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너무 삶의 한쪽만 보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홈페이지는 그 사람의 삶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이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은 애써 감출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그 사람의 성향이나 취향, 성격 등이 홈페이지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래서 나는 내 홈페이지와 다른 사람의 홈페이지를 비교해봤다. 내 홈페이지는 비록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이 다녀간다. 반면 다른 사람들의 홈페이지는 나보다 더 많이 다녀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숫자를 떠나서 온전히 홈페이지가 내보이는 이미지, 내용물만을 본다면, 내 홈페이지는 너무도 삭막하다. '이성'중심적으로 운영이 된달까? 내가 감성보다는 이성에 치우진 유형의 인간이기 때문일테지만 갑자기 나는 이런 내가 싫어졌다. 그러나 이는 나의 '이성'중심적 삶이 싫다기 보다는 '감성'중심의 삶이 소외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때문에 싫어진 것이다. 둘다 살릴 수는 없을까?

사실 내게 감성이 죽어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성 때문에 감성적인 부분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때론 그것이 두렵다. 다른 이들이 나를 너무 딱딱한 존재로 보는 것이 말이다. 난 사람들에게 이에 대해 물어본 것은 아니다. 친한 몇몇 이들에게 물음을 던진 적은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내게 내가 그렇게 접근하기 어렵고 딱딱한 사람이 아니라는 대답을 들려줬다. 나에 대한 배려때문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것이 실제 그들이 생각하는 나에 대한 인상이라면 나는 오히려 타인이 나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내 스스로의 허황된 이미지를 만들어놓고는 사람들이 나를 친숙하지 않은 존재로 파악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일부러 그렇게 만들고 싶어하는건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나는 가벼운 사람이 되기보다는 무거운 사람이 되고싶어하기 때문이다. 가벼운 사람은 얕잡아보기 쉽고 무시당하기 쉽다. 하지만 무거운 사람은 함부로 대하기 어렵고 무시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타인이 나를 보는 이미지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스스로 그런 이미지를 만들려고 노력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 모습을 싫어하면서 말이다. 이런 모순된 내가 있나...

모순덩어리.... 나...

마치 나는 나를 굉장히 잘 아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럴 때 보면 나는 나를 모르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쉽게 대답한다.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내가 만들어낸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자서전'을 쓸 때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골라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듯이 말이다. 나의 인생에서 밝히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사람들은 '자서전'을 쓰면서 기억에서 삭제해버린다. 그리고 출간된 '자서전'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거짓덩어리... 어쩌면 나도 그런지도 모르겠다.

거짓덩어리...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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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론
장 자크 루소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책을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고등학교 사회, 윤리 혹은 정치경제 교과서를 통해 그의 이름과 책의 제목을 들어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나는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상당 기간이 흘러 어느 책에서 보았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볼테르의 <관용론>, 존 로크의 <통치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등과 함께 짝짓기 시험을 대비했던 기억이 난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현재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온 본 책과 범우사에서 나온 또다른 번역본, 이렇게 두 종류가 있다. 범우사 번역본은 아직 접해보지 못했으나 이전에 범우사에서 나온 다른 고전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접해보고 실망감을 느꼈던지라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다. 게다가 범우사 번역본 보다는 서울대출판사 번역본이 판매율이 높은 것으로 보아 좀더 신뢰할 수 있을 것으로 미뤄 서울대 번역본을 읽었다.

 <에밀>을 정식으로 읽은 것이 아닌, 책세상문고판으로 1부만 번역된 책을 읽었고, 같은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은 바 있다. 그리고 <사회계약론>을 접함으로써 그를 세번째 만난다.

 <사회계약론>은 본래 루소가 젊은시절부터 평생의 대작으로 꿈꾸었던 <정치경제론>에서 발췌해 내놓은 저서이다. 그는 <정치경제론>을 집필하던중 자신의 역량의 한계를 느끼고 이미 집필된 논문 중 <사회계약론>만을 따로 묶어 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루소는 책의 앞머리 '독자에게'에서 밝혀두고 있다.

 제 1장의 제 1부의 주제에서는 우리가 가장 흔히 알고 있는 루소의 명언이 나온다.

 "인간은 본래 자유인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는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있다"

 이후로 그는 초기사회, 강자의 권리, 노예제도, 사회계약, 주권자, 물건, 사회신분, 생산권, 법, 국민, 입법, 정부, 투표, 선거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사회계약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펼쳐놓고 있다.
 
 <사회계약론>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에 따라 몇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하나의 장들이 글이 길지 않은데다 쉽게 쓰여져있어 소설읽듯 읽어도 금방 눈에 들어온다.

 1부에서는 사회계약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를 한다. 초기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강자와 권력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되는지, 노예와 권력의 관계는 어떠한지, 사회계약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에 간하여 기본적인 사안들을 다룬다. 2부에서는 주권, 법, 국민의 관계에 대해서 논한다. 주권은 전체 의사의 행사로서 양도될 수도 없고 분할될 수도 없다. 3부에서는 정부와 정부의 여러 형태, 즉 민주제, 귀족제, 군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2부에서 말한 법을 집행하기 위해 정부는 필요하며, 정부의 한 형태인 민주정치는 전 국민, 혹은 절대다수의 정부이고, 귀족정치는 소수에 의한 정부, 군주정치는 한 사람에 의한 정부형태이다. 마지막으로 4부에서는 로마 정치사를 예로 들며, 전체의사는 때때로 잘못 인식된다 해도 결코 파괴될 수 없고 항상 절대다수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주장한다.

 루소가 살던 시기는 18세기로 계몽주의자들의 시대이기도 하다. 몽테스키외, 디드로, 홉스, 볼테르, 로크 등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등장했던 시기이고, 이들이 함께 뭉쳐 백과전서파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루소가 디죵 아카데미의 논문현상공모에 응해 상받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출간하고, <에밀>과 <사회계약론>을 내놓으면서 저들로부터 멀어져가게 된다. 심지어 볼테르는 그를 향해 "인간을 네 발로 기는 짐승으로 되돌아가게 하려고 한다"고 비판했을 정도다. 이는 볼테르 뿐만 아니라 그와 친분관계를 맺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이었고 그는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은 루소를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루소는 사회와 문명 자체를 비판하고 무조건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사회적 질서를 비판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모든 악들이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잘못 통치한 인간에게 속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크게 위안이 되고 매우 유용한 것을 알게 할 것이다"(<나르시스>의 서문)

 루소는 결국 인간을 야만의 상태로 되돌리려했다기 보다는 사회적 법의 인위적이고 예속적인 체제 가운데 자연적 법의 순수한 자유를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철학자들은 그를 오해함으로써 루소를 비난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루소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것은 그의 저서를 보면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글을 쓰기 전에 타인을 비판을 의식하며 어떤 문제가 제기될까 하고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은 글쟁이에게는 지나친 기대다. 대개의 비판은 글이 출간된 이후에 벌어지며 다수의 비판 속에 소외된 저자의 목소리는 이미 그들에게 묻혀버린 뒤다. 루소는 그래서 그들에게서 멀어져 자신을 옹호하는 글을 써서 내는데 그것이 <고백록>이고, 이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다. 또, 타인을 의식하지 않은 자기 스스로를 위한 글을 묶어냈는데 이것이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추가 언급할 것은, 루소를 이해하기 위해서 로크의 <시민정부론> 혹은 <통치론>, 홉스의 <리바이어던>,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더불어 함께 읽으라는 것이다. 물론 나도 아직 <사회계약론>이외에는 본 책이 없지만 앞으로의 계획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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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래된 영화다. 1980년에 제작되었다고 하니 이런 내가 태어난 다음해에 만들어진 영화다. 그런데 영화가 그다지 옛스럽다('촌스럽다'의 우회적인 표현으로 사용)거나 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배가 난파되어 무인도에 단 둘이 남게 된 소년, 소녀가 무인도에서 성장하면서 겪는 일상의 일들을 담아낸 것인데, 최근 대두되는 '근대로의 이행'에 있는 <로빈슨 크루소>와도 같은 아주 진부한 소재이면서도 볼거리(?)때문인지 지루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여기서 볼거리란, 가끔 벗기도 하고 옷을 입어도 조금만 입는 두 남녀를 지칭함)

남자는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여자는 요기를 하는 등 원초적인 남여의 역할을 보여주면서 이들이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게 되고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는 과정을 너무도 순진(?)하게 보여준다. 남녀가 사랑을 느끼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섹스를 해서 아이를 가진 여자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아파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아이가 태어난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 모든 것이 이들에겐 처음이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다.

굳이 보라고 추천하지는 않겠지만 옛날 영화치고는 볼만하다는 것이 내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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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포선라이즈>를 보지 않고 <비포선셋>을 봐도 무방하다.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9년전 1995년에 <비포선라이즈>를 만들때의 감독과 남녀 주연배우가 모여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스토리를 짠 것이 <비포선셋>의 기본틀이 되었다. 이들은 애써 인위적인 무엇인가를 첨부하려하기 보다는 그때의 느낌 그대로, 단지 9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의 이야기를, 감정을 가지고 이어나갔다. 그래서 영화는 자연스럽다.

9년전 비엔나에서 하루밤을 함께 보낸 미국 남자 제시와 프랑스 여자 셀린느는 6개월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서 보자던 약속을 했지만, 셀린느의 사정으로 이들은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9년이 흐르고 제시는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파리의 한 서점에서 책홍보를 하고, 셀린느의 단골서점인 이곳에서 둘은 함께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80분이다. 지난번에는 그래도 하루밤은 있었는데 이제는 80분이라니, 연인에게 너무 가혹하다. 영화는 80분 동안 벌어지는 사건들을 실제로 80분에 담아낸다.

둘은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 받는다. 사소한 수다에서부터 환경문제, 미제국주의 문제, 책이야기, 그날밤 이야기 등 이들은 너무나도 할 말이 많다. 결국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유람선을 타고 셀린느의 집까지 가게된 제시는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혼했지만 그저 그런 삶인 제시는 셀린느와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셀린느 역시 다른 남자들과 만나보곤 했지만 그날 이후의 사랑은 그녀에겐 사랑이 아니다.

한마디로 평하자면 '말만 하다 끝나는 영화'다. 정말 이 영화에는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말'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말'이란 것이, 그냥 단순한 '수다'가 아니라 이들의 지난 9년동안의 삶과 그들이 만났던 하루동안의 일에 대한 서로의 탐색전이며, 변화된 서로의 모습을 감지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들의 '말'은 다분히 철학적이고 사색적이다.

"사람은 누구나 각 개인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본다"(제시)
"아픔이 없다면 추억이 아름다울텐데..."(셀린느)
"그 날 밤 내 모든 로맨티시즘을 다 쏟아 부어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셀린느)
"난 지금 누가 건드리기만해도 허물어질 거 같은 마음이야"(제시)

이 영화를 보는데 있어 중점사항은 이들의 대화를 통해 나와 소통하라는 것이다. 철학자 딜타이는 '타인의 자서전'을 통해 자기자신을 이해하는 해석학을 내놓았다. 타인이 쓴 그의 자서전을 읽음으로써 나를 알아갈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영화는 일종의 '타인의 자서전'이다. 영화를 통해 나의 사랑학에 대한 이해로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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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행정수도를 이전하던말던 이에 관해서는 크게 의견이 없지만, 행정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헌재의 판결결과에 대한 나의 입장이다. 나는 민노당과 열린우리당 양당 지지자다. 유럽식의 좌파 우파 개념에서 볼 때 열린우리당은 너무나 우파이고, 민노당은 약간 좌파이다. 사실 한나라당은 극우는 아니라더라도 적극적 우익은 되기 때문에, 이념상 중간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이념의 스펙트럼 위에서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사라지는 것이 옳다. 그리고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이 붙어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당과 민노당을 지지한다.

 어쨌든 내가 지지정당을 밝힌 이유는 그렇다.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양당의 입장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은 행정수도를 이전하자고 했고, 민노당은 이전하지 말자고 했다. 물론 지지정당에 따라 나의 줏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의 기본적인 스스로의 사유를 기초로 한 뒤 지지정당이 결정되는 것인데, 나는 민노당과 열린우리당의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수도 이전은 지역분배발전을 위해서는 좋은 정책이다. 하지만 굳이 행정수도 이전을 하지 않고도 지역의 고른 발전을 꾀할 방법은 있다고 본다. 반면, 나는 지역발전을 위해 행정수도이전을 하려는 정부의 장기적인 계획을 굳이 반대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열심히 일해보겠다는데 왜 반대하는가? 그게 그리 크게 문제될만한 정책도 아니지 않는가? 서울에 있던 행정기관이 충청도로 간다고 해서 서울이 달라지는 것은 없다. 서울은 여전히 가장 큰 도시로 남을 것이다.

 한편,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은 매우 유감스럽다. 이들의 판결이 극히 정치적이고, 자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 법학자도 아니고 법학도도 아니라 법에 대해선 잘 모른다. 하지만 언론에 명시된 헌재가 위헌결정을 내린 근거를 볼 때, 위헌 판결에 '관습법'을 끌어들인 것은 법을 모르는 내가 봐도 참 의아하다. 내가 법을 모르기 때문인가? 아니면 법이 해석되고, 적용된 내용이 이상하기 때문인가?

 위헌판결 이후 수도권 대학의 법학교수들을 대상으로 본 내용에 대한 의견을 조사했나보다. 그런데 대부분 위헌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고, 일부 소수만이 동의했다. 그렇다면 내가 잘못보고 있는 것도 아닌 듯 하다. 법학교수들이 위헌이 아니라는데 그렇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이는 '해석'의 문제다.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든 끊임없는 해석을 하고 있다. 그 해석의 대상이 텍스트이든, 사람이든, 일상이든, 정치, 사회, 법이든 간에 말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행위는 해석이다. 그런데 이 해석이 잘못될 경우 '오해'가 생겨날 수 있다. 해석을 제대로 해서 '이해'를 해야할텐데 잘못하면 '오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오해가 발생한다고 문제될 것은 없다. 오해에 오해를 거듭하다보면 언젠가는 이해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기존에 성서를 연구하는데 있어 도움을 주는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하던 해석학을 최초로 학문으로 정립한 철학자 슐라이어마허는 "오해는 이해의 전제"라고 말했다. 그래. 이해하려면 중간에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헌재 판결관들의 위헌판결에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들어있다. 이들은 수도이전이 아닌 행정수도이전에 대한 판결임에도 불구하고, 신행정수도에 대해서 판결내린 것이 아니라 '수도이전'이라는 엉뚱한 사안에 대해 판결을 내렸다.

 "국가 정치, 행정의 중추기능을 가지고 있는 수도로 건설되는 지역"이라는 특별법의 제 2조 1호와 2호를 근거로 해서 아예 판결대상을 '수도이전'으로 명시해버렸다. 처음부터 '오해'를 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자신들이 판결해야할 대상이 뭔지도 모르는 데 제대로 된 판결내용이 나올리 만무하다.

 또, 명문화 되지도 않은 관심법인지 관습법인지 하는 것을 끌어들여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은 국민들의 머리속에 인식되어온 개념이기에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국민투표에 붙여야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운다. 아니 지금 수도가 서울인 것은 알겠는데, 수도가 서울이어야하나? '서울이 수도이다' 라는 '사실명제'로부터 '서울이 수도여야한다'라는 당위명제가 나올 수는 없다. 논리적 비약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부터 끌어올 것이 아니라 저 고조선부터 끌어들여오면 안되는 것인가? 왜 하필 조선시대인가? 참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관습법을 적용하면, 네티즌들의 말마따나 과거부터 남자가 호주라는 사실은 관습으로 굳어져왔기에 호주제를  폐지해서도 안되며, 과거부터 성매매가 없던 시기는 없었기 때문에 지금 시행하고 있는 성매매특별법을 시행해서는 안되며, 과거부터 공대생들은 대장장이 정도의 역할을 수행했으므로 각종 고시를 볼 자격을 줘서는 안되며, 예로부터 여자는 집구석에 처박혀 집안일만 했으므로 직장을 따로 가져서는 안된다. 자 이제 조선시대로 돌아가자~ 얼씨구나~

 헌재가 이런 식으로 관습법을 자의적으로 적용하다보면, 이제 정치는 헌재가 하게 될 것이다. 여야가 싸우다가 헌재로 툭 던져버리면 헌재는 '관심법'을 가지고 어허 이리이리하거라~ 하고 명령(?)을 내리면 싸우던 여야는 예이~ 하고 명령을 곧장 수행해야한다. 이제 국민들은 대통령을 뽑지 말고 헌법재판관을 뽑아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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