕이 되어 불가피하게 이연걸이 무술을 선보일 수 밖에 없게끔 만든다. 어떻게 보면 이소룡과 성룡, 토니 자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감독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지금 언급한 세 사람의 무술은 짜임새있는 스토리를 통해 뭔가 보여주기에는 투박하고 거칠다. 이연걸의 우슈는 좀더 부드럽고 싸우지 않는 듯 하면서 싸우는 스타일이랄까. 순수하게 무술을 보기 위해서라면 이연걸 영화보다는 다른 세 사람의 영화가 더 낫겠지만, 영화 자체가 주는 재미를 느끼고자 한다면 이연걸이 단연 우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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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마니아 2006-07-06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옹박을 이제야 봤군. 입만 다물고 있으면 더 멋있을텐데 말이야.
근데 이 영화가 제목이 좀 이상해서 우리 나라에서 흥행이 안좋았다는 말이 있더라

이잘코군 2006-07-07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신영화이지만 옛날방식을 따르고 있는 영화인지라 과거의 홍콩액션물을 좋아했던 이들에겐 반가울거 같은데, 난 대략 별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