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다 죽어라 - 눈 푸른 외국인 출가 수행자들이 던지는 인생의 화두
현각.무량 외 지음, 청아.류시화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8년 1월
절판


살아 있는 것은 어느 것이나 반드시 죽음을 맞이한다. 모든 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해 깨달음을 이루라. -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 -5쪽

삶에 더 깊이 들어가고, 진정 열심히 시도하고,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것은 변화한다. 삶의 한순간도 멈춤이 없이 흐르며, 어떤 것도 변화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생멸하는 이 모든 것 뒤에는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해야만 한다. 각각의 순간을 깊이 있고, 행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깨어 있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몸 안에서 몸을 관찰하고, 느낌 안에서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 안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것, 그것이 곧 수행의 길이다. (청아, 류시화) -10쪽

모든 것은 변화한다. 이 육신도 세상에 왔지만 세상으로부터 사라질 것이다. 고통은 그 변화를 막으려고 하는 데서 온다. 우리가 생각으로 만들어 내는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무상한 것이다. 그것들에 집착할 때, 그것이 무지이고, 고통의 원인이다. 하지만 생멸하는 이 모든 것 뒤에는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파란 하늘에는 구름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온갖 변화가 일어나지만, 그 뒤에 항상 존재하는 그 무엇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현각)-11쪽

"사실 무지란 이 세상이 무상하다고 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여러분이 '이 세상은 무상하다.'라고 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어떤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때 여러분은 사물과 돈, 권력, 명예, 명성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뿐 아니라, 나아가 여러분 자신의 생각으로 만든 세상까지도 영원히 곁에 둘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이 숭산 스님께서 실제로 의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으로 만들어 내는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무상한 것입니다. 모든 생각, 모든 견해, 모든 느낌, 모든 조건, 그리고 모든 관념들은 본질적으로 다만 무상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에 집착할 때, 그것이 곧 무지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느낌, 나의 견해, 나의 정체성, 그 모든 것이 무상합니다. 그 모든 것은 실체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텅 비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순간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그것들에 집착할 때, 그것이 곧 무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관점입니다. (현각)-19-20쪽

고통은 생각에서 나오는데, 지금 세상에는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집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무지란 다만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생각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 실체라고 믿거나, 내 생각은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거나, 내 생각이 영원하며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을 때, 그것이 무지이며 그래서 그런 문제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현각)-25쪽

생과 사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매 순간 깨어 있고, 매 순간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간단한 진리이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인간 상황이다. 우리는 단지 이 몸, 이 무상한 수레, 어느 날엔가는 우주로 돌아가게 될 이 렌터카를 만족시키기 위해 생을 소비하고 있다. 하지만 만일 잠에서 깨어나 '참나'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이 렌터카를 우주에게 돌려줄 때가 되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때는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죽을 때는 죽을 뿐이다. (명행)-45쪽

삶에서 몇 번이나 진정으로 남을 위해 베풀었습니까? 일생에 몇 번이나 아무 주저함 없이 주었습니까? 비록 타인에게 베푼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 네게 무언가를 주었어.'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아니면 어떤 자선 단체에 베풀면서 '난 그들에게 많은 돈을 주었어. 난 그들에게 많은 음식을 주었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참된 베풂이 아닙니다.

참된 베풂의 의미는 거기에 주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으며, 또한 베푸는 물건마저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일생에 과연 몇 번이나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무엇인가 돌아올 것이라는 어떤 생각도 갖지 않고 진정으로 베풀까요? 매우 드물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상으로 무엇인가를 기대합니다. (중략)

실제로 이것이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일반적인 태도입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고 난 다음엥는 그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다니는가, 또는 지니고 있는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는 "아! 그건 내가 준 시계다! 저건 내가 선물한 차야! 네가 내 차를 아직도 운전하고 있다니 믿을 수 없구나." 하고 말합니다. (명행)-66-67쪽

"자신을 돕는 일과 남을 돕는 일은 새의 두 날개와 같다." (원효)-69쪽

"내려놓으라! 그대의 의견, 그대의 조건, 그대의 상황을 모두 내려놓으라! 지금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순간순간 행하라! 그대의 올바른 상황, 올바른 관계, 올바른 역할을 따르라." (숭산)-73쪽

늘 더 갖기를 원하고 더 좋은 거을 원한다면, 언제나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왜인가? 더 갖기를 원하고 더 좋은 것을 원하는 마음은 그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갖고 싶어서 밖을 기웃거리는 마음은 불안한 마음, 혼란스러운 마음이다. 반면에 내면에 만족이 있는 마음은, 마음이 모든 것을 지니고 있음을 아는 마음은 언제나 평화롭다. 이런 마음 상태에서는 무엇이 일어나든 집착할 것이 없음을 이해하며, 그런 사람에게는 고통이 없다. (텐진 위용) -77쪽

죽음의 순간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살아 있는 동안 키워 온 자비, 사랑, 만족, 마음의 평화 같은 긍정적인 것들이다. 이것들만이 죽음의 순간에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즐거움의 순간, 즐거움의 기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순간에도 그 안에는 고통의 씨앗이 담겨 있다. 또한 인간 존재는 단순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 속에 있다. 자비는 우리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한다. 자비는 생명 가진 존재들이 겪는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이 무지를 제거하려는 염원이다. (게셰 툽텐 룬둡)-115쪽

인간은 언제나 희망, 욕망, 혹은 바람을 지닌 채 계속 앞으로만 달려간다. 이것이 인간 삶의 방식이다. 언제나 달려가지만 최종적인 만족이란 없다. 좌절과 고뇌만이 있을 뿐이다. 소원이나 욕망을 이루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욕망은 이미 조금 더 앞서 간다. 우리는 또 다른 것을 얻으려고 할 것이며, 이런 악순환은 계속된다. 그때 늘 불만족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모든 즐거움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파나 완사)-140쪽

"그 누구도 위대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그 누구도 고구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천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의 행위에 따라 고귀하게도 되고 천하게도 된다." (붓다)-155쪽

고통의 원인은 마음속 집착과 갈망이다. 감각적 쾌락은 중독성이 있으며, 즐겁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그곳으로 가게 된다. 자꾸만 그곳으로 간다는 사실 자체가 고통이다. 금방 끝나 버리는 그 경험들로부터 쾌락을 얻기 위해 습관과 중독성을 키우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즐거울지라도, 실제로는 훨씬 깊은 불만족을 불러일으킨다. 평화와 기쁨을 경험할 다른 길이 없다면, 우리는 외부에 존재하는 이런 것들에 의존하게 되고 그것에 걸려들게 된다. (아잔 지틴드리야)-171쪽

보석을 물속에 떨어뜨리면 정신없이 물속에 들어가 그것을 찾으려 할 것이며, 배가 고프다거나 피곤하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끝내 찾지 못하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신경 쓰지 말자. 보석을 되찾으면 그만이고, 찾지 못한다 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고 나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보석을 포기하는 그 순간이 매우 중요하다. 만일 계속해서 잃어버린 보석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단지 고통을 더하고 있을 뿐이다. (아잔 차) -204쪽

자유의 상태에 머문다 해도, 그 상태에 아무리 오랫동안 머물더라도, 결국 고통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어떤 상태, 어떤 장소, 어느 순간에도 중단하지 말고 순간순간 명상하라. 일상의 작은 나를 따르지 말고, 단지 행동하라. 매 순간 앉아 있든 서 있든, 걷든 누워 있든, 말하든 침묵하든, 그 어떤 상태, 어떤 장소에서도 중단하지 말고 명상하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역시 분명해질 것이다. 그때 우리의 삶이 곧 우리의 수행이 된다. (무심)-205쪽

이 세상의 어떤 기쁨이든지 다른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이 세상의 어떤 고통이든지 모두 자기 자신만 행복해지려는 욕망에서부터 시작된다. (티베트 잠언) -234쪽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왜 하필이면 나이지?' 하고 불평하지 말라.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결과가 돌아오는 것이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친구가 마침내 도착한 것처럼. 지난날 내가 쌓은 업이 현재의 나를 이 상황에 몰아넣는 것이다. 이 업은 생의 시작부터 우리와 함께 해오고 있으며, 전생들로부터 계속되고 있다. 불행한 상황이나 환경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스스로 원인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행복을 바란다면, 타인을 소중히 하라. 바른 원인을 만들라. (텐진 데키)-235쪽

존재의 본성은 다름 아닌 고통입니다. 물론 이곳에 존재하는 한, 공통된 망상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날 것입니다. 저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아플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 주변의 사람들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 곁을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좋든 나쁘든 제가 쌓은 업의 결과를 경험해야 합니다. 고통을 중단하려는 굳은 의지를 키워 나가면서 존재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때 저는 그런 사실들을 깨닫게 됩니다. 고통의 한 가지 좋은 점은 자만심을 없애 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만심이란 과거사의 재발생이기 때문입니다. 자만심이란 특히 자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나는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며, 남보다 나은 사람이며, 훨씬 중요한 존재다.'라고 하는 감정입니다. 흔히 자만삼이란 부풀려진 에고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에 사로잡혀 있는 에고는 매우 나쁜 것으로, 마치 부풀어 오른 풍선과 같습니다. 티베트 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계속)
-246-247쪽

(이어서)

"당신에게 바람을 잔뜩 불어넣은 풍선이 있는데, 거기에 어떤 액체를 부으면 풍선 표면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풍선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만심을 갖는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큰 장애이다. 우쭐대면, 귀 기울여 들을 수 없다." -247쪽

"이기적이 되고 싶다면 지혜롭게 이기적이 돼라. 그대 자신의 행복을 바란다면, 타인을 소중히 하라. 바른 원인을 만들라. 그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그대의 행복의 원인이 아님을 알라." (달라이 라마)-257쪽

모든 것이 변하고 또 변한다. 그러나 겉모습은 바뀌지만, 모든 것이 같은 본질을 지니고 있다. 이름과 형태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같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살아 있는가? 무엇보다 삶의 방향이 명확해져야 한다. 이것은 곧 명상을 의미한다. 명상은 우리로 하여금 내면을 보게 하고, 우리의 생각 습관으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갖게 한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평화와 자유를 얻는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무량)-265쪽

이 순간을 산다는 것은 진정으로 깨어 있는 것이다. 현재에 있음을, 깨어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의 습관에 물들지 말라. 진정으로 새롭게 산다는 것은 과거의 경험으로 판단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옛 생각을 끄집어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곧 자유이다. 지금 당신은 살아 있다. 자유로워질 기회가 있다. 그 기회르 놓치지 말라. (무진) -301쪽

수억 겁 동안 반복해 온 수맣은 습관들은 우리의 마음 상태를 나쁘게 한다. 첫날에 생선은 신선하지만, 생선을 며칠 동안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닌다면 그 생선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할 것이다. 굉장히 나쁜 냄새가 날 것이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나 체험한 것을 내려놓지 못하면, 이것들은 자신을 오만하게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알고 있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러한 것들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곧 마음의 수행이다. (청고)-329쪽

여러분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남길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은 집이나 아파트가 아니고, 상속 재산도 아니며, 많은 액수의 현금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참성품에 대한 지식일 것입니다. 항상 자기 자신의 참성품에 귀의할 수 있는 습관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만일 여러분이 스스로 수행하고 계신다면, 아이들에게 참성품에 대해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대단히 영리합니다.

어떤 살마들은 말하기를,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가장 많이 배운다고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가장 많이 배웁니다. 만일 여러분이 정말로 진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의 아이들 또한 잘 성장할 것입니다. 아이들 또한 부모의 수행을 보고 배울 것입니다. 단지 작은 배려와 몇 마디 조언으로 아이들 또한 이런 수행에 대해 배울 것입니다. -344-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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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촌수, 변화하는 인간관계 SERI 연구에세이 71
김유정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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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면대면 접촉 및 교류에 의한 인간 네트워크의 결속력에 의해 형성, 유지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온라인을 통한 관계도 이에 못지않은 친밀도를 형성할 수 있으며, 특히 높은 친밀도가 요구되는 가족, 친구, 친지 관계도 온라인 접촉(연결)과 교류를 통해 한층 더 돈독하게 유지되고 있음이 여러 연구와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이것은 인터넷이, 면대면 접촉과 유사한 친밀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사회적 정보 전달과 습득에 적합한 것으로 알려진 인터넷상에서, 이용자들은 적극적으로 자아 표현을 하여 상호간의 긴밀한 유대감을 쌓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과 같이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직접 대면해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보다, 업무상 자주 이용하는 인터넷을 통해 교류하는 것이 더 편리할 것이다. -19쪽

비동시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동시적 커뮤니케이션을 이용하는 사람에 비해 메시지를 착안하고 구상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하지만 비동시적인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에, 같은 시간대에 의사 교환을 하기 위한 즉각적 반응에 대해 의무감을 갖지 못할 수 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드시 같은 시간대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동시적 기능은 양자가 각자 편리한 시간대를 활용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유용하지만 제한된 시간 내에서 상대방의 반응을 기대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어서,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효율적인 상호 교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40쪽

(온라인의 특징을 언급하며) 첫째, 서로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의견 교환이 그만큼 솔직하고, 주고받는 주제나 내용에 보다 정확하게 접근할 수 있다. 둘째, 참여자들은 좀더 자기중심적이 되어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주로 교류를 진행한다. 셋째, 의사 교류를 하는 데 특정 개인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보다 자유로운 상황에서 전개된다. 넷째, 교류 과정을 특정인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경우가 적어서 보다 평등한 참여가 보장된다. -45쪽

비록 익명이지만 서로 진실로 대하는 것이 관계 유지를 위한 최선책이다. 익명 상태를, 거짓말을 해도 되는 상황으로 잘못 인식하면 안 된다. 익명 상태란, 가면 속에 실체나 진실을 감추고 거짓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체를 동원한 자아 노출이 아니라 텍스트에 의한 자아 노출인 것이다. 그러므로 표현한 텍스트가 곧 자신이 되는 것이다. -49쪽

사이버 공간에 참여하는 모든 이용자들은 하나의 똑같은 현상으로 인식되어 모두 동질적인 개인으로서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참여한닫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다. 즉, 모든 사람들이 사이버 공간에서는 텍스트상으로 똑같은 기호와 조건을 갖는 동등한 대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이버 공간이 지각적 사실주의에 의해 주도되기 때문이다. 지각적 사실주의는 실제로 제시되는 것에 따라 느끼기보다는 표현된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근거로 판단한다. 그래서 사이버 공간에서는 텍스트에 표현된 개념적 해독에 의한 상호 간의 인식에 충실하기 때문에 가시적인 형상에 의한 전형화되고 차별적인 지각을 방지할 수 있다. -63쪽

현실 속의 각 개인은 무리를 짓거나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지만 기기에 의존하여 관계가 맺어지고 통제되므로 스스로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한다. 즉, 각자에 대한 '자급자족'의 개념이 강화된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자연히 내가 구축하는 관계망을 통해 형성된다. 그 관계망에서 내가 무엇을 얼마나 주도해나가는가, 또는 내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가에 따라 그 관계의 의미가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관계는 개인이 형성한 관계망 차원에서 논의될 것이다. 예컨대 관계망이 확장되었는지 혹은 축소되었는지에 따라 한 사람의 인간관계가 어떤지를 평가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에 따라 개인 중심적인 성향은 증가하고 개인 간의 연락을 위주로 하는 통신 미디어가 더 많이 출현하고 발전하여 개인 중심적인 사인주의는 더 가속될 것이다. -107-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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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하는 진보
지성사 / 2008년 3월
절판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17쪽

보수 진보진영이 우리 사회의 발전 방향에 대해 의견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므로 자신의 정치사상을 표현하고 반대 정파에 대해 비판할 자유가 있다. 그리고 사상의 좌우를 떠나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가 국가안보나 사회질서에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일으키지 않는 한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의 일환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김 의원이나 반공집회를 주도한 인사들도 자신의 정치적 기본권을 행사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최근 사태를 보면서 현재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이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지 묻고 싶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지만 그들이 지키는 민주주의는 친미와 반공의 틀에 갇혀 버린 민주주의가 아닌지 의문스럽다. 북한을 타도의 대상으로만 보고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비웃는 것이 진정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전체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일까.

친미와 반공의 틀을 벗어나려는 일체의 사상과 활동에 대해서 무조건 빨갱이, 좌경, 친북주사파라고 낙인을 찍고 비판하는 것은 참으로 품격이 떨어지는 정치선동이다. -53-54쪽

민주화로 '입'은 자유로워졌지만 '배'를 주리는 사람, 희망을 잃은 사람이 상존한다면 민주화는 반 토막의 의미만 가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의 사회 분위기는 성장, 경쟁, 효율만 숭앙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런 현실은 칼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의 유령" 또는 자크 데리다가 말한 "칼 마르스크의 유령들"을 불러내거나, 정반대로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스스로 복속하는 대중에 기초해 운영되는 "대중독재"로 가는 단초를 열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를 말할 때 '사회 경제적 민주주의'를 말해야 한다. -65쪽

인권보호는 반드시 일정한 사회적 비용과 부담, 그리고 다수자의 개인적 손실이 수반된다. 이를 체득하지 않고 인권을 말하는 것은 사탕발림의 '립 서비스'일 뿐이다. 다수자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고 불편함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소수자의 인권이 보장된다면 그것은 결코 인권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다수자의 성찰과 관용이 요구된다. 로널드 드워킨의 표현을 빌리며, 이 점에서 우리는 인권을 "강한 의미로" 파악하고 더욱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105쪽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병역거부에 대한 신념의 진지함과 철저함이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상황에서, 국가가 병역법이라는 실정법을 이유로 무조건 이들의 신앙과 양심을 포기하라고 강제하는 것이 정당한지 의문스럽다. 이런 '소수자 집단'의 상황을 무시하며 법률을 기계적으로 집행하기보다는 그들의 신앙과 양심을 존중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봉사할 기회를 주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일 것이다. -120쪽

이들 국가(영국, 덴마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는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이지만 다수의 지배라는 이릠하에 소수자의 양심과 신념을 무시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며, 국가존립을 위한 핵심적 사안인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소수자 집단의 양심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121쪽

(사형제에 관해) 시민을 살해한 범죄인에 대한 피해자와 사회의 분노가 범죄인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본능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제도로서의 사형은 오판 시 돌이킬 수 없는 오류를 만든다는 점, 사형을 통한 범죄억제 효과가 의심스럽다는 점, 우리 현대사에서 경험했듯이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복수로 사용되기 쉽다는 점 등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본능'의 직접적 표출은 순치되어야 한다. -135쪽

공소시효는 형사정의를 실현하는 데 정의가 법적 안정성에 양보한 결과 생겨난 제도이다. 이 제도의 존재 이유는 범행 후 긴 시간이 지나 증거가 멸실되어 진실 발견이 어려워지고, 범죄인 자신도 그 기간에 형벌 같은 고통을 받았으며, 범인의 법적 사회적 안정도 존중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그리고 공소시효가 종료된 후 소급적으로 연장하는 법률은 자신의 안전에 대한 시민의 기대를 뒤흔드는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법학계 일각에서는 반인권적 국가범죄에 대한 공소시효의 정지,배제를 반대하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국가기관이 살인과 고문 등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뿌리째 부정하는 범죄를 자행하고 은폐한 행위를 처벌하는 데도 정의가 법적 안정성에 양보해야 하는가. 헌법의 기본 이념과 시민의 기본권이 국가권력으로 침해되고 조직적으로 은폐, 조작되는 특단의 사정이 있는 경우에까지 '정의'의 양보를 주장할 수는 없다. -140-141쪽

그러면 도대체 고문은 왜 일어나는 것인가? 먼저 고문은 국가가 특정한 집단의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예컨대 테러리스트, 좌파혁명가, 간첩, 중범죄인 등 의심을 받는 사람은 국가와 사회에 위험을 초래하는 '불순분자'로 간주된다. 그리고 불순분자들의 범죄 혐의와 위험성은 왜곡, 과장되고 이들에 대한 인권존중은 사치스러운 군더더기로 취급된다.

이들에 대한 고문과 가혹 행위는 국가안보나 진실 발견의 명분 아래 행해지며, 인간 본성에 숨겨진 야수성은 고문과 가혹 행위의 강도를 높이게 만든다. 이들이 무고한 시민일 수 있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불순분자들의 인권을 따지는 자는 반국가적 의도를 가진 수사의 훼방꾼이나 범죄인들의 동맹자로 취급된다. 특히 국가 지도자와 정부가 고문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원칙을 슬그머니 방기하고, 고문도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하다는 악마적인 말에 귀를 기울일 때 고문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법이다.
-151-152쪽

주권자는 검찰이 '죽은 권력'을 무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이른바 '성역'으로 뛰어들어가 자신의 외뿔로 '살아 있는 권력'을 치받는 해치일 것을 요청한다. -185쪽

시민사회의 다양한 구성과 이념적 가치를 반영하는 인사원칙이 필요하다. 기존의 법원논리에 충실한 고위 법조 엘리트만으로 최고재판소가 구성된다면 사회분쟁은 특정한 경향에 따라 해결될 소지가 높다. 물론 고위법관 중에는 개방적 자세로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수용하며 소신 있는 판결을 내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법부의 중요한 임무가 사회 경제적 약자의 보호라는 점을 고려할 때, 앞으로는 '소수자'의 입장을 일관되게, 전면적으로 대변할 대법관과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많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계급, 계층, 집단의 이해관계의 충돌을 법적으로 종결하는 곳이 최고재판소라고 할 때, 최고재판소의 인적 구성은 이념, 출신배경, 성별 등에서 '다양성'을 갖추어야 한다. -190-191쪽

시민의 재판참여는 재판 과정의 투명성을 높여 법관과 검사의 권한 남용을 견제할 수 있고, '전관예우' 등의 관행이 봉쇄되어 재판 결과에 대한 시민적 신뢰가 높아져 재판의 정당성을 고양시킨다. 특정한 교육과 계층적 배경을 가진 직업법관이 재판을 독점하지 않고 일반 시민의 법의식과 법감정이 판결에 반영되면 참여시민은 재판 과정의 주체가 되어 주권의식이 높아지며, 준법의식도 고양된다. 그리고 배심재판에 참여하는 법률가들은 법률전문가가 아닌 배심원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과 논리를 사용해 재판을 진행해야 하므로, 배심재판은 현재 법조계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권위주의 문화를 불식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193-194쪽

재판참여는 민주사회에서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재판참여를 통해 시민은 사법의 주인이 될 수 있으므로 이를 회피하는 것은 주인됨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다.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가 긴요한 시기이다. -194쪽

"불가능한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견디며, 어느 용사도 감히 가려 하지 않는 곳으로 달려가고, 잡을 수 없는 별을 잡으려 하는 것이 진정한 기사의 의무, 아니 특권이다." (돈키호테)-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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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왕국의 게릴라들 - 삼성은 무엇으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가
프레시안 엮음, 손문상 그림 / 프레시안북 / 2008년 2월
품절


하긴 '내가 무능한 변호사'라는 지적은 옳다. 사건 의뢰인을 만날 때, 나는 어차피 받아야 할 벌이라면 받으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런 이야기에 대해 승복하지 않는 의뢰인도 있다. 이걸 두고 "김용철은 형편없는 변호사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잘못에 정확히 상응하는 벌을 받을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진정한 변론이라고 생각한다. 삼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잘못 이상의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잘못만큼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김용철 변호사) -41쪽

이건희 씨가 저지른 악행은 다른 것이 아니다. 좋은 인재들을 모아 놓고 무뇌아로 만든 것이다. 돈에 홀려서 생각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는 피눈물 나게 만들었다. 돈은 아름다운 노동을 통해서 거룩한 소비 과정을 거쳐야만 건강한 순환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아름답게 일하도록 허락하지도 않고 거룩하게 소비하도록 허락하지도 않는다. 비자금이라는 검은 돈을 만들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해고했다. 재투자나 사회복지에 돌아가야 할 이윤에다 빨대를 대서 개인이 착복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착복의 부스러기를 갖고 국가의 인재를 포섭하고 오염시킨 것이다. 그럼 국가 경쟁력은 어디로 가겠나. (문규현 신부)-102쪽

사목은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주고 축하하며 궂은 일이 있을 때는 함께 슬퍼하고 눈물 흘리고 장례식에서는 장지까지 쫓아가주는 것이다. 그런데 김용철 변호사 일은 궂은 일이기 때문에 간 것이다. 김 변호사가 자신이 털어놓는 진실을 받아주는 데가 없어서 사제단까지 찾아왔는데, 사제단마저 모르쇠해버리면 이 사람을 버리는 것이다. 불쌍하고 슬픈 영혼 찾아왔는데 어찌 외면하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앞으로 내가 기쁜 일에만 가길 원하면 그렇게 하겠다. 양탄자 깔린 레스토랑에만 가겠다. 힘들거나 억울하거나 눈물 날 때 날 찾아오지 말라. 나는 희희낙낙하는 사람들과 즐기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다. 내 사목의 방향을 여러분이 정하라고 했다. (문규현 신부) -106쪽

우리는 지는 데 익숙하다. 외로운 데도 익숙하다. 아무리 소리치고 머리 깎고 굶어도 사회는 꿈쩍도 안 한다. 우리는 열매를 보고 하는 게 아니다. 봄인 됐으니 씨 뿌리고 밭을 가는 것이다. (문규현 신부)-107쪽

사법부, 즉 법원의 구조 개혁도 필요하다. 대법관까지 지내고 변호사 개업을 하면 1-2년 사이에 100억원 이상 돈을 번다고 한다. 아예 대법관을 평생 하도록 하든가, 대법관이 된 이후에는 변호사 개업을 할 수 없게 해서 전관 예우의 뿌리를 뽑게 해야 한다. 사법부의 권력화 배경에는 전관 예우라는 뿌리 깊은 악습이 있다. 전관 예우를 뿌리 뽑아야 이런 떡값 검사니 떡값 판사니 하는 얘기가 안 나올 것이다. 전관 예우를 선호하는 기업들이 있기 때문이다. 삼성이 검사와 판사를 영입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노회찬)-177쪽

1. <한겨레>신문이 삼성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쓴 기사를 전부 스크랩해서 다른 신문이 보도한 것과 비교해보고 이것을 <한겨레>측에 보여주고 설명해줄 것. 이런 것을 근거로 광고도 조정하는 것을 검토해볼 것. [2003.10.18(토) 동경]

2. lG가 해외에서 덤핑을 일삼는다 하는데, 제대로 하면 몇조 이익이 날 것이어서 국가적으로 손해고 전부 같이 망할 수도 있다는 여론을 만들어 볼 것. 경제 담당 기자나 교수를 시켜서 삼성, LG 의 이익 등을 비교해 홍보하고 이게 얼마나 손해인지 여론을 조성해볼 것. [2003.12.12(금) 보광]

(이건희 회장 지시사항) -240-241쪽

"(기자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 '오프더레코드'란 없다. 언론과의 싸움은 백전백패. 베스트 초이스=홍보팀으로 문의하세요" (삼성전자 신입사원 교육자료)-241쪽

2000년 8월 27일 <한국일보> 가판에 실린 박진도 교수의 칼럼 '아침을 열며 - 재벌 불법 세습은 그만' 이 배달판에서 삭제되었다. 박진도 교수의 칼럼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부자의 불법 세습을 거론하면서 "재벌들이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좌지우지하면서 변칙적으로 세습하고 있다"는 취지로 쓰여졌다.

당시 <미디어오늘>(2000.8.31)은 박 교수의 칼럼 삭제 배경과 관련해 <한국일보> 안팎에선 광고주인 재벌, 특히 삼성의 입김을 의식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름철 광고난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거대 광고주인 삼성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칼럼을 삭제했다는 것이다. (이상호 기자)-245쪽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고발 기사를 쓰면 항상 마지막에 고발 대상이 찾아와서 돈이 든 쇼핑백을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돈을 받고 영원히 우리의 친구가 될래, 아니면 민형사상 소송 등 '우리와 평생 적이 될래?'라고 물으며 거래를 제안한다.

그때 돈보다 더 탐나는 것은 모든 편의를 줄 수 있는 단체가 제공할 유무형의 편익이다. 정말 달콤한 거다.

삼성은 30만 원, 300만 원이 아니라 삼성과 관련해 전화 한 통이면 일이 해결될 수 있을 정도의 편익을 기자들에게 줬을 거다. 사업, 일신상에 관련된 편익을 줬을 거다. 삼성문화재단을 포함해 대한민국에서 모든 편익을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걸 갖고 있는 편의점인 거다. 대한민국에서 모든 편의 시설을 만드는 회사인 거다. 막대한 재화의 공장이 줄 편익을 생각하면 돈은 새 발의 피라고 본다. (이상호 기자)-282쪽

사실 삼성과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이 삼성과의 싸움을 자조적으로 '계란으로 바위 깨기'에 비유한다. '그래도 바위에 계란 썩은 내라도 나지 않겠나, 바위가 썩었다는 건 알릴 수 있지 않겠나'라며. 그런데 김용철 변호사가 양심선언을 하면서 '이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양심수 김성환) -322쪽

(이건희 회장에게)

빨리 양심선언 하라. 그게 살 길이다. 우리가 당신을 죽이자고 이러는건 아니니까. 빨리 양심선언을 해서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이정도 되는 재벌이 있었다' 그렇게 긍정적인 얘기를 할 수 있게 하고, 그걸 토대로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자.

노사 갈등이 꼭 나쁜 건 아니다. 그런데 삼성에서는 그 자체가 범죄 수준이다. '페어플레이' 하자는 얘기다. 납치하고, 끌고 가고 하지 말고... 그러면서 건설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이 됐으면 좋겠다. (양심수 김성환)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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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처음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미 논쟁의 열기가 다 식어버린 시점이었다. 고종석에 대한 관심은 복거일로 옮겨갔고, 복거일에 대한 관심은 그로부터 시작된 영어공용화론으로 옮겨갔으며, 이 논쟁에 참여한 학자와 지식인들이 쓴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언어'는 내 안에 들어왔다. 영어공용화론에서 이제는 전 세계 언어의 생성과 사멸에 대해 생각한다. 범위는 넓어졌고 관심은 깊어졌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은 이와 같은 관심에서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예전에 읽었던 <언어의 죽음>이라는 책과 매우 닮아있다. 논지 전개 방식이며 담아내는 내용까지. 

  <언어의 죽음>에서 데이비드 크리스털은 전 세계의 언어 분포를 보여주면서, 지구상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 수와는 별개로, 수많은 부족들이 존재하고, 부족들의 수 만큼이나 많은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언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이며, 그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로부터 뻗어나간 호기심은 그렇다면 언어가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에 맞춰진다. 그는 그 원인을 두 가지로 요약하는데, 하나는 자연재해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문화흡수현상 때문이라 한다. 태풍이나 지진, 해일에 의해서 언어사용자가 사라짐으로써 자연스럽게 언어 또한 소멸을 맞이하는 것이 첫번째, "한 문화가 좀 더 지배적인 문화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특성을 잃어 가기 시작하면서, 결과적으로 구성원들이 새로운 행동 양식과 습속을 받아들이"며 언어가 사라지는 것이 두번째에 해당한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의 저자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이 말하는 언어의 소멸과정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이러한 멸종이 대개 인간의 개입과 관계없이 발생했지만 이제는 인간의 개입을 통해, 특히 인간이 환경을 바꾸어 놓음으로써 유례 없는 규모의 멸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p39) 데이비드 크리스털과 마찬가지로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은 자연재해에 의한 언어의 소멸보다는 인간의 개입을 통한 환경 변화에 의한 언어 소멸에 주목한다. 자연재해에 의한 언어소멸은 우리가 막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만, 후자는 분명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백한 '언어 살해'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의 저자들은 이러한 언어 살해의 원인을 좀더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오독한 것 아니라면, 저자들이 말하는 언어 살해는 분명 후자에 가깝지만, 전자와 무관하지 않다. 자연 재해로 인한 언어 소멸은 환경의 변화가 곧 언어사용자의 감소로, 그것이 또 결국 언어의 소멸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들에 따르면 현재 언어는 환경에 의해, 생태계의 붕괴로 인해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이 말하는 언어의 소멸 과정은 문화흡수현상보다는 자연재해에 의한 소멸과정과 닮아있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순수하게 자연에 의해서 언어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인간이 개입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에 의해 생태계의 붕괴가 일어나고, 생태계의 붕괴는 결국 언어 사용자의 감소와 언어의 소멸로 이어진다.

  "보다 큰 그림에서 볼 때, 언어들의 멸종은 전 세계적인 생태계 붕괴 현상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소위 생물언어적 다양성의 위기가 발생하게 된 이면에는, 인간이 지구 생태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오류가 있는 것이다."(p39)

  언어는 분명 죽어가고 있다. 저자가 인용한 <민족담화>에 의하면 "전 세계의 90퍼센트가 가장 많이 쓰이는 백 개의 상위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최소한 6천 개 정도의 언어를 세계 인구의 10퍼센트에 불과한 수가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 나머지 언어들은 어디로? 결국 시간을 두고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고종석씨에 따르면, 언어는 감염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이 신라나 조선시대의 것과는 분명 다르고, 그 당시의 사람들이 살아돌아온다해도 우리와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말뿐 아니라 글도 안 통한다. 그렇다면 굳이 어떤 언어가 자연스럽게 감염되고, 어떤 언어가 자연스럽게 사라져 가는 현상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언어의 감염'과 '언어의 (인위적인) 소멸'을 동일시 했기 때문이다. 언어는 분명 감염되는 것이 맞다. 몇 십년전의 한글 맞춤법과 지금의 한글 맞춤법이 같지 않듯이, 지금의 한국어는 계속해서 감염되고 변화하고 몇십년 후에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의 '인위적인 감염'(감염은 엄밀히 인위적일 수 없다는 생각이다. '감염'이라는 말 자체에 자연스러움이 내포되어 있다.)을 자연스러운 감염과 구분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언어가 변화해가고, 사라질 운명이라면, 그것을 막는 것이 도리다.

  분명, 한국어는 세계 10대 언어 중 하나로, 수십년이 지난 뒤에도 생존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언어가 사라질 예정이 아니라고 해서 현재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언어 살해 행위를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언어가 사라진다면 수십 년 뒤에는 한국어가 멀쩡히 살아있을지 몰라도, 수백년 뒤에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지금 당신이 살아있은 동안에는 적어도 소멸할 일은 없다, 고 말하시는 분께는 더 말 할 가치를 못 느낀다. 라디오 프로그램 중 '전통의 소리(?)'에서는 지금은 들어보기 힘든 옛 가락과 옛 소리를 할 줄 아는 분들을 찾아다니며 녹음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먼 미래에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아 녹음을 하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왜 언어를 지켜내야 하는가. 책을 읽다보면 그런 의문이 생긴다. 언어가 소멸되면 다른 언어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한국어를 못하면 영어를 하면 되지 않을까. 영어가 또 세력을 잃으면 중국어나 일본어를 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런 맥락과 생각 없이 다양성을 위해서 언어 소멸은 안 된다고 구호를 외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다. 하지만, 언어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생존과 나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다.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나를 떠올려보라. 만국 공통어로 쓰이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면 그게 더 살아가는데 낫지 않냐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이 책의 저자의 목소리를 빌어 그 이유를 말한다.

  "인간만의 발명품인 언어는, 하나의 종으로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문화, 기술, 예술, 음악,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을 가능케 한 것이 언어였다. 모든 인간들이 축적해 놓은 풍요로운 지혜의 원천이 바로 언어이다. 기술은 다른 기술로 대체될 수 있지만, 언어들은 그렇지 않다. 각 언어마다 세계를 보는 자신만의 창이 있다. 모든 언어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며, 언어가 스스로 일구어 낸 모든 문화의 기념비와도 같다. 다양성의 상실을 막기 위해 무언가 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상황에서 다양성의 일부라도 잃게 된다면, 이는 우리 모두에게 손실을 안겨 주는 것이다. 더욱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를 가질 권리, 그 언어를 문화자원으로 보존하고, 자손들에게 물려줄 권리를 갖고 있다."(p34-35)

  사람은 물론 말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고, 필요하다면 다른 언어를 배워 다른 언어 공동체 내에서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단지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살아있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내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와 글이 없어졌을 때, 그것은 비단 언어와 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향유하고 있는 온갖 문화들, 예술, 책, 음악, 시 등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들까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아 힘들겠다, 는 생각이 들면,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지켜내면 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그리고 먼 미래에 당신이 처할 그 위기를 지금 겪고 있는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주면 된다. 그것이 당신이 '살아있음'을 계속 간직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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