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노희찬씨가 국정감사에서 김동건 서울고법원장을 향해 재미난 쓴소리를 해서 화제다. 불법대선자금 피고인들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을 비판한 것인데, 그는

"기상천외한 차떼기 수법으로 불법자금을 강탈하다시피 한 피고인들에게 '3선 국회의원에, 고령에 죄를 뉘우치고 있다'거나, '오랫동안 법조인으로 활동해왔다'는 이유로 형을 감면해줬다"

"법원장도 수십년간 판사생활을 했는데 죄를 지으면 가볍게 처벌받아야 하는가"

"불법자금을 건넨 기업인 17명중 16명이 '사회공헌'을 이유로 집행유예나 벌금형에 그쳤는데 적자 낸 기업에서 전문경영인으로 수십년간 재직한 것을 감경사유로 보느냐"

"농민이 수십년간 땀흘려 농사를 지었다거나, 노동자가 생산현장에서 열심히 일해 산업화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관대한 처분을 받은 예는 보지 못했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하는데 만명만 평등한 것 같다"

뭐 하나 물고 들어갈 수 없는 논리정연하면서도 재미까지 더한 그의 촌철살인에 속이 시원하다.

언젠가 열린우리당의 유시민, 한나라당의 전여옥, 민주노동당의 노희찬을 놓고 이런 이야기나 나왔었다. 유시민은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엄청난 내공과 논리를 지니고 있어 감히 덤빌수가 없고, 노희찬은 내공과 논리는 좀 부족하더라도 재미난 비유를 통한 촌철살인이 가히 최고다. 전여옥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전여옥은 그다지 내공도 논리도 가지고 있지 않고, 재미난 비유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말빨'에서는 유시민과 노희찬이 최고다.

앞서 언급한 노희찬씨의 어록 중에 '법 앞에 만명만 평등'하다는 말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말은 헌법에 명시되어있다. 물론 헌법에 명시된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말의 본래 뜻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해야한다, 라는 규범적이고 당위적인 가치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당위적으로 그래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노희찬씨의 말은 바로 그런 개탄스러운 현실에 법이 일조하고 있음을 꼬집은 것이다.

그의 말대로 우리네 사회는 돈이건 명예건 권력이건 간에 못 가진 자를 향해서는 가혹하게 법을 적용하고, 가진 자에 대해서는 너무나 안이하게 관용을 베풀고 있다. 정작 관용이 필요한 건 저들이 아니라 억압받는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그 관용이 저들을 위해 쓰이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관용을 모욕하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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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김경형 감독의 코믹작품, <라이어>. 역시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특유의 자연스러운 웃음이 <라이어>에서도 적용되었다. <라이어>는 물론 이전작품에 비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약간은 어딘가 엉성해보이는 스토리에 그다지 짜임새를 가지고 있지도 못했다. 하지만 사건이 점점 커질수록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 억지스럽지 않은 매끄러운 웃음 유발이 좋았다.

 순수 코미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관심있게 영화를 보면서 웃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쇼파에 누워 키득키득 거리며 웃게 되는 것은 그만큼 자연스러웠다는 증거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라이터를 켜라>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라이터를 켜라>는 내가 본 최악의 영화였다. 억지스러운 상황연출과 웃음. 정말이지 내용도 없는 영화에 웃음까지 억지스러우니 볼 거 다 본 영화다. 어쩌면 <라이어> 또한 그와 비슷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었다.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 하지만 자연스러운 웃음 유발이 이 영화를 살려냈다고 본다.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부른다."
 "정직하게 살자."
 라는 교훈 아닌 교훈을 주는 영화다.

 주진모와 송선미, 서영희의 연기도 좋았고, 감초역할을 해주는 공형진과 손현주, 임현식의 연기도 볼만하다. 단,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섹스장면이 단지 앞에서 흥미를 끌기 위한 짧은 컷이었다는 점이 끝내 아쉽다. ^^; 끝까지 기대하며 봤지만 섹스장면은 그게 끝. 기대하지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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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부와 시민단체의 목소리를 받아들여 정부에서 성매매를 근절하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내세운 것이 성매매 특별법인데, 시행된지 며칠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갖가지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또 평생가도 못 볼, 성매매 여성들이 대낮에 단체로 나와서 광화문에서 시위를 하는 모습까지 보게되었는데 과연 이 법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고, 제대로 시행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오로지 경제, 경제만을 외치는 어떤 이는 이 법이 한국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준다고 한다. 성매매로 인한 지하경제가 엄청난 규모인데 이것이 모두 밖으로 드러나 투명해지고 성매매가 근절된다면 지하경제로 인해 이득을 봤던 우리경제가 더욱 위축된다는 것이다.

 또 한나라당의 어떤 남성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성매매가 근절 될 수 있다고 보느냐, 10대후반에서 30대초반 남자들이 성욕을 풀데가 없지 않느냐, 어디가서 성욕을 해소하라는 말인가, 라고 말이다.

 자칭 성매매 여성이라는 분은 한겨레21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제도가 만들어진 취지는 좋고, 여성단체가 성매매 여성을 위해서 애쓰는 것도 알지만 당장 이들은 무엇을 먹고 살라는 말인가. 옛날이면 모르지만 지금은 포주들이 강압적으로 하지도 않고 여성에게 자율적으로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광화문에서 시위하는 여성들 중 대부분은 포주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생계를 위해 나선 것이다, 라고 말이다.

 이 제도를 가운데 놓고 참 다양한 의견이 속출하고 있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이들의 말이 모두 옳아 보인다.

 나는 성매매 특별법의 취지에는 찬성하는 편이지만, 너무 성급하게 실시된 나머지 성매매에 종사했던 직업여성들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어버렸다고 본다. 이들에게 재취업교육이라고 해봐야 꽃꽂이 정도 가르쳐주면서 그렇다고 그것으로 취업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공짜로 가르쳐주기만 하는 정도다. 이런 식으로는 그 많은 여성들을 보호할 수가 없다. 오히려 불법적인 성매매, 좀더 은밀한 성매매를 활성화 시킬 뿐이다. 흔히 사창가라고 말하는 영등포, 미아리, 용산, 청량리, 장안동, 용주골 등의 특정지역이 아닌 좀더 광범위하고 우리네 일상생활에 깃든 성매매가 이뤄지기 쉽상이라는 것이다. 대책없는 제도를 성급히 시행한 나머지 오히려 성매매의 지역이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성매매는 여성을 성적 도구화 한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한다. 인간도 동물이라는 점에서 본능이 있고, 본능에 따르자면 남성은 수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씨를 퍼뜨리고자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이성을 가지고 있다.

  과거 철학사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해 데카르트, 칸트, 헤겔을 거쳐 현존하는 철학자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이성을 중심으로 사고를 해왔고, 이성의 관점에서 사회문제를 바라보았다. 그에 맞서 미셸푸코, 베르그송, 레비스트로스 등은 이성만 아닌 몸의 철학 혹은 감성의 철학 등을 내놓기 시작했다. 현대의 철학이 이성이 아닌 것이 중심을 이룬다고 해서 또 전체적인 문화적 풍토가 이성을 소홀히 한다고 해서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뒤바뀌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성만을 중시했던 사고를 좀더 넓혀 다른 것도 있다는 식으로 사고를 해야지, 이성을 버리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다른 동물과 다르고, 동물세계에는 없는 도덕과 윤리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정치인들을 비판할 때 흔히 도덕적,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기도 하는데, 비단 그것은 정치인을 비롯한 공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정치인이 단란주점에 가고, 성매매를 하는 것은 비판받아야 하면서 일반 시민은 여기서 벗어나려 한다면 이는 남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고 나에게는 너무나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모든 기준과 잣대는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신학대 교수가 성매매를 했다고 해서 법원에서 죄를 물은 일이 있었다. 이는 그가 신학을 하는 교수라는 점에서 더욱 높은 도덕성을 갖춰야함을 요구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기준이 일반시민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성욕도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이다. 하지만 밥을 먹고 싶다고 밥을 먹듯이, 섹스하고 싶다고 아무나 붙잡고 섹스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매매는 물론 아무나 붙잡고 하는 강간과는 다르다. 욕구를 가진 자와 이를 상대하는 자와의 일종의 계약관계가 성립해야 가능한 것이지만, 그 상대가 금전적 보상을 받고 도구화됨으로써 주체성을 잃어버리는데 문제가 있다. 내가 돈 받고 하겠다는데 왜 상관이냐?, 당신과는 상관이 없지 않느냐?, 는 식의 반론은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있어 잘못된 행위를 눈감고 그냥 각자 살아가라는 이야기밖에는 되지 않는다. 어찌보면 이는 폭력일 수도 있다. 내가 하겠다는데,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상관해서 못하게 하느냐, 내가 가지고 있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 아니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는 곧 돈을 받고 성관계를 하는 자가 자신이 도구화된다는 것을 스스로 허락해버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또 이것이 지극히 그 사람 개인에게만 해당된다는 점에서, 개인의 자유와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성이 충돌을 일으킨다.

 사회는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기엔 나는 너무나 자유주의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  성매매가 아닌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개인을 중시하는 사고를 하면서, 오로지 성매매에서만 개인보다 사회를 중시하는 발언을 하자니 내 스스로의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 하자면,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도구화됨을 스스로 용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나의 주체성을 포기버린다면 그 자는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더불어 마지막으로, 정부는 미완의 대책을 통해 서둘러 성매매를 근절하려 하지 말고 단계적으로 해당 여성들이 스스로 수렁에서 나와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자기주체성을 깨닫는 것은 그들 개인의 문제이지만, 의식적 차원이 아닌 현실적, 경제적 차원에서 그들을 구제할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야할 것이다. 그냥 불도저식으로 무자비하게 근절하려한다면 성매매는 근절되는 것이 아니라 범위를 넓혀 음성적으로 확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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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직장에서 왕따를 당하던 직장인이 결국 업무수행부족으로 승진시험에서 탈락하고 결국은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기사를 봤다. 왕따를 시킨 다른 직장인은 컴퓨터 계정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그는 다른 동료들에게 단체 메일을 보내 해당인을 왕따시킬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그의 계정을 없앴으니 그로 하여금 다른 계정으로 접속하지 못하게 하고, 철저하게 소외시키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업무와 관련하여 정보를 취득할 수 없었고, 승진시험에서 업무수행능력부족으로 누락되어 결국 그만두었단다. 하지만 분노한 그는 5년간 소송을 하여 자신을 왕따시킨 주범에게 결국 복수를 했다. 그의 집념 또한 대단하다.

그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왜 다른 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왕따현상이 비단 초중고등학교에서만 일어나는 철부지 학생들 사이의 장난스럽고 심각한 놀이 정도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성숙한 소위 어른들이라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심각하게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왕따를 당한 사람은 그가 실제로 잘못을 했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그의 잘못보다는 다른 이들과 조금은 다른 성격, 조금은 다른 삶의 유형을 살아가고 있는 경우이다.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은 그만큼 힘이 없다. 이는 힘이 없기에 그는 스스로가 대단한 권력을 쥐고서 다른 이들을 못살게 굴만한 여력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나의 친구 중 한명이 직장에서 왕따를 당하다 결국 그만둔 경우가 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 문제라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에 대한 사적인 정보도 밝히지 않겠다. 하지만 그는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고, 단지 그가 잘못한 것은 상급자의 지시에 조금은 딴지를 걸었던 것 뿐이다. 왜냐면 그가 보기에 그 지시는 부당한 것이었고 납득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왕따를 시키는 사람은 그 상급자가 아닌 동성을 가진 다른 상급자였다. 그는 그가 왕따당한 이유에 대해서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월급에서도 각종 수당을 받지 못했고, 안좋은 소문에 시달리며 직장생활을 계속해야했다. 결국 사직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왕따는 아마도 여러 사람이 모인 집단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그들과 순조롭게 생활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발생하는 것 같다. 함께 공유하지 못하는 소외된 개인을 철저히 고립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집단 내에서 고립된 자는 도태된 것처럼 취급받는다.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저런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이런 가치관을 가진 자가 있다면, 저런 가치관을 가진 자도 있는 것인데, 이를 용인하지 않기 때문에 별종으로 분류되는 자는 왕따를 당하게 된다. 모두가 다수의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모두 같은 생각, 모두 같은 행동을 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이미 인간사회가 아니다. 제조된 로봇일 뿐이다. 나를 벗어나 타자를 인정하자. 타인 또한 나와 같은 존재자이고 인격체이다.


P.S. 나 또한 다수가 살아가는 삶을 살지 않고, 다수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어쩌면 마이너리티이고 아웃사이더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난 그런 내가 좋다. 그러나 이런 나는 왕따 당하기 쉽상이다. 그렇다고 왕따당할 우려를 없애기 위해 생각도 없이 다수를 따라가고 싶지는 않다. 나를 인정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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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장 자크 루소. 그의 이름을 어설프게나마 접한 것은 고등학교 사회 혹은 정치경제 시간이었으리라. 루소가 어쩌고, 로크가 어쩌고, 홉스가 어쩌고,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이름과 그들의 저작을 짝짓기 하며 외우고 있을 때 나는 그냥 이들의 이름과 저작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그냥...

루소를 제대로 다시 접한 것은 대학 2학년 서양근대철학사 시간. 그러나 철학에서 루소는 칸트나 헤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거대한 사상가 그룹에는 속하지 않았던지라 이때도 그저 어설프게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대학 4학년. 나는 루소의 정치철학에 대한 학사논문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의 저작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책세상 문고에서 나온 얇은 <에밀>을 읽고, 역시 동일 출판사에서 나온 문고판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었다. 다음의 독서계획은 역시 그의 <사회계약론>이다. 책세상문고에서 <언어기원에 관한 시론>이라는 그의 또다른 저서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는 정치철학과는 거리가 멀다 싶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본래 <언어기원에 관한 시론>은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쓰면서 함께 언급했던 것인데 그 내용이 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여 따로 떼어 다시 쓴 것이다.

고등학교 때 루소를 알고 있던 것은, 그가 인간은 본래 악하다는 홉스의 견해에 맞서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장 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선악의 개념을 모르고 있는 백지상태에 불과했고, 따라서 인간은 본래 악하다는 홉스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인간은 본래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어느 순간부터 불평등해졌다. 그는 인간은 본래 자연상태에서 따로따로 행동하며 살았으나 이들이 함께 모여 집단을 구성하면서 그들간의 계급이 생겨났고 따라서 누구는 핍박받고 누구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불평등이 생겨났다고 한다. 또한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예술과 학문, 문화가 발달해 사치가 극성을 이루고 이런 사치는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근원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은 한번 악해진 다음에는 다시 선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18세기 당시에는 이러한 평등과 불평등의 관계를 따지는 것은 매우 급진적인 생각이었고 루소의 생각은 지금 사회에서도 급진적이다. 그는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 라는 그룹에 속하는 볼테르, 디드로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이 저작으로 인해 볼테르로부터 '거지철학'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루소가 볼테르로부터 이런 비판을 받았다는 대목은 그저 흘려버릴만한 대목이지만, 루소와 볼테르 둘 다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다. 볼테르의 <관용론>에도 나는 굉장한 매력을 느꼈고 그의 관용론이 현대 사회에, 우리나라에, 지금 이 시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졌고,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나타난 그의 생각 또한 지금에서 다시 되돌려볼만한 요소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시 주민은 네 가지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시민, 부르주아, 주민, 하층원주민이 그것이었는데, 루소는 최하층에 속하는 계급이었고, 따라서 그러한 환경적 영향이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쓰는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루소는 사실 당대에도 이 저작으로 인해 대단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주목을 받았지 칭송을 받지는 못했다. 그가 칭송을 받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혁명이 이루어진 뒤였다. 프랑스 혁명의 힘을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후에야 제대로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대개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사실 이 저작은 그다지 체계적이고 눈에 쏙 들어오는 글은 아니다. 번역자는 '더 읽어야 할 자료들' 도입부에서 이 저작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지만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우선 <사회계약론>등에서 구체화되는 루소의 정치사상 체계의 서론적 성격을 갖는 저작이라 아직 체계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그 이유가 된다. 또한 저자의 난해한 문체 때문이기도 하다."

루소라는 이름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고, 이 저작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제목 또한 들어봤을 법하다. 하지만 실제로 수많은 고전 중 이 책이 그리 많이 읽히지는 않는 듯하다. 물론 번역본의 부재도 그에 한몫을 했을 것이나 이번에 책사상문고에서 번역본이 나왔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꼭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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