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글들은 군대에서 화장실에 갔을 때 잠깐잠깐 생각나는대로 약술해본 짧은 글이다.


03. 6. 10
 
펜은 내게 있어 일종의 삶의 활력소가 되어준다. 나는 어떤 일을 하던간에 나의 오른쪽 바지주머니에 끼어있는 볼펜을 만지작 거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슨 일을 함에 있어 실질적으로 두려움과 불안감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는 안정제 역할을 한다.
아마도 나는 평생 펜을 놓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의 평생의 직업도 펜과는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게 있어 생명이다.


03. 6. 17

사람이 죽었단다.
그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비록 전화상이었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강렬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죽음, 내 후배 정욱이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이후로 내게 있어 죽음에 대한 세번째 경험이었다.


03. 6. 24

편집증적 기록습관을 지닌 나는 그 무엇이든 기록하고 그에 관해 써내려가야만 그것을 경험했다는 만족을 조금이나마 느낀다.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모두 활자화되어야한다. 시각의 활자화, 청각의 활자화, 촉각의 활자화...
글자는 굉장히 매력적인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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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의 비판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는 독일관념철학자 중 한명인 피히테의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라는 저서의 제목 형태를 빌려와 작성한 것이다.

"군대는 한마디로 나라의 힘이다. 나라가 있기에 군대가 생긴 것이고, 군대가 있기에 나라가 존재한다"

이 말은 부대 화장실 낙서판에 적혀있는 문장으로서, 대부분의 군대에 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군대에 관한 보편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 문장에서 나는 우리 사회에 널리 그리고 뿌리깊에 박혀있는, 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파시즘의 한 형태를 본다.

군대는 한 마디로 힘이라는 말은, 우리의 힘이 무력에서 나오는 것임을 뜻하고, 이는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제 3국을 침범하고 약탈하고 식민지로 삼을 때의 논리와도 상통한다. 그것은 분명 파시즘임에 틀림없다.

그 다음 문장을 보자.

"나라가 있기에 군대가 생긴 것이고, 군대가 있기에 나라가 존재한다"

나는 같은 형식으로 이런 문장을 만들어 보이겠다.

"개인이 있기에 나라가 생긴 것이고, 개인이 있기에 나라가 존재한다"

그것이 나라건, 군대건 간에 모든 것(단체, 조직)의 바탕에는 개인이 존재한다. 가장 원초적으로 소급해 들어가면 처음에는 '개인'이 있다는 말이다. 국가를 우선시함으로써 국가주의, 획일화, 강요, 강압에서 이어지는 파시즘이 발생하며, 개인을 우선시함으로써 '자유주의'가 탄생한다.

마지막으로 마무리 짓자면, 계급사회인 북한을 비판하는 이 나라가 '군대'라는 계급사회를 통해 그들만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려하고 있으며, 이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임에 틀림없다. 현재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바로 그러한 점에서 체제적 모순을 경험하고 있다. 그들이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것이다. 나는 이 작금의 현 실태를 보고 이런 말이 떠오른다.

"운수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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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종로에서 택시기사들이 '택시요금 인상 철회', '연봉제 대신 월급제를' 등등의 팻말을 들고 시위를 했었다. 그리고 최근 한나라당과 자민련 의원들의 짜고치기 고스톱으로 교원정년 1년 연장이 성립되어 학부모와 젊은 교사들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큰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위에 대해서,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다수는 교통이 막히고 거리가 시끄러움에 불만을 표하며 시위를 못마땅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시위 내용을 보면 실질적으로 일반 국민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지나는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불평불만이다. 분명 거리에서 불평을 토로한 시민들은 나중에 대선공략으로 택시요금 인하, 교육정년 원상복귀를 외치는 대선후보들에게 지지의사를 보낼 것이다. 왜 이토록 생각과 행동이 다른가.

택시 요금이 내리고, 농업이 안정되면 그 이득은 결국 일반 국민들에게 오는 것인데, 사람들은 당장의 불편을 토로하기만 하고 멀리 내다보지를 못한다. 만약 농업이 안정이 안돼 우리나라 농가가 모두 망한다면 외국의 쌀을 먹고 살아야 할 것이고, 외국에서 쌀 값을 기존의 우리의 농가 쌀 값보다 훨씬 높게 책정하면 우리는 그때가서 말없이 비싼 쌀을 받아먹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일이 현실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농민들의 시위, 택시 기사들의 시위를 지지해도 모자란데 오히려 이들을 탓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보다 모순적인 경우가 없다. 실질적인 목소리를 같으나 밖으로는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매우 못마땅하다. 시위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은 시위현장이 그들에게 주는 시각적인 이미지만을 받아들여 그것을 실질화시킨다. 마치 겉으로 보이는 허상이 본질인 것 처럼 말이다. 본질은 오히려 그것과 정반대되는 것임에도... 일전에 나도 노동자들의 시위나 파업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적이 있지만, 그때 내 고민은 시위나 파업을 통한 방법 밖에 없었던 것일까 하는 문제였지 시위 자체에 대한 부정은 아니었다.

자본주의를 도입해 산업화 사회를 거쳐 정보화 사회로 가면서 우리는 물질적으로 매우 풍족한 상태에 있다.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있고, 다양한 문화생활을 영위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사회의 외적인 안정감에 자신의 정신까지도 안정시켜 놓았다. 정신을 놓고 다니니 그저 내 자신에게 오는 직접적인 피해만 아니라면 나와는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시위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모습은 이렇게 해석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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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내가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이유'라고 제목을 달려고 했으나 혹시 제목이 길어서 본문을 다 쓰고 거부당해 본문이 날아가는 사태가 빚어질까 '두려워' 제목을 짧게 줄인다. 그러나 '빨리 읽지 못하는'과 '늦게 읽는'은 분명히 뉘앙스가 다르다. 책을 늦게 읽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말이 안되는 것 같기도 하다. 책을 늦게 읽는다? 책을 늦게 읽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나 '책을 빨리 읽지 못한다' 라는 말은 가능하다. '빨리 읽지 못한다' 는 말은 '빨리 읽는다'를 부정하는 말이고, 그와 반대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쨌건...
잡소리 그만하고...

나는 책을 매우 '천천히'(차라리 '늦게'라는 단어보다는 '천천히'라는 말이 어울릴 듯 하다) 읽는 편이다.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일일이 다 읽는 것도 아닌데 난 책장을 빨리 넘기지 못한다. 내가 나의 책읽는 속도에 답답해서 짜증이 날 지경이다. 읽고픈 책은 많은데 속도가 이렇게 느려서야 어떻게 그 많은 책을 다 읽을 수 있겠는가.

나의 책 읽는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동안의 책 읽을 때의 내 모습을 떠올려 보며 나는 내가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분석을 해봤다.

일단 나는 책상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는 경우가 거의, 아니 아예 없다. 책을 읽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난 이미 누워있다. ㅡㅡ; 비스듬히 베게에 의지해 책을 읽다가 자세가 불편해 베게에 머리를 얹는다. 그리고는 두 팔을 들어 책을 본다. 팔이 아프면 옆으로 기울기도 한다. 그렇게 꾸준히 책을 잘 읽다가 어느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 글귀를 눈으로 받아들이고 머리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머리 속에서 갖가지 생각들이 얽히고 설키기 시작한다. 이래저래 생각이 꼬리를 물고 확장되면, 나는 어느새 잠이 들어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이유이다. '책을 읽는다 -> 생각한다 -> 잔다'라는 도식이 성립되는 한 나의 책읽기는 느릴 수 밖에 없다. 책만 읽으면 자니 어디 진도가 빨리 나가겠는가. 그래도 다행히 중간에 '생각한다'의 과정이 있기에 나의 책읽기가 헛되지만은 않다. 책을 읽으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일면 당연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 당연한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생각의 생각으로, 생각의 생각으로,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사고가 확장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은 사고를 넓고 깊게 하기 위함이다. 비록 나의 책읽기가 결과적으로 잠으로 빠져들기는 하지만 중간에 '생각하기'의 과정이 있어 다행스럽다. 내가 책을 빨리 읽기 위해서는 생각에서 잠으로 빠져드는 통로를 어떻게든 막아야한다. 그 방법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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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에 들어와 동아리를 찾던 중 가입한 곳은 '노래패'였다. 당시 나는 학교 식당 앞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록동아리 인줄 알고 찾아갔으나 알고 보니 민중가요를 부르는 '노래패'였다. 나는 대학 새내기라면 으레 그렇듯 '운동권'이나 '민중가요'라는 단어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기왕 가입했으나 열심히 해보자 하고 마음 먹었다. 그곳이 록동아리였건 노래패였건 내 목적은 드럼을 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드럼이 목적이었던 나는 그 노래가 민중가요던 록이던 별 상관없었다. 그저 드럼을 친다는 것으로 행복했다.

#1
시간이 흘러 노래패 공연을 할 때였다. 선배들과 나는 공연곡을 놓고 어긋나기 시작했다. 민중가요에도 장르가 다양하기에 나는 민중가요 중 다소 록적인 노래들을 연주하고 싶어했고 선배들은 쨍가를 넣고 싶어했다(쨍가는 너댓명이 앞에 나와 주먹을 쥐고 손을 흔들며 부르는 노래라고 보면 된다). 민중가요에 적대적인 나는 쨍가를 매우 싫어했다.

#2
노래패에 있다보면 선배들이 함께 집회에 가자거나 교양교육을 하자는 제의를 하곤한다. 어떤 곳에서는 후배들을 강제로 집회장소에 데리고 가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집회를 나가지 않으려는 나와 선배들은 보이지 않는 벽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1과 #2를 통해 본 나는 운동권과 민중가요, 집회, 시위 이런 단어들에 매우 적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그저 노래패에서 드럼만 치고 싶었다. 그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대학 4학년인 나는 이상하게도 운동권, 민중가요, 집회, 시위 라는 단어에 매우 친숙하다. 아는 민중가요도 별로 없고 집회나 시위에 참석해본 적은 더더욱 없는 내가 이 단어들에 친숙한 것은 왜인가. 지금의 나를 보면 나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시각이라는 것은 천상 운동권이다.

1학년때는 그토록 적대적이었던 내가 4학년에 와서 친숙하게 된 것은 바로 '철학' 때문이다. 1학년 당시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의미도 모르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2학년에 철학과로 전과한 이후 동서양의 위대한 사상가들과 만나면서 또 나의 사유함의 범위가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나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나름대로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생겨났다. 사회 제도의 모순들에, 사회의 약자들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결국 나는 운동권의 시각을 갖게 됐다. 운동 한번 안해본 책상물림 운동권이 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운동권과 내가 다른 것은 그 시작에 있다. 대개의 운동권은 민중가요를 부르고, 집회에 나가고, 선배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나름대로의 시각을 형성하는 반면, 나는 그러한 과정없이 오직 철학으로 지금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현재의 나를 볼 때 결과적으로 운동권의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 시각의 '본질'은 다른 것이다. 나의 시각은 사유함에서 비롯되고, 그들의 시각은 자신의 눈으로 현실을 봄에서 비롯된다.

나는 내 스스로의 생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배들의 말이나 제의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내 스스로가 공부하고 생각하면서 그 시각을 형성하고 싶었다. 강요받지 않은 자기주체성에 기반을 둔 사유를 통해 나는 세상에 눈을 떴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의 사유함을 토대로 현실에 뛰어드는 것이다. 운동권에 비해 나의 행동은 한참 늦었지만 그들에 비해 나는 깊이있는 사고를 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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