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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cm 예술
김점선 지음, 그림 / 마음산책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김점선의 <10cm 예술>. 사실 뭔지 몰랐다. 김점선이 누군지도.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도. 난 어디선가 얼핏 '배꼽 밑 10cm'인가 하는 제목을 본 거 같아서 이게 그건가, 하고 집어들었는데, 아니었다. 흠. 성 관련된 책이 아니라 그림과 관련된 책이었다. 어쨌거나 일단 집어들었으니 보긴 봤는데, 으하핫, 너무나 재밌다. 웃기려고 작정하고 쓴 유머집도 아니고, 재미난 소설도 아닌데, 너무나 재밌다. 버스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면서 한시간도 안되어 다 봤고, 그 사이 난 버스칸에서 혼자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난 책을 읽다 웃기는 대목이 나와도 그냥 속으로 흐흐 하고 웃는 스타일인데, 속에서 웃는걸 넘어서 더 웃긴건 입가에 미소로, 더 웃긴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키득키득 거리며 소심하게 웃는다. 그런데 어제 버스칸에서 그 수준까지 갔다는 말씀. 너무나 재밌고, 너무나 웃기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슬픈 이야기였다.
<10cm 예술>은 김점선이라는 화가의 컴퓨터 그림과 글을 담은 책이다. 그녀는 그림을 너무나도 그려댄 나머지 오른쪽 팔에 무리가 왔고, 좀 쉬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아들이 알려준 컴퓨터 포토샵 프로그램과 그림판을 가지고, 그 사이를 못참고, 또 그림을 그려댄 것이다. 10cm라는건 컴퓨터 화면 상의 그림판 크기를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컴퓨터를 처음 다루면 어떠랴, 화가의 손은 역시 다르다. 그녀가 손을 댄 순간 그것은 하나의 작품이 되어 나왔다. 그냥 그림만 보면 사실 별다른 걸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녀가 직접 쓴 그녀의 삶의 이야기와 함께 하면, 그 그림들은 그녀 자신의 삶 자체였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어릴때부터 공부 잘했지만 내가 공부 잘하는지 몰랐고, 어느날 갑자기 그림을 그려야겠다 생각되어 다음날 미술학원 등록하고 그림을 그렸대는데, 그러고서 홍대 미대를 갔다. 그녀의 사고방식과 행동이 온갖 기행을 낳고 다닌듯 하고, 못생긴데다 꾸미지도 않고 노숙자처럼 하고 다니는 그녀의 행색은, 길거리에서 경찰관들에게 심문을 받을 정도였다. "분명히 마약한 놈같은데... 왜 없지?"
어릴 때, 행복이 거적을 입고 변장한 채 사람의 집에 찾아오는 내용의 동화를 읽으며, 그녀는 교복을 벗으면 거적을 쓰고 다니리라 마음 먹었단다. 그리고 실천했다. 헝클어진 머리에 빗지도 않고 단추도 안채우고 구겨진 옷을 입고 길거리를 다녔다. 미친 사람처럼.
도서관과 문화원에서 책을 읽다가는 아니 어떻게 읽은 책을 그냥 두고 나올 수가 있어, 그러면서 온갖 책을 다 훔쳤다는, 게다가 자신이 찜한 책을 넘어서, 친구가 이 책 괜찮네, 하면 또 그 책도 훔쳤다는, 이런 기행, 나아가 교수가 이 책 어디서 났니, 그랬더니, 훔쳤어요, 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그녀, 그런 그녀를 향해, 이거 빌려줘, 라고 말하는 교수, 아예 가지세요, 라고 마무리지으며 공범자가 생겼다고 좋아라한다.
이 책에 나온 그녀 자신의 삶의 이야기는 온갖 기행으로 가득차있다. 아니 이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싶다. 아무리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지만, 어떻게 의도하지 않고 이런 생각과 이런 행동이 나올 수가 있지? 더욱더 가관인 것은 그녀의 남편이다. 책을 읽으며 이런 여자가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헉 결혼을 했다. 그래서 난 그녀보다 그녀의 남편이 더 궁금해졌다. 하긴 앞에서 아들이야기가 잠깐 나오니 결혼을 하긴 했겠지. 남편은 그녀의 선배다. 그의 기행은 그녀의 그것을 넘어선다. 신발을 안신고 등산용 양말을 신고 길을 걷질 않나, 록가수의 무대에서 기이한 춤을 추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며, 술을 먹고, 여자를 탐한다. 결혼은 했지만 일은 하지 않는다. 매일이 담배와 술이다. 도덕성이라곤 아예 기초가 없는 인간이라 했다. 그는 결국 폐암으로 죽었다.
그녀의 선생님이 이렇게 이야기 했단다.
"예술은 그런게 아니다. 집에서 탄 돈으로 물감 사서 기분 나는 대로 물감칠을 하면 그게 예술인줄 아느냐? 너희들이 정말 예술가가 되고 싶으면 결혼해라. 백마 탄 왕자가 아닌 아주 가난한 사람과, 얼음물에 손을 넣고 기저귀를 빨고, 시장에서 콩나물 값을 깎으며 사는 고난을 이겨내고 나서도 그림을 그려야지..... 지금처럼 살면 너희들은 기생충이다. 부모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이다."(P43)
그래서 그녀는 그로부터 한달 뒤 가난한 사람과 결혼을 했던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실컷 웃었지만, 그녀의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문입이 이그러지며 잠시나마 가슴이 저며오기도 했다. 세상 참 재밌게 사는 사람이다. 재미를 추구하고 그러진 않았을테지만, 그녀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가치관의 기본 토대가 참 궁금하다. 도통한 도사같다. 이렇게 자유로운 영혼이 있을까 싶다. 나는 항상 내 영혼의 자유로움을 꿈꿔왔지만 내 영혼은 자유롭지 못했다. 난 항상 사회의 형식과 규칙에 얽매여 살았고,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장남으로 살았고, 사회가 마련한 틀 안에서 평범하게 자라왔다. 하지만 나의 영혼은 자유롭길 바랬다. 그것은 머리 속에서 뿐이었다. 행동으로 실천할 용기를 가지지 못했고, 어떻게 실천해야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런 것 조차도 고민하지 않은 채 생각이 곧 행동으로 표출되는 그 순간이 영혼이 자유로운 순간인지도 모른다. 아 정말 이렇게 순수하고 자유로운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김점선. 존경스러운 인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언어로 생각하고 수학자는 숫자나 기호로 생각하지만 화가는 눈과 손으로 생각한다. 손을 통해서만 사고는 앞으로 나아간다. 손으로 그려보지 않으면 상식적인 단계에서 시각적인 사고가 멈춰버린다. 화가는 생각과 동시에 손을 움직여서 그려야만 한다. 손이 그린 것을 눈이 보면서 생각은 더 앞으로 나아간다. 손의 도움 없이 눈만으로 나아가는 세계에는 한계가 있다. 자꾸 손으로 그리다 보면 어느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세계에 자신이 도달해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손으로 그리는 작업이 중요한 것이다." (글머리에 中)
그녀는 자신의 눈과 자신의 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세상을 보고 만진다. 그리고 내가 본 세상을 그린다. 그러다보면 그녀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것이 그녀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참 깨끗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46년생이라는 그녀, 우리 아버지와 동갑이구나. 그렇다면 그녀의 아들은 나보다 나이가 더 많겠구나. 그녀는 그림으로써 뿐만 아니라, 글로서도 자신의 삶을 그렸고, 앞으로도 그릴 것이다. 글은 어쩌면 그녀가 세상을 보고 만지고 접하는 또 하나의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삶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