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 위한 철학통조림 - 고소한 맛 1318을 위한 청소년 도서관 철학통조림 4
김용규 지음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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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을 위한 철학 통조림>(고소한맛)은 동일제목의 책 '담백한맛'에 이어 인식론과 과학철학을 이야기한다. 지난번 책에서는 앎이란 무엇인가로 시작된 물음에서부터 데카르트의 인식론까지 이어졌고, 이번엔 데카르트를 넘어선 칸트와 자신으로서 철학을 끝내려했던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열린 사회와 그 적들>로 더 유명한 포퍼, 수능시험 언어영역 지문에 자주 출제되었던 패러다임 이론의 주인공 쿤, 그리고 이름도 생소한 처음 들어본 마투라나를 다룬다.

  흔히 '서양철학사'라고 했을 때 마지막에 다루어지는 철학자는 칸트, 헤겔, 니체, 하이데거 정도다. 그러니 학부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나로서도 학부시절 따로 관심갖고 찾아보지 않는한, 어느 정도 들어본 철학자는 거기에서 그칠 수 밖에 없다. 동시에 '서양철학사'의 범주는 매우 작은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여기서 쿤이나 포퍼 같은 이들은 철학사의 영역 안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어떤 기준으로 철학사에 들어갈 철학자와 그렇지 않은 철학자를 분류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모든 학문에 있어서 논의의 끝에선 00철학을 다루기 때문에, 영역의 구분짓기가 모호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본래 생물학자였다가 사색의 끝에서 철학과 조우하고 여기서 새로운 논의를 창출해낸 이를 두고 철학자로 분류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고민은 '철학사'를 집필하는 이들에겐 그야말로 고민이다.

  하지만 '철학사'를 집필하는 것이 아닌, 각각의 해당 분야, 인식론, 형이상학, 과학철학, 분석철학 등등에서 논의를 시작하면, 그가 무엇을 전공했고, 무엇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든 간에 관계없이, 의미있는 논의를 이끌어낸 이들은 모두 포함될 것이다. 인식론을 다루는 이 책에서 끝에 마투라나 라는 생소한 이름을 접하게 된 건 그런 맥락이다. 마투라나는 인지생물학자로 분류되어있고, 그의 주전공 또한 생물학이다. 그러나 그는 인지론에 있어 상대주의적 인식론인 급진적 구성주의의 정초자로 알려져있고, 이러한 맥락에서 다른 철학의 영역과는 만날 일이 없지만, 인식론에 있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하는 철학자이다. 마투라나는 생물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인지생물학, 인식론, 인지론으로 나아가 윤리학과 조우한다.

   "...... 누구나 다 아는 이 세계는 오직 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다른 이들과 함께 내놓은 '어느 한' 세계임을 깨닫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그리고 우리가 다르게 살 때만 세계가 변할 것이라는 것을 알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앎의 앎은 우리를 얽어맨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면, 더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마치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 p.257 : 마투라나, <인식의 나무> 中)

  "우리의 세계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내놓은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다른 이들과 다투더라도 '그들과 계속 함께 살야 하는 한' 자신만의 확실한 어떤 것을 진리라고 고집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을 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과 함께 살고 싶으면 그것이 아무리 마땅치 않게 보인다고 해도, 그들에게 확실한 것 또한 '우리의 것만큼이나 정당하고 타당함'을 인정해야 한다. ...... 이런 행위를 가리켜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좀 약하게 표현하면 일상생활에서 내 곁에 남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문 p258 : 마투라나, <인식의 나무> 中)

  이로부터 저자 김용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놓는다. 

 "윤리와 지식에 대한 마투라나의 입장은 "무릇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라는 그의 아포리즘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함'과 '앎'을 각각 행위와 경험, 곧 '세계를 내놓은 행위'와 '세계를 인지하는 경험'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과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이라고도 표현했다. 그렇다면 "무릇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 라는 아포리즘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세계를 내놓은 행위'와 '세계를 인지하는 경험'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 즉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과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투라나의 인지론에서 지식과 윤리가 분리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함'과 '앎'이 서로 반복하여 순환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를 구성해 내놓으면 '그렇게' 구성된 세계를 경험하며, '그렇게' 구성된 세계를 경험하면 다시 '그렇게' 세계를 구성해 내놓는다는 말이다. 달리말해, 우리가 '그렇게' 존재하면 세계가 우리에게 '그렇게'나타나고, 세계가 우리에게 '그렇게' 나타나면 우리가 다시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투라나의 인지론에서 지식과 윤리가 서로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이유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함'과 '앎'의 이러한 순환구조가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윤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함'과 '앎'의 순환은 당연히 그것을 결정한다. 즉 '세계를 내놓는 행위',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이 선하면 선순환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악하면 악순환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p260-261) 

  인식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 앎과 함은 동일하며, 마투라나에게 있어서 '세계를 내놓는 행위'와 '세계를 인지하는 경험'은 분리시킬 수 없다. 고로 우리의 인식과 존재는 서로가 반복 순환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고, 윤리는 우리의 인식과 존재로부터 결정된다. 어떻게 세계를 인지하고 내놓는가에 따라 선순환과 악순환은 결정된다. 그것이 마투라나의 인지론이 윤리학과 만나는 지점이다.   

  가볍게 읽으려고 접한 철학통조림을 통해 기대보다 꽤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일단 저자의 글솜씨와 이야기를 엮어내는 솜씨에 놀라고, 내 머리 속에 조각들로 존재하는 지식을 한 줄로 꿰어줬다는데 고마움을 느끼고, 이름만 알고 책은 읽어보지 못했던 쿤과 포퍼, 비트겐슈타인, 로티을 접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또 생소한, 하지만 유명한 인지생물학자 마투라나를 알게 해주었다. 이래저래 이 책은 애초 나의 기대보다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지식의 조각들이 팽팽하게 들어맞지 않는 한 이 시리즈를 반복해서 읽을 것이다.

  지난주 신문에서 마투라나의 새 책을 접했다. 매주 신문 책 소개란을 보면서 보관함에 넣는 책이 많아지는건 그만큼 관심갖는 영역이 넓어졌다는 뜻일게다. 이 책을 통해 마투라나를 접하지 않았다면 나는 <앎의 나무>를 보관함에 넣지 않았을 것이고, 그가 쓴 이전의 다른 책들 또한 무심코 지나가버렸을 것이다. 좋은 책 한 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관심의 영역을 넓혀주며 동시의 인식의 영역에 있어서도 넓이와 깊이를 더해준다.  매달 지출하는 도서비용은 점점 더 늘어날테지만 앎의 영역을 확장하는건 나에겐 즐거움이다. 이 책이 내게 준 부차적인 도움들을 제외하고라도 순수하게 이 책의 기획의도와 목적만을 놓고 평가해봤을 때도 매우 잘 쓰여진, 누구에게나 유용한 철학서다.

 * 이번에 출간된 마투라나의 <앎의 나무>는 그의 저서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인식의 나무>의 새 번역본이다. '인식의 나무'가 '앎의 나무'로 제목만 바뀌어 새 옷을 입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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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23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품을 구매하는데 있어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힘이 디자인인 것처럼 -
책에 끌리게 만드는 첫 번째 요인은 역시 제목이라는 것을 또 한번 느낍니다.
이 책은 시리즈 형식인 것 같은데, 다 읽고 싶네요.
인생이 정말 항상 '고소하고' '담백하면' 좋겠지만 말입니다. (웃음)
아, '쓰고 역한 맛'도 있기 때문에 인생인건가 싶지만.

마늘빵 2007-04-23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제목. 제목이 참 가볍고 쉽게 느껴졌는데, 제목에 비해서는 꽤 진지하고 깊이있습니다. 다만 맛깔나게 조리했을 뿐이지요. 하나를 읽으면 다 읽으셔야 해요. 줄거리가 쭉 이어지거든요. 다 읽으신 다음에는, <알도와 떠도는 사원>을 보세요. 모든 것이 다 종합되어있는 환타지 소설이에요.

비로그인 2007-04-23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또 좋은 책을 추천해 주시는군요. (웃음)
예. 여름이 오기 전에는 - 이 맛있는 통조림들을 다 맛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식을 위한 철학통조림 - 담백한 맛 1318을 위한 청소년 도서관 철학통조림 3
김용규 지음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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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통조림 조리사 김용규가 전작인 <도덕을 위한 철학통조림> 두 권을 통해서 '윤리학'을 쉽게 풀어냈다면, <지식을 위한 철학통조림>을 통해서는 '인식론'을 풀어내고 있다.

  인식론이라는 것은, 영어로 epistemology 라 하여, 과학을 뜻하는 그리스어 episteme 와 담론을 뜻하는 그리스어 logos의 결합으로 이루어져있다. '인식의 일반적인 과정에 대한 분석이나 연구'라는 의미로, '지식이론' 과 '인지학'과 동의어이다. 작게는 '과학적 정신'에 대한 분석. 과학이 사용하는 방법, 과학적 위기, 과학의 역사를 연구하며, 어떤 특정한 과학에 대한 철학적 연구(수학 철학, 역사 철학, 생물 철학 등)도 포함한다. (엘리자베스 클레망의 <철학사전> 참조) 

  <지식을 위한 철학 통조림( 담백한 맛 )> 에서는 그리스 신화인 프로메테우스로부터 시작하여 지식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그리스 소피스트의 궤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플라톤의 상기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론, 베이컨의 귀납법, 데카르트의 연역법까지를 다룬다. 각각의 장 뒤에는 '보너스캔'이라 하여 저자 김용규가 먼저 낸 책 <알도와 떠도는 사원>에 등장시킨 알도와 레나를 등장시키며 해당 장에서 이야기한 바를 하나의 에피소드를 만들어 소설 속에서 쉽게 재현해냈다. 또한 연극이 벌어지는 각 장면은 프로메테우스의 경우 코카서스산, 소크라테스의 경우 감옥, 플라톤의 경우 동굴,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아테네 학당 등 각각의 등장인물들과 매우 관련이 깊은 곳을 택함으로써 해당 철학자의 삶의 터전과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하였다.

  앎이란 무엇이고, 지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고대 그리스 신화와 소크라테스에게서 시작하여, 이후로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의 앞에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가를 따져 묻는 데카르트에 이른다. 또한 <지식을 위한 철학 통조림> 2권인 '고소한 맛'에서는 믿을 만한 지식은 무엇인가, 진리는 어떻게 인식하는가, 우리가 믿고 있는 지식이란 변하지 않는 진리인가, 아니면 변하지 않는 진리라 믿는 것인가, 등등을 따져묻는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포퍼, 쿤, 마투라나에 이르며 과학철학의 부분을 건드린다. 사실 철학에 있어 인식론이란 과학철학, 심리철학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처음에는 단지 앎이란 무엇인가, 라는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하였지만, 점차 논의가 세분화되고 확장되며 과학와 마음의 영역까지 끌어들이게 된다. 또한, 존재론, 형이상학, 윤리학 등등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철학의 분야를, 심리철학, 과학철학, 해석학, 인식론, 윤리학, 정의론, 정치철학 등등으로 나누지만 모든 것은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되어있다. 2권의 끝에서 생물학자인 마투라나가 등장하는 것은 뜻 밖의 사건은 아닌 셈이다.

  프로메테우스부터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장들은 별개로 독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소피스트에게서의 지적되는 문제점은 소크라테스에게로, 소크라테스의 한계점은 플라톤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며 데카르트에 이른다. 고로 하나의 장에 한 명의 철학자가 등장한다고 하여 따로 읽어서는 안되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스토리로 구성되어있다고 봐야한다.

  김용규는 내게 기존에 알고 있는 철학사의 단편적인 지식들을 하나로 꿰어주는 마법사이다. 그 누구도 철학사를 하나의 스토리로 인식하게끔 가르쳐주지 않았으며, 나의 짧은 철학적 지식이란 것도 각각의 조각들로 바다를 표류하고 있다. 결국 공부는 스스로가 해야하는 것이고, 조각난 지식들을 꿰어 맞추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이런 책들을 만나면 조각난 퍼즐은 한결 맞추기 쉬워진다. 청소년용 철학서라 하지만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기 위해 바다 위를 유영하는 나같은 이들을 위해 안성맞춤인 책이다. 책이 청소년용이라 하여, 유아용이라 하여 그네들만 읽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아주 유치한 동화라 할지라도 그것이 내게 유용하다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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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04-22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 홍이에게도 유용하겠죠? ㅎㅎㅎ

마늘빵 2007-04-22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 요고 근데 대략 고등학생 수준에서 봐야할 거 같아요.
 
알도와 떠도는 사원
김용규.김성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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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저자 김용규에 대한 관심은, 그가 지금까지 쓴 책들에게로 나를 몰아갔고, 결국 좋아하지 않는 환타지 장르의 소설까지 읽게 만들었다. 검색창에 '김용규' 라 쳤을 때 뜨는 <알도와 떠도는 사원>은 그의 다른 책들과는 성격이 너무도 달라, 동명이인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러나 분명 저자 이력을 확인해보니 그가 맞았고, 그렇다면 그는 철학서를 쓰면서, 곁다리로 환타지 소설가로서의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이런 의문은, 이 책의 부제를 통해 해결된다. 철학 환타지.  아마도 이 책이 단순한 환타지 소설이었다면 접하지 않게 되었거나 뒤늦게 접했을 것이다. 환타지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전자의 이유이고, 그것이 김용규의 작품이라는 것이 후자의 이유다. 하지만, '철학 환타지'라는 부제를 통해 두 가지 선택은 모두 날아갔고, 곧바로 이 책은 장바구니로 들어갔다. 

  저자후기를 통해 김용규는 이 책이 <소피의 세계>나 <장미의 이름>보다 더 유익하다는 과분한 찬사도 들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건 사실이다. 두 책을 모두 읽었고 두 책 모두 좋아하는 나로서는 감히 <알도와 떠도는 사원>을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싶다. <소피의 세계>는 철학소설이고, <장미의 이름>은 추리소설이고, <알도와 떠도는 사원>은 환타지 소설이라는 각각 다른 세 장르의 영역에 있지만, 세 책은 재미와 동시에 읽는 이의 지적욕구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하겠다. <알도와 떠도는 사원>은 <장미의 이름>만큼이나 흥미진진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어렵지 않고, <소피의 세계>만큼이나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그만큼 장황하지 않다. 쉽게 읽히면서 많은 철학지식을 동원하지 않고도 윤리학과 인식론의 핵심적인 고민들을 안겨주고 적절한 지식을 선사해준다. 동시에 그리 두껍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첫장을 열면서 마지막장을 닫을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등장해 자신의 영역을 서서히 굳혀가고 있는 철학자 김용규가 궁금하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경험들을 했길래 이런 책을 쓸 수 있는걸까. 그가 지금까지 쓴 책이라고 해봐야 철학통조림 시리즈와 이 책이 다이지만, 또 그것이 철학사상서가 아니라 청소년 책이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란 생각이다. <알도와 떠도는 사원>이 나오기 위해서는, 소설의 요건을 갖추어야 하고, 해박하고 깊이있는 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 밖에 등장하는 물리학, 생물학 등등의 지식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어느 하나 만족시키기 어려운데 이 모든 것을 조합해 제대로 조리한 그가 대단해보인다. 그는 전공인 철학 뿐 아니라 참으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많은 지식을 섭렵하고 있었으며, 그 모든 지식들과 탁월한 글솜씨가 조화를 이루어 이와 같은 작품이 탄생했다. 동생인 김성규 씨와의 공동작인데, 이력으로 추정컨대 김용규는 내용을 담당하고, 김성규는 이것을 소설로 다듬는 작업을 담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때 두 권으로 나뉘어 선보였던 이 책이 주목받지 못했던 것은 지금의 출판시장의 풍토와 그때는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하고 재밌는 책들이 많이 나오면서 철학대중서를 비롯한 인문대중서들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 책은 껍질을 바꾸고 다시 나올 수 있었으며, 대중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김용규의 통조림 시리즈가 인기를 끌지 못했다면, 그가 주목받지 못했다면, 어쩌면 이 책도 다시 한번 묻혀졌을지 모른다. 통조림 시리즈는 김용규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고, 김용규에 대한 관심은 그의 책을 다 사보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결국 이 책도 그러한 맥락에서 접한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새로운 형태의 환타지 소설이 아니다. 이는 저자의 초판후기를 통해 확실히 드러난다. 김용규는 분명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었던게다. 그 메세지 전달이 효과적이려면 쉽게 읽히는 소설이어야 할 것이고, 환타지 장르는 철학과 과학 지식을 적절히 조리하기 좋은 그릇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은 전문인의 시대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전문인이 되려고 노력하며 또한 되어야만 한다. 전문인이란 기술자, 과학자, 관리자, 경영자, 의사, 법률가, 디자이너 등과 같이 도구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의 힘은 실용성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문인의 활동은 그 본성상 개인적이며 합목적적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지식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덕적, 거시적 전망이 요구되지 않는다. 여기에 이들이 중심이 되는 현대 사회의 위험성이 잠재되어 있다.

  문제는 또한 우리의 삶이다. ... 중략 ... 우리의 삶과 사회를 의미 있고 풍요롭게 하는 다양하고도 숭고한 인류 보편적 가치들 대신에 실용성, 경제성이라는 획일적 가치만을 추구하면서, 기계적이고도 과도한 경쟁 체계 속에 살아야 하는 오늘날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황폐해지고 있다. 이들의 삶은 마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열차에 오른 것과 같이 불안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해결의 열쇠는 지식인이라는 말에 있다. 지식인이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수호하며 사회에 구현하려는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자이다. 때문에 이들의 사고와 행동은 초개인적이고도 합리적이며 도덕적이고 또한 인간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고와 행동에 의해서만 사회가 발전하며 개인의 삶이 풍요로워진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단순한 전문인이 아니라 지식인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지식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은 '보편적 주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한다. ... 중략 ...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바르고도 바람직한 지식과 견해를 가져야만 하는데, 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곧 사상들이다. ... 중략 ...

  <알도 시리즈>는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화, 예술, 교육, 철학, 종교 등등 각 분야에 관한 다양한 사상들을 소설 형식에 담아서 독자들이 건전한 지식인으로서 가져야 할 각종 지식들을 흥미롭고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풍요롭고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한 삶의 지침서이며, 전문인이 아닌 지식인이 되기 위한 단초를 마련하는 책이다. 중요한건 여기 나오는 철학사와 과학사의 지식이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사유하는 나의 삶이다. 이 책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려주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나의 풍요롭고 의미있는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문제다. 한참 진로의 고민에 빠져있는 청소년들 뿐만 아니라 삶의 나침반 없이 하루하루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유용'하다. 철학은, 매우 실용적인 학문이다. 다만 사람들은 철학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으로 '유용하게' 다루지 못할 뿐이다. 아직까지 철학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있는 이들은 이 책을 '읽으며' 재미를 느끼고, 이 책을 '읽은 후에' 사색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철학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철학을 사랑하게 되면 다음은 나의 삶이다.

 *  <지식을 위한 철학 통조림> 두 권과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 두 권을 먼저 읽고, 이 책을 접한다면 더욱 수월하게, 유익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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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콘서트 1 - 노자의 <도덕경>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위대한 사상가 10인과 함께하는 철학의 대향연 철학 콘서트 1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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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읽은 어떤 철학 대중서보다도 '안' 철학적이고, '안' 어려운 책이다. 오늘은,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천시받는 동시에 인기를 끄는 기이한 현상을 바라보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가 부풀려진 것이니, 거짓된 것이니, 인문학을 하는 이들이 게으르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니  '인문학의 위기'의 실제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어쨌든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천대받는건 명백한 현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현실의 삶과는 달리, 출판시장에서는 철학이 인기를 끌고 있다. 아마도 논술열풍 때문이렸다. 이렇게라도나마 사람들이 인문학 지식과 인문학적 사유에 관심을 갖는건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얼마전 황지우 시인이 문화부장관에 내정되었다는 깜짝 기사를 봤는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제 얼핏 버스 라디오에서 문화부장관에 누가 내정되었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는 아닌 것 같았다. <철학콘서트>는 황지우 시인의 동생인 황광우 씨가 쓴 책이다. 권두문을 작성한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서양 사람이라면 한 시대의 의식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고 흔히 간주되곤 하는 철학자, 예술가, 행동가가 한 가족 안에 모여 있다는 데에 경탄을 표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황광우 씨의 첫째 형은 스님, 둘째 형은 시인, 그는 노동운동가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정말 각각의 다른 세 분야에 머물며 도를 닦는 이 형제들이 대단해보인다.

  저자 황광우는 고교 시절 반독재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 제적되었고, 검정고시로 서울대 사회과학대에 입학했으며, 1980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제적을 당하며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로 살았다. 1998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뒤늦은 나이에 졸업했고, 2002년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광주 '다산학원'에서 제자들과 고전을 공부 중에 있다한다.

  참으로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다.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으면서 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깊이있는 자기성찰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탐독한 고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닐까, 몸으로 부딪히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그런지 <철학콘서트>는 노동을 중심으로 쓰여졌다. 대중적인 철학책도 나름 글쓴이의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쓰여진다. 철학사의 객관적인 지식을 쉽게 전달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나의 주관에 따라 대상철학자를 선정하고 나의 주관에 따라 그들을 해석하는 책도 있다. 황광우의 <철학콘서트>는 후자에 속한다. 고로 이것이 철학사에 등장하는 철학자에 대한 객관적 시각이다, 라고 생각하지는 말 것. 철학자 선정에서부터 그에 대한 해석까지 모든 것은 황광우 개인의 주관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렇다하여 이 책이 잘못 쓰여졌다는 말은 아니다. 소위 '객관적'이라 칭하는 그것들도 실상 객관적일수 없으며, 단지 많은 이들의 평가와 해석이 주로 그렇다, 라는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 책에서 황광우는 흔히 철학사에서 다루지 않는 이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고작 10명 밖에 안되는 이들을 다루면서 철학사에서 제외한 '철학자'를 집어넣은 이유는, 이 책을 읽어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그것은 저자 황광우의 삶의 이력을 타고 들어간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공자와 노자, 예수와 석가, 토마스모어와 애덤스미스, 퇴계이황,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이들을 담아냈다. 서양 고대철학의 핵심인물들과 종교계의 성인들, 철학자로 다루지 않는 토마스모어와 애덤스미스, 한국철학의 거장 이황, 여기 다룬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마르크스까지. '차례'만 보고서는 대상을 선정한 기준을 알 수 없다. 하지만 내용을 읽으면 이해된다.

  이 책이 다른 철학대중서들과 다른 독특한 점 중 하나는, 서로 잘 비교하지 않는 이들을 끌어다 비교한다는 것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비교하고, 애덤 스미스와 플라톤, 애덤 스미스와 한비자, 애덤 스미스와 맹자를 비교한다. 순서도 어떤 기준인지 알 수가 없다.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석가가 나오고 공자가 나오고 예수가 나온다. 그러다 퇴계가 나오고 다시 토마스 모어가 나오고, 끝에가선 마르크스 이후에 노자가 나온다. 나름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토머스모어에서 애덤스미스, 마르크스, 노자로 이어지는 부분은 그럭저럭 이해가 되지만, 예수에서 퇴계로 이어지는 부분은 아무런 맥락이 보이지 않는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지금, 저자 황광우가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은 철학사를 좀더 쉽게 풀어 설명하자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들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철학자들을 빌어 노동을 이야기하고, 삶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가장 황광우의 삶과 어우러지는 철학자가 있다면 마르크스가 될 것이요, 다음과 같은 문구는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대표하여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이 자신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자신의 의식을 결정한다." (p251-252) (마르크스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中)

  황광우는 마르크스 이전에 애덤 스미스 편에서 이미 이와 비슷한 말을 한 바 있다.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가 그의 의식을 결정한다. 인간이 어떤 사회 관계 속에서 살아 가느냐에 따라 그의 의식이 결정되는 것이다."라고. 이 부분은 애덤 스미스와 한비자를 비교하며 설명하던 중 <한비자>를 인용하며 첨언한 말이다. 마르크스와 유사한 이 발언이 애덤스미스와 한비자를 비교하는 부분에서 나왔다는 것이 재밌다.

  황광우가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에게 콘서트를 선사했으니 이제 독자들이 저자와의 대화를 통해 삶으로 들어가는 길만 남았다. 첫 장을 읽는 순간 당신은 이 콘서트가 끝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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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1 1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4-22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어떻게 황광우씨를 아시는거에요? 님은 유명인이랑 친분이 있나봐요. 담에 나도 껴줘요. :)

eachtogether 2007-05-0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 제가 알기로는 황광우 아저씬 감옥에 안 가셨다 하신 것 같은데,,

웬지 민주화 운동 한 사람이라면 감옥에 갔다 왔다는 생각을 가지신 것 같아서 몇 글자 끄적입니다. 물론 제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지만요..

마늘빵 2007-05-0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감옥에 갔다는 기록은 못 본 거 같습니다.
(이치투게더님 반갑습니다)
 
철학 콘서트 1 - 노자의 <도덕경>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위대한 사상가 10인과 함께하는 철학의 대향연 철학 콘서트 1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6월
구판절판


당신은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인간이 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이다. 당신은 칸트처럼 인간의 행복이 도덕적 의무의 준수에 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벤담처럼 쾌락의 증대에 있다고 보는가? 어느 쪽을 추구하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이다. 유토피아는 당신의 철학과 가치관과 취향을 간섭하지 않는다. 유토피아가 하고자 하는 모든 사업의 목적은 생존을 위해 투여해야 하는 노동시간을 줄이고, 자유시간을 늘리는데 있다. 행복은 당신이 찾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누리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목적은 모든 시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는데 있다.
(토마스 모어 편 中)-188쪽

"유토피아에서 사유재산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회에 대해 열심히 일합니다.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것이 공동의 소유이므로 결핍과 공포가 없습니다. 유토피아에서는 돈이 사라졌고 아울러 돈을 벌려는 열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돈으로 인한 많은 범죄가 사라졌습니다. 금전 사용의 종말은 사기, 절도, 강도, 말다툼, 분규, 반란, 살인, 배신, 독살 등 많은 범죄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돈이 사라지면 돈으로 인한 불안, 긴장이 사라집니다. 그렇습니다. 가난, 그것이 돈의 결핍을 의미한다면 화폐의 소멸은 가난의 소멸을 의미할 것입니다."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中)-192-193쪽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가 그의 의식을 결정한다. 인간이 어떤 사회관계 속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의 의식이 결정되는 것이다. 의원이 환자의 고름을 빠는 것은 그의 도덕적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이해관계 때문이란다. 장의사는 그의 이해관계 때문에 죽음을 바라는 악마적 심성을 갖는 것이고, 이렇게 한비자는 인간의 이기심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 섭섭해하는 분이 있다. 스미스의 대선배 격인 홉스가 한마디 아니 할 수 없다.

... 중략 ...

만일 국가가 없다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홉스는 단언한다. 그야말로 인간을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이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본 것이다. 이렇듯 홉스는 한비자나 모두 인간을 이기적인 조재로 보았는데, 우리는 왜 유독 스미스의 이기심에 주목하는가? 홉스가 한비자 모두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전제로 전제군주의 강력한 통치를 역설했다면, 이와는 정반대로 스미스는 "정부는 경제 활동에 간섭하지 말라" "각자 자신의 이기심에 충실하도록 자유방임하라" "그것이 공익을 실현하는 지름길이다" 라며 자유주의 경제 이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애덤 스미스 편 中)-203쪽

"그들은 자신이 세운 이상적인 계획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계획이 조금이라도 수정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계획과 수많은 이해는 아무 고려도 하지 않은 채, 계획의 모든 부문을 완벽하게 짜나간다. 그들은 장기판에서 말을 옮기는 것만큼 사회를 계획하는 일을 쉽게 생각한다. 장기판의 말은 손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지만, 인간 사회라는 거대한 사회는 저마다 자신의 독자적인 운동 원리에 입각하여 움직인다. 인간 사회가 독재자의 의지대로 움직여준다면 사회는 조화롭게 굴러가겠지만 독재자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을 경우 사회는 불행해진다."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中)-207쪽

"우리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욕구는 자궁에서 태어나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지속적인 욕구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람은 자신의 상황에 완벽하게 만족하는 경우가 단 한 순간도 없다."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中)

토머스 모어가 대중을 사회의 주체로 파악한 점에서 플라톤을 넘어섰다면, 애덤 스미스는 대중을 역사 변화의 창조자로 파악한 점에서 플라톤을 능가했다. 역사는 철인의 지혜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대중의 창의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다. 스미스의 사상은 이기심을 존중한 점에서 한비자와 유사하다면, 대중의 경제 활동을 존중한 점에서 맹자와 유사하다. 안정된 생산 활동이 안정된 심성을 낳는다.
(애덤 스미스 편 中)-208쪽

고대 공동체 내의 분업과 근대 공업 내의 분업은 무엇이 다른가? 고대 공동체에서 생산물의 대부분은 공동체 자체의 직접적 수요를 충족하는 물품인 반면, 근대 공업의 생산물은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상품이다. 고대 공동체에서 생산물을 분배하는 원리는 관습인 반면, 근대 공업에서 각 생산물의 가격을 매겨 적당한 보수를 받게 하는 것은 시장이다. 고대 공동체에서 작업자는 물품의 전 공정을 다루는 장인인 반면, 근대 공업의 작업자는 무수히 많은 공정으로 잘게 나누어진 부분 노동의 수행자이다. 요컨대 근대 공업 노동자 그 자체가 기계의 부속품이다.
(애덤 스미스 편 中)-210쪽

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들은 경제의 효율을 추구하는 것을 합리적 행동으로 간주했고, 효율을 위해서 자유로운 경쟁을 자연법칙으로 내세웠다. 그 결과 발생하는 사회의 불평등은 아프리카 초원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처럼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에 반해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들은 경제의 형평을 추구하는 것을 정의로운 행동으로 간주했고, 형평을 위해서 사회적 연대를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발생하는 경제의 비효율이나 노동자의 게으름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자유냐 평등이냐?
(애덤 스미스 편 中)-216쪽

인간의 본질은 노동에 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연과 소통하며, 노동의 열매를 사회에 제공하면서 사회적 존재가 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진화해왔으며, 노동을 통하여 자아를 실현한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이 노동의 과정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외적 강제에 의해 통제되는 한, 인간은 불행하다. 자아를 실현하는 이 노동 과정이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했을 때, 노동자가 느끼는 것은 비참함이요, 자아의 상실이다.
(애덤 스미스 편 中)-219쪽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상정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분명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 원리가 존재한다. 이 원리들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지켜보는 즐거움 밖에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연민과 동정이 이런 종류의 원리이다. 타인의 비참함을 목격하거나 생생하게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느낀다."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中)-220-221쪽

"거미는 직포공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며 꿀벌의 집은 많은 건축가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라도 가장 훌륭한 꿀벌보다 뛰어난 점은, 그는 집을 짓기 전에 미래 자기의 머릿속에서 집을 짓는다는 것이다. 노동 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릿속에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의식하고 있는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자본론> 中)-228쪽

"1.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독립된 특정의 생산관계 속에 편입된다. 생산관계는 물질적 생산력의 특정 발전 단계와 조응한다. 이러한 생산관계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구조를 형성하고, 이 경제구조 위에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지며(교육, 예술, 종교, 윤리 등) 특정 형태의 사회의식들이 이 상부구조에 조응한다.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은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활동 전반의 성격을 결정한다. 인간의 의식이 자신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자신의 의식을 결정한다."
(마르크스,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中)-251-252쪽

"2. 기존의 생산관계는 생산력을 구속하는 질곡으로 변한다. 이리하여 사회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 경제적 기초가 변하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재빨리 변혁된다. 어떠한 사회구성체도 생산력이 그 안에서 발전할 여지가 있는 한 결코 사멸하지 않으며, 보다 높은 새로운 생산관계는, 낡은 사회의 태내에서 새로운 물질적 조건들이 성숙하기 이전에는 출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류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자기에게 제기한다.'
(마르크스,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中)-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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