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은 좆도 없지만 그렇게 거만하고 오만하던 나에게도 열등감이란 것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시도한 분야에 있어서는 항상 어느정도의 '최고'가 되려고 노력했고, 완벽함은 아닐지라도 자아만족감을 채워 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열등감은 있었다. 소위 말하는 학벌 컴플렉스.

 초, 중, 고등학교를 거치며 난다 긴다 하는 애들 다 제치고 전교 1등도 해봤지만, 결국 고 2 때부터의 방황으로 애초 생각지도 않았던 숭실대로 왔고(물론 숭실대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이 학교도 좋다. 그치면 순위를 굳이 메기자면 소위 말하는 상위권 학교에 비해서는 인지도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나는 그동안 좋은 학교(소위 말하는 스카이대)에 가지 못했다는 학벌 컴플렉스와 그들에 대한 열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예전엔 나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다. 아니면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고 피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나뿐 아닌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이런 컴플렉스를 지니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참으로 아니러니하게도 학벌 컴플렉스에서 벗어나는 길은 '좋은 학벌'을 갖는 것이다.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들은 그보다 더 좋은 학벌이 존재하지 않기에 학벌 컴플렉스로부터 해방된다.

 위와 같은 아니러니를 범하지 않고서, 학벌 컴플렉스, 학벌 좋은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물론 가장 간단한 답은 스스로 지니고 있는 학벌에 대한 의식을 버리는 것이다. 컴플렉스 자체를 버리면 해소된다. 참 간단한 답이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은 '어떻게?'라는 물음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모색중이다. '어떻게?'를 논하지 않고서 그 자체를 버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교내를 걸어다니며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려있는 한 현수막을 보았다.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씌여져있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 되기를 거부한다."

 우리학교에서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창업동아리에 관한 설명회 같은 것을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이 글귀를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사회는 이제 어느곳에서건 평범한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도 스스로가 평범해지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조차도 힘들다고 말을 한다. 소위 말하는 적당한 대학을 나와, 적당한 회사에 취직하고, 적당한 이성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오손도손 즐겁게 사는 삶이 그것일진대, 대부분은 사람들은 이 '평범한 삶'을 이루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해야한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평범한  삶'이란 굉장히 멀리 떨어져있다.  

 하물며 '평범한 삶'도 이러할진대, 사람들은 스스로 평범함을 거부하고 비범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보통이라는 선을 넘어서는 단계에 오르고 싶은 것이다. '평범하지 않은 삶'은 '평범'을 중간으로 하여, 그 아랫 단계와 윗 단계로 나눌 수 있을터이다. 물론 사람들이 평범함을 거부하는 것은 그 윗단계를 지칭하는 것. 이제 우리사회는 '보통사람'이 되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게 되었다. 무엇이든간에 남보다 월등히 잘하는 부분이 있어야 하고, 아니면 잠재력이라도 갖고 있음을 보여줘야한다. 사회가 그런 사람들만을 원하니 각각의 사람들도 스스로가 평범해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관점에서 평범한 삶을 거부한다. 약간은 삐딱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난 내가 사회가 원하는 그런 평범치 않은 조건들을 갖추며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뛰어나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좋은 집, 좋은 차, 이쁜 아내와 함께 오손도손 살아가는 삶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난 남들과 '똑같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자신을 비범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동기부여와의 차이다. 난 그저 '남들과 다르면' 된다.

 그래서 남들 다 하는 영어공부도 안했고, 자격증도 안땄고, 다들 보는 영화도 안봤고, 남들 다 보는 책도 안봤다. 난 같은 것을 거부한다.

 취직한다고 회사에서 원하는 조건, 토익 몇 점, 자격증 몇 개, 어학실력 등등의 이런 조건들, 나는 싹 무시했다. 물론 그랬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이렇게 '필요'에 의해서 공부를 하고 있지만 말이다.

 티비에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뜬' 책들, 누구다 다 읽는 처세술에 관한 책들 나는 하나도 안 읽었다. 물론 선정된 책들 중에,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중에, 나 스스로 판단하기에 '아 좋은 책이군', '내 취향에 맞는 책이군' 이라는 생각이 들어 읽게 된 책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야 나는 그 책들을 거들떠도 안본다. 요즘 잘 나가는 책 중에 '아침형 인간', '퇴근후 3시간(이건 정확한 제목인지 모르겠다)'이라는 제목의 책들이 있는데, 난 이 책들 안 보고 안 살거다. 왜냐! 저런 류의 제목을 단 책들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대부분의 이런 유형의 제목을 단 책들은 내용이 없다) 남들다 몰려드는 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책을 보지도 않았지만 책의 내용에 비해 너무 과대평가받는 책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 두 사람 사서 읽다보니 10만명, 20만명 되는거고, 100만명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작품성이 있거나 내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다들 사보는데 나만 안보잖아?'라는 식의 주변에 의한 보이지 않는 협박과 스스로의 불안감때문에 구입하게 되는 책들, 별 볼일 없다.

 난 이런 의미에서 평범한 사람이 되기를 거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겨레21(제 494호)에 "베트남의 악몽이 날 밀어간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예비역 군인이든, 현역 군인이든 간에 '반전평화'라는 말만 꺼내면 동료 군인들로부터 집단 테러를 당하는 지금의 현실에서 베트남 참전군인 출신인 김영만씨의 행보는 참 용기있어 보인다. 반전평화를 위한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대표, 코리아평화연대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데다 베트남 평화마라톤 대회까지 참석한다니 군인집단으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내가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은 얼마전 있었던 '예비역 준장의 별들의 모임 강제탈퇴사건'때문이다.

 얼마전 한 예비역 준장이 일간지에 '이라크 파병 반대'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가 예비역 별들의 모임에서 '강제탈퇴'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저 자신의 소신을 밝혔을 뿐인데 그것을 꼬투리로 삼아 모임에서 강제탈퇴까지 당하다니...

 대통령은 바뀌었을지언정 군인집단은 바뀌지 않음을 실감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비록 이라크 파병이 결정되긴 했지만(사실 이것도 특정언론과 한나라당의 확정되지도 않은 파병에 대한 기정사실화 발언으로 인한 언론플레이가 작용한 바 크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개인으로서 반대의 의견을 내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그는 '왕따'를 당했다. 군인으로써 "파병을 하라" 라고 말하는 것은 허용되면서, 그 반대의 의견은 무시당하는 이 현실이 참 개탄스럽다.

 군인사회가 아무리 개인의 의견은 없고, 집단의 의견이 중시되는 사회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옛 군인사회의 모습이고,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는 발전불가능한 사회다.

 볼테르의 관용론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당신의 말 할 권리를 위해서는 함께 싸우겠다."
 
 비록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못하더라도 말 할 기회는 부여해주는 것이 기본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홍익대 역 출구에서 한 여학생을 만났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있던 내게 다가오더니 "저기요, 혹시 교회 다니세요?" 라고 물으며 입을 뗐다. 순간 '앗! 이런 걸렸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 여학생이 귀찮게 느껴졌지만 참기로 했다. 몇 년전 수유리에서 "혹시 도에 관심있으세요?"라고 말했던 여학생에게 너무 짜증스럽게 대했다가 오히려 그 여학생의 말빨에 내가 기가 죽었던 적이 있었고, 당시에 나도 참 미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솔직히 도에 관심있냐고 물은 것이 뭐 잘못인가? 단지 나는 걸렸구나 하는 생각에 귀찮음을 느꼈을 뿐이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이번에는 이 여학생을 함부로 대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녀는 내게 요 앞에 xx교회에 다니는데 이번 일요일에 거기에 한번 와보지 않겠느냐, 좋은 말씀 한번 들어봐라 라는 식으로 말을 했고, 나는 모든 종교를 거부하지도 않되,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나는 특정 종교에 구속되고 싶은 생각이 없으며, 따라서 나를 기독교인으로 만들려고 하지는 말라 라는 등의 내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면서 나는 종교로서가 아니라 철학으로서 당신이 말하는 세상의 문제들과 우리 자신의 문제, 진리를 찾아나가는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여학생은 자신과 나의 관심사와 가치관이 동일하다는 것을 공감하며 기됵인으로 전도하려는 것은 그만두고 그저 일요일에 좋은 말씀을 전하니 한번 와바라 라는 식으로 나를 설득했다.

 추운 겨울에 그렇게 서서 나를 설득하는 그녀를 보니 참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차라리 매몰차게 말했으면 찬바람 맞지 않고 그냥 갔을텐데 괜히 내가 제대로 응하는 바람에 서로의 말을 들어주고 또 말하고 하느라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

 결국 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서 전화가 와 그 자리를 뜨고 말았지만, 그녀는 내게 꼭 한번 와보라 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취직을 하고, 돈을 벌고, 차를 사고, 집을 사고, 애를 낳고, 기르고 하는 일련의 인생의 과정들이 아주 평범해보이지만 사람들은 이것조차도 겨우겨우 따라간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다 해도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어떤이는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모르고 산다. 물론 그 행복이라는 것이 본인이 느껴지는 바에 따라서 결정된다면 아마도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 또한 그 행복을 느끼면서 무언가 비어있다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난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그런 생각을 해봤을 거라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이 틀렸기 때문에 공황을 맞이하는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등등의 소위 말하는 철학적 물음들은 바로 우리가 느끼는 공황이 무엇인가를 대변해준다. 그녀가 말하는 바도 그러한 것. 아무리 청년실업이다 뭐다 하면서 먹고 살기 힘들더라도 그것을 논하기 이전에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정신적 공황을 메꿔야한다는 것이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서 말이다.

 결국 나도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다가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이렇게 사회준비인이 되어버렸지만 그렇다고 내가 찾던 것들, 고민하던 것들이 가치없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것은 삶을 살아가면서 꾸준히 묻고 대답하는 과정을 거치며 찾아야하는 것들이고, 다른 한편으로 나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준비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나는 나의 물음들을 접어놓은 채 사회준비를 하련다. 삶의 안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숨을 쉴 작은 구멍 하나만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물음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말많고 시끄럽던 의-약 분업이 시행된지도 꽤 지나 이제는 국민들조차 새 제도에 적응한 모습이다. 약을 구입하기 위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처방전을 받아 다시 약국에 가서 약을 구입하는 귀찮은 과정은 새로운 것에 빨리 적응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는 그다지 큰 불편은 아니었나보다.

 나 역시 이러한 귀찮은 과정을 거쳐 어렵게 연고 하나를 구입했다. 병원에 가서 진료예약을 하고 며칠 뒤 진료를 받고 약국을 찾아 연고를 구입했다. 다음은 약국에서의 대화이다.

 (처방전을 들이밀며) "이 연고 있어요?"
 "네 여기요. 1,500원이에요."
 (돈을 주며) "네. 수고하세요"

 참으로 간단한 대화이지만 이 안에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다 들어있다. 의-약 분업 이후의 약사는 과연 의료진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지금 '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하고 있는가'를 물었다면 나는 지금의 약사에 대해 질책을 하려 하는 것이지만, '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면 약사의 잘못을 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서 문제점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지금의 약사는 슈퍼주인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참 건방지고 당돌한 질문이다. 하지만 현실이다.
 물론 슈퍼주인이 소비자가 원하는 아무 상품이나 소비자에게 팔 듯이 약사가 아무 약이나 소비자('환자'가 아니라 '소비자'다)가 원한다고  해서 팔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슈퍼주인과 다를 바가 없다. 약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게 우리네 약사의 현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약사인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약사회에서 뭘 받아먹거나 한 것도 없다. 내가 약사를 옹호한다고 해서 비난하지는 말라.

 그렇다고 의-약 분업을 예전으로 돌려놓자는 것도 아니다. 그럼 뭔가? 내가 말하고픈 것은 무엇인가?  약사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난 심정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훗...  그러기엔 너무나 장황했나.

 약사 너무 불쌍하지 않나요?




여담 하나.

우리 국민들은 그렇게 말많던 의-약 분업이라는 새로운 제도에 쉽게 적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새로운 것에 빨리 적응한다는 것은 그만큼 변화에 잘 적응한다는 것이며 생활력이 강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의 단점은 뭐든 한번 굳어지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드는 일이라면 물불 안가리고 누구나 달려들어 스스로 적응한다는 것이다. 자발적 복종. 무서운 국민성이다.


여담 둘

우리네 국민의 면역성 약화를 우려하여 함부로 약을 조제하지 못하도록, 약을 팔지 못하도록 의-약 분업을 실시했지만,  면역성 약화 면에서 볼 때 과연 예전과 얼마나 달라질지 의문이다. 어차피 약을 사는 것도, 진료를 받는 것도 환자인데, 굳이 예전에 약사가 잘못했기 때문에 국민의 면역성 약화란는 결론이 도출된 것이 아니라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바는 없다. 단지 약에 대한 실권이 의사에게 넘어갔을 뿐. 그렇지 않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