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구판절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다" (몽테뉴)-1쪽

"타인과 대화할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일이다."-16쪽

"낯선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나는 돈 많은 손님을 맞는 호텔 수위처럼 노예 같은 ㅌ ㅐ도를 취하는데, 이는 호의를 얻으려는 무분별한 욕망에서 비롯된 행동이다."-16쪽

"정확한 진술이란 이성적으로 결코 모순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진술은 그릇됨이 증명될 수 없어야 진실이 될 수 있다. 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믿고, 그들이 제 아무리 저명한 인물이라 해도 그릇된 점이 증명되는 진술이라면 그것은 거짓임에 틀림없고, 그러면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40쪽

"하나의 관념이나 행동이 유효하냐 아니냐는 그것이 폭넓게 믿어지느냐 아니면 매도당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논리의 법칙을 지키느냐의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다."-70쪽

"한 인간이 일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혜가 제공하는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이다."(에피쿠로스)-93쪽

"무엇인가를 먹거나 마시기 전에, 무엇을 먹고 마실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구와 먹고 마실 것인가를 조심스레 고려해보라. 왜냐하면 친구없이 식사를 하는 것은 사자나 늑대의 삶이기 때문이다."(에피쿠로스)-93쪽

"우리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켜봐줄 누군가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내뱉는 말은 다른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94쪽

"현명한 사람은 가장 많은 양의 음식이 아니라 가장 맛있는 음식을 선택한다."(에피쿠로스)-96쪽

"불안을 다스리는 데는 사색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 문제를 글로 적거나 그것을 대화 속에 늘어놓으면서 우리는 그 문제가 지닌 근본적인 양상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문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것들, 말하자면 혼동, 문제의 악화, 준비없이 당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고통 등을 예방할 수 있다." -96쪽

"삶이 이어지지 않을 죽음 후에는 전혀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에게는 삶 또한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에피쿠로스)-98쪽

"결핍에서 오는 고통만 제거된다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음식도 호화로운 식탁 못지 않은 쾌락을 제공한다."(에피쿠로스)-101쪽

"삶의 본연의 목적이라는 잣대로 측량하면, 빈곤은 커다란 부고 무한한 부는 커다란 빈곤이다."(에피쿠로스)-113쪽

"동물은 자신의 목을 매고 있는 밧줄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지만 그것은 오히려 밧줄을 더 단단히 조이는 결과가 된다. ...... 순응하지 않고 마구 몸부림친다고 해서 묶여 있는 동물의 고통이 덜해지도록 적당히 느슨하게 만든 멍에는 이 세상에는 절대로 없다. 저항할 수 없는 악에 맞서 고통을 경감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굴복하며 참는 것이다."(세네카)-118쪽

"가벼운 슬픔은 말이 많고 큰 슬픔은 말이 없다"(세네카)-120쪽

"가능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미래에 대한 낙관에는 위험스런 순진함이 들어있다.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사고는 어떤 것이든, 그게 제아무리 드물고 시간적으로 멀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것에 대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하는, 일어남직한 일들이다."-144쪽

"불공평은 정의의 규율들이 침해당했다는 느낌을 말하는데, 그 규율들이 약속하는 것은, 만약 명예로운 행위를 하면 보상을 받을 것이고 나쁜 짓을 하면 마땅히 그에 따르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원칙이다."(세네카)-148쪽

"근심이란 불확실한 상황에 처해 심리적 동요를 느끼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런 경우 당사자의 마음에는 어떤 일이 최선의 결과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과 최악의 결과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교차하게 된다."(세네카)-151쪽

"위안은 근심을 치유하는 대책 중에서 가장 잔인한 형태다. 장밋빛 예언들은 근심에 빠진 사람으로 하여금 최악의 결과를 무방비 상태로 맞게 할 뿐 아니라, 고의는 아닐지라도 그런 위안의 말에는 최악의 결과가 닥칠 경우 매우 비참할 수도 있다는 암시까지 담겨 있다."-152쪽

"철학자들은 돈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 누구도 지혜로운 자는 가난해야 한다고 운명짓지 않았다."(세네카)-155쪽

"바깥의 모든 것들이 미친 짓거리여도 좋으리. 집안에 불안의 요소만 없다면."(세네카)-167쪽

"저항할 수 없는 악에 맞서 고통을 경감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숙명에 굴복하며 참는 것이다."(세네카)-172쪽

"인간에게 어떤 사건들을 바꿀 만큼 힘이 없을지는 몰라도 그 사건들에 대한 태도를 선택할 자유는 주어진다"-178쪽

"은퇴 이후로 독서가 나를 위로한다. 독서는 괴롭기 짝이 없는 게으름의 짓누름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준다. 그리고 언제라도 지루한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켜준다. 고통이 엄습할 때도 그 정도가 매우 심하거나 극단적이지만 않다면 그 날카로운 예봉을 무디게 만든다. 침울한 생각으로부터 해방되려면 그냥 책에 기대기만 하면 된다."(몽테뉴)-186쪽

"우리가 어리석은 짓을 했다거나 어리석은 말을 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보다 넉넉하고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우리 인간이 한갓 멍청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몽테뉴)-193쪽

"책을 통해서 내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을 올바르게 활용하여 나 자신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책을 읽다가 어려운 문장을 만나기라도 하면 그 부분을 곰곰 생각하느라 손톱을 물어뜯는 일은 절대로 없다. 한두번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다 안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만약 어떤 책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면 나는 다른 책을 집어든다"(몽테뉴)-247쪽

"난해함이란, 말하자면 학식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학문의 공허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마법을 걸어 불러내는, 그리고 인간이 어리석음에 대한 보상으로 손에 쥐기를 갈구하는 한 닢의 동전과 같다"(몽테뉴)-249쪽

"나는 간혹 나 스스로 잘 정리할 수 없는 것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빌려 말하는데, 그 이유는 언어 구사력이 허약하기도 하고 가끔은 나의 지력이 허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종류의 글을, 특히 지금도 살아있는 사람에 의해 씌어진 최근의 글을 공격하는 성급한 비평의 무모함을 저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위대한 명성 아래로 나의 허약함을 숨겨야 한다."(몽테뉴)-258쪽

"이 세상에 태어난 데 따른 벌을 치르지 않아도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세네카)-259쪽

"몽테뉴는 학자들이 고전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쏟는 이유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을 지적인 존재로 비치고 싶은 허영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262쪽

"다른 어떤 주제보다도 책들에 대해 쓴 책이 많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책들을 서로 설명하는 것이 전부다. 모든 책들은 부족한 면을 가진 저자들에 대한 해설로 가득 채워져 있다."(몽테뉴)-264쪽

"있지도 않은 모습을 받아들이려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냥 두는 것이 더 낫다"(샹포르)-275쪽

"결혼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혐오스런 존재가 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다 하는 것을 의미한다."(쇼펜하우어)-278쪽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그 두 사람이 결합할 경우 신체구조가 매우 나빠 그 자체로 조화가 일그러진 불행한 존재를 낳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선언하는 것이다."(쇼펜하우어)-309쪽

"사랑이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 때, 사랑의 본래 계획에는 행복이란 절대로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겠는가"-312쪽

"가장 분별 있는 인간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애쓴다"(아리스토텔레스)-328쪽

"쾌락과 불쾌감은 서로 단단하게 묶여 있기 때문에 한 가지를 가능한 한 많이 누리려는 사람은 불가피하게 다른 한 가지도 그만큼 경험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 불쾌감을 가급적 적게 맛보면서 고통 없는 시절을 짧게 누리든지 아니면 이제까지 좀처럼 맛보기 힘들었던, 형언하기 어려운 쾌락과 환희를 누리고 그 대가로 불쾌감을 한껏 맛보든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만약 전자의 길을 결정하고 인간적인 고통의 정도를 줄이거나 낮추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또한 그 고통이 줄 수 있는 환희에 대한 기대치도 줄이고 낮춰야 한다."(니체)-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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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5-08-14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것두 한 방~

마늘빵 2005-08-14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함다 ^^
 

 

 

 

 

  감기인지 몸살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몸이 뻐근하고 머리도 지끈지끈하여 토요일 투잡스인 나는 오전에 원잡만 끝내고 집으로 바로 향했다. 배는 고픈데 배를 채울 만한건 집에 없네. 쟁반짜장을 하나 시켰는데, 다 먹고 나니깐 내가 너무 많이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 난 꼭 그런다니깐. 다 먹고 배터진대.

도저히 그냥은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먹자마자 쇼파에 누워서 티비를 켰다. 이 얼마만에 보는 티비더냐. 참 티비 안본지도 굉장히 오래됐다. 요새 영화도 못봤는데. 공중파에서는 별로 재밌게 없는거 같고, 케이블로 돌려보니 영화 몇 편이 상영중이다.

오늘 나의 선택을 받은 영화는 바로 이것.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머라 해석해야하지? 국가의 적? 갑자기 <공공의 적>이 떠오르는군.

다시 영화에 집중하자. 어디서 많이 본 인물이 주인공이다 싶더니 윌 스미스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도 모르겠다. 난 연예인이나 배우들 이름은 아주 유명한 사람들 빼고는 잘 모른다. 윌 스미스라는 것도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알았다. 볼 때는 모른다니깐. 부르스 윌리스나 졸리, 탐 크루즈 같은 아주 유명한 배우들 얼굴만 기억하지.

 영화 속 티비에서 공화당의 한 의원이 국가안보를 위한 법안을 제출했다고 한다. 이를 보고 흥분하는 로버트 딘의 아내. 그럴 수도 있지라며 별 생각 없이 내뱉는 로버트 딘. 하지만 정작 나중에 국가안보국으로부터 위협당하는 것은 로버트 딘이다.

오랫만에 만난 대학 동창 다니엘. 하지만 다니엘은 란제리 숍에서 딘을 만난 뒤 쇼핑백에 뭔가를 살짝 집어넣고는 황급히 자리를 뜬다. 그리고는 사망. 이 때문에 국가안보국으로부터 각종 위협을 받는 딘. 신용카드도 정지되고, 과거에 사귀었던 레이첼이라는 여자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 아내에게 배달되고, 아내를 팔팔 뛰고, 노동변호사인 딘은 신뢰를 잃어 회사에서는 짤리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과거에 안보국에서 일했던 브릴을 통해 도움을 받아내 결국 진실규명을 하게 되지만, 그간 그가 겪었을 고초를 생각하니 아찔하다.

 국가로부터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 처벌, 음모. 우리가 사용하는 전화, 휴대폰, 컴퓨터 인터넷망 등 모든 것이 국가의 감시를 받는 사회. 영화 속에서 브릴이 잠깐 언급했듯 누군가와 통화 중에 '대통령' '폭탄' 등의 낱말이 들리면 바로 도청을 받게 된다는 사실. 섬뜻하다. 당해보지 않으면 처음 딘이 아내를 향해 뭐 그런걸 가지고 라는 식의 안일한 태도를 보이겠지만, 실제로 당해보면 국가의 감시와 통제라는 것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점을 모르고 살아가겠지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조지오웰의 <1984년>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감시카메라에 의해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확연히 드러나는 사회. 모든 것이 국가의 통제 아래 있고, 모든 것은 조작된다. 오웰은 1984년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예상하고 책을 썼고, 그 시점은 대략 약간 늦춰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감시 당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강남구청에서는 강남지역 일대에 CCTV를 설치해서 동네 주민들을 감시하고 있고, 한 차례 이 CCTV로 인해 범인검거에 도움을 얻자, 인권침해라는 등의 반발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지금 강남에는 CCTV가 모든 이들을 감시하고 있다. 심지어는 다른 구청에서 그럼 강남의 범죄자들을 다른 구역으로 내모는 것 아니냐! 며 따지자, 돈 많은 강남구청 왈 "그럼 니네 구역에 CCTV 설치하는 비용을 대주겠다" 라고 말했다지.

 참 별거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참 별거 맞다. 모든 시민들이 잠재적 범죄자로 몰리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일찌감치 주민등록증 이라는 것을 통해 지문날인하고 국가의 감시체제에 들어간 우리는 그 말고도 우리가 평소에 인식하지 못하는 다양한 국가의 감시를 받아가며 살아가고 있다. 단지 정말 인식하지만 못할 뿐.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사건에 연루될지 모르는 일이다. 이걸 단지 음모론이라고 생각지는 마시길. 한 때 주민등록증에 지문날인 반대 운동을 벌이자 - 주민등록증을 없애자는 주장이었나 - 나도 그들의 생각에 공감은 했지만 결국 주민등록증 없이 이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생각해본 결과, 잔말 없이 구청에 가서 지문을 찍은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의식하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존재자.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국가안보라는 이름 하에 개인의 사생활과 인권이 얼마나 침해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강력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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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싶다 2005-07-03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은 지금은 좀 괜찮으세요? ^^ 저는 어쨌든 아프락사스님이 재밌다고 하시는건 재밌다고 봐요. ㅋㅋㅋ 저도 이 영화 한번 봐야겠네요.

마늘빵 2005-07-03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몸은 한결 낫습니다. 오늘은 바깥 나들이를 좀 해야겠어요.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알랭 드 보통 지음, 이강룡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번에 읽었던 스위스의 젊은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에 이어서 접한 그의 두번째 작품. (두번째란 의미는 순전히 내가 그를 접함에 있어서의 두번째. 그가 책을 낸 순서와는 상관이 없다)

 이런식의 개그는 절대 식상하지만, 절대 보통 사람 같지 않은 알랭 드 보통 씨는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라는 책을 통해서도 그만의 특유한 문체를 사용하며 독자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최근 알랭 드 보통의 작품들이 새롭게 디자인되어 출판계를 강타하고 있다.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여행의 기술>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등 그의 책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마치 <다빈치 코드>가 대박을 터뜨리자 댄 브라운의 이전의 다른 작품들이 쏟아져나온 것처럼 말이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한번 대박 터뜨린거 그의 이름을 빌려 다 팔아보자는 속셈이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는 즐겁다. 이런 기회에 이 즐거운 작가를 접하게 되었으니 말야.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라는 책의 원래 제목은 <KISS & TELL>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명한 인물과 맺었던 밀월 관계를 언론 인터뷰나 출판을 통해 대중에게 폭로하는 행위를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다 그런 다소 딱딱하고 뉴스거리같은 책의 제목이 우리네 번역서에는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라는 달콤한 언어로 표현이 되었던가? 그건 모를 일이다. 출판사만이 알일.

 절대로 이 책에서는 우리가 키스하기 전에 무슨 말들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키스를 못해봐서 키스를 하려고 하는데 뭔 말을 해야할지 고민 중인 남녀나 남들이 키스하기 전에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은 이 책에서 손 떼시라. 아무리 찾아봐야 없으니깐. 키스는 말 없이 그냥 하면 되지 않남? ㅡㅡa 뭔 말이 필요햐?

 파아란 깨끗한 하늘에 뭉게 구름 둥실둥실 떠있는 책의 표지와 완벽한 정사각형은 아닐지라도 다른 책들과는 확연히 다른 크기를 가진 이 책은 단번에 우리의 눈길을 끌기는 한다. 하지만 일부 책 수집가들에게는 이 책은 모양새가 튀는지라 다른 책들과 함께 공동체를 형성하여 같은 선상에 꽂아넣기는 애매한 책. 그래서 불만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제목이나 모양새나 이래저래 출판사가 독자들의 눈길을 좀 끌어볼라고 애쓰기는 무진장 애썼다.

 근데 도대체 책 내용에 대해서는 언제 이야기하는거야? 너는 아직까지 서론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잖아! 라고 짜증내지말길. 나는 원래 책 내용이야기보다는 딴 이야기를 잘 하니깐. 이게 내 감상문의 끝일지도 모르는거야.

 읽은지는 꽤 시간이 흘렀는데 선뜻 감상문을 작성하기가 힘들었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일에 치여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읽은지 상당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감상문을 작성하는 것은,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을 함부로 서투르게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재밌게 봤고, 뭐 대단한 내용이 들은건 아니지만, 아껴주고 싶은 책이다. 나중에 다시 보게 될지 어떨런지는 모르지만 모양새나 내용이나 너무나 마음에 들어 옆에 두고두고 간직하고픈 책이기에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상당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는 그냥 지 멋대로 감상문을 갈기고 있다.
 
 외관에 대한 감상은 여기서 그만! 너는 너무 외모만을 보고 있잖니?

 "훌륭한 삶을 쓴다는 것은 훌륭한 삶을 사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라는 나는 잘 알지못하는, 하지만 보통씨는 책에서 이 사람들 자주 언급하고 있는, 리튼 스트래치 라는 사람의 문구로 책은 뚜껑을 연다.

 '시작하며, 어린시절, 가족관계, 음식과 이사벨, 기억, 사생활, 다른 이의 눈을 통해 본 세상, 남자와 여자, 심리, 결말을 찾아서, 끝내며, 옮긴이의 말'이라는 12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 이 책은, 제목에서 보면 혹시 알랭 드 보통 자신의 자서전을 쓰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내용을 읽기 전에 제목에서 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내용이 보통씨의 자서전은 아니었지만, 일단 전기인 점에서나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단지 전기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이걸 전기로 분류해야할지, 아니면 보통씨의 에세이로 분류해야할지, 아니면 소설로 해야할지 참 애매하다. 알라딘 서점에서는 이걸 '소설'로 분류하고 있고, 예스24에서도 역시 '소설'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볼 땐 차라리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더 나을 듯 싶다. 전기와 소설과 에세이의 교집합 선상에 놓여있는 이 책은 사실상 작가 보통씨의 사색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사벨이라는 평범한 한 여자의, 그것도 나이들어 죽음에 임박한 할머니가 아닌, 힘 팔팔 넘치는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전기라니! 우리들이 흔히 지니고 있는 전기에 대한 상식을 깨버린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읽어왔던 전기의 공통점은, "1. 죽은 인물이다 2.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또 다른 공통점이 뭐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잠깐 생각해봐도 이 두 가지 점에서는 벗어날 전기가 없다.  그런데 보통씨의 전기는 이걸 다 깼다. 왜 전기는 죽은 인물이어야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겨야 하느냐는 것이다. 평범한, 아직 인생을 다 살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도 전기를 쓸 수 있다.

 또 보통은 전기를 쓸 때에는 작가가 전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보통은 새뮤얼 존슨의 말을 빌리기도 하고, 자신의 언어로 이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와 사회적 관계를 맺고 같이 먹고 마시며 더불어 살아보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다른 이의 삶을 기술할 수는 없다."(새뮤얼 존슨, p45)

 "진정한 전기가 되려면 저자와 주인공 사이에 어느 정도 정서적 관계가 있어야 한다." (p68)

 "은유적으로 말해서 작가는 주인공과 잠자리를 같이 해야한다. 전기가 격식에 맞춰 작성된 회고록이나 학술 논문과 구분되기를 바란다면 말이다. 전기는 문자로 씌어질 수 없는 생각의 연쇄고리다. 침실의 불빛이 켜져 있는지 꺼져 있는지를 조사해본 다음에야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임을 알려주는 행위와는 다른 것이다."(p154)

 대개의 전기작가들은 직업적인 전기작가들이고 따라서 여러편의 전기를 씀으로써 책을 내고 밥벌어먹고 살아야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한편의 전기를 쓰는데 있어서 전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만한한 시간적 여유와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다. 우리들이 접하는 전기는 그 인물의 작은 한 단면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전기가 되려면 그 인물과 먹고 마시고 자고 싸고 하면서 함께 생활에서 부대껴야하고 그 과정에서 그 인물의 세세한 부분까지 잡아낼 수 있어야한다. 그러려면 일단 인물이 죽은 뒤에 전기를 쓰는 것은 여기선 불가능하다.

 보통씨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상식을 쉽게 깨어버리고 이사벨이라는 여자와 함께 생활하며 그녀에 관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아주 자연스럽게. 절대 인위적이기도 않고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대단했던 사건들만을 나열하지도 않는다. 처음 자위를 했던 이야기며, 남자와 관계를 맺었던 이야기며, 무슨 음식을 좋아하며 왜 좋아하는지와 같은 아주 시시콜콜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이야기들까지도 보통은 늘어놓고 있다. 마치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전기다 라고 말하듯이.

 그러면서도 알랭 드 보통은 전기를 쓰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고, 이사벨과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이 생각한 것들을 중간중간 풀어놓는다. 그래서 이 책이 전기가 아닌 에세이로도 분류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그의 서술방식이 마음에 든다. 도대체 이게 소설이야, 에세이야, 전기야! 라고 짜증내지말고 기존의 형식을 과감히 파괴한-일부러 파괴한 것 같지는 않다- 보통씨의 이야기 서술방식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보라. 너무나 사색을 깊이 한 나머지 독자들이 사색할 부분까지도 없애버리는 보통씨. 하지만 그가 깊게 사색한 것을 우리는 눈으로 살펴보며 우리의 머리 속에는 또다른 사색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색은 또다른 사색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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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 2005-06-30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들이 사색할 부분까지 없애버린다'는 말이 무슨 말인 지 알 거 같습니다. '왜 나는 너를'부터 '키스하기 전에'까지 읽는 내내 드 보통씨의 집요함에 치를 떨었거든요 ㅎㅎ..

마늘빵 2005-07-01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님같이 생각하는 분들도 많더라구요. 독자의 몫까지도 빼앗아버린다구. 그래도 전 이 사람 참 맘에 듭니다. ^^

야클 2005-08-13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정성스런,그리고 훌륭한 리뷰네요. 잘 읽고 갑니다. 물론 Thanks to도 한방! ^^
 


 제목만 익히 들어왔던, 여러 사람들이 추천했던 작품이다. <천사의 아이들>.

 온통 모르는 배우들뿐인 이 영화는 비록 좋아하는 배우를 눈으로 보며 즐기는 즐거움을 선하지는 않았지만 내게 따뜻한 감동을 선사했다. 눈물 짜내는 드라마. 비록 영화를 보는 동안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어쨌든 감동적이고 따뜻한 영화였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사실.

 조니와 새라에게는 두 딸이 있고, 막내 아들 프랭키가 있었지만, 그 아이는 2살때 계단에서 굴러 죽었다. 조니와 새라는 그를 잊지 못하고 항상 가슴에 담아두고 산다. 두딸 크리스티와 아리엘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고, 둘 또한 가슴 속에 프랭키를 담아두고 매일같이 프랭키에게 소원을 빌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 대화는 비록 일방적인 메아리에 불과하지만.

 아일랜드를 떠나 미국의 마약쟁이들이 사는 허름한 아파트에 거주하게 된 가족. 그 아파트에는 매일같이 괴성을 지르는 우라부락하게 생긴 한 흑인 사내가 살고 있었고, 그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않는다. 대문 밖에 쓰여있는 'keep away'라는 문구는 그를 보지 않은 가족들에게도 섬뜩함을 전해준다.

 미국의 할로윈 데이. 아이들은 집에서 만든 괴상한 복장들을 하고선 이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의 문을 두드려 보지만 그 누구도 나오지 않는다.

 "사탕줄래? 골탕먹을래?" 라는 두 꼬마아이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마지막으로 두 꼬마는 '킵 어웨이'라고 쓰인 대문을 쿵쿵 두드리고 안에서 들리는 괴성에도 불구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열때까지 두드려댄다. 화가 나서 문을 연 험상궂은 흑인사내는 두 귀여운 꼬마 아가씨들을 보자 마음이 누그러지고 셋은 좋은 친구가 된다.

 가슴 속에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설리번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고, 산모나 아이 둘 중 하나는 위험하다는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흑인 사내 마테오의 덕담을 믿고선 밀고 나간다. 새라가 병원에 입원하고, 마테오는 몸이 안좋아 역시 병원에 입원하고. 남자아이가 태어나고, 마테오는 죽고. 가난한 이들에게 부담이 되는 병원비는 마테오라는 이름으로 이미 지불되었다.

 이 영화의 매력은 무엇보다 두 꼬마 여자아이들의 연기다. 나이 답지 않게 사려깊고 성숙한 두 아이는 엄마 아빠가 그들의 가슴 속에서 프랭키를 지우는데 도움을 준다. 아픔을 가지고 있고 가진 것 없고 사는게 항상 힘겨운 가족에게 두 아이는 천사와 같은 존재다. 감동의 드라마를 느끼고 싶다면 <천사의 아이들>을 추.천.

 

 

참 영화를 다 보고 이 영화가 왜 영국과 이란의 합작영화인지가 궁금해졌다. 이란인이 등장했었나...?



요 사진은 두 꼬마천사들. 귀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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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분의 러닝타음은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다. 요즘 웬만한 영화는 죄다 백분을 넘기는 상황에 짧은 러닝 타임으로 긴박한 긴장과 공포를 선사하리라고 믿었던 영화는 기대이하의 실망을 넘어 절망을 안겨주었다. 더운 여름날의 공포는커녕 짜증만 더해졌다.

 송일국과 장신영이라는 괜찮은 배우들의 출연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의 허술함과 밋밋함으로 그저그런 영화 중 하나로 기억에 남았다. 김동빈 이라는 감독은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를 나와 대우조선에서 일하다 충무로에 입성했다고 하는데 대학 시절 영화동아리에서 했던 활동을 바탕으로 감독신고를 하기에는 그는 너무도 경험이 부족했고 아이디어가 없었다.

 밤 11시 50분의 심야열차의 비극. 과거에 일어났던 대형열차사고로 죽은  귀신들이 이 기차에 타고 있다. 이 기차는 오늘이 마지막 운행. 과거와 현실이 교차하며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그저 과거에 열차사고가 있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그리고 이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 또한 그게 전부다. 그 이상의 무엇을 기대하고 좌석에 앉은 관객들은 어이가 없을 밖에. 공포영화로 분류되지만 공포도 선사해주지 못하는 공포영화. 그냥 황당할 뿐이다.

 열차 바닥을 뚫고 등장하는 여자귀신은 오히려 웃기다. 이건 영화 주온이나 그루지를 보는 듯 했다. 최근 본 영화 <그루지>에서는 어느 한 건물의 복도 문 밑으로 통과해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는 장면이 있었고, <레드아이>의 그 장면은 그것과 너무도 흡사했다. 물론 <레드아이>가 더 먼저였고, <그루지>가 더 나중이었지만, <그루지>의 모태가 된 <주온>이 <레드아이>보다 우선한다는 점에서 나의 이 비난은 정당하다. 물론 감독이 그걸 카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은 왜 '레드아이'일까. 이건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빨간눈' 이미 죽은 사람들의 눈이 빨간색이었던가. 모르겠다. 별로 보여주는 것도 없는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도 제목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영화. 너무 혹평했다고 생각하지는 마시길.

 이 영화가 개봉됐던 당시에 다른 영화를 보기 위해 이 영화를 포기했던건 역시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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