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포선라이즈>를 보지 않고 <비포선셋>을 봐도 무방하다.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9년전 1995년에 <비포선라이즈>를 만들때의 감독과 남녀 주연배우가 모여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스토리를 짠 것이 <비포선셋>의 기본틀이 되었다. 이들은 애써 인위적인 무엇인가를 첨부하려하기 보다는 그때의 느낌 그대로, 단지 9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의 이야기를, 감정을 가지고 이어나갔다. 그래서 영화는 자연스럽다.

9년전 비엔나에서 하루밤을 함께 보낸 미국 남자 제시와 프랑스 여자 셀린느는 6개월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서 보자던 약속을 했지만, 셀린느의 사정으로 이들은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9년이 흐르고 제시는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파리의 한 서점에서 책홍보를 하고, 셀린느의 단골서점인 이곳에서 둘은 함께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80분이다. 지난번에는 그래도 하루밤은 있었는데 이제는 80분이라니, 연인에게 너무 가혹하다. 영화는 80분 동안 벌어지는 사건들을 실제로 80분에 담아낸다.

둘은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 받는다. 사소한 수다에서부터 환경문제, 미제국주의 문제, 책이야기, 그날밤 이야기 등 이들은 너무나도 할 말이 많다. 결국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유람선을 타고 셀린느의 집까지 가게된 제시는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혼했지만 그저 그런 삶인 제시는 셀린느와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셀린느 역시 다른 남자들과 만나보곤 했지만 그날 이후의 사랑은 그녀에겐 사랑이 아니다.

한마디로 평하자면 '말만 하다 끝나는 영화'다. 정말 이 영화에는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말'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말'이란 것이, 그냥 단순한 '수다'가 아니라 이들의 지난 9년동안의 삶과 그들이 만났던 하루동안의 일에 대한 서로의 탐색전이며, 변화된 서로의 모습을 감지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들의 '말'은 다분히 철학적이고 사색적이다.

"사람은 누구나 각 개인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본다"(제시)
"아픔이 없다면 추억이 아름다울텐데..."(셀린느)
"그 날 밤 내 모든 로맨티시즘을 다 쏟아 부어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셀린느)
"난 지금 누가 건드리기만해도 허물어질 거 같은 마음이야"(제시)

이 영화를 보는데 있어 중점사항은 이들의 대화를 통해 나와 소통하라는 것이다. 철학자 딜타이는 '타인의 자서전'을 통해 자기자신을 이해하는 해석학을 내놓았다. 타인이 쓴 그의 자서전을 읽음으로써 나를 알아갈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영화는 일종의 '타인의 자서전'이다. 영화를 통해 나의 사랑학에 대한 이해로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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