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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북
귄터 아멘트 지음, 이용숙 옮김 / 박영률출판사 / 2000년 3월
평점 :
<섹스북>이라는 제목만으로 이 책을 구입하거나 빌려오신 여러분은 여기서 표지만 보고 내려놓길 바란다. 절대, 결코, 이 책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섹스(성교)에 관한 책이 아니올시다. 이 책 어디에서도 섹스는 어떻게 시작하고, 섹스를 어떻게 해야하며, 어떻게 해야 남자가 여자를 흥분시키는지, 여자가 남자를 흥분시키는지, 오르가슴에는 어떻게 도달하는지, 또 정상위 아닌 섹스의 여러 체위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어떻게 시도해보면 좋은지, 이런 이야기는 결코,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내려놓길 바란다.
이 책에서의 '섹스'는 '성(性)' 이다. 성교가 아니고 일반적인 '성'이다. 그러나 성교에 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있지 않다고는 말 못한다. 왜냐면 성을 논함에 있어 성교가 빠질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위에 언급했듯 섹스의 기술에 대한 책은 아니다. 기술은 각자 연마하시길. 풉.
권터 아멘트라는 엄연히 사회학 박사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학자가 지은 책이다. 그는 독일에 성상담 연구소를 세우고, 성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험. 참 독특하기도 하지. 이 책의 차례가 있어야 할 앞장에는 차례 대신 이런 글귀가 씌여져있다. " 이 책에는 보통 책에서 볼 수 있는 '차례'가 없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은 부분만 골라서 읽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만들지 않았지요. 모든 주제들이 모든 독자에게 중요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만 이 책은 의미가 있습니다." 라고. 차례가 없으니 아무데나 펼쳐놓고 땡기는데부터 읽자. 그렇다고 책을 쭉 훑어가며 야한 사진 나와있는데부터 읽으면, 된다. 므흣. 아무렴 어때. 야한사진 나와있는 쪽에 무슨 이야기가 써있나 궁금하면 거기서부터 보시라.
이 책은 굉장히 많은 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사랑하고 잠자리에 드는 과정에 대한 가벼운 일상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책 뒤로 가면 자위, 낙태와 동성애, 성추행, 성폭행, 성의 역사에 관한 사회, 역사적인 문제들까지도 다루고 있다. 여러가지를 다룬다고 또 그들이 이야기 나눈 대화를 책으로 옮겼다고 해서 결코 수박겉핥기식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여러가지 성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이야기하돼 꽤나 진지하다. 이 책 여기저기에는 독일 매체를 통해 내보내지는 광고들이 한면을 차지하고 있다. 성관련 용품 뿐 아니라 섹스를 이용한, 섹스를 연상케하는 자동차 광고 등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주며 재미를 더하고 있다. 적나라한 사진 몇장이 우리나라 출판계의 검열로 인해 날아버린 사실이 안타깝지만, 여기에 있는 광고와 사진만으로도 난 충분히 만족스럽다.
이런 성교육서가 어디에 있을까 싶다. 성교육서이면서 사회학 서적인 <섹스북>. 막 성에 눈 뜨는 청소년들이 읽어도 좋을, 그리고 동성애, 낙태, 페미니즘, 성폭행 등의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읽어봐도 좋을 책이다. 또 성에 눈을 뜨긴 했지만 성 가치관이 확실히 자리잡지 못한 많은 성인들에게도 좋은 책.
권터 아멘트 박사와 30살 직장인 여성 울리케, 17살의 카이 우베가 나누는 대화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카이 우베는 아직 성경험이 없고, 자기 또래의 친구들이 일찍 성경험을 쌓는데 비해 자신은 여자들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적절한 파트너를 찾지 못하는 것 같아 고민스럽다. 그는 섹스를 흔히 그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생각하듯 빨리 치뤄야 할 경험 따위로 생각한다. 어서 나도 섹스를 해보고 싶다 라는 생각. 하지만 이런 카이 우베의 생각에 대해 울리케와 권터 박사가 함께 대화를 나누며 또다른 관점에서 섹스를 바라보게 만들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책의 맨 뒷장에 가서까지도 카이 우베의 생각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지만, 이 대화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카이 우베를 설득하거나 권터가 생각하는 성의식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으니 문제삼아 볼 건 없다.
성에 대한 매우 개방적인 자세로 대놓고 이야기하는 이 책은, 정말 충격이다. 1970년에 이 책이 독일에서 나왔을 때 당시 출판계에서, 언론계에서, 학술계에서 이런저런 비판을 해댄 것이 이해된다. 아마 우리나라 ㅅ람이 지금 이런 책을 냈다고 하더라도 2006년 현재 큰 논란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서구사회가 성에 대해 개방적이라고는 하지만 1970년대에 이 책을 내놨을 때 조용히 지나갔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각자의 자위경험과 첫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마치 야설을 읽는 듯한 그 상세한 상황 묘사와 전혀 거리낌 없는 대화는 때로 흥분시키기도 한다. 여자들은 시각으로만 흥분하는 일은 적겠지만 남자들의 경우 시각에 의한 흥분이 크기 때문에, 남자들이 이런 자위경험이나 첫경험, 섹스이야기 등의 대화 속에서 때로는 발기하기도 할 거란 생각도 든다. 나도 간혹 그랬으니까. 그 만큼 솔직하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청소년 성교육이 많이 개방적이고 솔직해졌다고는 한다. 물론 과거에 비해서 지금이 훨씬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과거에는 아예 성교육이라고 해도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성교육이라고 해봐야 그냥 그렇고 그런 도덕법칙에 대한 이야기들, 보통의 도덕교과서에 나와있는 이성간의 문제에 대한 들어봐야 아무 도움도 안되는 뻔한 이야기들. 아직 우리나라 성교육은 멀었다. 그리고 성교육에 대해 가끔씩 생각해보는 나조차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감이 안잡힌다. 나도 그렇고 그런 성교육을 받았고 다른 성교육은 어떤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이 책을 자료로 한 성교육이 실시된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한편으로는 잘못하면 아이들 흥분만 시키는 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실컷 흥분시켜놓고 애들 화장실가서 딴짓하다오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
이 자리를 빌어 이야기하지만 나 역시 자위를 해봤고, 지금도 한다. 그것은 이상할 것이 못된다. 너무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자위하는 것이 마치 무슨 변태같은 행위인양 비춰지는 현실이 더 이상한 것이다. 대개의 남자들은 자위를 하며, 일부는 결혼 한 뒤에도 자위를 한다고 한다. 나야 결혼을 안했으니 모르겠지만. 또 난 여자는 아니지만 들은 바에 의하면, 남자들만큼 대부분은 아닐지라도 여자들도 자위를 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남녀를 불문하고 자위는 친한 사이에서도 쉽게 입에 담기 어려운 소재임에 틀림없다. 첫경험이나 섹스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나 역시 이런 이야기를 친한 친구 사이에도 입에 담지 않는다.
성적인 이야기를 쉽게 한다는 것은 두 가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첫번째, 나는 개방적이다. 나는 항상 열려있다. 수많은 여성과 키스를 했고, 섹스를 했다. 그러니 누구든 원하는자 나에게 오라. 뭐 이런 뉘앙스를 풍긴다. 아니면 나에게 오라 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경험 많아 하고 자랑하는 듯한 뉘앙스. 두번째, 나는 사회에서 금기시된 소재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게 말 할 수 있다. 자신이 보통 사람들보다 뭔가 확실히 깨어있다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런 주제에 대해서도, 나의 경험에 대해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내가 성적인 이야기를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내가 개방적이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내가 깨어있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개방적이거나 깨어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또 정반대라고 이야기하기도 뭣한 정도이지만. 남녀가 모여있는 자리에서 성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상대방이 성에 대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함부로 말 할 수가 없다. 만일 그 사람이 성에 완전 보수적이고, 섹스는커녕 자위조차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라면 아주 작은 발언이라 할지라도 큰 실례가 된다. 이런 이유에서, 또 내가 헤픈 놈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라는 이유로, 마지막으로 내가 누군가와 관계를 했다면 그것은 내게나 그 사람에게나 비록 헤어졌다하더라도 소중한 경험이고, 깨진 사랑이지만, 어쨌든 사랑이었기 때문에, 그 소중한 기억들을 고이 혼자 간직하고 싶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내게 자위, 섹스, 관계, 사랑, 동성애, 페미니즘, 낙태 등의 여러가지 주제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시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주었다. 청소년뿐 아니라 나이든 어른들까지도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강.력.추.천.
추가 발언 첫번째.
<섹스북>의 세 명의 대화자 중 30대 직장인 여성 울리케는 이런 말을 한다.
"관계의 첫번째 조건은 독립성을 인정하는 거지만 두번째 조건은 공통성 또는 연대감을 갖는 일이에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공통점을 찾으려 애쓰죠. 두 사람의 공통성이나 연대감이 관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수록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있죠. 애정도 쉽게 변하지 않구요. 일상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공통점, 그러니까 식사습관이나 잠버릇 같은 건 여기서 굳이 얘기하지 않겠어요. 제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만 얘기할래요. 전 정치적인 입장이나 관심이 저와 완전히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는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제 모든 친구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전 알고 있어요. 제 친구들도 모두 제 생각을 알고 있구요. 물론 그 생각들이 언제나 서로 정확하게 일치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입장은 다들 같지요. 정치적 관점이 일치한다는 뜻이에요." 230-231
나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의 연대감을 중요시 한다. 공통점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만일 공통점이 별로 없다면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일단 사귀기로 했으면, 그 사람과 내가 함께 관심갖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부분이 어딘지 찾아본다. 나 역시 울리케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입장이 다른 여자와는 만나기 힘들다. 아예 정치적 입장이 다른 여자는 이성으로서의 관심대상에서 삭제해버린다. 나의 정치성이야 여기저기서 밝힌바 있으니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될듯 하고. 단 이정도는 봐줄 수 있다. 난 스타벅스의 최고운영자(?)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간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무기 구입비를 대주고 있다는 기사(?)를 어디서 봤고, 그래서 난 스타벅스는 안간다. 하지만 어떤 여자가 스타벅스를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이 여자를 멀리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 정도의 아량은 보여줄 수 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의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은 적어도 같아야 한다.
추가 발언 두번째.
다른 모든 성행위에는 '혼전섹스'라는 이름을 붙여, 결혼을 통한 성생활보다 뭔가 부족하고 열등한, 또는 문제 있는 것으로 보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결혼 전의 모든 관계들을 평가절하하는 셈이며, 자신의 혼전 파트너 또는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상대바을 모르모트나 스파링 파트너 정도로 생각한다는 뜻이 됩니다. 232
울리케의 발언은 아니다. 권터 박사의 발언인 듯 보이는데, 이에 동감한다. 내가 이미 헤어진 전 여자친구와 만일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나는 결혼했다, 그 상황에서 나의 결혼 상대자와 나의 섹스는 성스러운 것이고, 나의 이전의 여자친구와의 섹스는 열등한 것이다라는 생각은 아니올시다 이다. 결혼하게 된 여성이건 헤어진 여성이건 간에 나와 그 여자와의 관계는 모두 소중한 것이다. 누구는 연습상대고 누구는 실전상대다 라는 생각은 매우 어리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