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
이선민.최홍렬 엮음 / 민음인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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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는 조선일보에 2004년 8월 10일부터 2005년 3월 1일까지 연재되었던 것을 책으로 묶은 것이라 한다. 나야 조선일보를 보지 않으니 그랬는지는 모르겠고, 그저 하나의 책으로서 대했는데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별로다. 이 책의 내용들이 조선일보 연재물 이었기 때문에, 내가 조선일보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니고, 생각보다 내용이 부실하다.

  이 책은 대담집이고 나는 대담집을 좋아한다. 대담집의 장점은 사람과 사람의 대화를 지면으로 옮겨놓은 것이기에 마치 두 사람의 대화를 현장에서 엿듣고 있는 거 같은 사실감을 전해준다는 것이다. 또한 어려운 말을 하더라도 대화이기 때문에 - 대화란 곧 말로 풀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문어체보다는 구어체에 가깝다 - 쉽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일전에 읽은 <춘아 춘아 옥단 춘아 네 아버지 어디갔니>도 세계의 문학의 특별기획으로 구성된 대담집인데, 이 책을 통해서 참 많은걸 배웠고 많은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내 고민이 풀리면서 또다른 더 큰 고민으로 나아갔던 책이기에 '대담집'에 대한 내 감정은 더욱 호의적이다. 참고로 이후에 읽은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 받다> 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어쨌든 이 같은 기대감을 가지고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를 접했지만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화를 나눈 것은 상관이 없는데, 이들의 대화가 좀 진행이 된다 싶으면 금방 끊어져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신문지면의 연재물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대화를 하다마는 느낌이다. '잠깐 인터뷰' 형식이랄까. 제자가 스승을 만나 스승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승이 이에 대해 답하고 여기서 대화를 주고 받는 이 형식과 과정은 참으로 좋은데, 볼 만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조선일보 연재 당시엔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하지만 신문 연재물이 책으로 옮겨진다고 해서 반드시 인기를 끄는 것은 아니다. 잡지에 기고하기엔 퍽 좋은 글이 묶여져 책으로 냈을 때 별거 아닌 책이 되는 이치와 같달까. 글은 성격에 맞게 있어야 할 곳이 따로 있다. 인기있던 신문 연재물이라 해서 책으로 묶어서 '괜찮은 책'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이걸 책으로 묶고 싶었다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다면, 대담 분량을 더 늘려서 묶었어야 할 것이다. 이 두꺼운 책 한권을 읽고 뭔가 시각이 트인다거나 삶의 깨달음을 주었다거나 하는 뭔가가 있어야 책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할 것이 아닌가. 이 책이 내게 전해준 것은 잘 몰랐던 많은 이들을 접했다는  사실 외에는 없다.

  하나 더. 대담이 조선일보 연재물이라 그런지 이 안에 대담에 참여한 이들 중 다수가 조선일보식의 사회관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 탄핵사건이나 경제문제나 교육문제, 친일청산문제에 대해서 조선일보식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까웠다. 조선일보식 사고방식과 그 사람들의 평소 가치관이 우연히 일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마저도 왜 조선일보의 계략이라 생각되는거지. 무엇이 옳다 그르다의 관점을 떠나 대담까지도 '조선일보식'이구나 하는 생각에 더 속이 불편해졌다. 다른 사람들의 정치성이야 잘 모른다쳐도 김호기와 임지현이 대담자 리스트에 들어있는 것은 참으로 거시기허다.

  유일하게 이 책에서 내가 건진 것이 있다면, 이 책의 마지막에 있는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 김용구의 말이다.

  "저는 후학들이 '철학자로서의 지식인'이 되길 바랍니다. 지식인은 활자나 기호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여 그 사회의 문화 향상에 영향을 주는 사회 계층을 지칭합니다. 교수와 언론인, 종교인이 대표적인 계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지금 국제 정치학자들을 대상으로 말씀드립니다. 지식인은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기술자로서의 지식인'입니다. 강대국 국제 정치 이론을 충실히 전파하는 집단인데, 이들의 역할은 긍정과 부정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강대국 이론을 전달하는 면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으나, 전달 자체가 자기 해석이 결부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전달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문화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둘째, '이념 전달자 또는 이념 창조자로서의 지식인'입니다. 특정 정당, 정치 집단의 명분을 선전하는 집단인데, 그들이 지탱하려는 집단의 성격에 따라 역할이 상이하고 이른바 선진국과 후진국에서의 그들 역할도 상이합니다. 1960년대 이후 너무 많은 교수들이 이 유형에 해당하는 것이 한국 국제 정치학 발전에 과연 도움이 되는 일인지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셋째, '철학자로서의 지식인'입니다. 자신이 처한 국가나 사회의 역사적 발전 방향을 설정해 이에 대한 원칙을 제시할 수 있는 지식인입니다. 저는 후학들이 이런 지식인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철학자로서의 지식인에게는 자연히 뒤따라 발생하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p.s. 리뷰를 쓰다 전에 읽었던 두 대담집을 검색해보았다. <춘아 춘아 옥단 춘아 네 아버지 어디갔니> 와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 받다>가 절판되었었는데, 다시 확인해보니 지금은 둘 다 판매중이다. 절판되어 참 아깝다고 생각했던 두 책이 다시 보여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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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하게 세속적인 삶
복거일 지음 / KD Books(케이디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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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고민은 언제나 지속된다. 마치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져놓고 매번 다른 대답들을 내놓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여전히 삶은 진행 중이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여전히 나를 찾고 있는 중 이라는 대답으로 일관하며 모색 중이다. 결국 아마도 난 자연히 나이가 들어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 연령에 도달하는 즈음에서 죽어가는 시점에서도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만족스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눈을 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런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대답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할지도 모른다.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복거일은 '세속적으로 현명한' 보다는 '현명하게 세속적인' 것이 삶의 본질에 맞다고 이야기한다. '세속'과 '현명'은 '삶'을 똑같이 수식해주지만, 똑같은 질감으로 삶을 수식하진 않는다. '세속적으로 현명한 삶'과 '현명하게 세속적인 삶'은 분명 다르다. 영국의 시인 콸스는 어느 싯구절에서 "현명하게 세속적이어라. 세속적으로 현명하지 말고"라고  말했다. 복거일은 말한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세속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세속적 처신으로 시종하면, 무언가 근본적 중요성을 지닌 것을 놓칠 수도 있다. 따라서 자신이 추구하는 삶에 맞는 방식과 정도로 세속적이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후손들이고, 당연히 우리는 보다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애쓰고 노력한다. 한편 모두 세속적 성공에 대해서 또 약간의 진정한 경멸감을 가지고 있다. 세속적으로 성공한 자들에게 부러움을 표현하지만, 그들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존경을 받는 너무 낮은 자리를 차지하면 당장 살기 어렵고 발전에 도움이 안된다. 뜻하고자 하나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할 공산이 크다. 고로 여기서 "현명하게 세속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복거일이 말하는 "현명하고 세속적인 삶"을 지칭하는 것은 기업인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 자리가 한정되어 있는 공무원, 관료 등을 향한 젊은이들의 열망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위치재는 "가치의 큰 부분이 특수한 위치 덕분에 생긴 재화"를 가리키는데, 이는 더 생산될 수 없고 재분배 될 수만 있다는 것이다. 위치재에 대한 다툼은 치열하고 이를 향한 경쟁과정에서 창출되는 가치는 없다. 그러나 기업 등의 상업활동은 돈을 많이 벌어 자신의 위치를 높일수도 있으며, 아울러 물질적 가치를 창출해 사회에 공헌하므로 권장할만하다. 위치재와는 다르게 높은 사회적 성공에 따르는 부러움과 존경도 받을 수 있고, 사회에 공헌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는 것이다. 복거일에게서 "현명하게 세속적인 삶"은 바로 이를 뜻한다.

  더불어 그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삶에 도달한 뒤에는 회사나 기업의 이름으로 자선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재산으로 기부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회사의 돈으로 기부를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진정한 사회적 공헌과 함께 나 개인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싶다면 내 이름으로 내 재산을 털어 자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평소 복거일의 발언내용이나 다른 책을 통해서 접했던 그의 사회에 대한 가치관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복거일은 친기업적이고, 친시장적인 발언을 자주했으며,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를 실현하는 길이고,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이라 믿는 사람이다. "현명하게 세속적인 삶"을 기업인의 삶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것도 그의 평소의 생각과 같다. 그는 한국의 지식인 지도에서 '자유주의자'에 속하는 사람이고, 이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도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이 책과 그의 몇몇 책들을 살펴본 결과, 그의 자유주의는 삶의 방식에 있어서 그럴 듯 하고 설득력을 갖기도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문제로 나아갔을 때는 다르게 바라봐야 할 듯 하다. 한 개인으로서의 삶과 그것을 사회나 국가의 차원에 적용했을 때의 차이랄까.  

  책 몇 권 읽었다고 복거일과 그의 생각에 대해서 다 알았다고 하면 성급한 일반화일 것이다. 그는 꽤나 굳건하게 꾸준히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 논변을 표현하고 있으나 그것이 얼마나 의미있는 메세지일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이 책에는 "현명하게 세속적인 삶"에 대해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는데, 지금까지 이야기한 '기업인으로서의 삶'과 연관지어 볼 수 있는 작은 소제목이 그 하나요, 이 책 전체를 통해 "현명하게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복거일의 눈으로 본 일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또 하나다. 짧은 글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있지만 읽으며 생각할 거리들은 꽤 많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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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2-05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명하게 세속적인.. 보통사람이 추구하는 삶의 양상일 것입니다.
복거일의 책은 유행하는 '왜곡된 평등'에 대한 일종의 'rebound'일 것입니다.
세상이 노멀이라면 무의미한 책이지요.

 
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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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이를 토대로 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은 많다. 강준만, 한홍구, 김동춘, 탁석산, 박노자, 홍세화 등등. 하지만 진중권은 다른 이들에 비해서 재미난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다. 같은 것을 보지만 다르게 표현한다. 진중권이 이 책을 통해서 드러낸 그가 바라본 한국사회는 우리가 살면서 흔히 접하는, 또 느끼는 것들이다. 그 중에는 우리가 이것만은 좀 고쳐졌으면 좋겠는데, 이런 면은 이렇다, 라고 스치듯 생각이 지나치는 경우들도 많다. 진중권은 이런 평범한 한국 사회의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것들을 소재로 삼아 한국인을 성찰한다.  크게 근대화, 전근대성, 미래주의 로 나누고, 각각에 들어맞는 한국 사회의 모습들을 담아낸다.

  진중권은 이 책의 서문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했다. "'정체성'이라는 낱말은 다분히 이념적이어서, 한국인이 마땅히 수립하고 보존해야 할 어떤 가치 체계를 함축한다. 가치관이 다양해진 시대에, 과연 한국의 문화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어떤 양식 같은 게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정체성' 담론은 종종 특정인의 주관적 가치관을 사회의 객관적 규범으로 제시하는 형식을 취한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한국인이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한국의 정체성'에 관해서라면 철학자 탁석산이 <한국의 정체성>이라는 책을 통해서 작업 한 바 있다. 그는 정체성과 주체성은 분명히 다르며, 정체성이라 할지라도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인'의 정체성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의 정체성을 알기는 매우 어려운데, 한국인이 만든 작품을 통해서 분석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때도 한국인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한국이란 집단이 역사를 통해 공동으로 만들고 지금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가 언어요, 둘째가 한국과 관련된 각 분야의 공통 속성을 찾는 것이다.

  진중권이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통해서 하는 한국인에 대한 작업은 탁석산이 내세우는 것만큼이나 거창하지는 않지만, 이 역시 한국사회와 한국인을 설명해줄 수 있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그는 이 책이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하비투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서문에서 밝히는데, 하비투스란 "우리말로 흔히 '습속'이라 번역되는데, 거칠게 말하면 특정 사회 성원들의 사고방식, 감정구조, 행동양식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

  진중권이 살피고 있는 우리 사회는 생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인의 습속이다. 지하철 문화, 식탁에서의 식사문화, 예절, 황우석 사건을 대하는 태도, 국가대표, 월드컵, 취미와 여가생활 등등 우리 생활의 일면을 재료로 삼아 이를  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단 이것을 근대화와 전근대성, 미래주의로 나누어 해당 범주안에 묶어놓아 단순히 일면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근대성과 전근대성을 살펴본다는 차원에서 의미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진중권의 글은 매우 재밌다. 일단 우리의 모습이 담겨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친근하고, 글 자체가 어렵지 않으며, 그의 분석은 날카로우나 즐겁다. 때로는 그의 글은 심한 경우 '비꼬기'로 변질되는 경우도 있으나 적절한 선에서 마무리 지음으로써 읽는 이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다음과 같은 대목들로 진중권의 일상의 한국인에 대한 분석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볼 수 있다. (참고로 비꼬기가 적나라하게 표출된 것으로 그의 저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가 있다. 이 책은 읽는 내내 공감하면서도 불편했다.)  

  "수직적 위계를 위한 예법이 매우 복잡하게 발달된 한국 사회, 수평적 교제를 위한 예법에는 이렇게 구멍이 나 있다. 원래 전통 예법 자체가 신분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데다가, 근대화마저 군대를 모델로 하여 이루어지다 보니, 예법이 주로 수직적 위계를 세우는데에 소용된 것이다. 그 결과 개인과 개인의 평등한 교제를 규제하는 품위있고, 격조 있는 시민적 예법은 발달할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낯선 사람과 마주칠 때 한국인이 느끼는 어색함은 거기서 비롯된다."

  "한마디로 한국인은 근거리 지각에 따르는 쾌, 불쾌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 일단 내가 불쾌해야 남도 불쾌할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지 않겠는가. 자신이 불쾌하게 느끼지 않는 행동은 당연히 남에게도 별 생각 없이 하게 된다. 한마디로 이것은 '배려'의 문제이기 이전에 먼저 '감각'의 문제다. 이른바 에티켓의 전제가 되는 것은 바로 불쾌를 불쾌로 느끼는 미적 취미다."

 진중권의 글을 통해 독자들은 한국인으로서의 자신과 주변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느끼고 행동하고 살았던 부분들이 이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생활 곳곳에서 떠올리게 될 것이다. 지금도 내 머리 속엔 그의 시각,후각,미각,촉각 등에 대한 지적이 맴돌고 있다. 쥐포를 구웠더니 난 구수했는데 내 동생은 대뜸 화난채로 나와서 창문을 활짝 열고는 들어간다. 어찌 볼 것인가. 내 동생의 근대화된 후각을. (다른 차원에서 보면 동일 냄새에 대한 개개인의 취향 문제로 들어갈 수도 있다)  

  진중권의 한국인의 하비투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에는 동의하고, 웃음의 미학에는 즐거움을 느꼈으면서도, 한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면, 그의 한국과 한국인의 습속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소 그가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그곳에서 접했던 것들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홍세화와 고종석이 프랑스를 기준으로 삼고 한국을 바라보듯, 진중권은 독일을 기준으로 삼아 한국을 바라본다. 도식화의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굳이 연결지어본다면, 옳은 독일의 모습으로 그른 한국의 모습을 바라본달까. 재밌게 읽으면서 불편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물론 진중권은 독일이 무조건 옳다는 것이 아니라 독일의 모습 중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가지고 한국의 동일한 부분에 대해 지적했겠지만, 글 전체에서 풍겨지는 인상만큼은 지울 수 없다.

 p.s. 이 책과 함께 탁석산의 <한국의 정체성>과 강준만의 <인간사색> <한국인코드>를 비교하며 읽는다면 한국인의 정체성이든 습속이든, 다양한 관점에서 한국과 한국인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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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7-02-05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점 리뷰쓰시는 실력이 느신다는 느낌. ^^

마늘빵 2007-02-06 0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사합니다. ^^

파란여우 2007-02-15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드팀전님과 아프락사스님때문에 진중권 책을 그만 사야겠다던 각오(??)가 무너집니다. 자꾸 이런식으로 강력 뽐뿌를 하면!(하면? 할수 없죠 뭐. *.*)^^
보관함으로!

마늘빵 2007-02-15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여우님 저는 아무 짓도 안했는데요 =333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
이선민.최홍렬 엮음 / 민음인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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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200편까지 나오곤 했지. 그러니 어떤 배우는 심지어 20편을 동시에 촬영할 때도 있었어. 신인 감독의 진입도 쉬워졌찌. 양이 질을 지배한다는 논리엔 수긍을 하지만, 양에 함몰되는 순간 그때부터 매너리즘에 빠진 것도 사실이야.
(영화감독 유현목) -31쪽

"물론입니다. 학교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지만 책을 통한 배움도 이에 못지 않아요. 우리는 책에서 인생의 다양한 좌절과 성취와 깨달음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자극을 받습니다. 요즘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 과외에 치중하는 것을 봅니다만, 사람이 성숙해지는 것은 책을 만났을 때부터라고 말하고 싶어요."
(민음사 회장 박맹호) -41쪽

"세계적인 어느 수학자가 한 말인데, 자기가 두렵게 생각하는 수학자는 머리가 좋다든가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보다 수학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저리도 수학을 좋아할 수 있는가 하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 더 수학을 잘하는가는 누가 더 좋아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는 그만큼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은 자기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서 그 길을 택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인 것 같습니다."
(이화여대 명예교수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 -68쪽

"저는 인문학을 '기본적 학문'이라고 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기본' '기초'라고 하면 왠지 초반 일정 기간만 배우고는 '졸업'할 대상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근원적인 것을 천착하는 '일상적인 학문'으로 인문학이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에게는, 젊음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고 싶은대로 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삶은 의외로 높고 깊고 넓습니다. 아무리 부지런하게 살아도 모자랍니다. 약삭빠르게 계산하고 재는 삶은 이미 젊음이 아닙니다."
(한림대 특임교수 종교학 정진홍) -156쪽

"요즘 교육이 경쟁력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대학을 비교하는 수치가 있는데, 그 수치에는 속임수가 많아요. 대학의 서열 매기기는 미국의 잣대를 사용한 겁니다. 유럽 대학은 수치를 매기는데 모두 빠져 있는 상황이죠. 대학 강의를 영어로 하면 경쟁력이 커진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하짐나 학문의 모국어가 영어일 수 없는 한국에서 영어로 바꾸느라 힘만 들 뿐 소득이라곤 별로 없지요. 우리 학문은 우리 말로 강의해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국산품의 질을 높여야 하듯 우리 학문도 기술 도입과 같은 문제나 주문자 생산 방식의 수준에서 벗어나야 해요. 국내에서 생산한 물건을 외국 것과 비교하는 작업을 통해서만 외국어로 바꿀 필요가 있겠지요."
(계명대 석좌교수 국문학 조동일) -172쪽

"저는 후학들이 '철학자로서의 지식인'이 되길 바랍니다. 지식인은 활자나 기호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여 그 사회의 문화 향상에 영향을 주는 사회 계층을 지칭합니다. 교수와 언론인, 종교인이 대표적인 계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지금 국제 정치학자들을 대상으로 말씀드립니다. 지식인은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기술자로서의 지식인'입니다. 강대국 국제 정치 이론을 충실히 전파하는 집단인데, 이들의 역할은 긍정과 부정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강대국 이론을 전달하는 면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으나, 전달 자체가 자기 해석이 결부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전달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문화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둘째, '이념 전달자 또는 이념 창조자로서의 지식인'입니다. 특정 정당, 정치 집단의 명분을 선전하는 집단인데, 그들이 지탱하려는 집단의 성격에 따라 역할이 상이하고 이른바 선진국과 후진국에서의 그들 역할도 상이합니다. 1960년대 이후 너무 많은 교수들이 이 유형에 해당하는 것이 한국 국제 정치학 발전에 과연 도움이 되는 일인지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셋째, '철학자로서의 지식인'입니다. 자신이 처한 국가나 사회의 역사적 발전 방향을 설정해 이에 대한 원칙을 제시할 수 있는 지식인입니다. 저는 후학들이 이런 지식인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철학자로서의 지식인에게는 자연히 뒤따라 발생하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 김용구) -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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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전히 '액션'만 있는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몇몇 좋아하는 시리즈 물이 있는데, <다이하드> 편과 <리셀웨폰> 편이 그렇다. 둘 다 굉장히 오래된 영화들인데, <다이하드>는 88년에 1편이 나오기 시작해 4편까지 있고, 리셀웨폰은 3편까지 나왔던가. 뭐 검색해보면 금방 나오겠지만 귀찮아.  

  순수 액션 영화인 다이하드의 주인공은 언제나 존 맥클라인 경사. 브루스 윌리스. 이 사람 나온 영화들은 거의 다 좋아한다. 특별히 매력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브루스 윌리스는 나오는 영화마다 거의 이런 식의 액션영화들인데 출연작도 엄청 많고 대개 흥행했다. 비슷한 이미지로 이렇게나 오래 읅어먹는 사람도 많지 않을텐데, 게다가 이렇게 또 오래도록 사랑받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 참 멋있게 늙었다. 저 나이(55년생)에 몸매도 저 정도면 잘 빠졌고.

  언제나 살짝 벗겨진 이마에 인상 잔뜩 지푸린 얼굴로 피를 흘리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브루스 윌리스. 영화마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올시다. 탐크루즈가 나오는 액션도 좋아하지만 대개 탐크루즈의 액션은 액션도 액션이지만 영화에 메세지가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브루스 윌리스의 출연작은 그렇지 않다. 나름 스타일이라면 스타일. 두 사람 다 온몸을 내던지며 열연하지만 브루스 윌리스의 액션은 안쓰럽다. 맨날 많이 당하고 주먹구구식 싸움인 경우가 많다. 탐 크루즈 처럼 최첨단 무기도 사용하지 않으며 기교를 부릴 줄도 모른다. 그냥 냅다 몸만 던진다. 이제 나이 생각도 하셔야지. 88년 첫 작품이면 거의 20년 세월이다. 대단하다.

   역시나 <다이하드> 1편에서도 홀로 독일 우익 테러범들과 맞서 고군분투 하며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맨발의 청춘으로 계단을 이리저리 뛰댕기고, 엘리베이터 안에 위에, 옥상에, 책상 밑에 여기저기 안다니는 곳이 없다. 그러다 결국 발바닥에 유리 잔뜩 찔리고, 근육질 어깨는 피투성이다. 아 그냥 얼굴만 봐도 아프겠다 싶다. 수고했다 존 맥클라인 경사. 당신이 수고한 만큼 20년 뒤에도 이 영화를 사랑하는 나같은 이가 있으니. 이 영화를 내가 대여섯번은 본 거 같은데 봐도 봐도 다음에 무슨 장면이 나올지 뻔히 알면서도 재밌다. 아무 생각 없이 보기에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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