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SERI 연구에세이 14
복거일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5년 1월
품절


따라서 자본주의의 높은 효율만을 내세우는 주장은 자본주의를 제대로 변호할 수 없다. 자본주의가 정의롭다는 점을 주장할 수 없으면, 그래서 정의를 내세우는 자본주의의 반대자들에게 도덕적 고지를 내주면, 어떤 다른 가치들을 내세워도, 자본주의를 변호하는 주장은 밀릴 수 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자본주의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바로 그 길을 골랐다. -12쪽

자본주의와 그것을 떠받치는 이념인 경제적 자유주의가 정의롭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또렷하지 않고 길고 어려운 설명이 따라야 비로소 밝혀질 수 있다. 반면에, 평등을 내세우는 주장들은 직관적으로 옳게 여겨진다. 자본주의의 반대자들은 자본주의의 변호자들보다 늘 목청이 높았고 훨씬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다는 사정이 이상하지 않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자본주의가 효율적일 뿐 아니라 정의로운 까닭을 밝히는 일은 중요하고 시급하다. 그렇게 한 뒤에야 우리는 자본주의를 적대적 세력으로부터 지킬 수 있고, "제때를 만나 태어나기 위해 베들레헴을 향해 비척거리는 사나운 짐승"이 이땅에 태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터이다. -13쪽

자본주의가 정의롭다는 사실은 그것이 자연스럽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정의가 사람 마음에 자연스러운 무엇으로 다가오리라는 생각은 합리적이다. 자연스러움이 정의의 핵심적 특질들 가운데 하나임을 명확하게 증명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무엇이 정의로운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다. 정의감이 진화의 산물이므로, 그런 사정은 필연적이다. -14쪽

자본주의가 정의롭다는 것을 밝히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재산권이 본질적으로 정의롭다는 점을 밝혀야 한다. 자본주의가 사유재산 제도에 바탕을 두었고 사유재산 제도는 재산권을 통해 세워지고 유지되므로, 재산권은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만일 재산권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다른 면들에서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정의로울 수 없다. -22쪽

최종결과 원칙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정의롭다고 여기는 구조적 원칙들 가운데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은 물론 평등이다. 그래서 그들은 평등한 분배가 가장 정의로운 분배라고 여긴다. 자연히, 자본주의를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은 흔히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결정적 결점으로 꼽는다. 그리고 구성원들 사이의 평등을 보다 잘 이룬다는 점을 들어 대안적 체제들을 내세운다.
그러나 평등은 좀처럼 모습을 또렷이 드러내지 않는 개념이다. 그래서 그것은 정의하기가 무척 어렵고 쓰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것들을 뜻한다.
그런 혼란을 줄이려면, 먼저 평등을 기술적으로 쓰는 경우와 당위적으로 쓰는 경우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사람들의 특질이 평등하다는 얘기와 사람들은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구별해야 한다. -53쪽

로버트 노직은 <무정부, 국가, 그리고 이상향>에서 "기회의 평등에 대한 권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존재하는 것은 특정한 사물들에 대한 특정한 사람들의 특정한 권리들 뿐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기회의 평등의 정당성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다.

"모든 사람들이 기회, 생명 등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권리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과 이 권리를 강제하는 것에 대한 주요 반론은 이 '권리들'이 사물들과 물질들과 행동들의 하부구조를 필요로 하며 다른 사람들이 이것들에 대한 권리들과 자격들을 지녔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한 권리의 달성에 다른 사람들의 권리들과 자격들을 지닌 사물들과 행위들의 어떤 이용들이 필요하면, 누구도 그런 권리를 지니지 못한다. 특정한 사물들(저 연필, 그들의 몸 등등)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권리들과 자격들 그리고 그들이 이 권리들과 자격들을 행사하기 위해 하는 선택은 어떤 개인의 외부 환경과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을 확정한다. [...] 특정한 권리들의 이 하부구조와 부딪치는 권리들은 존재할 수 없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어떤 깔끔하게 다듬어진 권리도 이 하부구조와 양립 불가 관계를 피할 수 없으므로, 그런 권리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들에 대한 특정한 권리들이 권리들의 공간을 채워서 일반적 권리들이 어떤 실질적 상태로 존재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노직, 1974) -55-56쪽

반면에, 대안적 체제들에선, 공산주의든 국가사회주의든, 에드워드 윌슨이 "평등의 이념과 야만적 강제의 편리한 동거"라 부른 질서가 탄생했고, 그 질서는 사람들을 잡아먹는 괴물임이 드러났다. 그러한 질서 속에서, 평등의 이념을 실현하려면 강제적 소득 이전이 필요하고, 강제적 소득 이전을 위해선 강력한 국가 권력이 필요하고, 그런 권력은 소수 정예 집단에 집중되고, 그렇게 소수에 집중된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하므로, 결국 권력을 쥔 정예 집단만 잘 살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억압을 함께 맞는다.-66쪽

대안 공동체들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잘하면, 복잡하고 경쟁이 심한 현대 사회에서 지친 사람들이 잠시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피난처 노릇은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런 피난처가 사소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대안이라고까지 하기는 어렵다.
보다 일반적으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대안'이란 말은 너무 가볍게 쓰인다. 현존하는 관행, 질서, 풍습, 규칙, 법, 기구, 공동체 또는 사회에 대한 '대안'을 선뜻 내놓는 사람들은 현존하는 것들이 많은 대안들 가운데서 가장 나은 것들로 판명되어 사회적 진화를 통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게다가 '대안'이라고 제시된 것들은 거의 모두 이미 오래전에 시험되어 버려진 것들이다. -130-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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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경고

  전쟁 영화 좀 봤다 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 꼭 반드시 떠올리는 영화가 있다. 너무나 흡사한 스토리 라인과 격전과정, <태양의 눈물>은 2001년 개봉한 <블랙호크다운>과 쌍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너무나도 비슷한 구조를 지닌다. 하지만 <블랙호크다운>이 개봉했을 당시 흥행성적이 박스오피스 1위로 8주간 지속되었던 반면, <태양의 눈물>은 첫주 2위에 올랐으나 이후 순위권 밖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블랙호크다운>을 전편이라고 봤을 때, 후편인 <태양의 눈물>은 소말리아 대신 나이지리아를 택했을 뿐 스토리의 목적은 변함없다.



* 레나 켄트릭스 박사와 그녀의 환자들. 저 아프리카 사람들은 알까. 이 영화가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영화 엔딩 크레딧에 이름 한번 올리지 못할 사람들이지만 저 사람들의 연기도 매우 좋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작사(정확히는 제작사와 미국방부)는 그들에게 무엇을 대가로 영화에 출연해달라 말했을까. 음식일까 아니면 의료품?

  레나 켄트릭스 박사를 구출해오는 것이 임무였고, 임무를 무사히 달성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나의 애원과 두고 온 마을의 참혹한 실상을 하늘에서 보게 된 워터스 대위는 헬기를 돌려 함께 먼 길을 걸어온, 그대로 내버려두면 반군에 의해 살육당하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서기로 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나중에 판단하자,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더이상 저들을 두고 갈 순 없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카메룬 국경까지 우리는 함께간다.

  함께 먼 길 떠난 레나 일행 속에 누군가 첩자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반군의 추격군이 잠도 자지 않고 우리를 추격한단 말인가. 그들이 쫓는자 누구인가. 레나 박사를 구하기 위해 파견된 네이비씰은 이제 어느덧 나이지리아의 암살당한 대통령의 외아들을 보호해야 하는 임무를, 또 함께 가는 저 많은 사람들을 살려 국경을 통과해야 하는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위에서 명령한 것도 아닌데, 오히려 대령의 명령을 어겨가면서 워터스 대위는 그들의 유능하고 충실한 부하들을 이끌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



* 오른쪽에 워터스 대위역의 브루스 윌리스. 그의 똥씹은 듯한 표정은 참으로 다양한 영화에 그의 얼굴을 들이밀게 한다. 개인적으로 브루스 윌리스에 대해서는 (어디서 기원했는지 모를) 약간의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가 출연하는 매 영화마다 그의 똥씹은 같은 표정을 보는건 이제 좀 질렸다. 그는 왜 한결같이 똥씹은 표정일까. 한 가지 표정으로 다양한 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55년생인 그도 이제 나이 꽤나 먹었는데 아직도 몸을 던지는 액션연기가 가능하다니 대단하다.

  마지막으로 너희들의 의견을 듣고싶다. 나는 저들을 그냥 두고 갈 수 없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리 전쟁이 아니라 생각하지만 대위님을 따르겠습니다. 저들을 두고 갈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짐짝 취급하기 싫습니다, 그들이 죽으면 저도 죽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살면 저도  삽니다, 아 이 눈물 겨운 현장이라.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 먼 이국 땅에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리다니. 

  정말, 영화 보는 내내 네이비씰 대원들의 그들에 대한 동정, 애정, 연민을 느낄 수 있었고, 심지어 눈물까지 흐른다. 무참히 도륙당하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과, 아이는 내던져져있고, 엄마는 반군에게 가슴을 도륙당한 채로 목숨만 붙어있다. 누구는 휘발유에 불태워지고, 누구는 질질 끌려다니며 강간당하고, 누구는 칼에 찔려 죽고, 누구는 반군 앞에 춤추며 죽어간다. 영화는 선악의 구도를 확실하게 감잡게 해준다. 무참히 주민들을 살해하는 반군은 악의 화신이요, 소수의 인원으로 그들을 처단해 주민을 구출하며 눈물 흘리는 미군은 정의의 사도다. 아 진짜 나도 영화 보면서 눈물 흘리지만 내 눈물이 역겹다.  

   영화를 볼 때 꼭 알고 봐야 할 것 하나는 2001년말 선보인 <블랙호크다운>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대 테러전을 수행하기 바로 직전에 개봉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2003년 초  <태양의 눈물>은 미국의 이라크 전을 앞두고 개봉되었다. 이 두 영화의 의미는 아프리카에서 행해지는 참혹한 전쟁의 실상을 알리고 핍박받는 그들을 구출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그들 국가에 대한 전쟁선포를 정당화하는데 있다. 두 영화 모두 미 국방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만들어진 영화이며, 아프리카에서 인민들을 이끌고 반군에 저항하는 스토리는 마치 미국이 정의의 사도인양 묘사되고 있다. 순수한 전쟁 영화로서 볼 영화는 절대 아니다. <태양의 눈물>은 2001년 당시 <블랙호크다운>으로 인해 대 테러전의 국민 지지율이 올라갔다고 판단, 이라크 전을 앞두고 다시 한번 같은 수법으로 지지율을 상승시키려는 미 부시정부의 전략이다. 

  미국은 자신들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영화를 통해 정당화시키고 있다. 남의 땅에서 내정간섭한다는 반론은 그냥 그렇게 넘긴다쳐도, 미군이 정말 그들이 주둔하며 전쟁을 치룬 그 국가들에서 영화와 같은 외딴 민족에 대한 동정심과 애정과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는지 의문이다. 영화 속 반군처럼 젊은 여자애들 강간하지 말고, 너희들 앞에서 춤추며 쇼하라고 하지 말고, 아무런 이유 없이 두건 씌워놓고 러시안룰렛 놀이 하지 말고,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아무렇게나 살해하지나 말아라. 한참 이라크 전쟁이 진행 중일 때 언론을 통해 사진으로 전해진 영국군과 미군이 행한 그 참담한 실상은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영화 속 반군의 모습은 그 사진의 영국군과 미군의 모습과 별로 다를 바 없던데.

 
p.s. 순수하게 즐기는 전쟁영화로 봤을 때 - 이 영화에 담긴 이러한 정치적 의도를 빼놓고 본다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 <태양의 눈물>은 <블랙호크다운>보다는 확실히 떨어진다. 사실감과 긴장도와 눈물 자아내는 극적장치면에서도. 그러나 두 영화 모두 '순수하게 즐기는' 전쟁영화로 봤을 때 합격점을 줄 만하다. <태양의 눈물>의 안톤후쿠아 감독과 브루스 윌리스 주연은 <블랙호크다운>의 리들리 스콧 감독과 이완 맥그리거, 에릭 바나 주연보다 캐스팅 면에서도 떨어지지만, 두 영화만을 놓고 비교하지 않고, 모든 전쟁영화를 통틀어 본다면 둘 모두 만족스럽다. 재밌는 사실 한 가지는, 한스 짐머라는 음악감독이 두 영화의 음악감독을 맡아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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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22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케이블 TV에서 몇차례 방영하더군요.
말씀처럼 선악의 구도와 결말이 뻔한 영화이므로 몰입이 좀 어려웠답니다.

 



  (이 영화를 조금이라도 즐겁게 보고픈 분들은 제목 빼고 다 잊어. 아예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지 말 것)



  "로맨스라고 하기엔 애틋함이 부족하고, 스릴러라고 하기엔 스릴이 부족하고" 

  감독은 미리 예상했던걸까? 관객들의 반응을. 영화 초반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레이첼은 잘 나갈 거리도 없는 남편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곤 곧 팩스가 도착했다. 출판사에 원고를 보낸 남편의 글에 대한 화답이 온 것. "미스터리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하고, 스릴러라고 하기엔 스릴이 부족하고." 레이첼은 말한다. "스릴을 더 넣어서 다시써봐" 돌아오는 남편의 대꾸 "피를 더 넣으라고?" 

  이미 영화 초반의 두 사람의 대화는 아직 한참 남아있는 이 영화의 뒷부분을 미리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다. 이어지는 아이의 죽음과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레이첼, 그리고 그다지 아무렇지 않아보이는 그녀의 남편. 레이첼은 친구 샤론의 권유에 따라 그녀가 구해다준 어느 외딴 섬마을의 경관 뛰어난 하얀집을 얻게 된다. 이곳에서 글이라도 쓰면 죽은 아이도 잊고 책도 낼 수 있을거라 생각하며.



* 이 남자배우 꽤 멋있다. 스코틀랜드 태생 한스 매디슨이라고 하는데 <캐논 인버스> <아발론의 여인들> <데스워치> 에 나왔었다고. 내가 <캐논인버스>는 봤는데 기억이 안나네. 뭐 그렇지. 알고 봐야 아는거지, 모르고 보며 모르지. 그의 얼굴을 두고 올랜도 볼룸과 브래드피트를 닮았다고 하면 말 다했지.

  어떤 장르의 영화인지도 모르고 봤던지라 더욱 흥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다정한 남편과 아내의 대화에서, 그리고 비록 아이가 죽었지만, 외딴 섬마을로 들어와 지난 일을 잊으려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곳에서 만난 등대지기 앵거스와의 만남, 그리고 절벽 아래 바위 사이로 툭툭 파도치는 소리와 해변을 거닐며 뛰어다니는 말들의 모습에서 '스릴'과 '공포'를 느끼지 못한 것은 비단 나 뿐이 아닐 것이다. 장르를 모르고 본 나는 기대이상의 로맨스와 스릴을 만끽했지만, 장르를 알고 본 사람들은 기대 이하였을 듯 하다.

  무언가에 대한 기대는 본디 그것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치보다 더 큰 만족감으로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엄밀히 '만족'이란 기대 이후의 상황에 대한 주관적인 꽉참과 비움의 느낌일 터지만, 기대는 이미 나의 사물에대한 만족감을 형성시킨 채 만들어진다. 로맨스를 기대했던 이도, 스릴러를 기대했던 이도 이 영화에선 어느 것에도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맨스도, 스릴러도 기대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로맨스에서도, 스릴러에서도 기대치 않은 만족감을 느꼈다. 무언가에 대한 기대감이란 그런 것이지.

  영화 개봉에 앞서 로맨스로도, 스릴러로도 홍보를 전혀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고, 두 가지 모두로 홍보를 하게 되면 결국 남는 것은 없다. 극장 개봉영화로서 부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불운의 영화라고 볼 수 있을 듯. 전혀 모르고 봤다면 괜찮지만, 이미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획득했으므로 영화에 대한 기대는 하지 말 것. 스토리, 배우, 감독 등 모든 면에서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데미무어에 대한 열광적인 팬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영화. 로맨스도 아니고, 스릴러도 아니고.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기대 이하 일 것이다"



p.s. 보너스 헐리우드 엿보기

 

* 데미무어. 62년생인 그녀는 78년생인(나보다 한살 밖에 안많아) 15살 어리다는 애쉬튼 커쳐와 2005년 9월 24일 결혼했다지. 벌써 시간이 횟수로 3년째 접어들었네. 62년생이면 40대 중반쯤 된거 같은데 나이먹고 나이먹은 티가 별로 안난다. 그러니 한참 연하남과 스캔들나고, 결혼까지 하지 않겠어. 배우로서도 아직 그녀는 한창이다.  



* 데미무어와 브루스 윌리스의 딸이라지. 루머 윌리스. 88년생으로 엄마 아빠와 같은 직업에 종사중이다. 헐리우드 영화배우로서 재밌는 사실은 그녀가,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 아버지인 브루스 윌리스와 같은 영화 <호스티지>에 출연했다는 사실. <호스티지> 영화 봤지만 얘가 어디에 나왔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근데 또 재밌는건 지금의 아버지인 애쉬튼 커쳐는 78년생이니깐 얘랑 10살 차이라는거네. 뭐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 로맨스 좋지만 -_- 이건 좀... 근데 엄마닮았으면 이뻐야되는데 안이쁘다. 아빠 닮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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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22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비 무어가 많이 날씬해 졌군요.
사진이 좋습니다. 하하

 



* 스포일러 경고

  만나고 탐색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탐색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의 연속된 삶'을 살아가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어느날 그 혹은 그녀와 어느덧 잠자리를 함께 하는 사이로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잠자리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 혹은 그녀가 내 마음 안에 자리잡는 것이 사랑이려니.

  여자들은 말한다. "왜 남자들은 한결같이 지가 좋아서 만나고선 먼저 차버리는거야?" "응 옛날에 목장에 한 마리의 숫소와 구십구마리의 암소가 있었는데, 이 숫소는 구십구마리의 암소들과 한번씩 돌아가면서 잠자리를 하고는 거뜰떠도 보지 않는거야. 그래서 어떻겠어? 목장 주인은 옆 목장의 숫소와 자기네 숫소를 맞바꾸기로 한거야. 그럼 새로 온 숫소는 다시 또 구십구마리의 암소와 잠자리를 하지 않겠어?" 소위 이것이 암소이론이렸다. 암소이론에 따르면, 남자는 결코 한 여자에 만족하지 못하며, 구애를 통해 사랑을 획득한 남자는 그녀와의 달콤한 시간을 보낸 뒤 걷어차버린다. 어디까지나 암소이론에 따르면. 어떻게 사람을 소에 비교할 수가 있지, 라는 인간은 근원적으로 동물과 다르다는 생각은 여기서 그만. 인간이 동물인건 맞잖아. 인정해야지.




음무우~ 음무우~  얘(↑) 암소

  방송국 토크쇼 섭외담당 제인 굿웰은 새로 온 방송국 PD 레이에게 반해버렸고, 둘은 금새 만지고 물고 빨고 하는 사이로 변했지만, 레이는 곧 헤어진 여자친구에게로 돌아가고, 제인은 차였다. 둘이 함께 전망 좋은 집으로 이사간다고 살고 있는 집 방뺐는데. 남자친구한테 차이고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불행한 일은 홀로 오지 않는다지. 그러나 구원자는 나타나는 법. 방송국의 바람둥이 PD 에디는 자기네 집에 방이 비었고, 여기로 이사오라는 제안을 한다. 날 차버린 남자친구 앞에서 다른 남자의 집으로 들어오라는 제안에 '승락'버튼을 누르는 쾌감이라니. 레이에게 차인 제인은 이제 자신이 남자들에게 차인 이유를 스스로 합리화시키기 시작한다. 암소이론으로.



* 제인(애슐리 쥬드)과 레이(그렉 키니어).
  두 사람이 있다. 신문만 보고 있는 남자와 그런 그를 향해 웃음지으며 사랑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여자.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하는 과정이야 여자친구 혹은 남자친구를 사귀어본 사람들은 언제나 겪는 과정이거니와, 때로는 그것이 결혼이라는 안정된(?) 사회적 제도 속으로 들어가 둘만의 영원한 사랑을 '법' 아래 약속하기도 하고, 때로는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날 차버린 그 혹은 그녀로 인해 폐인생활을 하기도, 그놈시끼는 못된 놈이라고, 뭐 그런 못된 년이 있냐고 오랫동안 연락끊었던 친구녀석들을 불러내어 술마시며 주정하기도 한다. 끝까지 홀로임을 자처하지 않는 이야 누구나 동일한 과정을 거치지만, 누구나 다 영원한 사랑으로 골인하는 것은 아니다. 과연 영원한 사랑이란 것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사랑의 시소게임에서 위로 붕 떠버린, 상대방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자기합리화할 거리를 찾는다. 아 쟤는 어차피 나랑 성격이 너무 안맞았어, 쟤는 돈도 없었는데 뭐, 어차피 우리는 헤어질거였어, 라고 상대방을 꼬투리 잡아 이별의 통보는 '먼저'와 '나중'의 차이였을 뿐 결과는 같았을 거라 믿는 이와, 나같이 잘해준 여자가 어딨다고, 나같이 이쁘고 성실하고 자기만 사랑하는 여자가 어딨다고 나를 차버릴 수가 있어, 어떻게 지가 감히, 라고 자기자신의 모습에서 '사랑의 구조적 결함'을 찾지 않고, 상대방에게로 떠넘기는 이도 있는 법. 이별을 받아들이는 유형도 가지가지. 자기자신을 깎아내리며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오로지 내 잘못이라고 스스로에게 이별의 원인을 부담짓는 것도 바보같은 짓이지만, 자기자신에겐 문제가 전혀 없고 오로지 저 미친놈 때문이라며 저 못된놈 때문이라며 상대방에게 이별의 원인을 돌려막는 짓도 바보같은 짓이다. 전자와 후자 중 한 가지를 택해야만 한다면,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기 보다는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훨씬 나을지도 모르지만.



* 야해. 끈나시에 끈팬티 바람으로 있는 제인(에슐리 쥬드)과 팬티 바람으로 있는 에디(휴 잭맨). 그 차림으로 있는데 뭔 일 안나는 니들이 더 이상해. -_-

  영화 속의 제인은 이별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이별의 원인을 레이에게 뒤짚어씌운다. 저놈시끼가 못된 놈이라서 나를 꼬드겨놓고는 단물 쪽쪽 빨아먹고 이제 지겨워져서 버린거지 그런거지, 라고. 65세의 마리 찰스 박사로 가장하여 암소이론 이란 칼럼으로 각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왜 숫컷들은 죄다 그 모냥이야. 암컷들을 사랑한다 할 땐 언제고 그냥 내다버리고는 다른 암컷을 찾아 떠나다니.

  부정하지 않겠다. 나의 과거를 반성합니다. -_- 나의 연애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던(솔직히 짧지) 것으로, 한참 좋은 시간 보내며 그녀로부터 사랑을 받던 그 시기에,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했던 나를 반성합니다. 제인의 암소이론에 따르면, 나는 새로운 암컷을 찾아 떠난 못된 숫컷일 뿐, 어떤 말도 이별의 이유에 대해 대답해주지는 못하겠죠. 하지만 영화는 암소이론을 정당화시키기 보다는 암소이론은 그저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상처받은 한 여자의 자기합리화를 위한 것으로 결론나니, 그렇담 나는 비난의 화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건가?

   제인은 다른 남자에게 사랑에 빠졌을 때나, 그에게서 버림받았을 때나, 자신의 곁에서 묵묵히 조언을 하고 아껴주던 바람둥이 에디에게 사랑을 느낀다. 사랑에 상처입은 한 여자를 보듬어줄 수 있는건 곁에서 위로해주던 또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사랑을 만날 때 그가 그 자리에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영화. 그렇다면. 영화의 또다른 결론은, 아픔을 겪고 있는 여자가 잘 넘어온다? -_-v 남자의 꼬시기 전략의 대상은 갓 이별을 통보받고 울고 있는 여자. 어쩜 바람둥이 에디는 그것을 너무 잘 안 것이 아닐까.'바람둥이'자격이 있다면, 전략적으로 그러지 않았더라도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을지도.

  사랑이 불현듯 다가오듯 헤어짐도 불현듯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사랑의 달콤한 첫키스는 반갑지만 갑자기 다가온 이별의 첫키스는 반갑지 않다. 하지만 사랑이 오듯 이별도 온다. 사랑이 온다고 이별도 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 원인에도,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된 원인엔도, 내가 그에게 이별을 선고한 이유에도, 그가 나에게 이별을 선고한 이유에도, '누구탓'은 없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탓'은 있다. '똑같이 똑같게' 존재하지는 않겠지만 '똑같이 양쪽모두에' 존재한다. 사랑이 이별로 둔갑한 순간 그에게나 나에게나 헤어짐의 모든 것을 전가할 필요 없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혹은 그와 나에게 이별의 원인이 있을지니. 사랑에 '두 사람'이란 조건이 필요하듯 이별에도 '두 사람'이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 더.



* 애슐리 쥬드. 날씬하고 몸매 이쁘고 입술이 매력적인 이 여자. 그룹 U2의 보노보노가 '피플'지를 통해 에이즈 퇴치 운동 ;RED'에 가입하도록 요청하여 청년에이즈 퇴치 운동 본부에 속해 니카라구아 온두라스 과테말라에서 활동중이라 한다. RED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등과 함께 만든 브랜드로 여기에서 올리는 수익을 에이즈 퇴치 기금으로 기부하는 프로젝트를 지칭한다. 얼굴과 몸매 만큼이나 이쁜 짓 하네.

p.s.

근데 한 직장 한 부서내에서 여기저기 붙어먹는건 너무했다. -_- 팀원도 네명인가 다섯명 밖에 없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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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1-2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슐리 쥬드의 경우 분명 매력적인 배우임에는 틀림없으나.....
왜이리 나오는 영화마다 영 꽝인지 모르겠습니다..^^

책속에 책 2007-01-21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애슐리 주드 참 좋아해요..사실, 이 영화외에는 그닥 큰 인상을 준 영화가 없긴 하지만. 아무튼, 조오기 위에서 애슐리랑 휴랑 저 차림에도 아무 일이 안 일어나긴요..벌써 눈빛이며, 마음속이며 저기서 게임 다 끝났더만요..ㅎㅎ

마늘빵 2007-01-21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 그러게요. 나온 영화들은 죄다 꽝이죠. -_- 시나리오를 보는 안목이 없는건지, 안들어오는건지.
데이드리머님 / ㅎㅎ 먼일이 일어나긴했죠. 근데 너무 오랫동안 암일도 안일어났잖아요. 같이 살면서. ㅋㅋㅋ

비로그인 2007-01-22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오브 비홀더, 외에는 잘 찍었다 싶은 영화가 없었지만, 아이 오브 비홀더는 애슐리 주드 없이는 안될 영화였죠.

마늘빵 2007-01-22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쥬드님 그 영화는 아직 못봤어요. 근데 쥬드님과 애슐리 쥬드의 '쥬드'는 같은 쥬드인가요? -_-
 



* 스포일러 경고 (아래글 18禁)

  영화배우 김민정을 좋아하고, <스캔들>이후 야한사극(?)이고, 음란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주는 제목으로 꼭 보고 싶었던 영화였지만 뒤늦게 접했다. 극장개봉 당시 이 영화를 봤던 지인들의 평가에 따르면 그다지 재미도 없고 음란하지도 않다고 하는데 역시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그 말이 맞다. '음란서생'이란 제목과 저 야릇한 포스터는 역동적인 줄거리와 장면 전환, 현란하고 화려한 야한 색감을 자랑할 것만 같지만 제목 잘 짓고 포스터 잘 만들고 캐스팅 잘 했다고 해서 영화가 흥행하는 것은 아니다. 지나친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광고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온다.

  공맹의 도를 읊어대는 사대부 집안의 명문장가 윤서는 권력과 당파싸움에 관심이 없고 어느 곳에도 속해있지 않으려 하지만 누군가의 모함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을 맡게 되었다. 사건조사차 들른 저자거리의 유기전에서 생전 처음 보는 난잡한 책을 접하게 되고, "음경이 여성의 축축한 음부를 파고들어갔다"라는 대목에서 움찔한다. 공맹을 읊는 사대부로서 어찌 이런 음란한 글귀를 읽을 수 있단 말인가. 에이잇. 하지만 그날 밤부터 그의 작업은 시작됐다. '추월색'이라는 그럴듯한 필명까지 만들어가며 야설을 쓰기 시작한다. 추월색의 음란소설은 장안의  화제거리가 되었고, 하지만 1인자가 되고픈 욕심에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삽화를 넣기로 마음먹고는 그림 좀 그린다 싶은 의금부의 광헌을 꼬셔 '글 윤서, 그림 광헌'의 작품을 탄생시킨다. 아 노골적이고 적나라하며 세밀한 장면묘사와 탄탄한 스토리, 게다가 마치 튀어나올 것만 같은 저 음탕한 그림들하며. 책은 당연히 화제를 몰고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둘만 아는 비밀이 있었으니, 윤서는 왕의 여인 정빈과 몰래 내통해 뜨거운 정사를 치루며 그리기 어려운 체위를 몰래 문틈으로 광헌에게 보여준다. 사실감있는 그림은 이로부터 탄생했다.

 


* 김민정. 어쩜 이렇게 이쁠 수가. 그녀의 외모와 말투는 차가움과 도도함이 함께 느껴지면서도,
  어딘가 여린 상처받은 마음을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나. 야설에 관하여

   배경은 조선 시대이지만 이야기는 오늘날과 다를 바 없다. 어제 한국일보에도 소개되었지만 신춘문예에 당선된 어느 시인은 당선되기 전에 먹고 살기 위하여 야설을 썼다고 한다(나는 문단의 누군가로부터 간접적으로 들어서 그 시인이 누군지 알고 있지만 밝히지 않겠다). 머리를 쥐어짜내 밤새 야설을 써서 원고를 보내면 사무실에 있는 에로배우겸 여직원이 그랬다고 한다. "넌 이거 보고 꼴리냐" 그래 야설은 꼴려야 제맛이다. 그런데 안 꼴리니 야설이라 할 수 없지. 온갖 음란한 단어와 상황을 설정해도 야설의 첫번째 조건은 '꼴려야 한다' 이다.

  소싯적 인터넷이란 것도 없었으니 음란물을 접할 기회가 지금보다 축소되었던 그때,  직접 비디오대여점에서 야한 비디오도 못빌리고, 야한 잡지도 살 수 없는 나로서는 가끔 보게 되는 스포츠 신문의 야한 여배우의 사진이나 피씨통신을 통해 야설을 보는 것이 기껏 내가 음란물을 접할 수 있는 경로였다. 꼬레 또 학교에서는 얌전한 모범생이었던 나는 몇몇 노는 친구들끼리 모여 음란물을 보는 무리에 끼어들기도 어려웠다. 이미지가 있지 내가 어찌 감히. 그러니 혼자서 야설 다운 받아 읽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야설은 사진보다 자극적이었다. 아 그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와 다양한 스토리는 나를 음란한 상상력의 공간으로 이동시켰고, 이러면 안돼 공부해야지, 이러면 안돼, 하면서도 하루 건너 또 보고 하루 건너 또 보고, 질린다 싶으면 다른 거 또 다운받고. 이랬더랬다. -_-

  <음란서생>은 야설작가에 관한 영화다. 아무리 천한 문학(?)으로 취급된다고 하지만, 엄연히 야설도 문학이다. 그러나 그때는 지금보다 야설을 쓰고 읽는 것이 금기시되었던지라 쓰는 이나 베포하는 이나 읽는 이나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필명을 사용하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더 꼴리게 할 것인가 고민하고, 잘나가는 야설에 대해서는 팬층도 생긴다는 점에서 지금과 다를 바 없다. 심지어는 책을 보고 감동 받은 독자들은 책 뒤에 나름의 감상문 격인 서평도 썼다지. 적어도 영화에서는. 모든 면에서 밖으로 드러내지만 않았지 지금 우리가 하는 행위들과 다를 바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감동받은 이들이 서평을 쓰고 인기작가에 대해서는 대량주문이 들어오는 시스템.

  요즘은 인터넷에 아마추어 작가들이 각자 필명을 가지고서 활약하고 있는데, 이들도 이쪽 분야에서는 나름 팬을 확보하고 있다. 조선시대 저잣거리의 무대가 인터넷 안으로 숨어들어왔을 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허나 인터넷 야설 중에서는 아직까지 삽화가 들어간 야설은 보지 못했다. 책으로 만들어진 야설은 내가 지하세계에 어두운 관계로 아직까지 보지 못했으니 삽화가 들어간 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고, 적어도 어쩌다 가끔 봤던 인터넷 야설에는 삽화가 들어있는 건 없었다. 만일 누군가 새롭게 시도한다면 인기작가 반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않을까 싶다. 내가 해볼까? 근데 필력이 없어서 영...

  둘. 음란물에 관하여

  다양한 방식의 음란물이 나온다고 하나,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해도, 음란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읽는 것과 보는 것, 다시 말하면 글과 그림이다. 전자는 야설을 의미하고 후자는 사진, 그림, 동영상을 의미한다.  야설로 분류되지 않는 일반대중소설 중에서도 야한 장면을 묘사한 부분을 읽을 때면 가끔 '머리'가 아닌 '아래'에서 명령을 내리는대로 행동을 하게 되기도 한다. 대개 읽는 방식은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선호하는 걸로 알고 있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머리 속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자신을 야설의 여주인공에 감정이입시키기 쉽고, 남자들은 자극이 시각으로 먼저 들어오는지라 그림이나 사진, 동영상에 흥분하기 쉽다. 읽고 보는 것 모두 눈으로 하는 활동이기는 하나, 전자가 상상력이 주가 되고, 눈은 그저 받아들이는 경로가 되는 반면, 후자는 상상력보다 눈 앞에 펼쳐지는 자극적인 체위나 이쁜 가슴, 목선, 잘록한 허리가 주가 된다. 고로 대개 야설을 찾는 사람들은 남자가 아닌 여자가 주가 된다. 여자들은 상황에, 남자들은 시각의 자극에 흥분하는 듯 하다. 그러나 요새는 여자들도 시각에 길들여지는 듯 하다. 야설보다 멋있는 근육질의 축구선수들의 누드달력이나 잘생긴 꽃미남들의 상체 노출 사진 같은 걸 찾는 이들이 느는 걸로 봐서는. 

  솔직히 야한 것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서로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다들 컴퓨터 안에는 몇 개의 동영상과 사진, 혹은 야설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컴퓨터 안에 없다면 아마도 즐겨찾기에 주소가 저장되어있거나 그도 아니라면 들킬까봐 혹시나 누군가가 실수로 들어갈지도 모르니깐 머리 속에 저장하고 있거나 하지 않을까. 어떤 방식으로든.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아주 가끔(정말?) P2P를 통해 다운받아 보고 지우거나,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거나 한다. 왜 혹시 동생이 컴터하다 발견할까봐 (경험상 미디어플레이어 띄우면 제목이 뜨기 때문에 엉뚱한 제목으로 바꿔주면 좋다). 혹은 야한 사이트 찾아다니며 가끔 볼 때도 있다. 유명연예인 노출 동영상이나 누드 사진, 섹스비디오 돌려보는건 문제있지만, 일반 음란물 가끔 보는거야 굳이 숨길 필요 있나. 나 야한거 좋아하고, 가끔 본다. -_- 그래서 뭐. 솔직해져봐.

 셋. 영화에 관하여

  영화 <스캔들>을 만든 감독의 작품이지만 전작보다 카메라 이동이 느리고 러닝타임이 길어졌으며, 야함의 정도도 낮아졌고, 스토리 또한 긴장도가 덜하다. 전반적으로 <스캔들>보다 훨씬 못하며 음란하고 재밌어야 할 영화가 지루하고 슬퍼졌다. 김민정이 아니었다면 140분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에이 노출도 하다 말면 어떡해. 제대로 보여줘야지. -_- 기대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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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1-16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야, 스캔들은 제대로 스캔들이었지요, 배용준 허벅지. 털썩
음란하지 않은 음란서생.은 재미없었어용-

마늘빵 2007-01-16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스캔들>은 남자나 여자나 다 야했는데. 음란서생은 제목만 야해요. ^^
배용준 허벅지 ㅋㅋㅋ

... 2007-01-16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캔들 보고 음란서생을 보면 확실히 재미없을 것 같아요.
스캔들의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음란서생은 거기에 묻히는 듯...



마늘빵 2007-01-17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너무 스캔들 따라하기 구도로 갔다가 모든 면에서 실패해버렸죠. 한석규는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캐스팅도 좀 문제 있었고.

비로그인 2007-01-17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금에 야한 이야기만큼 언제나, 늘, 변함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 없지요.
야설, 야한 이야기, 소설들이 공식적이며 밝은 곳에서
지금보다 활성화되기를 기원합니다.
야한 소설에도 고전이 있지요.
아나이스 닌이라든가. 에리카 종이라든가..
훌륭한 소설들입니다. 젊은시절에 겁나 좋아하며 열독했지요.
야설은 사람들의 행복에 명백히 기여하므로 장려해야합니다. 하하


마늘빵 2007-01-17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한사님 저는 야한 소설은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기껏해야 <혼자 뜨는 달>인가 하는거, 이렇게 추천해주시니 한번 일독해야겠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