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구판절판


그 시간의 공간적 표상이 바로 시계다. 근대적 시간은 시계에 의해 지배된다. 시계는 시간을 잘게 쪼개서 공간적으로 위치시켜놓은 기계다. 처음엔 시간을 표시하기 위한 도구였던 시계가 곧바로 인간의 신체를 지배하는 존재로 전도된다. 시계를 신체에 새기는 것이야말로 문명적 신체가 되는 첫번째 코스다. -40쪽

결국 문명과 비문명 사이의 경계는 시간을 얼마나 잘개 쪼개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어떤 태도로 전유하는가에 달려 있는 셈이다. 즉, 시간-기계 란 하루를 분 단위로 잘게 쪼개서 잘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시간이 곧 금 이라는 명제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43쪽

사이성이 사라진다는 건 대상과 대상 간에 확연한 위계가 설정됨과 동시에 주인과 노예의 권력관계가 구성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관계 안에선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노예는 물론 주인조차도. 인간과 우주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우주를 소유할 수 있되, 결코 그것과 함께, 혹은 그 속에서 공명의 춤을 출 수는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근대인의 시공간이다. -58쪽

근대 이후의 역사서는 구체적인 궤적에서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민족의 기원과 유래를 설정하고 그 웅대한 자취를 기술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때 역사란 신분과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경험과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하는 프로젝트에 해당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지적인 충돌과 차이들을 지우고 '국민'이란 이름으로 하나의 역사를 공통의 기억으로 전유하게 하는 것이 필요했다. 역사서술에서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사서적 통일성이 요청된 것도 그 때문이다. 연대기적으로 듬성듬성 나열되기보다 사건들 사이가 촘촘하게 이어지면서 주체와 동기들이 명료하게 부여되었다. 말하자면 하나의 완결되고 잘 짜여진 이야기로서의 역사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민족의 '대서사'로서의 역사, 이 대서사야말로 근대 민족담론에 피와 살을 입힌 장본인이었다. -68-69쪽

결국 근대 역사는 현재를 향해 달려오는 과거,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현재라는 단 하나의 평면만 존재하는 셈이다.
이 평면을 이끌어가는 척도가 바로 진보다. 미개와 진화, 야만과 문명의 차이는 결국 시간적 차이를 지칭하게 된다. '아직 이른' 좀더 늦은' 등의 언표들이 자연스럽게 쓰이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 그런 기준에 따르면, 역사가 진보한다는 건 앞의 시기가 뒤의 시기보다 열등한, 달리 말하면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성숙해지는 수직적 위계를 지닌다. -78쪽

노마드의 여정에는 목적지가 없다. 아니, 여정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해야 맞다. 따라서 그는 여정마다에서 마주치는 온갖 대상들과의 능동적 접속을 시도한다. -84쪽

동양적 사유에서 악은 기본적으로 불선(不善), 곧 선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악이란 결코 본래적으로 선에 대항하는 것은 아니며 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에 이름 붙인 것일 따름이다" -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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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13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군요.

이잘코군 2006-05-13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녀. 속독 했습니다. 음. 이거 지금 이 시점에서 제가 읽기엔 제가 부족한듯 합니다. 받은 책이니 서평은 써야겠고 해서 속독했습니다.

가넷 2006-05-13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려는데 제가 볼만한 책인지 모르겠네요..-_-;

이잘코군 2006-05-13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생각보다 쉽지 않군요. 어렵다기보다 정신이 없어요.

비로그인 2006-05-13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랑..전 이 책 리뷰써서 벌써 탱스투 2개 받았어요.

이잘코군 2006-05-13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방금 리뷰 올렸어요. 제겐 별 소득이 없었던 책입니다.

사마천 2006-05-13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집트의 술탄은 근대를 받아들이기 위해 오래된 오벨리스크를 주고 시계를 받았습니다. 지금 보면 우스은 거래지만 당시에는 상징하는 바가 컸습니다. 문장이 꽤 뛰어나군요. 한번 보아야겠네요.

이잘코군 2006-05-13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두번째 장이 전 재밌었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시간에 쫓겨 읽었기 때문인지 그닥 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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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 먼저 접한 <오만과 편견>은 소설 속에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아니 거꾸로 소설 <오만과 편견>이 영화로 그대로 재현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터이나, 내겐 영화가 먼저였고, 소설이 나중이었으니, 영화가 소설 속에 그대로 재현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터이다. 고전이라는 것은 이미 당대의 베스트셀러에서 오늘날의 스테디셀러로 변신을 거듭한 많은 이들로부터 검증받은 책이다. <오만과 편견> 역시 우리가 흔히 고전의 반열에 쉽게 올려놓을 수 있는 작품이지만, 이 책은 처음엔 출판이 힘들었다고 한다. 여기저기 퇴짜맞고 집구석에 오래묵혀두었다가 나중에 작가 제인 오스틴의 인생말엽에 가서야 대박 터졌다고 하니, 작품을 알아보는 이를 만나는 것도 '고전'의 조건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오만과 편견>은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연애소설이다. 근데 꽤나 긴 연애소설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주제는 남자와 여자의 탄생 이후부터 생겨난 케케묵은 진부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언제나 새롭다.사랑을 주제로 시를 쓰고, 사랑을 주제로 에세이를 쓰고, 사랑을 주제로 소설을 쓰고, 사랑을 주제로 노래를 만들고, 사랑을 주제로 영화를 만든다. 사랑은 인류가 망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써먹힐 소재다. 같은 '사랑'을 주제로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모두 같은 것이 아니다. 항상 새롭고 신선하다.

  <오만과 편견>은 제목에도 나타나 있듯 오만에 빠진 한 남자와 편견에 사로잡힌 한 여자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재력가이고 미남이지만 사람들에겐 오만방자하고 버릇없는 녀석으로 찍힌 다아시와 도무지 여성스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까칠한 엘리자베스. 활동적이며 자기주장 강해 할 말 다하는 지적인 여자다. 어려서부터 정식으로 가정교사에게 뭐 배운 것 하나 없어 피아노도 못치고 그림도 못그리고 당대 '우아한 여성'들이 갖춰야 하는 재능은 하나도 갖춘 것 없지만 성격하나는 화끈하고 깔끔한 여자. 딱 오늘날의 여성상이다.  

  오만한 남자와 까칠한 여자가 만났으니 처음부터 일이 잘 풀릴리 없지. 다아시는 그녀를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부터 딱 부러지게 말하고 활동적이고 밝고 지적인 그녀가 좋아졌고, 엘리자베스 또한 오만하고 예의 없는 신사답지 못한 다아시가 싫었지만 그의 진면모를 알게 된 후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만나면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툴툴 거리고 티격태격 싸우던 그들은 정말 '싸우다 정든다'는 우리의 옛말 처럼 순간 사랑에 빠져버렸으니 이를 어쩐다.

  소설은 매우 오랜 호흡에 걸쳐 두 사람의 감정의 변화를 다루고 있어 조금 지루한 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 티격태격 싸우는 꼴이 나에겐 너무나 재밌었다. 좋아하면 괴롭힌다. 어릴 때건 다 커서건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괜히 심술부리고 딴지걸고 장난치고 그런다. 그러면서 상대를 파악하고 좋아지면 사랑에 빠져버린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싸움은 내겐 그렇게 보였다. 서로 좋아하면서 마음을 숨긴채 정반대로 표현하는. 아유 귀여운 것들.

  반면 제인과 빙리의 사랑은 그저 지고지순한 사랑 그 자체다. <오만과 편견>은 오만한 남자와 편견에 빠진 여자의 사랑뿐 아니라 다양한 사랑의 유형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사랑 말고도 이 책에선 '제인과 빙리의 사랑' '콜린스와 샬럿의 사랑' 그리고 '위컴과 리디아의 사랑' 이렇게 세 쌍의 커플이 더 등장한다.

  제인과 빙리의 사랑 :  한 눈에 반해버린 사랑. 그러나 오래도록 지속되는 사랑. 순수한 두 남녀의 사랑. 제인과 빙리의 사랑은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지만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는, 눈으로 말하는 사랑. 두 사람은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나 사랑한다 말도 못하고 오랜 세월은 흘려보낸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 덕에 오해를 낳고 결국 오해는 이해로 변해 다시 사랑을 되찾긴 했지만 말이지. 정말 순수한 사랑.

  콜린스와 샬럿의 사랑 : 현실적인 사랑. 못생기고 키 작은, 외모로는 도저히 승부가 안되고, 게다가 성격까지 이상한(?) 그는 오직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교구 목사직이라는 직업을 통해 많진 않지만 평생 수입이 보장되고 명예도 가지고 있다. 나이들고 그다지 이쁘지도 않은 샬럿은 청혼하는 이 없어 노처녀로 늙어 죽을까 걱정하지만 콜린스로부터 청혼을 받고 바로 수락한다. 그의 명예와 돈을 보고서 선택한 결혼. 사랑하지 않지만 그녀는 현실을 택했다. 오늘날의 현실에서 많은 커플들이 이렇게 맺어지지 않을까. 서로 말은 안하지만.

"콜린스 씨는 똑똑한 사람도, 함께 있기에 즐거운 사람도 분명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지루했고, 그녀에 대한 그의 애정도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어찌 됐든 그녀는 남편을 갖게 될 것이었다. 남자나 혼인 관계 그 자체를 중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은 언제나 그녀의 목표였다.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겐 오직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대책이었고, 결혼이 가져다줄 행복 여부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해도 결혼만이 가장 좋은 가난 예방책임이 분명했다. "(p177)

  위컴과 리디아의 사랑 : 한 눈에 반한 사랑은 맞긴 맞는데 한쪽에서만 한눈에 반한 사랑이다. 다른 한쪽은 돈을 노린 사랑. 사기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여자가 남자를 열렬히 사랑하는 걸 어쩌랴. 그것이 사랑인지 열정인지 모르겠다만 좋아 죽겠다는데. 남자가 바람둥이인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여자가 그것도 용인할 수 있다면야 썩 나쁜 맺음은 아니다.

  수많은 커플들이 팔짱을 끼고 다니고 키스를 하고 귀에 대고 사랑을 속삭이며 그들 중 일부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공식평생커플로 거듭난다. 넌 내꺼야. 1700-1800년대의 영국사회의 시대상을 반영했다고는 하지만 소설 속에서 보여지는 사랑의 장면들은 지금의 우리네와 다르지 않다. 재고 따지고 오해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하는 모든 행위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어떤 커플은 순수한 사랑으로 맺어지고 어떤 커플은 평생의 경제적 여유를 택하며, 어떤 커플은 한 사람의 사랑으로 맺어지고, 어떤 커플은 원수에서 연인으로 변신한다. 사랑은 하나지만 사랑은 여러가지다. 이 세상 모든 커플들의 사랑은 모두 각각 다르다. 그들은 그들만의 사랑의 방식으로 사랑을 나눈다. 그 어떤 것이 거짓이고 그 어떤 것이 진실이라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소설 속의 커플들에게서 '제인과 빙리의 사랑'과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사랑'만을 진실된 사랑으로 뽑기 쉽지만 그건 우리의 사랑에 대한 또다른 편견.  그 어느 것도 거짓되다 진실되다 말할 수 없다.    <오만과 편견>은 사랑에 대한 많은 질문들을 던져주고 생각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소설에 드러난 네 가지의 사랑 방식 중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사랑'의 유형을 선호한다. 그들이 소설의 주인공이어서가 아니라 실제로 난 그런 사랑을 꿈꾼다. 내가 오만방자하고 거만하니 까칠하고 자기주장 분명한 여자 하나 구하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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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블 - 악의 역사 1, 고대로부터 원시 기독교까지 악의 인격화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영범 옮김 / 르네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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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본질은 감정을 가진 존재,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를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고통이다. 악은 정신을 통해 즉각 파악되고, 감정에 의해 곧바로 감지되며, 고의로 가해진 고통으로 느껴진다. 악이 존재한다는 데 더 이상의 증거가 필요치 않다. -13쪽

악을 이해하려면 개인에게 행해진 어떤 사건을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악을 즉각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 친구나 이웃들에게 아니면 개인적인 친분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행해진 악을 감정적으로나마 직접 경험한다. 악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16-17쪽

전통적으로 '자연발생적 악'과 '도덕적 악'을 구분하기도 한다. 자연발생적 악이란 토네이도나 암과 같은 '신 또는 자연의 파괴적인 행위'를 말하고, 도덕적 악은 인간의 의지나 여타 지능을 가진 존재에 의해 발생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나 진지하게 신이라는 개념을 숙고해보면, 그러한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신이란 다른 감정을 지닌 존재에 고난을 짊어지우는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23쪽

"아브락사스는 신성하고도 저주스러운 말을 하는데 거기에는 삶과 죽음이 동시에 들어있다. 아브락사스는 진실과 거짓, 선과 악, 빛과 어둠을 같은 말과 같은 행동으로 낳는다. 그래서 아브락사스는 끔찍하다"
(융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설법> ) -34쪽

악은 왜, 어떻게 인격화되는가? 가장 기본적인 답은 이렇다. 즉, 악을 외부로부터 우리에게로 침입해 들어오는 고의적인 악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격화된다는 설명이다.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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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 누가? - 철학 이야기 지식전람회 10
김주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6년 3월
절판


아테네를 비롯한 고대 희랍의 나라들은 다신교 전통에 서 있었다.
...중략...
희랍에 단일한 신이 없었다고는 하나 나라를 수호하는 대표적인 신들은 있었다. 아테네라는 이름의 유래가 아테나 여신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아테나 여신은 아테네에서 주로 섬기는 신이다.
...중략...
신화상으로도 포세이돈과 아테네 여신이 이 나라를 두고 쟁탈전을 벌였고, 올리브를 선물한 아테나 여신의 승리로 끝나 이 나라는 아테네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60-61쪽

희랍의 다신교와 기독교와 기독교의 일신교는 섬기는 신의 숫자에서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형태에서도 차이가 났다. 기독교는 유태인들의 민족 신앙인 유대교에서 유럽인의 보편 종교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할 필요가 생겼다. 전래의 문화 전통 속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신앙 체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신이 새삼스런 증명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천신 만고 끝에 로마의 국교가 되었지만 게르만 족의 대이동과 로마의 멸망으로 유럽의 주인이 바뀌면서 다시 기독교를 전혀 모르는 이민족에게 기독교의 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납득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현실적인 이유말고도, 여럿이 아닌 단 하나의 신은 추상적이라 설득의 과정이 추가로 더 필요한 측면도 있다. 반면에 희랍의 다신교는 오랜 문화 전통이었고, 신의 수가 교리에 의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이해 능력이 발전하면서 자연스레 신의 수가 불어났고 인간의 이해에 부응했기 때문에 신이 심각한 증명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62-63쪽

신화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공동체의 누군가가 신을 모독하는 경건하지 못한 행위를 하면 그 공동체 전체가 몰살될 수 있다. 새로운 해석은 위험하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해석은 불경이다. 전통의 방식만이 옳다고 믿는 경직된 상태, 그것이 당시 아테네 배심원들의 심정이었다. -80-81쪽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대화술이 아무 여과 장치 없이 젊은이들에게 공개될 경우, 경거망동하는 젊은이들이 기성의 권위에 도전하고 조롱하는 장난 도구로 대화술을 악용할 소지가 많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국가>에서 대화법을 배울 수 있는 나이를 30세 이상으로 제한하기도 한다. -100쪽

변함없는 악법을 운용하는 나라가 불안정한 좋은 법을 운용하는 나라보다 낫습니다. 절도를 갖춘 무지가 자유분방한 명민함보다 유익합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보다는 한층 평범한 사람들이 나랏일을 더 훌륭하게 꾸려나갑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법보다 더 현명해 보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투키디데스 <펠레폰네소스 전쟁사> 3권 37장, 클레온의 말 中)-129쪽

dura lex, sed lex
(quod quidem perquam durum est, sed ita scripta est)
(그것이 나쁜 것이긴 하지만, 법에 그렇게 되어 있다)
(도미누스 울피아누스의 말, 3세기 로마법학자)-130쪽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일단 지켜야 하며, 악법이라는 것을 국민에게 널리 홍보하여 정당한 입법절차에 따라서 그 악법을 개정하여야 한다.
(오다카 도모오, <법철학>,1937년)-146쪽

흥미로운 것은 이 말(악법도 법이다)이 1980년대에 부쩍 많이 인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군국주의 시대와 군부 독재 시절에 똑같이 '악법도 법이다'가 강조되고 소크라테스가 오명을 뒤집어썼다는 것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하여간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이 말이 대중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일까? 1960년대 이후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다고 학교에서 배웠는데, 교과서에 명시적으로 없으니 어떻게 된 일인가? 아마 이것은 오다카의 책과 우리의 교과서에 적힌 내용이 그런 오해를 방조 내지는 조장했고, 이를 학교에서 수업하는 선생들이 적극적으로 '그렇다'고 연결지어 설명했으며, 언론이 이를 확대, 재생산했으리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 해석이리라. -150-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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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로그 digilog - 선언편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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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어령이 책을 냈다, 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주목받게 되어있었다. 그는 크게 본다. 크게 본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을 많이 하고 글을 많이 쓰고 세상의 변화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2006년 그는 디지로그를 선언했다. 그런데 디지로그가 뭔데? 눈치 빠른 이라면 금방 떠올릴 수 있는 두 단어의 합성어다. 디지털 + 아날로그.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분명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요소들이다. 흑과 백 사이에는 수많은 무채색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회색이라고 쉽게 칭하더라도 다 같은 회색은 아니다. 회색이라고 말하더라도 내가 지칭하는 회색과 네가 지칭하는 회색은 다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에도 무수히 많은 회색이 존재할 수 있을까.

  흔히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비교할 때 전자시계와 바늘시계를 예로 든다. 전자시계는 열 두시 점심시간을 가리킬 때, "12:00:00"라고 표시하지만, 바늘시계는 숫자 12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누구도 우리가 바늘 시계를 보고 12시라고 말을 할 때 바늘이 정확히 숫자 12에 도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대략 12자에 근접해있으면 12시다, 라고 이야기를 한다. 초침은 여전히 돌아간다. 디지털은 정확하고, 아날로그는 부정확하다. 디지털은 기계적이고 아날로그는 인간적이다. 디지털은 삭막하고 아날로그는 부드럽다. 등등의 디지털과 아날로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들.

  이어령이 말하는 디지로그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인식하고 있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그 개념들을 조합한 것이다. 사회는 언젠가부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고 사람들은 이 변화를 감당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는 시대의 저편으로 물러나고 변화를 빨리 받아들이고 변화를 창조해내는 사람은 시대를 이끌어간다. 디지털은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회의 변화 중 하나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에선 뭐가 개발되었다느니 이제 우리는 어떤 집에서 살게 된다느니 하며 불과 몇년전에 SF영화 속에서 봤던 미래사회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SF 영화를 찍기 위해 우리가 상상해내는 모든 것은 곧 현실화된다.

  워크맨을 들고 다닌지 그다지 오래된 거 같지 않은데, 씨디플레이어가 나오고, 테잎은 사라지고 씨디로 음악을 들었다. LP를 말하는 사람은 이미 뒤떨어진 인간이다. LP는 입에 올릴 수 조차 없다. 이젠 CD를 구입해 음악을 듣는 것도 뒤떨어진 인간 취급받는다. 인터넷에 접속해 MP3를 다운받고 쬐그만 목걸이형 엠피쓰리 기계를 차고 다니며 음악을 듣는다. 아직 까지 엠피쓰리를 쓰지 않는 나는 뒤떨어진 인간?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고, 핸드폰과 엠피쓰리, 카메라, 캠코더가 조합된 제품이 나오고, 무거운 종이 사전 대신 국어, 영어, 중국어,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을 짬뽕해낸 전자사전이 나온다. 것도 모자라 전자사전에 스케쥴 관리 기능과 엠피쓰리까지 첨가했다. 녹음도 된다. 오늘 산 컴퓨터는 불과 일년 후면 고물이다.

  디지로그는 이러한 디지털 사회 속에 인간적이고 다정다감한 옛 아날로그 감성을 조합시키는 것을 일컫는다. 현대와 과거의 조합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미래와 과거의 조합이라고 해도 되겠다. 이어령은 이 책 속에서 우리의 옛 것을 예로 들면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조화를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의 전통 떡, 비빔밥, 나물, 젓가락, 숟가락 등등을 언급하며 아날로그적 감성을 이야기한다. 우리나라는 특히 세계 다른 나라보다 더더욱 디지로그에 적합한 나라임을 강조한다. 디지털 최강국에 아날로그적 감성까지 지녔으니 디지로그 시대의 최강자가 될 것이라는 결론?.

  "숟가락은 주로 국문을 떠먹는 것으로 음에 속하는 것이고, 젓가락은 양에 속하는 것으로 고체형 마른 식품을 집는데 사용된다. 건식에 편중되어 있는 서양의 식기가 접시 위주로 되어 있는데 비해 습식 문화의 한국 식기는 종기 뚝배기 사발 등 움푹 팬 것들이 많다. 그러니까 같은 동북 아시아권 가운데서도 '음양 조화'의 문화를 가장 철저하게 생활화한 것이 바로 한국 문화라고 할 수 있다." (P62)  

  "정보가 샌다" "정보를 흘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보를 물과 같은 액체로 생각한 것이다. 물꼬를 자기 논에다 대던 농경시대적 개념이다. 그러나 "정보를 캔다" "정보를 묻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보를 무슨 석탄이나 노다지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산업시대인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정보가 환하다" "정보에 어둡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보는 액체도 고체도 아닌 빛이다. 만화에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전구를 그려놓듯 에디슨 시대의 유물인 것이다.
  "정보를 맡았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냥꾼들이 사냥감을 추적할 때 짐승이 지나간 채취를 통해 추적하던 원시적 감각의 산물이다. 정보는 이렇게 수렵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잠재의시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지식 정보의 새로운 기술을 옛 패러다임으로 읽고 있다는 증거다.
정보기술을 새 패러다임으로 비유하자면 그것은 액체도 고체도 아닌 '공기'라고 말할 수 있다. 공유는 해도 독점할 수 없는 것이 공기이며 지식이다. 사용을 해도 없어지지 않고 순환하는 것 또한 공기의 속성이며 정보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가치'는 있어도 '가격'은 없는 것이 공기이며 지식정보다
. (p130-131)

  이 책에서 이어령이 주장하는 바는 너무나 설득력있고 자세하여 정말 믿어야 될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뭔가 의심스럽다. 아니 의심스럽다기 보다 일부러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 모두 무릎을 탁 치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과대 포장된 주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너무 우리민족, 우리나라,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이 지나친 나머지 우리의 모든 것을 미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 정말 그렇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것은 모두 다가올 새 시대에 너무나 적합하고 딱 떨어지는 것이라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디지로그 시대의 최강자가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 하고 질문을 던져봤을 때, 책 속에서 보여지는 우리의 환상은 우리의 현실과 너무 멀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이 책에서 너무나 많은 예를 통해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 이 책을 한번 읽고는 고개는 끄덕일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기는 어렵다. 매우 쉽게 쓰여진 책이라 빠르게 가볍게 쉽게 읽을 수 있지만 다시 한번 천천히 진지하게 읽어나가야만 하는 책이다. 하나 하나의 장 속에서 우리는 많은 생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의심하라. 질문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한번 읽어봐라. 그가 내다보는 우리의 미래는 밝고 희망적이지만 정말 그럴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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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07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저령선생의 이화여대에서 강의할때 제자들이 그러는데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은 예전부터 하신 말씀이라는데요. 갑자기 나온 말이 아니라는 거죠.
추천.

이잘코군 2006-05-07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게 중앙일보 연재됐던걸 묶은 책이라 하네요. 디지로그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한거 같고, 정식으로 책으로 내면서 '선언'이라고 이름을 붙인거 같아요. 추천 감사함다.

nada 2006-05-0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흥미롭긴 한데 아프락사스님 말씀처럼 조금 갸우뚱하네요. 그럼 정보를 긁어오는 사람들은 정겨운 등 긁어줌 문화의 향수를 느끼는 걸까요? 정보를 퍼오는 사람들은 돌아가며 서로의 뒷간을 퍼주던 품앗이 문화을 그리워하는 걸까요? 잘 모르겠네요. 잘은 모르지만.. 철학도 그렇고 시대를 읽는다는 것도 그렇고 어느 정도 끼워맞추기가 있는 것 같아요.^^

이잘코군 2006-05-07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좀 너무 우리식의 어거지가 있는 것 같아요. 그걸 만들어내는 것도 대단하지만요. 어쨌든 이어령의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는 능력은 알아줘야돼요. 젊은 세대보다 디지털에 대해 더 잘 알아요. 제가 모르는 것도 수두룩하게 등장하더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