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구판절판


"매력이 문제야. 위성곤씨한테 매력이 철철 넘쳤다면 포르노를 보는 것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을거야. 매력만 있다면 사람들은 뭐든 용서하려고 들지. 좀 부도덕해도, 말을 뒤집어도, 사악한 짓을 해도, 다 이해하려고 한단 말이야. 그러나 이런 후진 회사에 다니는 대머리 아저씨가 포르노를 보는건 용서할 수 없는거야." -35쪽

애들도 연인처럼 여러 종류가 있었다. 맛있는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고 싶은 애가 있는가 하면 미술관 같은 곳을 함께 거닐며 수다를 떨고 싶은 애도 있었다. -48쪽

그러나 지금 와 돌이켜보면 권태와 허무야말로 이 사회의 특질이었다. 권태는 무차별적으로 퍼져 있었다. 기영은 권태가 무엇인지는 알았으나 그것을 실제로 목도하기는 처음이었다. 그가 떠나온 사회에서 권태는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에나 등장하는 추상적 개념이었다. 물론 그곳에도 권태는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사회의 권태는 차라리 무료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적절한 동기부여가 부족한 상태라 할 수 있었고, 따라서 어떤 자극만 주어진다면 금세 사라질 가볍고 허망한 것이었다. 그것은 삶을 짓누르고 질식시키는 유독 가스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생겼다. 가끔 어떤 종류의 인간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아 저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 라는 원초적인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경로로 포섭되었는지 모를 그 동사무소 직원이야말로 그런 사람이었다. 권태와 우울, 허무와 냉소, 후줄근한 옷차림과 매력 없는 용모가 어우러진, 잠시라도 함께 있기 불편한 인간이 되어있었다. -80쪽

그녀의 혀는 천천히 마중을 나갔다. 그의 혀는 그녀의 혀를 만나 미끄러졌다. 오래 걸어온 달팽이들이 더듬이를 빼 서로를 확인하듯, 둘의 혀는 조심스럽게 서로를 건드렸다. 그럴 때마다 둘의 혀는 뒤로 수줍게 후퇴했다가 다시 앞으로 나와 서로를 맞았다. 마침내 소년과 소녀의 혀가 격렬히 엉키며 입 속을 가득 채웠고, 그의 혀가 좀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그녀는 입을 조금 더 크게 벌렸다. 침이 입가로 흘러 허벅지로 떨어졌다. -306쪽

그녀는 문득, 엄마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런 일이 과연 자신의 인생에 닥쳐올까, 따위를 생각했다. 끔찍하기만 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키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아까처럼, 끔찍했던 어떤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것,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 혹시 그런게 인생이 아닐까.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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