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씨의 피살이 알려진 이후 네티즌들이 분노를 하고 있다. 일부는 정부의 안이한 대응에 분노하며 정부에 원망을 돌리고 있고, 일부는 김선일씨를 죽인 테러범들에 분노를 하면서 우리 해병대나 특전사를 보내 싹쓸이를 하자는 극단적인 발언 또한 나오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이라크 전쟁의 시발점이 된 미국을 탓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각기 다양한 반응들을 보면서 혼란스러운 이 광경을 정리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무조건적인 정부비판에 대해서는 아래 글에서 이미 한 차례 언급한 바 있으므로 생략하겠다.

무차별적인 이라크 싹쓸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이들은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문구를 인용해가며 우리네 민간인을 죽였으니 우리도 이라크에 가서 싹쓸이 하자는 주장을 제기한다. 김선일씨 사망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충격에서 나온 발언이라면 그저 그 한 사람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탓으로 돌리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주장은 매우 위험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국민이 희생당했으니 너희도 당해봐라, 는 식의 논리는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다. 똑같이 보복조치를 하겠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피가 피를 부르는 파국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다. 영화감독 박찬욱 씨가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가 이런 말을 하더란다.

"특전사나 해병대를 보내서 다 쓸어버려야 한다"

아무리 화가 나고 한탄스럽더라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다. 다 쓸어버리자는 주장은 이라크를 초토화하고 있는 미국 부시행정부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이라크 팔루자에서 죽은 미군의 시신이 훼손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부시는 팔루자에 대대적인 공격을 지시했고 그곳에서만 수천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결혼식장도 공습을 해 막 결혼식을 올리던 신혼부부와 그의 일가족, 친척들이 죽었다고도 한다. 단지 결혼식장에서 축하포를 쐈다는 이유로 말이다. 뭔가 번쩍 했으니 미군은 이를 공격으로 알고 싹쓸이 했다는 것이다.

김선일씨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해야할 일이 이것인가? 그건 아니라고 본다. 고인에겐 미안하지만 우리국민 한명 죽을 때 그동안 이라크인은 수만명 죽었다. 너무 많이 죽어 그들 하나하나 애도하기도 힘들만큼 말이다. 국민들이 김선일씨의 죽음에 대해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라크인의 죽음 앞에서는 그저 뉴스 기사를 흘려읽는 정도의 관심조차도 쏟지 않았다. 우리 국민의 목숨이 소중하다면 이라크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모든 목숨은 같은 것이다. 우리 것과 남의 것을 구분짓지 말자. 이 전쟁의 배경에는 우리와 남을 구분짓는 '차별의 폭력'이 숨어있다. 미국은 자기네와 다른 이라크가 못마땅했고 다른 명분하에 이라크를 쳤지만 어쨌건 까놓고 얘기하면 이라크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정치체제, 나와 다른 종교, 나와 다른 문화를 가진 그들을 열등하게 여겼고, 나와 일치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폭력을 가했다.

내가 가장 많이 읅어먹는 인용구를 또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사상가 볼테르는 <<관용론>>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말 할 권리를 위해서는 함께 싸우겠다."

미국은, 그리고 우리는, 이라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라크가 말 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서는 함께 싸워줘야한다. 미국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라도 이라크를 위해 함께 싸워줘야한다. 이라크의 편에서 전쟁을 치르자는 말이 아니다. 자유가 억압당한다는 이유로 이라크를 쳤지만 지금 이라크에는 아예 자유를 찾아 볼 수 없다. 지금 볼 수 있는 자유는 '방종'이지 자유가 아니다. 이라크에는 자유가 상실되었다. 우리는 그 자유를 되찾아주어야한다. 이라크의 권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다면 차라리 간섭이라도 하지 말자.

관용의 정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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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일씨가 이라크에서 참수당했다는 소식이 들린 후 신문과 방송을 비롯한 언론들은 이에 대한 기사를 계속해서 내보내고 있다. 마치 노무현 대통령 탄핵 가결 이후의 언론을 보는 듯 오로지 이 사건만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정부는 제대로 협상을 한 것인가? 김선일씨가 31일에 납치됐던 것은 아닌가? 일본은 살렸는데 우리는 왜 못살렸냐? 는 등등의 의문을 제기하며 김선일씨의 목숨을 구하지 못한 것을 정부의 탓으로 돌리는 여론의 목소리가 강해지고 있다. 나 역시 그를 구하지 못한 정부가 원망스럽다.

 정부는 나름대로 노력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어쩌면 그 노력은 애초에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협상조건은 '한국군의 파병 철회'였고 우리가 거듭 파병을 재확인하자 그들은 바로 김선일씨를 죽였다. 그들의 조건인 파병 철회가 먹히지 않았는데 더이상의 협상이 진행될리 만무하다. 애초 협상은 불가능했다. 또한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들이 제한한 시간이 다가왔기에 시간이 촉박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협상의 성공과 실패여부를 중심으로 삼아 정부를 탓하는 것은 지나치다. 결코 정부의 행위를 감싸려는 것은 아니다. 논의의 중심이 다른 곳으로 이동되는 것을 막고 싶을 뿐이다. "김선일씨의 죽음=정부의 잘못"의 공식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가? '노무현 정부'만이 아닌 국회의제로서 파병을 확정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까지 포함한 '그들'의 잘못이다. 일부 소수 의원들에 한해 파병철회 주장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파병확정에 표를 던졌다. 파병을 철회하라는 사회 곳곳의 시민단체와 민주노동당, 시민들의 의견에도 그들은 눈한번 '깜빡'하지 않았다. 김선일씨의 피랍사실이 알려진 시기에도 그들은 되풀이해 '파병 재확인'만을 했을 뿐 파병철회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했다. 김선일씨의 죽음의 근본적인 배경은 이라크 파병 확정에 있는 것인 만큼 '이라크 파병'이 중심적인 논제가 되어야 한다.

 <이라크 파병을 철회해야 하는 첫번째 이유>

 이번에 파병하게 되면 미국과 영국에 이어 우리가 세번째 규모라고 한다. 이 정도 됐으면 미국, 영국의 제대로된 꼬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시가 파병하라고 한다고 이에 대한 정당성 여부나 안정성 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부당한 전쟁'에 꼭두각시로 참가하려는 우리는 확실히 그들의 꼬봉이다. 미국이 무서운가? 만약 미국의 말을 듣지 않으면 경제적인 제제가 가해진다거나 하는 등 기타 부수적인 악영향이 있을테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자국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할 정도의 것은 아니라고 본다. 가면 모두 죽느냐? 그렇지는 않다. 가면 죽지 않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면 그곳에서 우리 군인이 죽을 수도 있고 죽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만약 운이 좋아 아무도 죽지 않는다고 쳐도 우리나라는 그들의 다음 테러 목표가 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파병된 수천명의 군인이 살아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전체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한 채 테러의 위협에 시달려야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라크 파병 결정은 굉장한 실수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파병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파병안 결정에 찬성표를 던진 국회의원들에게 묻고 싶다. 열린우리당이여, 한나라당이여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파병안에 찬성을 하는 것인가?


<이라크 파병을 철회해야 하는 두번째 이유>

 이라크에는 핵무기는 당연히 없었고, 핵시설 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911 테러를 자행한 알카에다와는 더욱 연관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알카에다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더 큰 연관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는 이라크를 쳤다. 그가 '불량국가'(재밌는 것은 노암 촘스키는 그의 저서 <불량국가>를 통해 '불량국가'를 지정한 부시의 미국을 '불량국가'로 지정했다는 점이다)로 규정한 나라 중 가장 만만한 상대를 골라 무기력화 시키려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부차적으로 누구는 미국이 이라크의 석유를 노렸네 어쩌네 하는 경제적인 이유를 들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전리품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부시는 '팍스 아메리카'를 실현하기 위해 그들에 적대적인 나라들을 하나 둘 잡아먹으려 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리하여 부시는 이라크 침공에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다. 후세인을 생포했고 이라크 정부를 친미파로 채워넣었다. 주변에서 아무리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네 어쩌네 하면서 부시를 압박하지만 부시는 이미 자신의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다음번 대선에서 부시가 떨어질 것은 불보듯 확실한 일이지만 그는 자기꿈(?)을 이미 이루었다.

 부시 때리기는 이쯤하고 다시 돌아와 이야기를 마무리하자면, 정당한 이유는 커녕 아무런 이유조차 없는 일방적인 이라크 침공에 우리가 합세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가서 미국이나 영국처럼 석유를 얻어 올 것도 아니고, 기타 다른 떡고물도 떨어지지 않는데 왜 가려는지 모르겠다. '평화와 재건'이라는 모토를 내걸기는 했지만 평화와 재선은 안정된 뒤에 민간단체를 보내서 이루어라. 어설픈 천사인 척 흉내내며 군부대 보내면서 무슨 '평화와 재건'을 들먹이는가? 그들에겐 그저 이라크를 먹으러온 군부대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평화와 재건도 상대방이 요청해야지 상대가 원치도 않는데 해주겠다고 나서면 그것도 폭력이다. 다 파괴해놓고 와서 재건해주겠다는건 병주고 약주는 격이다. 병주고 약주는데 상대가 밉지 않겠는가? 원치 않으면 그냥 내비둬라. 나중에 그들이 원할 때 도와주면 된다. 굳이 '미국 시다바리'라는 소리들어가며 파병할 이유는 없지 아니한가?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제 2의 김선일씨가 나타나지 않도록 막는 길 뿐이다. 이라크 파병을 철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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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일지>

1999년 겨울 공군에 지원 입대했다. 하지만 군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나는 결국 돌아왔다.

2001년 가을, 12월 입대를 앞두고 몇달간의 심각한 고민을 했다. 나의 반전평화주의를 통한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겠노라 결심하고, 주위 친구, 선배와 부모님께 '통보'하다. 나의 결심도 힘들었지만 주위 사람들이 이를 곱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내게는 더욱 힘들었다. 결국 현실의 힘에 부딪혀 입대했다.

2001년 겨울-2004년 겨울, 훈련소 입소부터 시작해 제대하기 전까지 군대의 부당행위와 부조리 등에 대해 화장실 낙서판, 투고함, 설문지 작성, 대대장에게 이메일 보내기 등의 방식으로 나의 비판적 의견을 공개함. 익명인지라 나임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다들 나라는 것은 알고 있음. 하지만 대놓고 내게 '지랄'하지는 못했음. 그럴경우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자기들도 알고 있기에... 단 한번, 중대장이 나를 불러 "이거 니가 썼지?"라고 물어본 적만 있음.

2004년 겨울, 제대함.

이상이 나의 군에 대한 대략적인 서사적 기술이다. 난 위의 군에 대한 내 행위들이 그다지 평범함의 범주를 확연히 벗어난 일이기에 사석에서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내가 위에 기술한 나의 행동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 자리는 토론장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때로는 귀찮고, 짜증나고, 열받는다. 매번 했던 얘기 또 해야되기에 귀찮고, 상대방이 내 말을 알아듣지를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기에 짜증나고, 상대방은 반공주의와 민족주의, 애국주의에 표방해 군사논리만을 내세우기에 인간의 근본적인 양심과 인권의 문제를 논하는 나를 열받게 한다. 그럼에도 나는 글로나마 이렇게라도 말해야겠다.

2004년 5월 21일, 남부지법 형사 6단독 이정렬 판사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군 입대를 거부해 병역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여호와의 증인 신도 정아무개씨 등 3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바로 이러한 판결을 보고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 본 영화 '데어데블'에서 밴 애플렉은 "개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곤하는데, 위의 판결은 가히 개인이 세상을 바꿀 만한 사건이었다. 그는 선거때도 진보정당을 찍지 않았고, 스스로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고 있으며, 게다가 군대는 지원하여 특전사를 나왔고, 여전히 베레모를 자신의 사무실에 두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 판결은 더욱 의미있다. 그다지 진보적이지 않은 판사조차도-일단 판사라는 직책은 이미 그 국가의 법에 충실해야하기 때문에 진보적이 될 수가 없다. 법이란 원래가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옳다고 판결한 마당에 이땅의 손놓고 있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이는 일종의 회초리로 작용함과 동시에 한국의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점으로 새롭게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찬성한다. 내가 군대에 반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느낀 생득적인 나의 반골기질에서 비롯된 자유주의적인 기질 때문이었고,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신체검사통지서를 받던 시기를 기점으로, 나의 동아리 후배가 22사단 동해안 바닷가에서 시체로 발견된 때, 나에게 입영통지서가 날아든 때를 거쳐간다. 넓게는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비인권적인 만행들이 군대에서 비롯됨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것이 곧바로 반전평화주의로, 양심적 병역거부로 연결되었다.

대한민국의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군대' 문제에 대해 이야기만 나오면 모두가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정신에 입각해 군사주의적 논리를 펼치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군대 문제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모두가 군사주의적 시각으로만 바라볼 뿐, 그 자리에 평화와 인권과 자유와 사상과 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일단 군대를 다녀온 예비역 남성들의 경우에는 보상심리가 존재한다. 나는 군대에서 빡시게 고생했는데 씨바 다른 어떤 놈들은 양심이니 종교니하는 이유로 이를 거부한댄다. 아 열받네. 뭐 이런 식이 되는 거다. 그러니 그들도 군대를 가는 것이 당연하고, 안가겠다면 감독에 가라는 논리다.

또 한편으로는 북학의 침투도발을 우려하는 시각이 있다. 쟤들에게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하면 다른 애들도 따라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작 군대가는 놈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럼 당연히 북한이 쳐들어올 수 밖에 없지 않느냐? 는 논리다. 실존하지 않는 위협을 마치 당장이라도 일어날 듯이 포장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국토를 수호하고 있는 군대가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해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들을 감독에 가두는 것은 모순이다.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고 주장한다면 이 또한 민주주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리도 있지만 소수존중의 원리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은? 이들을 인정하고 대체복무제를 실시하면 된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면 이들을 심사위원회를 거쳐 걸러내면 될 것이고, 위증을 한 자에게는 법정 최고형을 때리면 된다. 또한 대체복무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데 이건 차후의 문제다. 당면한 과제는 이들의 양심을 인정할 것이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난 뒤에야 심사위원회를 어떻게 구성하고, 대체복무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하면 된다. 제도가 계획되어 있지도 않다고 해서 양심을 저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한기총의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반대입장은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비종교적이다. 이들은 기독교인들이 여호와의 증인으로 종교를 변경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들의 교인들이 빠져나갈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쓸데없는 기우다. 이 땅에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위치는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말에 따라 남북전쟁 이후의 '빨갱이'보다도 못하기 때문이다. 빨갱이로 대표되는 비전향 장기수들에 관한한 1990년대에 한국의 인권운동의 핵심과제이기라도 했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일제시대 때부터 존해해왔지만 이제야 주목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홍구 교수의 말에 따라 할아버지는 일제의 감옥에 갔고, 아버지는 군사독재의 감옥에 갔고, 이제 그 아들은 민주화된 감옥에 가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일제시기의 병역거부자는 독립운동자이었지만, 지금은 병역기피자로 전락해버린 것도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한기총에게는 이런 말을 되새겨보라고 전하고 싶다. 근대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그의 저서 <<관용론>>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당신의 말할 권리를 위해서는 함께 싸우겠다" 한기총은 여호와의 증인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이들의 인권이 짓밟히는 현실을 위해서는 싸워야하는 것이 마땅하다. 기독교가 표방하는 이념이 이것이었던가? "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이웃의 불행을 아랑곳하지 말라" 한기총의 현재 주장으로써는 이런 결론밖에는 도출되지 않는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함을 인식하기 위해 더이상 의심할 수 없는 최초의 것으로부터 사유를 시작한 결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양심적 병역거부 논란에 있어서도 지금까지의 판결과 선례만으로 고집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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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5-08-0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들러님께서 추천은 이곳에 가서 하시라네요.^^ 첨이에요. 반갑습니다.

얼룩말 2005-08-13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가슴아파요. 하고 싶어도 주위의 시선 때문에 못한... 참 슬프죠?^^
 

이라크 전쟁을 통해 본 칸트의 평화론(平和論) 비판(批判)

독일의 근대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주창하며 그에 따른 두 가지 평화론을 예로 들었다. 첫번째는 '자본주의 평화론'으로 자본주의 국가들끼리는 시장경제의 확산과 교역을 통해 상호의존적 경제 관계가 구축되면 기업인들간의 유대가 돈독해지고, 이들이 정치적 영향을 행사, 기업의 이익을 저해하는 전쟁을 못하게 한다는 것이 요지다. 두번째는 '민주평화론'으로 민주주의 체제가 견제와 균형을 통해 선전포고와 같은 중차대한 결정에 대해 민주적 통제를 가할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지도자의 자의적 결정에 따른 전쟁 발발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상과 같은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비추어봤을 때 현재 미국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은 '자본주의 평화론'과 '민주평화론' 을 모두 빗겨나갔다고 볼 수 있다. 이라크는 완전 개방된 자본주의는 아니었으나(이는 미국의 압력에 의해 한정된 공간에서의 자본주의로 보인다) 자본주의 체제를 따르고 있었고(사담 후세인이 국가를 지배하고 있기는 했으나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관점이다), 미국은 당연히 자본주의 국가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두 자본주의 국가간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칸트의 '자본주의 평화론'은 틀렸다. 비록 이라크와 미국간의 교역도 적고, 기업인들간의 유대도 돈독하지 않을 것이고, 이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서로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유도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더라도 자본주의 국가끼리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칸트의 생각은 엇나갔다. 오히려 미국의 자본주의는 기업의 이윤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껏 쌓아두었던 무기창고를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 비워야하기 때문이다. 비우고 다시 생산해야 미국 경제가 활력을 되찾는다. 더군다나 이라크를 치게되면 테러예방이라는 명분과 함께 석유 또한 얻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미국 기업의 입장에서 이라크 전쟁은 적극 반길일이다. 따라서 이라크와 미국 기업의 유대가 좋지 않았다는 요소가 남아있지만 칸트의 '자본주의 평화론'은 적어도 절반은 틀렸다. 자본주의 국가간의 평화는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번째 '민주평화론' 또한 틀렸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견제와 균형을 통해 국가 지도자의 자의적 결정에 따른 전쟁 발발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했지만, 지금의 이라크 전쟁은 부시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민주당과 반전 평화주의를 외치는 이들의 견제와 균형을 먹히지 않았다. 부시를 포함한 부시행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결과다. 따라서 칸트의 '민주평화론'은 틀렸다. 만약 칸트의 '민주평화론'이 성립이 되려면 미국이 '민주주의'를 표방하지 않고 있음에 고개를 끄덕이면 된다. 그런데 미국이 민주주의 체제를 따르지 않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성급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미국의 민주주의 시초이고, 지금의 민주주의를 만들어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고, 이들이 채택하고 있는 정치제도가 민주주의임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다만 민주주의에 패권주의가 결합된 형식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고,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미국의 '하는 짓'이 싫다고 해도 미국이 민주주의를 택하고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면 칸트는 확실히 틀렸다.


사실 칸트의 '자본주의 평화론'이나 '민주평화론'의 골자가 되는 핵심내용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내용인지라 이 시대를 살지 않는 칸트는 저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나는 칸트가 틀렸다고 밖에 말 할 수 없으나, 그 시대의 관점에서는 칸트는 옳았다. 다만 후대에 발생할 수 있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변수를 고려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칸트는 옳고 또 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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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2014-11-23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 평화론은 처음들어봐서 뭔지 모르겠으나,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주창했지 민주주의 평화론은 후대의 학자가 칸트를 인용해서 주창한겁니다. 또한 칸트의 영구평화론속 공화정은 현재의 민주주의 국가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평화론의 골자는 `민주주의 국가 간` 입니다.

마늘빵 2014-11-25 14:23   좋아요 0 | URL
넵 한참 전 글이라 지금은 기억이 전혀 안 나네요. 이 글에 무슨 내용을 썼는지도. ^^ 지적 감사합니다.
 

내가 남을 비판하려면 내 자신이 떳떳해야하고 내 스스로 도덕성을 기본전제로 깔고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남을 비판할 것이다.

김규항씨의 <B급 좌파>에 실린 동명의 글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사람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난 스스로를 '진보적 자유주의자' 혹은 '좌파 자유주의자', '비판적 자유주의자'라고 말한다. 그 말은 즉, 나는 나의 양심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양심까지고 지켜내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기 위해서는 나는 다른 이들을 향해 계속해서 쓴소리를 해댈 수 밖에 없고, 그에 따르는 기본전제는 나 자신의 양심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나의 양심이 깨끗하지 않고서 나는 다른 이들을 향해 쓴소리를 해댈 수가 없다. 다른 이와 나의 죄질의 차이가 클지라도 그나 나나 깨끗하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좌파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고해성사를 한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다지 크게 잘못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수학경시대회에서 친구들의 성화에 못이겨 시험문제 답을 몇개 가르쳐준 적이 있고, 대학에서 시험전 책상에 조그맣게 기록한 몇 문장을 통해 교양과목 시험에서 약간의 이득을 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가끔이기 했지만 그리고 그가 잘못한 것이긴 했지만 나는 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 원인 제공이야 누가 했건 누가 잘못했건 나의 폭력행사는 잘못된 것이었다. 그 이외에는 나는 나의 도덕성에, 나의 양심에 비춰 잘못한 일은 없는 듯 하다.

한가지 더. 행동으로 옮겨지지 못한 나의 머리속에 갇혀있던 생각들 중에서 나의 양심에 반하는 것들이 조금 있기는 하다. 나는 누군가를 죽이고픈 생각을 한 적이 있고, 누군가를 매우 증오한 적이 있으며, 그가 잘못되기를 바란 적도 있고, 가끔은 아니 자주 야한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나는 지금껏 이정도면 나의 양심을 지켜왔다고 생각하고, 이 정도의 도덕성이라면 남에게 뭐라고 할 만한 자격은 있다고 본다. 앞으로도 지금껏 했던대로 나는 잘못된 행동이나 생각에 대해 쓴소리를 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나는 그들의 양심까지도 지켜낼 것이다. 나는 김규항이 자처하는 B급좌파까지는 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좌파인지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나는 좌파가 되고픈 희망을 가진 사람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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