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 어깨를 빌려줘 - 이용한 여행에세이 1996-2012
이용한 지음 / 상상출판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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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에 대한 숭배는 항상 뭔가 더 나은 것이 미래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일종의 탐욕이다. 하지만 가능성의 마법은 미래에 마법을 거는 대가로 현재에 대한 환멸을 요구한다."(마이클 폴리, "행복할 권리")-17쪽

티베트에서의 시간은 말과 야크가 걷는 속도로 흘러가고, 몽골에서의 시간은 낙타가 걷는 속도로 흘러간다. -24쪽

빨리 달린다고 해서 하루가 더 빨리 가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왜 그렇게 속도를 내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다. 사실 속도라는 것은 에너지의 사용량과 비례한다. 더 빨리 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이를테면 자동차가 한 시간을 달리려면 최소한 몇 리터의 기름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당나귀와 함께 한 시간을 걷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당나귀가 소화한 한 묶음의 건초만 있으면 된다. -24쪽

"세계의 절반은 너무 많이 생산해서 가난하고 나머지 절반은 너무 적게 소비해서 가난하다."(버트런트 러셀, "런던통신 1931~1935", 너무 적게 소비해서 가난한 것을 비난하지 말라.)
-25쪽

관광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현지의 자연과 문화와 삶에 영향을 미치고,
결정적으로 그것을 파괴하는 힘을 지녔다.
이것은 또 다른 침략이고,
그곳을 여행하는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침략자일 수밖에 없다.
-47쪽

카오산의 수많은 여행자도 떠나기 전에는
우리처럼 평범하게 출근하고 노동하고 퇴근하던 사람들이었다.
잠깐씩 친구도 만나 수다 떨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떠나는 순간 여행자가 되었고,
이곳에서 자유인이 되었다. -53쪽

여행은 ‘지금 이곳’의 나를 ‘여기’가 아닌 곳으로 잠시 데려가는 것이다. 여행이란 더 이상 한가한 한량이나 부유한 계급의 특권이 아니다.
-55쪽

여행은 이제 일상이고 실천이며, 실현 가능한 로망이고, 언제든 복귀 가능한 일탈이다. 거긴 너무 위험해, 거긴 너무 멀고 거긴 너무 힘들어, 라고 미리부터 핑계 대기 시작하면 여행은 점점 어려운 불가능의 문제로 남게 된다. 처음부터 망설이면 망설이다가 끝나고 만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이다.

모든 생을 통틀어 오늘이 당신의 가장 젊은 시간이다. 만일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었다면, 오늘이 바로 최적의 순간이다. 내일이 되면 당신은 오늘 하지 못한 것들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여행은 평생처럼 순간을 사는 일이다. 짧지만 눈부신 순간을. 지금 이 순간에도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어딘가로 떠나서 어딘가를 여행하고 있다.-55쪽

"시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시간은 사람을 두렵게 만들며, 두려움은 사람을 타협하게 만든다."(버트런트 러셀, "런던통신 1931~1935")
-55쪽

대개 남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터무니없는 약속을 한다. 여자들의 어리석음은, 내 남자만은 그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는 데 있다. -61쪽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다. 피곤한 사람에게 길은 멀다."("법구경")-69쪽

어느 쪽이 더 불행한가, 행복한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불평과 불만, 불안 속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고작해야 게르 한 채에 양 떼 50마리를 키우며 살아도
언제나 우리보다는 그들이 더 행복해 보인다.
언제나 부족을 느끼며 더 많이 가지려는 쪽은 우리다.
언제나 남을 딛고 올라서 이기려는 쪽도 우리다.
도대체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그토록
눈에 불을 켜고, 입에 칼을 물고 사는 걸까.
세상에는 분명 멈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70쪽

"현대 세계에는 여가라고는 거의 없다...... 그 결과 영리한 사람은 많아졌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 지혜란 천천히 생각하는 가운데 한 방울 한 방울 농축되는 것인데 누구도 그럴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버트런드 러셀, "런던통신 1931~1935")-83쪽

"사진을 찍으면 어떤 장소의 아름다움을 보고 촉발된 근질근질한 소유욕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다. 귀중한 장면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불안은 셔터를 누를 때마다 줄어든다. 아니면 아예 우리 자신을 물리적으로 아름다운 장소에 박아놓을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이 그 장소 안에 좀 더 확실하게 존재한다면, 그 장소도 우리 안에 좀 더 확실하게 존재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97쪽

"당신을 스쳐 간다면 난 모든 것을 스쳐 가는 거야!"(레오 카락스, 영화 ‘나쁜 피’)

"사랑은 오래된 언덕 같은 거라서 닳아지게 마련이야!"(영화 ‘소년, 소녀를 만나다’)

"우린 만우절 날 헤어졌고, 난 농담만 했다. 헤어지더라도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 그 후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았다. 파인애플은 그녀가 좋아하는 과일이고, 5월 1일은 내 생일이다. 30개의 통조림을 살 때까지 그녀가 오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도 끝날 것이다. 만약에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영화 ‘중경삼림’)

"언젠간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134쪽

"역사상 그 어느 때도 자유민이 이토록 전적으로, 일이라는 한 가지 목적에만 온 에너지를 바친 적은 없었다."(에리히 프롬)
-155쪽

느닷없이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소나기가 쏟아졌죠.
빗방울은 차창을 투닥거리고, 지프는 길 위에서 투덜거렸죠. -164쪽

"그래야 한다면 그래야 한다."(베토벤)

"자유기고가는 두 종류야. 자유만 있되 기고가 없거나, 기고는 있되 자유가 없는."(시인 김경주)-174쪽

"정말 이상해. 포기하는 건 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분하지 않아.", "얻는 것이 크면 그건 패배가 아닌 거야. 그리고 그건 포기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지."(오가와 야요이, "너는 펫")-175쪽

확실히 시간이 추억을 미화시킨다.
현재의 불만족과 상관없이 옛날은 옛날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기억은 늘 지루하고 불쾌한 순간들을 증발시키고,
기쁘고 행복한 순간들만 남겨 놓는 경향이 있다.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빌리자면,
"현재는 너무 결함이 많기 때문이다."
-183쪽

그림자는 내가 이 세상에 던져진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단서이며, 반영체이다. -191쪽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김훈, "바다의 기별")
-263쪽

그리움 씨로부터

마음을 멈추고 당신을 본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만,
괜찮지 않은 밤은 온다.
창밖의 나무는 고요가 무성하고
아주 괜찮은 듯 서 있다.
당신은 언제나 떠나고 있고,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안다.
‘아프지 말아요’라고 말하던 그리움은
아프게 입술에 남아서
버릇처럼 ‘걱정 말아요’를 중얼거린다.
지나친 것들은 지나치게 나를 괴롭혔다.
가벼운 구름의 열망과
헐거운 방랑의 열정도
내내 길 위에서 시들었다.
늦은 밤, 늦어서 미안한 빗방울만이
토닥토닥 창문을 위로한다. -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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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의 발명 - 지식 편집자를 위한 12가지 생각도구 아로리총서 20
정상우 지음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0년 11월
절판


작가를 ‘발굴’하던 시기는 지나고, 출판은 작가의 ‘등장’을 뒤늦게 확인해서 책으로 묶는 역할에 만족해 가고 있다. -24쪽

편집자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매체로서 사고할 수 있는 힘을 지녀야 한다.
-35쪽

자신 없는 이야기를 할 때 저자는 주저하고, 말끝을 흐리고, 수많은 인용과 재인용의 뒤로 숨는다. 이처럼 수시로 자신을 잃고 움츠러드는 저자를 대신해서 편집자는 때때로 ‘팩트 체커’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51쪽

"실제 사건들은 우리를 진실 근처에도 데려가지 못한다. 진실이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견해 그 자체이다."("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의 작가 로버트 맥기)-73쪽

롤프 얀센의 이야기 공식

1. 당신의 스토리를 믿고 열정을 갖고 말하라.
2. 반드시 갈등을 포함하고 그것을 당신이 어떻게 해결했는지 말하라.
3. 그것은 반드시 가슴에 호소해야 한다.
-77쪽

‘브랜드가 있다’는 것은 여러 출간작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지향이 보인다는 것이고, ‘그 출판사의 책이라면 믿고 살 수 있다’는 독자층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단품 하나의 성공만으로 브랜드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중략) 그러니까 결국 브랜드 관리란 ‘우공이산’ 정도의 각오와 뚝심이 필요한 일이다. 아무리 시장성 있는 아이템이라 해도 고객과의 ‘브랜드 약속’에 위배된다면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브랜드 출판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 약속 자체가 없거나, 있다 해도 편의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출판사는 이름은 있으되, ‘브랜드가 있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고객들의 마인드에 브랜드가 제대로 포지셔닝 되기만 한다면, 그 동안의 노력은 보상받고도 남음이 있다. 신용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신뢰고, 브랜드 가치란 결국 소비자가 보내주는 ‘신뢰의 값’이니까 말이다. 따라서 마케팅의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는 브랜드 문제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120쪽

편집은 혼자 놀기가 아니다. 낯선 인물과 새로운 사상들에 마음을 열고 한바탕 어울려 놀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익숙한 도구와 익숙한 생각에 스스로를 가두는 순간, 편집은 어느덧 지루한 일이 되고, 편집자는 타성에 빠진 편집 기계가 된다.
-129쪽

피라미드의 건축이 노예들의 잔혹한 노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들의 참여로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우리는 조직과 개인 간의 균형의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피라미드를 노예들이 만들지 않았다는 주장에서 우리는 왜 이토록 위안을 받는 걸까? 이것은 진위의 문제라기보다는 당위의 문제이며, 본질적으로 마인드의 문제이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작품이, 혹은 책이 착취의 결과람녀 우리는 그 작품을 과연 기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겠는가? 착취는 조직 안에서 열정과 창의성을 몰아낸다. 결국, 열정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착취당하지 말아야 한다. 노예 되기를 거부하고 탈출해야 한다. 이것은 현실의 조건과 무관한 마인드의 문제이다. 스스로 자기 일의 주인이 되겠다는 마인드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주인의 자리에 있어도 노예의 근성을 갖고 있다면 그는 열정 없는 기계에 불과하다.
-131-132쪽

"글을 쓸 때는 문을 닫을 것, 글을 고칠 때는 문을 열어둘 것"(스티븐 킹)-160쪽

"이야기란 서술형으로 이어지는 집적된 정보가 아니라 의미가 집약된 절정을 향해 관객을 몰아가는 사건들의 설계를 의미한다."(로버트 맥기)
-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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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소녀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19
김류미 지음 / 텍스트 / 2011년 8월
품절


애서가의 단계 중에 장서가가 존재하는 것은 ‘텍스트의 소유’가 ‘텍스트에 대한 독서’보다 쉽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36쪽

적극성이라는 건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기계발에 잘 맞는 항목이고, 그만큼 평가받기도 좋은 면이 있다. 일은 하기 나름이라, 어느 알바나 적당히 하려고 하면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구석도 있다. 보통 그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대기업은 시스템을 만들어 분업화시켜 놓고 소점포의 점주는 일일이 알바를 갈군다. -81쪽

"멘티가 멘토를 찾는 경우는 별로 없다. 다만, 멘토가 멘티를 고르는 것이기에, 멘토의 눈에 띄기 위해 멘티는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류미 님이 블로그에서 만난 어떤 이의 말)-171쪽

경험의 필터를 통한 발화는 모두의 긍정을 받기는 어려워도 딱히 부정을 당하지는 않는다. 의외로 악플이 잘 달리지 않았다. 늘 맥락을 정교하게 고민해 조직하려고 했었다. 글은 경험만큼의 위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172쪽

글을 허투로 쓰지 말아야 한다고, 내가 치열하게 쓰지 않는 글은 남들에게도 심드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블로그를 하며 배웠다. -172-173쪽

세상은 착하게 살고 싶은 개인들이, 적당히 세상에 맞춰서 살면서 돌아간다. 그걸 알기에 세상을 쉽게 단순화시켜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사안이나 과거를 회상할 때, 이들은 하나씩 자기만의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처럼 때에 맞춰 적당한 자리에 옮겨 놓았을 뿐 아닐까.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건 즐거운 일인 동시에, 나를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었다. "너도 그 나이 되면 똑같아진다."는 말이 아니라고 그 자리에서 우길 수는 없다. 그저 사는 모습으로 보여 줄 수밖에 없다고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외친다. 메아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지만. -175쪽

"어떤 삶을 선택해도 괜찮아. 다만 그걸 핑계 삼지만 않으면 돼."(‘허니와 클로버’ 대사)-177쪽

기획은 아티스트가 될 수 없는 이들에게 창조할 수 있는 권한 같은 것을 주는 게 아닐까. 내가 쓸 수는 없지만, 쓰지는 않지만 누군가를 쓰게 만들거나 누군가가 쓴 것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거나, 누가 무엇을 써야할지 선별해 내는 작업. 누구나 본질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는 분야가 바로 기획이다. -178쪽

뉴미디어의 낙관론 속에 뜬 새로운 사람들은 서평가거나 인문학 담론을 오프라인에서 구축해 온 그룹, 또는 해외유학 박사급으로, 개인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식견을 탁월하게 제시했던 이들이다. PC 통신 시절부터 글쓰기를 통해 칼을 휘둘러 온 뛰어난 논객들은 결국 일부만 문화평론의 영역으로 넘어왔을 뿐이다. 대부분은 트위터나 블로그 등에서 콘텐츠를 생산해 내는 ‘지적질’을 하며 푼다. 이런 상황에서라도, 기존의 생태계가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말은 ‘기득권의 다양성을 보고 있다.’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등단에 목을 매지 말고 새로운 방식으로 진입하라."는 주문은 "취업이 힘드니 스펙이 목매지 말고 창업해라."라는 88만 원 세대에 대한 개발주의적 처방처럼 들리기도 한다. -181쪽

책을 한가롭게 앉아서 읽을 수 있는 계층이 이미 존재하고, 어떤 책들이 좋은 책인가를 말하는 고준담론에는 수준 있는 책을 읽지 않는 대중에 대한 타박이 들어 있다. 종종 사소한 댓글 논쟁이 결국 "님이 무식하십니다."로 끝나는 걸 보면, 과연 이 죄책감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183쪽

"확실히 숯불갈비집에서 12시간 동안 서빙을 하거나, 화장품 공장에서 하루 9시간씩 화장품 뚜껑을 끼우는 것에 비하면, 하루에 원고지 백 장을 쓰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쓰고 싶은 걸 쓰는 거니까."(소설가 김사과)-185쪽

출판사가 열악한 건 사실이다. 업계 게시판에 늘상 올라오는 글처럼, 신입을 뽑지 않는 출판계에는 인력난이 심각하다. 경력자를 선호하는 업계 분위기가 있고, 생각보다 적은 인원으로 돌아가는 노동집약적인 산업, 출판계를 택하는 이들은 나름대로 책을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책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또 스스로를 훈련시키고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지만, 편집자는 여느 독자들만큼이나 많은 책을 사고 읽는다. 훌륭한 편집자들은 어느 저자를 만나도 논의를 따라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공부량도 만만치 않다. 기실 이게 가능한 이들, 그리고 그만큼 기본을 갖춘 친구들이 편집자를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189쪽

‘돈이 아닌 텍스트에 대한 숭고함과 다른 가치’를 말하기보다는 이 업계가 ‘다른 가치와 함께 기본적인 삶의 수준’ 또한 보장해 주기를 원한다. 그게 아닌 이상, 능력 있는 젊은이들은 이 바닥에 들어올 수 없다. 노동력이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명제가 담긴 책을 내고 있다면, 당연히 책값을 올리는 한이 있더라도, 노동 소외를 느끼지 않는 업계가 되기를 바란다. 이건 너무 어린 생각일까? 디자인 비중이 중요해지면서도, 교정을 비롯한 외주 노동자의 단가는 10년째 그대로라고 말한다. 신입 채용을 잘 하지 않는다고 해서 ‘뽑아주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업계 이미지를 가질 수는 없다. 그것으로 ‘글밥 노동자’의 노동이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92-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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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로 산다는 것
김학원.정은숙.강주헌 외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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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란 "각각의 개성이나 인격, 인생관, 세계관, 또 지식, 교양, 기술, 나아가 일상의 생활 방식까지도 아우르는 이른바 그 사람이 지닌 일체를 총동원하여 전문가인 저자나 책을 직접 만드는 이들과 관계를 맺는 일을 하는 사람"(한기호)-7쪽

(우리 사회의) 인문학 바람은 '인문학 연구와 학문의 바람'도 아니고, '인문학 책 읽기' 바람도 아닙니다. 표면적으로 우리의 인문학 바람은 인문학 '강의' 바람입니다.(김학원)-26쪽

한 회사에 평생 다니겠다, 이런 시대는 지나갔어요. 이 회사에 뭘 배우고 이 회사에 뭘 기여할 것인가, 그 과정에성 나의 차별성과 전문성, 그리고 비전을 찾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나의 운동장을 가져야 합니다.(김학원)-42쪽

출판사에서 책이 나오면 독자들이 "이건 2년차가 만들었다고 하니, 적당히 봐줘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20년차 거니까 그가 얼마나 잘 만들었을까" 이러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완성된 책으로 독자와 맞대응을 하는 겁니다. 출판사에서 책이 출고될 때는 당연히 편집자의 연차와는 상관없이 완벽한 책으로 제작되어 나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출판사에서는 그 나름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정은숙)-69쪽

미디어는 기획자를 새로운 책으로 안내하는 길잡이입니다. 물론 책을 찾아내는 과정은 길고 험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열정과 끈질김을 강조했던 겁니다. 여하튼 신문에서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으면 한 구절이라도 허투루 넘기지 마십시오. 그 구절을 키워드로 요약해서 집요하게 추적하십시오. 그것이 기획의 답입니다. (강주헌)-111쪽

기획을 하는 에디터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그 많은 요소들을 모두 직접 장악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재주와 신통력을 가진 사람을 만나고 그들이 가진 힘을 나의 유용함으로 끌어 내는 자질이다. 기획의 힘은 곧 사람의 힘이고, 사람의 힘이란 한정되고 고립되지 않은 다양함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이홍)-160쪽

글은 저자가 쓰고, 책은 에디터가 만들고, 독자는 책 속에 있는 글을 읽는다. 아주 간단한 이 프로세스의 핵심은 상호 설득의 과정이다. 저자는 출판사와 독자를 설득해야 하고 출판사는 저자와 독자를 설득해야 한다. 판단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이홍)-165-166쪽

몇 년씩이나 현장에서 종잇밥을 먹었다는 ‘경력 편집자’들 중에서도 선뜻 일을 맡기기에는 도무지 미덥지가 않은 분들도 수두룩하다. 그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산술적으로 계량할 수 있는 ‘경력’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계기 속에서 축적된 ‘경륜’의 차이일 것이다. (변정수, "출판 편집자가 말하는 편집자")-188쪽

편집자가 다루는 텍스트는 그저 글자들의 나열이 아니다. 인격으로서의 존엄을 지닌 한 사람이 펼친 ‘정신 활동’의 소산이다. 그 앞에서 겸손해질 수 없다면 제아무리 오랜 세월 텍스트를 다루는 기술을 갈고 닦았다고 해도, 그 텍스트의 가치에 걸맞는 책으로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텍스트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 갈고 닦아야 할 것은, 해박한 지식이나 숙달된 기술이나 풍부한 실무 경험 따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대하는 자세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자신의 삶을 마주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요컨대 자신의 삶도 제대로 편집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정신이 담긴 텍스트를 감히 편집할 엄두인들 낼 수 있을까. (변정수, "출판 편집자가 말하는 편집자")-188쪽

상대적으로 안정된 노동 조건을 유지하며 직업적 전망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은 그야말로 ‘확실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쉴 새 없이 일하고 또 일해서’ 갈고닦은 전문성을 가시적인 성과로 제시하는 것뿐이다. (변정수)-193-194쪽

당장은 ‘짤릴’ 위험이 없는 유능한 사람이라 해도 시장 실패로 인한 실적 저하가 발생할 경우 언제든 미련 없이 해고될 수 있다는 불안 앞에서 노동 강도만 높아져 갔으며, 하물며 당장 ‘모가지’가 오락가락하는 불안정한 실적으로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는 더 많은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렇듯 어차피 시장 실패의 위험을 개인이 감당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굳이 회사 조직 속에서 직업적 전망을 모색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인지 상정일 것이다. 차라리 고유의 가치와 지향을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자신의 생산 과정에 최대한 실현해내면서 노동 강도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으로 적당히 유지하고, 설령 실패하게 되더라도 그 ‘민폐’의 범위가 자기 자신만으로 제한되는 각개약진이 구조적으로 강요된 것이다.
사람이란 아무리 험한 상황에서도 그 조건을 발판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게 마련이다. ‘1인 출판’ 담론은, 어쩌면 강요된 선택에 어쩔 수 없이 직면한 출판 종사자들이 스스로를 겪려하기 위한 ‘자기 포장’의 수사학은 아니었을까 (변정수)-206-207쪽

책 만드는 일을 잘해내려면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어두워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상식에 속한다. 세상이야 어찌 돌아가건 눈과 귀를 꼭 닫고 원고더미에만 코를 박아 보았자, 그 원고의 가치가 제대로 보일 리도 없고, 그 가치를 온전히 책 속에 담아낼 방법을 찾을 길도 막연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 가치를 전달할 독자를 창출해내기도 언감생심일 것이다. 책을 통해 만나야 할 독자들은, 세상에서 몸 부딪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갑남을녀들이지 세상과는 동떨어진 별천지에서 ‘독서삼매경’에나 취해 있는 탈속적인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정수)-209쪽

대다수의 편집자들이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빠삭하고 동네 소식에 빠꼼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 경영자들이 적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면, 특히나 자기 회사의 사장이 바로 그렇다고 판단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현실을 구성한다. 책 만드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으로 흔히 지목되곤 하는 ‘세상에 대한 폭넓은 시야’와 주체할 수 없이 왕성한 ‘호기심’ 따위는 자칫 인사권자의 눈밖에 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금기로 전락하게 된다. (변정수)-212쪽

독자는 미술을 이용한 책들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네 삶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미술이 자기계발도 할 수 있고, 삶의 지혜는 물론, 심리 치유도 할 수 있는 장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이 또한 미술의 대중화거든요. 미술 전공자의 영역에 감금된 미술을 일반인의 자기계발 욕구와 접목시켰다는 점에서 그렇고, 창의성 개발과 경영의 지혜를 얻기 위한 도구로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미술을 대중친화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도 그래요. (정민영)-243쪽

8,90년대의 책이 정보 위주였다면, 2000년대가 진행될수록 ‘정보+저자의 개인사’가 일반화되는 추세를 보입니다. 독자가 재미있게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정보를 습득하게 하는 거죠. (정민영)-254쪽

기획자는 신입 저자에게 독자가 자신의 글을 읽고 무엇을 얻어갈 것인지 생각해보게끔 자극하면서, 저자의 내부에 깃든 이야기나 감성을 끌어내줄 필요가 있어요. (정민영)-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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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개 2012-06-23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그렇듯 정성스럽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소한 오류가 있네요. 제 글에 다시 인용된 대목의 출처는 '편집에 정답은 없다'가 아니라 '출판편집자가 말하는 편집자'입니다.

마늘빵 2012-06-23 14:2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변정수 선생님. 책에서 출처를 그렇게 본 거 같았는데, 잘못 봤나 보네요. 수정했습니다.
 
말의 가격 - 돈에 갇힌 미디어와 언론, 그리고 민주주의를 구해낼 방법들
앙드레 쉬프랭 지음, 한창호 옮김 / 사회평론 / 2012년 6월
절판


대규모 출판 그룹들에 어떤 일이 생길지 정확히 예측하기란 아직 이르지만, 우리는 진작부터 예상되는 패턴을 목격한 바 있다. 그 패턴을 엄청나게 가속화시켰던 경제 위기 이전에도 압박이 있었다. 책을 더 적게 출판하고, 판매될 가능성이 높은 책들에 집중하고, 여러 출판사의 개성을 드러내 주곤 했던 광범위한 분야의 책들을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과거에 농담 삼아 말한 적이 있다. 출판사들이 도무지 판매될 것 같지 않은 새로운 책을 무시해버리는 ‘유아살해’로부터, 더 이상 재정적으로 가치가 없는 서적 계약을 취소해버리는 ‘유산’ 단계로 나아갔다고. 또한, 출판사들의 현재 목표는 판매되지 않을 책이 아예 얼씬 못하게 ‘피임’해버리는 것이라고.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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