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 살림지식총서 24
이기상 지음 / 살림 / 200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땅에서 철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의 자기성찰적인 책들은 꾸준히 나왔다. 많은 철학자들이, 인문학자들이 이에 대해 고민하고, 자기의 밥그릇 문제 때문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철학이 없는 사람들, 철학이 없는 국가의 현재 상태에 대해 고민하고 나름대로 그 해결책을 내놓으려 시도하고 있다.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이기상의 <이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 역시 이와 같은 고민에서 비롯되어 나온 하나의 작은 결실이다. 그는 "우리가 몸으로 부대끼며 사는 삶의 세계에 바탕한 우리의 고유한 철학이론을 세워보고자 시도해본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의 '철학하기'는 구체적인 생활세계와 그 언어인 일상 언어를 떠나서 행해질 수 없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여 우리의 역사와 문화, 현재의 삶의 세계에서 무늬와 결로 아로새겨져 있는 삶의 문법을 우리의 철학으로 체계화 시켜서 제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책에서 그 첫걸음을 내딛어 본다." 라고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지은이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철학, 대다수의 철학자들이, 철학을 공부한다는 이들이 하고 있는 철학이라는 것은, 서양의 것이고,  우리만의, 이땅에서 필요한 철학이 부재중이라고 진단한다.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외국의 이런저런 석학들을 모셔와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문제를 그들에게 진단내려달라 한다. 1996년에 리처드 로티와 위르겐 하버마스가 내한했을 때, 한국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내려달라는 우리 학자들의 요구에 그들은 당사자인 한국의 학자들이 더 잘 알 것이라고 말했다. 정답이다. 우리의 문제를 이제 한 번 내한한 그들에게 물어보는 것은 정말 멍청한 짓이었다. 우리의 문제는 지금 이 땅에 발붙여 살고 있는 우리가 더 잘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한 진단과 처방 역시 우리 스스로가 내려야 한다. 나의 문제를 내 고민 없이 타인에게 맡겨버린다는 것은 정말 바보같은 짓이다.

  저저는 이와 같은 한국 철학의 문제를 지적하고서 우리 생활 세계에 바탕한 철학이론 세우기를 시도한다. '사이이론'이라고나 할까. 자연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문명과 사람 사이가 극도로 파괴되는 혼돈의 시대 속에서 사이의 철학을 강조한다.

  "다만 남의 말이나 자기가 들은 것에만 의지하는 사람은 더불어 학문을 말할 것이 못된다. 하물며 평생토록 마음의 작용과 자연의 현상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사람이랴."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中)

  이땅은 외국철학이론의 전쟁터가 되었으며, 우리의 생활에 바탕한 철학이론을 세워야 한다는 지은이는 열하일기의 한 대목을 통해 이를 강조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흔들리지 않는 우리만의 토대가 있어야 하며, 이를 우리 스스로 중심을 잡고 굳건하게 서있을 수 있기 위해서 우리만의 터전이 필요하다(공간성, 영토성), 중심을 잡기 위해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어야 한다(정체성, 동질성), 우리의 생활 세계와 문화, 역사에 대해 주인이 되어야 한다(주체성), 또 잊지말아야 할 것이 세계상황이다(세계성, 보편성) 라고 하며 몇 가지를 이야기한다.

  이어 그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차이를 지적하며 서양은 있는 것(존재)에 대한 놀라움으로 철학을 시작했고, 우리는 없는 것에 대한 경외심에서 철학을 시작했다고 하며, 철학의 시작이 다르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서양철학의 이성중심, 인간중심적 사고관에서 벗어나 감성과 자연중심적 사고를 해야한다. 이성중심적 세계관은 히로시마의 원폭,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대량학살이라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고, 우리는 이성중심의 하나의 세계가 아닌 문화, 종교, 언어의 고유성과 특수성을 인정하는 다양성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이란 결국 '사이'의 존재이며, 첫째, 빔-사이(공간). 노동이 도구, 기술, 예술, 생산, 거주라는 방식으로 이어지며 인간은 사이에 있음으로써 빔-사이를 채워나가며 사이를 나름대로 인간적인 과정으로 만들어 나간다. 공간이라는 빔-사이를 없애는 것은 기술로 이루어지는데, 교통과 통신이 그것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둘째로, 인간, 즉 사람 사이에 있음을 이야기하며, 이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행위는 '말'이며, 말의 실천에서 관습, 윤리, 도덕, 사회, 국가가 생겨난다, 사람 사이의 간격을 없애는 것이 평등이며 인권이다. 사람 사아에 있음이 무너지게 되면 도덕,윤리가 무너지게 된다고 말한다. 셋째는, 때 사이에 있음, 즉 시간이다. 이는 역사, 학문, 지평이 생겨나는 공간이며,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로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과거의 전통을 세우고, 현재가 과거에 의해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도록 하며, 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시각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넷째, 천지간, 하늘과 땅 사이를 말한다. 기도, 감사, 초월, 성스러움, 신, 종교 등으로 이야기되는 차원이며, 인간은 우주적 인 사이에 있음을 책임져야 할 뿐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에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그는 때- 사이에 있음(주체성), 빔-사이에 있음(공간성,영토성), 사람-사이에 있음(역사성), 하늘과 땅-사이에 있음(보편성)을 논한다.

  또한 그는 이땅에서 철학하기 위한 조건으로 우리말을 이야기한다. 언어는 세계를 보는 시각이며, 영어공용화나 한자병용과 같은 논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지은이는 철학함을 이끌고 있는 언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열 가지 명제를 소개한다.

  첫째, 언어는 세계를 보는 눈이다. 둘째, 언어는 민족을 묶는 끈이다. 셋째, 언어는 사고방식을 형성해주는 틀이다. 넷째, 언어는 의식의 밑바탕을 이루는 무의식이다. 다섯째, 언어는 정서의 공감대이다. 여섯째, 언어는 자주와 자율의 바탕이다. 일곱째, 언어는 자유와 평등의 조건이다. 여덟째, 언어는 학문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이다. 아홉째, 언어는 사람 사이의 다리이다. 열번째,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우선 그의 한국 철학의 현 세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이땅에서 학문하기 위한, 이땅에서 철학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고민이 묻어나는 짧은 글이었다. 이땅의 철학이 중심을 잃고 이성중심적인 서구적 세계관을 바탕으로한 서양철학의 전쟁터가 되었다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를 대체하기 위해, 우리말로 철학하기 위해 그가 제시하고 있는 그만의 처방엔 언뜻 동의하기 힘들다. 아니 동의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동감은 하기 힘들다. 그의 처방은 적절해보이면서도 어딘가 허전하다. 그것은 그가 제시하고 있는 우리철학이라는 것이 이땅에 발붙여 사는 우리의 구체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추상적이고 뜬 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이미 들어온 서양의 문화, 서양의 철학도 결국 우리의 것이다라는 탁석산의 진단이 더 적절하고 현실성 있어 보인다. 탁석산은 <한국의 주체성>과 <한국의 정체성>에서 우리 것이란 과거에 우리 선조들이 누렸던, 선조들이 말하고 글로 남겨왔던 그것과는 다르다고 말하며, 외국의 것이라도 일단 우리에게 접수된 이상 그리고 우리식으로 변질된 이상 그것은 더이상 외국의 것이 아니고 우리의 것이라고 했다. 헐리우드 액션영화를 본 딴 영화 <쉬리>를 서양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의 고민과 시도는 좋았으나 너무나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독일에서 하이데거를 전공한, 서양의 철학을 한 철학자가 서양철학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네 현실을 지적한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그의 한국철학에 대한 고민에 꼬투리를 잡을 수는 없을 터. 그는 이를 의식한 탓인지 책의 중간에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처음부터 일본어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우리말 번역어를 전혀 모르면서 독일에서 독일어로 독일식으로 사유하며 철학 공부를 시작한 나에게는 한국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한 다른 사람에게 없는 장점이 하나 있음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논의가 되고 있는 철학적 사태를 일본어적인 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우리말의 언어적인 상황에로 옮겨 놓고 우리의 일상세계적 맥락에서 이해해 보려고 시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그것이었다. "

  우리네 철학에 대한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철학과에 개설된 '한국철학'이라는 수업에서는, 지눌과 불교, 권수정혜결사문, 성학십도, 동몽선습, 격몽요결, 사소절, 우주문답, 서유견문, 동경대전과 같은 우리네 선조들의 서적을 읽으며 한국철학을 논하지만, 그것이 한국철학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단지 편의상 철학의 과목을 나누고 이름붙이기 위해 '한국철학'으로 분류했다면 동의하겠지만 말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땅에서 철학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책을 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그들의 책을 읽고 이것이 정답이다 라고 무릎을 칠만한 적절한 진단과 처방을 보진 못했다. 기존의 학자들의 주장과 철학자 이기상의 주장이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 비해, 철학자 탁석산의 주장은 그나마 신선하기라도 했다.

  이 책과 더불어 조동일의 <이땅에서 학문하기>, 최종욱의 <이땅에서 철학하는 자의 변명>, 탁석산의 <한국의 주체성> <한국의 정체성> 을 읽는다면,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10-03-14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림 지식 총서를 모으고 있는 저로서, 관심이 가는 책입니다..사서 봐야 할거 같아요^^

마늘빵 2010-03-15 09:39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이기상 교수에 근거없는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 그걸 떠나서 이 책은 학문하는 자세, 철학하는 자세에 대해서 생각해볼 만한 꺼리를 제공합니다. 얇은 책이라 출퇴근길에 금방 읽을 수 있을 겁니다. :)
 
사랑을 생각하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을 때는 
 나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그것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하면
 나는 더 이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가 무엇을 대상으로 삼아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중세의 철학자이고, 중세의 철학이란 신학을 의미하고, 그가 쓴 <고백록>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쯤은 쉬이 예상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도출되는 결론은 그 대상은 아마도 하느님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지만, 그의 말은 다른 곳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사랑.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을 때 나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그것에 대해 물어보고, 내가 그에 대해 설명을 하려하면 나는 그것을 내가 알고 있는건지 모르는건지조차 알 수 없다. 분명 알고 있는거 같은데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있다. 사랑.

  모르는 척 하다 이제서야 밝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위의 발언은 '시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사랑을 생각하다>를 시작하며, 아우구스티누의의 저 말을 걸고, 시간 대신 사랑을 적용시킴으로써 입을 뗀다. 내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 도대체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사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붓이나, 펜, 혹은 악기를 집어 들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하는 쥐스킨트. 맞는 말이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모르는 것. 그 어설픔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탐구하도록 만드는 힘이 된다.

  그는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대화편>을 통해 사랑에 대한 사색을 시작한다. 그가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오르페우스 신화'.

  오르페우스는 시인이며 음악가였고, 그의 아버지는 아폴론, 어머니는 칼리오페.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라는 님프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한 양치기에게 쫓기다가 뱀에게 물려 죽고 말았다. 아내를 잃고 슬픔에 빠져있던 오르페우스는 저승으로 가서 직접 아내를 찾기로 결심했다. 그는 리라를 타고 노래하면서 지하세계로 내려갔다. 그의 음악에 감동한 뱃사공 카론은 산 사람인 그가 강을 건너게 해주었으며, 지하세계의 문지기개 케르베로스도 고개를 숙이고 저승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는 저승의 왕인 하데스와 아내 페르세포네 앞에 나아가 리라로 반주하면서 아내를 되찾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그의 애달픈 노래를 듣고 누구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고,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도 그것에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뤼디케를 지상으로 데리고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단 조건이 하나 붙었는데 그것은 지상에 도착하기까지는 그가 그녀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오르페우스는 앞서고 에우뤼디케는 뒤따르면서 둘은 어둡고 험한 길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걸어왔다. 마침내 지상세계로 나가는 출구에 거의 도착하게 되었을 때, 오르페우스는 순간 약속을 잊고 에우뤼디케가 아직도 따라오나 확인하기 위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에 에우뤼디케는 하계로 다시 끌려갔다. 오르페우스는 다시 그녀를 따라 하계로 내려가려했으나 이번에는 카론도 케르베로스도 그에게 다시 자비를 베풀어 주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죽음과 자신의 실수를 탓하면서, 그 후 여자를 멀리하며 추억을 회상하며 살았다.
처녀들은 그에게 구혼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어느 날 디오니소스의 제전에 참석한 그를 한 처녀가 발견했다. 처녀들은 자신들의 구혼이 거절당한 것에 대한 원한으로 창과 돌을 던져 그를 공격했고 그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의 찢겨진 몸은 강에 던져졌고 그것들은 슬픈 모래를 속삭이는 듯 노래와 연주를 하며 흘러 내려갔다. 그는 죽어 지하세계에 내려가서 에우뤼디케를 찾아내자 열렬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들은 이제 서로를 마음껏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엠파스 검색 참고)

  쥐스킨트는 이와 같은 오르페우스 신화의 사랑이야기를 기본으로 하여 사랑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사랑에 대한 어떤 체계를 잡아내려 한 듯 하진 않다. 오르페우스 신화에서부터 시작해서 그의 사랑에 대한 사색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멀리 나아간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괴테, 예수, 스탕달, 토마스만, 바그너,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의 이야기까지. 집으로부터 너무 멀리 걸어온 탓에 사색의 꼬리는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의 생각의 꼬리를 따라가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겐가 정신이 아찔하기도 하다. 책고 난 뒤에 뭘 읽었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책이다.

  2005년 1월, 독일에서 개봉한 영화 <사랑의 추구와 발견>에 대한 일종의 해설서라고 볼 수 있다는 이 책은,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와 줄거리를 넘어 쥐스킨트만의 사랑에 대한 사색으로 번져나갔다. 해설서라기보다는 그걸 기본으로 한 사랑에 관한 한편의 사색서라고 보는 편이 훨씬 낫겠다. 어차피 이 책을 읽고 있는 한국의 독자들이야 독일에서 개봉한 그 영화에 대해 아는 이라고는 거의 없을테니.

  사랑은 무엇인가 하고 질문을 던졌던 쥐스킨트 조차 이 책을 끝까지 써내려간 뒤에도 정답을 찾지는 못한듯 보인다. 어차피 정답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사랑에 정답은 없다. 각자가 사랑에 대한 사색을 펼쳐나가다보면 어느 덧 사랑에 조금씩 한발 더 다가와있을 뿐. 사랑을 정의하려들지 말지어다. 사랑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사랑을 정의하려들면 더욱 멀어진다. 도를 도라 부르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 그것만으로 족하다. 설명하려들지 말지어다. 정의하려들지 말지어다. 그저 느낄지어다.

나 살아있는 그 존재를 찬양하리,
불꽃같은 죽음을 동경하는 그런 존재를.

사랑의 밤들의 서늘함 속에서,
당신의 증인이었고, 이제 당신 자신이 증인이 된 그 속에서,
촛불이 고요히 타오를 때,
낯선 느낌이 당신을 사로잡네.

이제 더 이상 당신은
어둠 속 그늘에 싸여 있지 않네,
새로운 욕망이 당신을 사로잡네,
더 높은 곳에서의 성교라는 욕망이.

그곳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당신은 두렵지 않네,
당신은 황홀경에 빠져 훨훨 날아오르네,
그리고 빛을 열망하는 당신,
이제 당신은 드디어 나비로 불타오르네.

하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네,
그렇다 : 죽으면 그리 되리라!
이 어두운 지상에서는
당신은 단지 우울한 손님일뿐.

괴테 <행복한 동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 살림지식총서 24
이기상 지음 / 살림 / 2003년 8월
장바구니담기


한국에서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한국인의 정신치료에 많이 활용되고 있다. 한국에서 소위 배웠다는 사람치고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 용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용어는 보편적인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삶의 맥락에서 만들어져 나온 이론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서양사람의 길고 긴 역사와 문화, 그리고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들의 생활 속에서 서서히 형성되어 온 서양인들의 심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론이며 용어이다. 그런 이론과 용어가 서양에서 잘 나가는 과학이기에 직수입하여 우리의 생활세계에 적용시켜 이 땅의 어린아이들을 몽땅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환자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식민행위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5쪽

그런데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생활 세계가 거의 모든 면에서 균형을 상실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문명과 사람 '사이'가 극도로 파괴되는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다. 거기에 덧붙여 한국인은 앎에서도 삶에 필요한 정보와 방향을 얻지 못하는 삶과 앎 '사이'의 괴리 속에서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삶 따로 앎 따로', 일상과 학문, 실천과 이론이 따로따로 분리되어 아무런 연결 없이 따로 노는 극도의 '궁핍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이론이 현실에서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이론소외, 이론척박, 이론부재'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은 그 이론이 우리의 생활에서 만들어진 자생적 이론이 아니라, 수입된 이론, 때 지난 낡은 이론, 삶에서 이끌려나오지 않은 이론이기 때문이다. -6쪽

"다만 남의 말이나 자기가 들은 것에만 의지하는 사람은 더불어 학문을 말할 것이 못된다. 하물며 평생토록 마음의 작용과 자연의 현상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사람이랴." (박지원 <열하일기>)-8쪽

처음부터 일본어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우리말 번역어를 전혀 모르면서 독일에서 독일어로 독일식으로 사유하며 철학 공부를 시작한 나에게는 한국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한 다른 사람에게 없는 장점이 하나 있음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논의가 되고 있는 철학적 사태를 일본어적인 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우리말의 언어적인 상황에로 옮겨 놓고 우리의 일상세계적 맥락에서 이해해 보려고 시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그것이었다. -51쪽

"지금 우리의 과학기술의 수준으로는 전세계의 인류를 먹여 살릴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인류 역사상 현대만큼 굶어죽은 사람이 많은 적이 없었다." (마르쿠제)
"아무리 빵이 넘쳐나도 인간은 절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려 하지 않는다."(도스토예프스키)
"나눔 없이 평화는 없다."(마더 테레사)-7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권창은 외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5년 11월
장바구니담기


폐지될 수도 있는 법이라는 표현으로 가리키는 법은, 선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시행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거나 혹은 제정 당시에는 순기능이 컸으나 달라진 상황 속에서 문제가 생겨나 대체입법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는 불완전한 법이지 악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44쪽

철학하는 일을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신의 명령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국가 공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만약 철학 금지 명령이라면, 자신은 신의 명령을 따르기 위하여 죽음을 무릎쓰고 공권력의 명령이라도 이에 복종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경건을 대체로 신의 뜻에 따른 것 혹은 옳은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불경건을 피하려 했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57쪽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정의롭다고 합의한 것들"을 우리는 행해야 하며, 반대로 국가를 설득시키지 못하고서 떠나는 식으로 탈출함으로써 이를 짓밟는 것은 위약이다.(위약설). 또한 이러한 탈출은 상대방들을 나쁘게 해 놓는것, 달리 말해서 상대방들에 해를 가하는 행위이며(파괴설), 그것도 가장 그렇게 해서는 안될 "그런 상대방들(국법 내지 국가, 조국)에게 행하는 종류의 행악이라는 것이다(불경설). -84쪽

고대희랍에서 성문법이 생기기 이전의 초기 단계에서 분쟁 해결의 평화적인 방법은 분쟁 쌍방이 동의하는 제삼의 인물에게 그 해결을 함께 호소하여 쌍방이 받아들일 만한 판결을 얻는 것이었다. 이 경우 판결 내용은 강제적 구속력을 갖기보다는 분쟁 해결의 중재안으로서 쌍방에게 제안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의 판결에 분쟁 당사자들 중 어느 한쪽이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 이러한 판결은 강한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무시되어질 수 있다. -86쪽

왜냐하면 불의를 행할 것을 적법하게 명령받을 경우, 이 명령이 옳지 않다는 것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실패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명령받은 자의 입장에서는 이에 복종하는 것이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4쪽

소크라테스의 정의의 원칙은 불의를 행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지 불의를 당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 아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불복종사상 역시 불의를 행하라는 명령에 대한 불복종사상이지 불의를 당하라는 명령에 대한 불복종 사상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118쪽

"나는 말과 행동으로 그리고 투표로써 또한 가능하다면 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아테네에서 민주정을 전복시키는 자나, 민주정이 전복된 이후에도 관직을 차지하고서 통치에 참여한 자나, 스스로 폭군 노릇을 하려고 쿠데타를 한 자나, 혹은 폭군이 되는 데 협력한 자 등을 죽이겠다." (BC410년 아테네 법률)-146쪽

"통상적으로 심지어 나쁜 법의 불복종조차도 그러한 행위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좋은 법을 포함하여 모든 법에 대한 일반적인 경멸을 초래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어린이들이 모든 과일을 팽개쳐 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좋은 과일은 물론 썩은 과일도 먹어야 한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썩은 과일을 먹도록 강요당한 사람은 그로 인해 모든 과일을 싫어하게 되지 않을까?"(하워드 진)-154쪽

"명령을 내리는 자와 복종하는 자 간의 '권위적' 관계는 공통된 이성에 근거하고 있지도 않으며 명령을 내리는 자의 권력에 기초하고 있지도 않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양자가 그 올바름을 정당성을 인정하고 양자가 그 안에서 미리 결정된 안정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위계 구조 그 자체이다."(한나 아렌트)-164쪽

가장 정의로운 사람인 철학자가 이상국가에서 통치자로 군림하지만, 현세의 타락과 불의로 가득 찬 세상에서는 공적인 영역을 피해 사적인 영역에 은신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172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히피드림~ 2006-03-24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말인데도 이렇게 어려울 수가,,, ^^;;
올려주신 모든 문장들이 인상적이네요.

마늘빵 2006-03-24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거 한번 더 읽어야할 거 같아요. 대강의 틀만 잡혔고 아직 머리 속에서 정리가 안돼요.

코마개 2006-03-24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강정인 교수도 필자로 들어가 있나요?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이다'이 책이 좀더 좋은듯 한데요.

마늘빵 2006-03-24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두 사람 모두 기재되어있던거 같은데요. 흠. 이상하게 검색하면 권창은 교수만 나오네요.
 
사랑을 생각하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품절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을 때는
나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그것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하면
나는 더 이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9쪽

시인이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 쓰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비록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주 정확하게 알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알지-못함>, 즉 <도대체-나는-그것이-무엇인지-모르겠다>는 사실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붓이나 펜, 혹은 악기를 집어 들도록 만드는 가장 원초적인 동력이 된다. -11-12쪽

플라톤에 의하면 바보들은 그들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이나 선함, 혹은 성스러운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들 역시 이미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단지 중간에 있는 사람들, 바보와 현자의 중간에 있는 사람들만 그것을 추구한다. -22쪽

사랑에 빠지게 되면 누구나 어느 정도 멍청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을 확인하려면 자신이 쓴 연애편지를 한 20-30년쯤 지난 후에 다시 읽어보라. 기록으로 남아있는 그 멍청함, 치기, 우월감, 그리고 맹목적인 사랑을 보고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또한 내용은 얼마나 유치하고, 문체는 또 얼마나 격정적인가. 평균 이상의 지적인 사람조차 그런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어리석은 내용을 써내려 간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좀더 너그러운 시각에서 말한다면, 순진무구해서 그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한 그것에서 오히려 공감과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행동은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멍청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입증해 줄 뿐이다. -36쪽

사랑은 언제나 이성의 상실, 자포자기, 그로 인한 미성숙함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잘 해야 우스꽝스러운 코미디가 되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세계 정치사의 대재앙이 되는 것이다. -38쪽

나 살아있는 그 존재를 찬양하리,
불꽃같은 죽음을 동경하는 그런 존재를.

사랑의 밤들의 서늘함 속에서,
당신의 증인이었고, 이제 당신 자신이 증인이 된 그 속에서,
촛불이 고요히 타오를 때,
낯선 느낌이 당신을 사로잡네.

이제 더 이상 당신은
어둠 속 그늘에 싸여 있지 않네,
새로운 욕망이 당신을 사로잡네,
더 높은 곳에서의 성교라는 욕망이.

그곳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당신은 두렵지 않네,
당신은 황홀경에 빠져 훨훨 날아오르네,
그리고 빛을 열망하는 당신,
이제 당신은 드디어 나비로 불타오르네.

하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네,
그렇다 : 죽으면 그리 되리라!
이 어두운 지상에서는
당신은 단지 우울한 손님일뿐.

괴테 <행복한 동경> -56-5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