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몰랐을까. 그때 사랑이었다는 것을. 왜 지나쳤을까. 그 사람인줄 알면서도.
사랑은 언제나 '후회'입니다.
지금의 난 과거의 나보다 사랑고백에 있어선 서툴지 않다. 해보고 또 해보고 그러다보면 아 고백은 이렇게 하는거구나, 이렇게 해서는 안되는구나,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알게 된다. 대학 3학년, 첫사랑이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매우 늦은 시기였다. 멜로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지만 첫사랑의 기억은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도 너무나 뚜렷하다. 그리고 소중하다. 상처받지 않게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해놓아야만 할 것 같은 기억이다. 소중했고 조심스러웠기에 난 멜로 영화를 볼 때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지도 모르겠다.
3학년 시절, 한살 어린 다른 학교의 여자아이에게 사랑고백을 했다. 일년간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만 다른 사람이 있었기에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고, 그저 그냥 연락하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러다 그녀에게 걸려온 전화, 그 전화가 상황을 바꿔놓았다. 함께 만나 영화를 보고, 대공원에 놀러도 가고, 함께 한 우산을 쓰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난 고백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고백이 쉽지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참 둘다 고생했다 싶다.
어느 쌀쌀한 초겨울의 날씨. 그녀와 난 여의도 공원에 있다. 걷다 걷다 벤취에 앉았다. 날씨는 참 추웠지만 사람들이 하나 둘 우리 앞을 지나다녔다. 난 그곳에서 고백할 생각이었으나 사람들이 자꾸만 지나다니는 통에 한동안 말 없이 멍하니 위 아래만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글쎄 시계를 볼만한 여유는 없었으니 모르겠지만 적어도 40분 이상이 그렇게 지났을 거다. 어쩜 한 시간 정도 될지도. 그리고 너무나 가슴이 답답하고 터질 것만 같아 고백했다.
"나 할말이 있는데..."
"뭔데...?"
"...... (또 한동안 적막) 나... 너... 좋아해."
"그래서?"
"음....... (또 한동안 적막) 우리... 사귀자..."
아휴 그 말이 뭐 그리 어렵다냐. 그런데 정말 어려웠다. 그 말을 하려고 마음먹기까지도, 하려고 그 추운날 그 공원 벤취에 가기까지도, 가서 40분가량을 침묵하며 앉아있는 것도, 그리고 막상 말을 꺼낸 것도 너무나 너무나 어려웠다. 그러나 말하고나니 후련했다. 답답했던 가슴이 펑 뚫릴 것만 같았다. 고백하기 어려운 것은 상대방이 나의 사랑을 거절할까봐서다. 나 역시 그랬다. 사랑한다고 말해버리면 이 사람이 도망갈까봐. 나한테서 멀어질까봐. 그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무서웠다. 거절당하느니, 그녀가 나에게서 멀어지느니, 지금 이대로가 낫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러자니 내 가슴은 너무나 답답했고 터질 것만 같았다. 말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래서, 고백했다.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차마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 말은 좋아한다는 말 보다 더 힘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추운날 손 꼽 붙잡고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갔고, 버스에 타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집에 데려다 줄때까지.
처음에는 그냥 관심이었는데 그게 어느새 내 마음 속에 사랑으로 자리잡은 걸 알았을 때, 난 너무나 행복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하지만 또 두려웠다. 그녀에겐 다른 사람이 있었고,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1년이 지나고 힘들게, 힘들게 고백했다. 사랑을 고백했다. 우리는 '인연'에서 '연인'이 되었다.
* 이 사람이 내 사람일까 고민하는 사이, 내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 사랑은 용기 있게 고백하는 자의 몫이다.
* 나 할 말 있어. 알아 무슨 말 할지 알아. 그러니까 하지마.
사랑하지만 사랑이라 말하면 도망칠 것만 같았다는 연수, 그리고 10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사랑인줄 알았다는 우재.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나 답답하다. 내가 가서 얘 너 사랑하고, 너도 얘 사랑해,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이 먹으면 뭐하냐. 사랑고백 하나 못하고. 사랑에는 나이란 아무 것도 아니다. 나이를 먹어도 사랑고백을 쉽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렵게 힘들게 한 마디 내뱉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은 나이를 먹는다고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새롭고 조심스럽다. 놓치면 추억으로 남고, 잡으면 사랑으로 머문다. 추억을 간직할지, 사랑을 이룰지는 나에게 달려있다. 추억은 혼자 가지지만, 사랑은 둘이 갖는다. 한쪽에선 머뭇 머뭇 거리다가 말 못하고, 한쪽에선 눈치 못 채서 모르고. 사랑은 너무나 어렵다.
* 선술집 한 구석에서, 이별을 고하는 남자와 받아들일 수 없는 여자
이 사람이 과연 나의 사람일까? 생각하고 고민하며 시간 보내는 사이 사랑은 떠난다. 이 사람이다 싶으면 잡아야 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여자건 남자건 이 사람이다 머리에 번쩍이는 순간, 가슴이 아련한 순간 잡는거다. 내가 어떻게 먼저 고백해, 에이 나랑 얘랑 비교가 돼나, 머리 속으로 계산하고 고민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은 떠난다. 우재가 연수와 하룻밤을 지새고, 연수가 우재의 집을 찾아갔을 때, 계단을 올라오던 우재가 연수에게 하는 말. "미안하다..." 연수 되뇌인다. "미.안.하.다......" 그리곤 계단을 내려간다. 살며시 젖은 눈으로. 언젠가 내가 누군가에게 했던 말이다. 미안하다. 우재에게 미안하단 말을 듣고 계단을 내려가는 연수에게 나는 너무나 미안했다. 나에게 미안하단 말을 듣고 되돌아가는 그녀에게 나는 너무나 미안했다. 미안하다. 참 쉬운 말이다. 내뱉기 쉬운 말이다. 미안하단 말 한마디면 다 되는 줄 알아? 그렇다. 미안하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것은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그녀에 대한 미안함 마음을 조금 줄여볼 수 있는, 나를 위한 한 마디다. 난 그 말을 함으로써 모든 것이 해결됐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믿고 싶은 것일 뿐이다.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쉽게 내뱉을 수 있지만 쉽게 내뱉어서는 안되는 말이, 바로 '미안하다' 이다.
우리 그만하자. 우리 헤어져. 쉽게 말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상대방의 가슴에 너무나 큰 가시를 찔러넣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별을 고하는 사람은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에게 쉽게 그 말을 내뱉는다. 그만두자. 헤어져. 영화 속에서 우재와 연수가 다시 만나 선술집에 들어갔을 때, 한 쪽에선 남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그만두자. 여자는 말한다. 내가 잘할게. 이별을 고하는 남자와 어떻게든 이별을 막으려는 여자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다.
추창민 감독은 말한다. " '내가 이 여자를 정말 사랑하나? 모르겠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나중에 결국 헤어지고 나서 '아, 내가 이 여자를 정말 사랑했구나' 하고 깨닫는거죠." 그래 맞다. 사랑은 이별 뒤에야 비로소 느껴진다. 아 이 사람이 내 사람이었구나. 하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내 사람은 나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곁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고민된다. 이 사람이 내 사람인가? 정말 그럴까? 그러지말고 잡아라. 그 사람이 네 사람 맞다. 고민하고 머리 굴리지 말고 잡아라.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고민된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해버리면 도망갈까봐. 그러지말고 고백해라. 그 사람 도망가지 않는다. 너에게 감동받는다. 갈등하지말고 고백해라.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