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론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
볼테르 지음, 송기형.임미경 옮김 / 한길사 / 2001년 9월
구판절판


<인간 정신의 자유에 대한 옹호> (송기형, 임미경)

우리에게 법을 가르쳐준 위대한 스승인 고대 로마인들은 불관용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그리스도교들을 박해한 것은 단지 사회의 질서와 국가의 안녕을 위해서였다. 당시 로마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도들은 사회를 교란하는 불순세력이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초기 그리스도교도들도 신앙에 앞서 자신이 소속된 국가의 법과 관습을 존중해야 할 의무는 있지 않았던가.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무엇을 믿거나 믿지 말아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의 신념의 자율적 행사는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 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17쪽

"종교는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리고 죽은 후에도 행복해지기 위해 만들어졌다. 내세에 행복한 삶을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현세의 삶을, 우리 인간의 비뚤어진 본성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행복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관용을 알고 베풀 줄 알아야 한다."(볼테르) -18쪽

이성이 진정 그 가치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효율성과 합리화와 더불어 관용의 정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20-21쪽

관용(tolerantia)이란 소극적 인정과 방임을 넘어 다른 종류의 사고방식과 행위양식을 존중하고 자유롭게 승인하는 태도를 말한다. -21쪽

내가 아무리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도 다른 사람의 신념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관용의 전제 조건이다. 또한 관용은 모든 것을 관대하게 대하는 중립적 관찰자의 태도가 아니라, 나와 다른 존재 안에서도 가능한 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권리를 부여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관용은 어떤 인간도 결코 오류와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통찰에, 모든 사람은 자기 관점에 얽매일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21-22쪽

<관용론 본문>

그러나 어쨌든 그들이 하나의 신을 정신적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섬기는 데 만족하지 않고 기존의 종교에 대해 격렬하게 맞섰던 이상, 그 종교가 아무리 어리석은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부정한 것이다. -98쪽

"종교에서 사람들로부터 자유를 빼앗아 각자가 자신이 섬길 신을 선택할 수 없게 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일이다. 강요된 복종을 달가워할 인간이 없듯이, 그 어떤 신도 강요된 숭배를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 <호교서>, 24장) -167쪽

"강요된 신앙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니다. 그러므로 강요할 것이 아니라 설득해야 한다. 신앙은 명령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락탄티우스, 제3권)-167-168쪽

우리가 지켜야 할 교리가 적을수록 논쟁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논쟁이 줄어들면 그만큼 참화를 겪을 일도 없어질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종교는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리고 죽은 후에도 행복해지기 위해 만들어졌다. 내세에 행복한 삶을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현세의 삶을, 우리 인간의 비뚤어진 본성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행복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관용을 알고 베풀 줄 알아야 한다.

형이상학적 문제에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주 터무니없는 욕심일 것이다. 한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의 정신을 예속시키고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무력으로 세계를 굴복시키는 편이 훨씬 쉬우리라.
-201쪽

결국 이 거룩한 작가(옮긴이 주 : 말보 신부. 볼테르의 <관용론>이 나올 당시 정반대의 의견을 피력한 <종교적 불관용에 대한 신앙과 인도적 정신의 일치>라는 책이 나왔다)는 불관용이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그 이유란 "예수 그리스도가 불관용을 명시적으로 비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파리 온사방에 불을 지른 자들이 있다 해도 마찬가지로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이 방화자들을 칭찬할 이유가 된다는 말인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편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온유하고 자비로운 목소리로 관용을 설득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 본성의 적인 광신이 광포하게 포효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들이 평화를 밎아할 때마다 불관용이 그것을 무너뜨릴 자신의 무기를 벼리고 있는 것이다. 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권자들이여, 당신들은 유럽에 평화를 가져왔으니 이제는 다음의 문제를 결정할 때요, 평화와 화합의 정신과 불화와 증오의 정신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지 말이오.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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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8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 칼국수.. 아니 장 칼라스 사건에서 볼테르에게 반했죠.

마늘빵 2007-09-18 16:57   좋아요 0 | URL
오홋, 테츠님 아시는군요. 아니 어떻게 사건 이름까지. 저도 이 책 2001년에 읽고 다시 읽은건데 확 반해버렸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로크가 쓴 관용에 관한 책이 있는데 이건 번역이 안되었나보더군요. <에밀>이나 <통치론>, <시민정부론>은 있는데...

비로그인 2007-09-18 20:17   좋아요 0 | URL
칼라스 사건과 관련해서 또 하나 중요한 저작이 있는데 (아마 아실테지만)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추천입니다. 요 사건때문에 썼다고 하는데. 사형폐지론의 고전이죠..줄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마늘빵 2007-09-18 20:23   좋아요 0 | URL
테츠님은 아는 것도 많으셔. 이건 몰랐던거에요. 찾아볼게요. 땡큐 :)

가넷 2007-09-18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한국학술진흥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라고 하면 학술진흥재단에서 지원을 받은 책이란게 아닌가요? 항상 볼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지원받은 책이 왜 저렇게 비싸 싶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살까 싶었는데 비싸기가 엄청...;ㅁ;

마늘빵 2007-09-18 21:08   좋아요 0 | URL
음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역자가 생활비를 받고서 번역작업을 하는게 아닐까요. 책값엔 그게 반영되진 않을듯. 덕분에 첨 듣는 책 한번 검색해서 구경해봤습니다. :)

2007-09-19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9-19 09:56   좋아요 0 | URL
장 칼라스 사건은 볼테르가 살던 당시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인데, 당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대립하던 시절 - 카톨릭의 우세 - 카톨릭 교도가 아니면 변호사 시험을 칠 수 없게 되어있었고, 장 칼라스 씨의 아들 중 하나가 변호사 시험을 치려하는데 종교의 제약으로 막히자 고민 끝에 자살한 사건이었어요. 근데 동네 카톨릭 교도 주민들 중 하나가 "개종을 하려하자 죽인거다!"라고 소리쳐서 장 칼라스씨와 그의 아들, 하녀, 엄마, 놀러온 아들의 친구를 살인범으로 몰아 결국 장 칼라스씨가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을 당했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지게 된 사건을 말합니다. 볼테르가 나중에 이 사건을 알고는 문제제기를 했고, 사건 딱 3년 뒤에 무죄판결이 났고 국왕이 보상금까지 쥐어줬답니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는 사지를 찢겨 죽었고, 가족은 이미 뭉개질대로 뭉개진 상태였죠.

로크의 관용론에 관한 책은 번역이 안되었어요. 아직 읽어보지 못했답니다. 그의 관용론이 언급된 책으로는 홍세화 씨가 번역한 <왜 똘레랑스인가> 라는 책이 있고, 한남대 철학과 김용환 교수가 쓴 <관용과 열린사회>를 참조하시면 돼요.

지금 논문 관련해서 살짝 엿보고 있는 중인데 - 직접적인 관련은 없고 - 아직 구체적으로는 모르고요, 간단히만 말하자면, 종교의 관념적 진리의 '불확실성'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다른 견해에 대해서 관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혹시라도 이 관념적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불확실하다면 우리의 견해가 아닌 다른 견해가 진리일수도 있다고 했답니다. 곧 타자의 견해가 명백히 틀린 것으로 밝힐 수 없는 한, 그 견해를 탄압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제가 읽은 논문의 한 부분에 따르면, 번역되지 않은 그의 책 <관용에 관한 편지>에 보면 "그 문제에 대한 판단은 오직 모든 인간의 최고 주재자이신 하느님에 속한 것이고, 그에게만 그릇된 자의 처벌권도 속한다"라고 했답니다.

볼테르의 관용과 어떻게 다른지는 저로서는 잘 모르겠는데, 개인적인 생각을 물으신다면, 볼테르의 그것과 로크의 그것은 큰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볼테르는 철학으로서 관용을 대했다고 보기보다는 하나의 삶의 태도로서 넓게 말한거 같고, 그의 <관용론>에도 철학적 분석이나 해석 작업보다는 장 칼라스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한 고전으로부터의 인용과 장문의 편지와 같은 글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로크의 책은 안봐서 모르겠고요. -_-
 
관용과 열린사회
김용환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8월
구판절판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가 '용납'보다 소극적인 표현인 것은 사실이나 관용 개념의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소극적 표현이 보다 유용할 것이다. 부정(반대)하면서 동시에 긍정(용납)하는 관용의 공식에서 생길 수 있는 모순과 역설적인 느낌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용납이라는 개념의 모호성을 피하기 위해서 용납이라는 말 대신에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로 대체하는 것이 적절하다.
-26쪽

반대하는 것(대상)에 대해 부정적인 행위를 자발적으로 중지했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용납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인종 차별 정책에 대해 반대, 저항 같은 부정적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용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용납은 '복종', '강제적 시인', '묵인' 등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관용 이외의 유사한 개념들로부터 관용을 뚜렷하게 구별하는 일을 곤란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관용은 본래 자발적 행위 또는 자유와 관련되어 있는데 복종, 강제적 시인, 묵인은 자유의 결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허가나 허용은 권리 개념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자유의 확대라는 관용의 기능과 어울리지 않으며 관용이 상호 교환적 행위임에 비해 일방적이다. 따라서 관용을 정의할 때 외연의 양이 많은 용납보단느 내포의 양이 증가된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를 택하는 것이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서도 바람직할 것이다.-26-27쪽

관용되는 것에 대해 우선적으로 내려지는 부정적 평가(반대)는 개인의 존재론적 결점 같은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불충분한 정보의 제공, 통치 집단에 의한 이데올로기적인 조종, 사회적 관습 같은 외부적인 요인들 때문에도 생겨난다. 실제로 사물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ㅇ가하는 일과, 갈등을 일으키는 사물, 이념, 가치 체계들에 대해 불편부당하기란 곤란하거나 불가능하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어떤 대상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정적 평가를 내리거나 그것에 대해 전면적인 거부 행동을 할 수 없게 된다.-30-31쪽

"도덕적으로 말해서 관용은 보다 많은 도덕적 자각을 제공함으로써 불가피하게 우리의 도덕적 공감을 확대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관용은, 인간을 목적으로서 그리고 존엄성과 고유한 가치를 지닌 합리적 존재로서 간주하도록 명령하는 칸트의 정언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일과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토마스 헌) -37쪽

... 관용과 불관용의 문제가 발생되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두 가지 이상의 다른 의견, 행위 또는 행위가 예상되는 신념들이 동시에 주장되어야 한다. 충돌이 없이 서로 다른 의견을 단지 개진하는 한 관용과 불관용의 선택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둘째,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다르고 이해 관계도 서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 다른 의견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동시에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막거나 제거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57쪽

관용은 '권리'의 일종이 아니며 권위를 바탕으로 해서 A가 B에게 제공하는 '허가'(PERMISSIVENESS)의 일종도 아니다. 관용은 자유와 관련되어 있으며 자유를 확대하는데 목적이 있다. 자유없이는 관용도 있을 수 없다. 또 관용에 대한 일반적 정의를 '반대'와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라고 했을 때 자발적 중지 속에는 이미 관용하는 사람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종교적 관용을 말할 때 이는 종교적 자유와 동일시될 수 있으며 근대 이후의 자유주의의 신장과 종교적 관용에 대한 활발한 논의는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77-78쪽

"정치적 행위들은 선한 삶에 대한 경쟁적 개념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회는 서로 다른 기질과 포부 그리고 종교적 신념들과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립성의 요구는 사람들에게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요구이며, 정부는 특정한 집단에 더 우호적이어서는 안된다."(수잔 멘더스)-81-82쪽

우리는 '다양성의 원리'로부터 한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우월하다는 독선주의가 그릇되며, 제도나 문화가 여러 가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독점적이고 유아적인 종교관을 고수하는 일이 위태롭다는 것을 배운다. -87쪽

가치 상대주의는 다양한 가치를 서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나의 가치도 다른 사람의 가치 못지 않게 옳고 좋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변화시킬 필요가 없고 또 그런 가치에 근거를 둔 자신의 삶의 방식도 바꿀 필요가 없다고 믿게 만든다. 이런 믿음은 정체성을 띠기 쉽고 그런 정체성은 자기 반성력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반성력의 결핍은 '완전주의'로 나가게 만들며,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던 원래의 태도에서 오히려 배타적인 태도로 변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가치 다원주의는 상대적 가치들을 충돌시키고 비교하고 검토해서 보다 나은 가치의 창출을 기대한다.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과정을 통해 가치의 탐구를 지속하려는 것이 가치 다원주의의 기본적인 태도이다. 상대주의에 머무는 순간 진보는 중단되고 논의는 정체되고 만다. 어떤 가치 판단도 완전하지 않다는 고백을 해야 하고 보다 나은 판단이나 이론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관용은 이런 가치 다원주의가 상대주의로 빠지지 않고 지속적인 실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117쪽

각주 6) 완전주의라는 말은 '어떤 사람 또는 그의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삶의 방식보다 본질적으로 더 열등하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본질적 차이와 불평등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평등주의와 대립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열등한 사람이나 삶의 방식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불관용적 태도가 이미 완전주의자의 의식 안에는 자리잡고 있다. - vinit haksar, Equality, Liberty, and Prefectionism, Oxford. 1979, p.1. -117쪽

규모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최선의 의사 결정 방식은 다수결의 원칙이다. 그러나 이 다수결의 원칙이 종종 '다수의 전제'(tyranny of majority)로 전락하는 이유는 소수에 대한 정당하고 공정한 고려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소수 집단에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언젠가는 소수도 다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아야 한다. 그럴 때에만 다수결의 원칙이 그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119쪽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란 달리 말하면 종교 선택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리고 선택은 개인적인 선호에 따라 결정될 문제이지 강요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주의는 종교를 정통과 이단, 유일신 종교와 다신 종교, 토착 종교와 외래 종교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종교는 자율적 존재인 각각의 개인들이 자기의 양심과 성향에 따라 결정하는 선택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 경우 선택의 행위는 배타적 행위가 아니라 선택되지 않은 것과의 공존 관계가 반드시 성립되어야만 하는 포괄적 선택 행위인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적 자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종교적 공존이 선행되어야 하고 모든 종교는 끊임없이 선택을 기다리는 열려진 상태로 남아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은 1회 이상 종교적 선택을 할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한다.-141쪽

'무한 경쟁 시대', '경쟁력 강화'라는 현실 인식이 개인의 생존 방식으로 강요되었을 때 발생하는 세 가지 도덕적 결함은 공통적으로 관용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배타적이고 불관용적인 경쟁의 논리를 극복하는 길은 관용을 실천함으로써, 그리고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움으로써 가능하다.

첫째 무한 경쟁 또는 경쟁력 강화의 논리는 최소한의 생존이나 타자와 함께 공존하겠다는 방책이 아니라 '죽기 살기 경쟁'이며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겠다는 이기심과 탐욕을 그 바탕에 감추고 있는 전술이다. ... 중략 ...

둘째, 경쟁이라는 결정 방식 자체에 결함이 있다. 즉 경쟁은 불공정하기 쉽다는 점에서 비도덕적이다. 처음부터 경쟁은 공정한 게임이 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의 경우 그 게임의 규칙은 경쟁자 개인들의 차이성과 개별성을 대부분 무시한다는 점에서 비도덕적이라 비판될 수 있다. ... 중략 ...

셋째, 현실은 무한 경쟁의 시대이며 경쟁력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냉혹한 적자 생존의 법칙은 평등한 분배의 원칙 또는 분배적 정의 실현의 당위성을 희석시킬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도덕적 결함을 가진다.-143-145쪽

대부분 이들이 보이는 배타성과 불관용성은 자기 충족적 확신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배제하고 불관용하는 것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거나 무엇이 사실인지를 보다 명확하게 판단하려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에 그 불관용성과 배타성은 강화된다.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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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자의 글쓰기 - 책이나 논문을 쓸 때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낼 것인가?
하워드 S.베커 지음, 이성용ㆍ이철우 옮김 / 일신사 / 2006년 3월
품절


퇴고를 수없이 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신은 초고의 엉성함과 일관성 결여에 대해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초고는 발견을 위한 것이지 발표를 위한 것은 아니다.-45쪽

개요는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개요를 가지고 글을 시작하면 도움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개요에 의존하여 시작하는 대신에, 모든 것을 적어 가면서, 가능한 한 빨리 아이디어를 토해내는 방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 - 당신이 작업해야만 하는 미완의 부분은 당신이 방금 적어놓은 다양한 것들이다 - 을 발견할 것이다.-100쪽

'가장 쉬운 것부터 하라'는 원칙을 지킨다. 가장 쉬운 부분부터 쓰고, 논문들을 분류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허드렛 일들을 먼저 하는 것이다. ... 중략 ... 우선 당신이 써온 것에 관해 메모를 하고, 각각의 생각을 카드에 적는 것부터 시작하라. 원고에 적혀 있는 어떤 생각도 없애버리지 말라. 그런 생각들은, 그 순간에는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 수 없을지라도, 여러 가지로 유용하다. –-101-102쪽

연구자는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기본적인 생각을 명료하게 해놓아야 한다. 연구자의 생각이 명료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가 갖고 있는 생각은 이미 영향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최고 또는 최악으로 만들어 준다.-198쪽

* 여기서부터는 <한국 사회과학자의 존재 이유>(이성용 역자후기)에 관한 밑줄긋기입니다.
-0쪽

각주 : 그 강사는 저서의 변환과정을 아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모른다고 하자, 그것은 '번역물->편저->저서'라고 웃으면서 말했다(이한우, 1995 : 311-314는 번역물이 저서로 바뀐 책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우선 교수는 대학원생과 박사실업자에게 논문을 나누어주고 번역을 시킨다. 이것이 번역물이 생성되는 첫번째 단계이다. 두번째 단계에서 박사실업자는 번역물을 총괄적으로 다듬는 역할을 수행한다. 여러 사람들이 번역했기 때문에 출판사에 편저로 출판하기로 결정한다. 책이 출판될 무렵, 원고가 괜찮다고 생각되면 교수는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저서로 바꾸라고 말한다(우리는 교수업적의 평가에 있어 번역물, 편저, 그리고 저서가 차지하는 점수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교수의 행위가 얼마나 합리적(?)인 행위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논문을 진짜로 번역해 주었던 사람들에게 저서를 작성하는데 도움을 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머리말에 적는다. 교수가 저서에서 진짜로 작성한 글은 머리말 뿐이다. ... 중략... 이것은 우리 학계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교수의 권위주의적 폭력과 비양심적 자세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278쪽

학자들은 왜 표절과 짜깁기로 글을 쓰는가? 나는 전공에 대한 자부심의 결핍과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의무를 망각하는 도덕적 해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학문세계가 없는 사이비학자들이 주도권을 잡은 학계에서는 표절과 짜깁기로 쓰여진 글들이 판치기 쉽다.-280쪽

불행히도, 우리 사회는 사이비 학자가 자신의 상품을 과대 포장할 수 있도록 '간판'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있다. 간판의 정당성은 우리 사회의 피라밋 유형 구조에 의해 합리화되고, 교육제도에 의해서 강화되어 왔다. 사실상 우리 나라 사람이 한국 사회에서 차지할 수있는 위치의 상당한 부분은 일차적으로 대학입시에 의해 결정된다. 고졸자보다 대졸자가, 그리고 비일류대학의 졸업생보다는 일류대학 졸업생이 좋은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한국 사회에서 부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문제는 개인 또는 집단이 간판 또는 그 간판이 중심이 된 집단을 악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부당하게 챙긴다는 데 있다. 최근 교육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고학력자일수록 학연과 같은 연고에 집착하고 질서의식과 비판의식도 떨어진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똑똑한 자일수록 자신의 연고를 이용하여 자신의 밥그릇을 더 확실하게 챙긴다는 것이다.-282쪽

우리 학계 피라밋의 최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일류대 교수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들은 대개 일류대 출신이고 박사학위는 한국의 일류대나 외국의 유명대학에서 취득한 자들이다. 우리 나라 사람은 일류 대학에 입학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우리 나라의 일류대학은 매년 그 당시에 가장 똑똑한 고등학교 학생들을 선발하여 정원을 채워왔다. 이렇게 선발된 똑똑한 대학생 가운데서 공부 잘하는 학생이 대개 대학원에 진학한다. 대학원 과정에서도 경쟁에 승리한 자만이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 국내 박사는 이렇게 치열한 경쟁을 통해 학위를 취득한다. 한편 외국 박사는 학부시절부터 외국어 공부를 하고, 외국의 유명대학에서 유학하여 학위를 취득한다. 일류대학의 교수는 이렇게 뽑고 또 뽑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존한 일류대학 출신 박사학위자 가운데에서 또다시 선발된다. 이러한 과정 때문에 일반 사람(특히 비일류대학의 학생)은 일류대학의 교수를 거의 신적인 학문의 권위자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저술한 교재 또한 거의 '성경'처럼 생각한다. -283쪽

사이비 전공자는 자신의 성품을 '내용'으로 팔면, 고객이 자신의 상품이 불량품인 것을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래서 그들은 책의 내용보다는 자신의 업적과 지위를 강조하는 '껍데기'(또는 간판)로 자신의 상품을 선전한다. 자신에 대한 비판 역시 비판 내용보다는 비판 자체를 가지고 반박한다. "내가 누군데 감히 너 따위가 나를 비판해." 이와 같이 사이비 교수는 오직 '껍데기'(결과)만 중요시하지 '내용'(과정)은 중요시하지 않기 때문에,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암기식 교육을 선호하기 쉽다. 게다가 이치를 따지고 창의력을 강조하는 교육을 하다보면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기 쉽다. 자신의 지식을 최대한 포장함과 동시에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교육을 시킨다. 이러한 교수한테 교육을 받은 학생은 논리적 모순을 발견하고 표절과 짜깁기를 비판할 수 있는 '감시의 눈'을 가질 수 없다. 결과적으로 사이비 교수는 학계의 피라밋 구조뿐만 아니라 교육방식까지도 악용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시켜 왔던 것이다.-286쪽

각주 10 : 한국사회에서 교재의 질은 주로 조직의 힘에 의해 평가되지, 교재의 '내용'에 의해 평가되지 않는 것 같다. 출판사는 일류대학 교수의 권위와 연줄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저서를 출판하기를 희망하고, 또한 책의 출판을 결정할 때, 책의 내용보다는 저자의 간판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많다. 출판사의 이러한 행위는 비도덕적인 교수와 합세하여 독자를 기만하는 행위이다. 고객은 과대포장에 한번 속지 그 이상은 속지 않는다. 출판사는 편집과정에서 글이 표절과 짜깁기로 일관되었거나, 또는 논리적인 모순이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출판사는 저자의 간판보다는 저자가 쓴 내용을 가지고 출판 결정을 해야 한다. 저자 역시 출판사에게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하지 말고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286쪽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한다. 이 말의 이면에는 교육이 잘못되면 그 나라의 국민은 100년 이상 고통의 나락 속에 빠질 수 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혼과 그것을 유지하고 창조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자들은 부실경영을 해서 회사를 부도낸 기업가들에게 사재를 털어 노동자에게 보상을 하라는 주장을 많이 해 왔다. 이제는 교수 자신이 부실교육을 한 대가에 대해 과연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온 것 같다.

각주 11 : 학계가 공멸할지라도 자신은 정년이 보장되어있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교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교수조차 기억해야 할 법원의 판결이 있다. 자유당 말기, 많은 여성을 농락한 박인수 사건에서, 판사는 "법은 보호해줄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해 줄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교수의 정년보장도 학생과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하려고 노력하는 교수를 위한 것이지, 학생과 국민을 기만하고 자신만의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사이비 교수를 위한 것은 아니다.-289쪽

학계에서 논문의 질은 주로 논문이 실린 곳이 어디인가에 근거해서 평가한다.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출판된 경우 학술지에 실린 글에 최고 점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고, 또한 국내 학술지보다는 외국 학술지에 실린 글에 높은 점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평가방법에는 고려되어야 할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하나는 사회과학자의 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글인가? 사회과학자인가 아니면 사회과학에 관심있는 일반 대중인가? 다른 하나는 한국 사회과학자의 논문은 '해외수출용'보다는 한국인의 이익을 위한 '내수용'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291쪽

왜 대부분의 학술지들이 동료학자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글로 가득차 있을까? 학술지는 주로 학회회원들에게만 배부되고, 사회과학에 관심있는 일반 대중들은 구입하기 매우 어렵다. 그 결과 학술지의 주고객은 '국민'이 아닌 '학술지 회원'이 된다. 학술지 회원은 동료이지만 보이지 않는 경쟁자이다. 경쟁에서는 무조건 승리해야 한다. 진짜 전공자가 드문 사회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는 서구에서 개발된 '최신 무기'를 과시하여 상대방의 기를 죽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이비 전공자들은 그 최신 무기가 제대로 사용되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고, 최신 무기를 보여준 사람을 어설프게 공격하다가는 자신의 정체가 들통날 수 있다는 두려움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최신 무기를 가지고 남에게 폼을 잡고 싶은 마음으로 최신 무기를 소개한 신진학자들에게 입발린 칭찬을 하기 쉽다. 바로 이것이 학술지가 온갖 '서구의 최신 무기'들이 난무하는 학자들의 '지식과시의 전투장'으로 전환된 이유일 것이다. -291-292쪽

미래의 지식사회는 평생직장보다 평생직업이 강조되는 사회이다. 평생직장이 강조되는 현대 산업사회는 자신의 학문세계가 없는 학자일지라도 직장이란 울타리를 통해 자신의 일자리를 보존할 수 있다. 하지만 평생 직업이 강조되는 미래 사회에서는 학문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는 자신의 무기가 없는 학자는 생존할 수 없다. 따라서 대학원생들이 자신의 무기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교수와 과목을 찾아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사이비 전공자도 학생에게 생존무기를 내용대신 '간판'으로 줄 수 있다. 이는 미래 한국 사회에도 사이비 학자들이 영속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의미한다. 반면 진짜 전공자는 '내용'으로 학생의 무기를 만들어주며, 학계의 도덕성을 회복시켜 탄탄한 미래의 지식사회를 형성해주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제 학생들은 자신의 무기를 형성할 요인이 '간판'인가 아니면 '내용'인가를 결정할 중대한 시기에 왔다. 이러한 학생들의 결정에 따라 우리 나라의 미래는 크게 좌우될 것이다.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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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9-12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다, 글도, 아프님도.

마늘빵 2007-09-13 00:17   좋아요 0 | URL
이 책 본문 보다는 역자의 후기가 더 멋집니다. :)
 
차이의 존중 -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조너선 색스 지음, 임재서 옮김 / 말글빛냄 / 2007년 8월
품절


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 문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책이 필요하다.
- 조너선 색스 -5쪽

<서문 :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폭력을 막는 단 하나의 훌륭한 해독제는 '대화'이다. 서로서로 자신의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타인의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며 서로의 연약함을 나누면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대화이다. -16쪽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 철학자 존 롤스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공적 이성'이다. 그것은 정치 논쟁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논리를 사용해야만 우리가 -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빌리면 - "서로 변론"(이사야 1장 18절)할 수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서로 변론한다'는 생각은, 도덕적 언어가 붕괴하고 '나는 해야 한다'는 어법이 '나는 원한다', '나는 선택한다', '나는 느낀다'는 어법으로 바뀐 20세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의무는 우리가 서로 논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냥 만족하거나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시각을 강조하는 텔레비젼은 소리의 문화가 아니라 보기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미지는 언어보다 크게 말하고 감정을 강하게 자극한다. 그 결과 가장 시각적인 항의나 가장 목소리가 큰 분노의 외침, 극단적인 구호 등이 승리하는 일이 벌어졌다. 만약 대결은 뉴스가 되고 화해는 뉴스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대결의 문화를 갖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우리 자신의 소중한 능력을 앗아갈 것이다. 그 능력이란 우리와 문화와 믿음, 가치관, 이해관계 등이 충돌하는 사람들, 따라서 우리가 반드시 이야기를 걸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또 그런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다.-17-18쪽

"(종교가)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히 많지만 서로를 사랑하게 만들기에는 부족하다" (조나단 스위프트)-19쪽

종교는 불화의 원천일 수 있다. 또한 종교는 갈등 해결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전자다. 반면 종교를 갈등 해결에 사용하려는 시도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갈등과 반목을 해소할 수 있도록 인류의 연대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희망은 다른 어느 곳이 아닌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 이제 위대한 종교들은 평화를 안착시키는 데, 그리고 평화의 필수 조건인 정의와 자비를 널리 퍼뜨리는 데 적극적으로 달려들어야 한다.-20쪽

"전쟁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평화는 근대의 발명품" (헨리 메인 경)-26쪽

"종교에서 말하는 고통은 현실에서 겪는 고통의 표현이자 그런 고통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학대받는 자들의 한숨이고 감정 없는 세상의 감정이며 영혼 없는 세계의 영혼이다." (칼 마르크스) -31쪽

어떤 사회에서도 하나의 제도가 본래의 경계를 뛰어넘어 자기와 논리나 동력이 다른 주변 영역을 식민화할 때는 위험하다. 중세 시대에는 종교가 그런 경우였다. 18세기에는 과학이 그러했고 19세기와 20세기에는 정치가 그러했다. 21세기에는 시장이 그렇다. 화폐교환은 전부가 아니라 일부의 거래에 대해서만 적합한 기제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가족이나 공동체, 교단, 자발적인 모임 등 경제적 계산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인간관계이다. 이런 관계들은 시민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집단이지만, 소비 위주의 사회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39쪽

내가 알고 존경했던 만년의 이사야 벌린 경은 훌륭한 에세이 <자유의 두 개념>에서 자유주의적 신조의 핵심을 이제는 유명해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한 바 있다.

"자기 신념의 상대적 타당성을 깨닫는 동시에 자기 신념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야만인과 구별되는 문명인의 태도이다." 이는 대단히 고귀한 감정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가인 마이클 샌들은 이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신념이 상대적으로만 타당하다면 그것은 끈질기게 옹호할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널리 반향을 얻은 물음이었다. 언론과 결사의 자유가 단지 서양 현대성의 관례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퇴폐의 한 형태로서 거부하는 사람들을 내가 무슨 권리로 비판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 많은 가치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면, 다른 사람들을 살해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자살 테러범을 내가 무슨 근거로 반대할 수 있겠는가? -43-44쪽

그것은 우리가 진리나 궁극적 실재를 찾기 위해서는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나아가야 하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이에 따르면, 특수성은 불완전한 것이고 오류와 편협과 편견의 원천인 반면, 진리는 추상적이고 시간을 초월하며 보편적이고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특수성이 전쟁을 낳는다면 진리는 평화를 낳는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있다면 갈등은 저절로 해소될 것이기 때문이다.-45쪽

그러나 갈등의 시기에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그런 공통성이나 유사성이 아니다. 그 때에는 국외자에게는 사소한 차이로 보이는 것이 엄청난 의미를 띠면서 이웃을 분열시키고 예전의 친구를 적으로 만든다. 프로이트는 이를 두고 '작은 차이의 나르시즘'이라고 불렀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차이점이라 해도 정체성의 표지, 그래서 서로를 소원하게 하게 특징을 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통의 신학, 인류 보편의 신학 뿐만 아니라, 차이의 신학도 필요하다.-48-49쪽

하나의 문화가 종교의 이름으로 그러한 체계에 인위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하나의 체계가 번창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오해한 비극에서 나온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 나름대로 세상에 공헌하는 바가 있는 것이고 또 그렇게 공헌한 바는 하나같이 소중한 것이다. ... 중략 ... 차이가 전쟁으로 이어질 때는 쌍방 모두 패배한다. 거꾸로 차이가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할 때는 양쪽 모두 승리하는 것이다.-50-51쪽

우리의 이야기와 심각한 충돌을 빚을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열어야 하며, 때로는 그들의 고통과 모욕감과 원한을 귀담아 들을 줄도 알아야 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우리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대화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에 대한 논박에서 진리가 움터나온다는 소크라테스식 대화술이 아니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대화의 기술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세상을 해석하는 타자들을 용인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우리는 보편이 아니라 특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보편적인 문명이 서로 충돌하면, 세상이 흔들리고 많은 생명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많은 문화와 문명과 종교가 있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함께 살아갈 하나의 세상만 주었다. 그 세상은 줄곧 작아지고 있다.-51-52쪽

<세계화 속의 불만>

세계화는 통합시키는 만큼 분열시킨다.
분열의 원인은 지구의 통합을 촉진하는 원인과 동일하다.
- 지그문트 바우마 <세계화>-54쪽

20세기 초에 화이트헤드는 우리의 시간 경험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과거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이 한 사람의 일생보다 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나 늙었을 때나 별 변화가 없는 환경에서 살았다. 반면 "오늘날에는 변화의 시간이 한 사람의 일생보다 짧고" 앞으로는 더욱 짧아질 것이다.-56쪽

매튜 아놀드의 말을 빌리면, 마치 우리는 "하나는 이미 죽었고 다른 하나는 아직 태어날 만큼 힘이 없는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처지이다. 현 상황의 특이성은 우리가 공통의 미래로 나아갈 길을 찾기 힘들 만큼 변화가 너무 빨리 진행된다는데 있다. 기술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지만 우리의 도덕적 신념은 점점 더 갈피를 잃고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57쪽

"사실 우리는 도덕성의 시물라크르(환영)를 가지고 있고 도덕의 핵심용어들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론저긍로나 실천적으로나 도덕성을 이해하는 능력을 -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 상실하고 말았다." (알래스테어 매킨타이어)-65쪽

세계화 시대에서는 무엇이 행동의 주역인가? 서양에서 지난 반 세기 동안 점점 더 강조된 것은 두 가지 제도이다. 하나는 시장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현재 자신에게 지워지는 책임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다. 시장은 본래 도덕과 상관없이 거래를 하는 곳이고 가치가 아니라 가격을 다루는 곳이다. 다시 말해 시장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교환하는가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는 교환의 장일 뿐이다. 한편 서양에서 정치는 우리가 공동으로 만들어야 할 세상에 대한 실질적인 도덕적 질문을 건너뛴 채 오직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면서 더욱 더 절차적으로 관리적인 무엇이 되고 말았다. 존 롤스는 현대의 자유주의의 신조 가운데 하나인 이런 점을 두고 "선보다 정당함이 우선한다"고 지적했다.-68쪽

사람에 관련된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과거에느 부의 소유주와 생산자 사이에 접촉이 활발했다. 봉건 영주와 산업 자본가는 비록 피고용인을 착취하기는 했어도 그들의 복지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썼다. 오늘날의 글로벌 엘리트들은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과 별다른 교섭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생산하는 사람들과 같은 나라에 살지도 않는다. 자신들의 상품을 사는 사람들, 특히 인터넷으로 구매하는 사람들과도 거의 접촉이 없는 편이다. 이는 중요한 문제다. 도덕적 책임은 단지 추상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사이에서 움터나온다. 그런 관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고 이 과정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는 것이다. 현대 생활의 비인격화와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우리에게서 행동과 결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앗아갔고 이는 우리의 도덕감을 약화시켰다. -69-70쪽

간단히 말해서 시장은 빈부 격차만을 극대화 한 것이 아니다. 시자은 사회의 일원을 공통 운명으로 맺어주는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와 같은 유대 관계를 파괴했고 지금까지 우리가 '나는 원한다'와 '나는 해야한다' 사이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했던 도덕적 담론을 무력화했다. 시장은 집단적 의무로 묶인 위계를 개인적인 생활 방식과 취향을 누리는 슈퍼마켓으로 대체함으로써 공공선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허물었따. 여기서 공공선이란 공원에서부터 공공 서비스와 애국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사거나 소유하거나 공유하지 않는 것들을 일컫는다. -71쪽

우리는 유일하게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며 '나는 어떤 이야기에 속하는가?'이다. 경제가 정치를 대체할 수 있고 사적 선택이 공공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상상력의 가장 원대한 희망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경제 자체는 '누구'와 '왜'라는 커다란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거기에 대답을 준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오늘날 종교가 갖고 있는 힘이 있다. 이데올로기 저치는 아마도 죽고 말겠지만, 그것을 대체한 것은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정체성 정치다. -79쪽

정치는 차이가 있는 곳에 거주하지만, 종교는 그 차이를 뛰어넘는다. 종교는 서로 다른 것들을 한데 묶는다. 정치는 중재하고 조정한다. 정치에서 타협, 다의성, 외교, 공존 같은 종교의 관점에서는 악덕으로 보이는 덕목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81쪽

종교와 정치는 인간 조건의 서로 다른 측면에 말을 건다. 하나는 사람들을 공동체에 묶어주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차이를 평화롭게 중재한다. 20세기의 커다란 비극은 정치가 종교화되었을 때, 국가(파시즘)나 이론체계(공산주의)가 절대화되고 신격화되었을 때 생겨났다. 21세기는 반대 상황이 발생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즉, 정치가 종교화될 때가 아니라 종교가 정치화될 때다. 종교는 정치가 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공화국을 비판한 근거였다. <국가>에서 플라톤은 국가에 종교적 성격을 부여하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차이가 없으면 정치도 있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정치는 종교가 극복하려고 하는 것, 즉 의견의 다양성, 상충하는 이해관계, 복수성 등이 자리잡은 공간이다. 한때는 이러한 것들이 지역적인 차원에서 필요했지만, 이제는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필요하다.-82쪽

<차이의 존엄 : 플라톤의 유령 몰아내기>

우리가 잘 아는 대답이 있다. 종교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고 정체성은 배제하는 것이라는 대답이다. 모든 '우리'에는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 즉 '그들'이 있다. 혈족과 비혈족, 친구와 이방인, 형제와 남이 있고, 이러한 경계가 없다면 우리의 정체성도 없을 것이다. 어딘가에 속한다는 느낌은 무리의 일원이 아니면 생명을 지킬 수 없었던 인류사의 새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포식자가 우글거리는 세계에서 무리에 들어가지 못한 개인들은 생존이 불가능했다. 우리 내면에 깊이 잠재한 어떤 본능들은 이때부터 유쾌한 것이며, 그 본능들은 우리가 인간관계에 맺고 소속 집단에 애착과 충성심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성향을 '부족적'이라고 부른다.
-87-88쪽

유대교는 한 분인 하느님을 믿지만 구원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하나 뿐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은 인류 전체의 하느님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려진 명령을 인류 전체가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유대교에는 extra ecclesam non est salus, 즉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에 해당되는 교리가 없다. 오히려 고대의 유대 현인들은 "여러 민족의 경건한 자들은 다음 세상에서 제 몫을 얻으리라"고 설파했다. 실제로 성경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오직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지 않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97-98쪽

마이클 왈저는 '얇은' 혹은 보편적인 도덕성보다 '두꺼운' 혹은 맥락으로 가득 찬 도덕성이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 사회는 특수할 수 밖에 없다. 각각의 사회는 저마다 고유의 성원과 기억, 다시 말해서 제 자신만의 삶이 아니라 사회 공통의 삶에 대한 기억까지 가지고 있는 성원들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류는 성원만 있고 기억은 없는, 따라서 역사도 문화도 관습도 익숙한 생활방식도 축제도 사회적 재화에 대한 공동의 이해도 없는 집단이다.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이러한 것들을 갖는 게 당연하지만, 그 방식잉 하나일 수는 없다. 그러나 온갖 다양한 사회의 성원들은 인간이기에 서로의 다른 방식을 인정하고 다른 이들의 도움 요청에 응답하고 서로에게서 배울 점은 배우며 - 때로는 - 다른 이들의 행진에 동참할 줄도 아는 것이다."

도덕적 배려의 보편성은 우리가 보편적인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게 아니라 특수한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것이다. 이는 부모가 되어 내 아이를 사랑할 줄 알게 된 다음에야 제 자식을 사랑하는 다른 부모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도덕적 특수성에서 시작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연대성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각자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어서 그게 무슨 뜻인지 안 다음에야 인간의 연대성을 이해하게 된다.-106-107쪽

<통제 : 책임의 의무>

20세기 초반에 윌리엄 오그번은 '문화지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이는 오늘날처럼 기술을 비롯한 물질문화가 통치 방법이나 사회 규범 같은 비물질 문화에 비해 빠르게 변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바깥 세계가 우리의 내부 세계(정신적, 정서적 반응)보다 빠르게 변할 때 우리의 환경은 당혹스럽고 위협적이다. 사회는 변화에 시간이 걸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125-126쪽

과거에는 엘빈 토플러가 '안정적인 사적 영역'이라고 부른 것이 존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변화에 대처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삶에는 변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생 종사하는 직업이고 평생 지속되는 결혼 생활이며 평생 살아가는 장소이다. 이것들은 누구에게나 허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희귀한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경제적, 개인적, 지리적 연속성의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낯선 것에 대처할 힘을 주는 친숙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런 것을 찾아보기가 점점 더 힘든 실정이다.-127쪽

고도의 소비문화를 지탱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부추기고 일시적으로 만족되는 욕망의 급속한 변천이다. 시장이 교환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인생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면, 의미 자체가 허물어진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인상적인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순례자'에서 '여행자'로 변한 것이다. 사회는 점차 가정이 아니라 호텔을 닮아간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 상태, 아무에게도 진실한 애정을 갖지 않고 어느 누구의 진실한 애정도 받지 않는 상태, 아무와도 운명을 공유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영속적인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상태에 접근하고 있다. 삶은 자아 너머의 보다 견고하고 영속적인 것과 점차 멀어지면서 점점 더 가벼워진다.-135-136쪽

인간관계가 정체성과 자존감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은 그것이 계약과 시자 거래의 영역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 친구, 이웃, 조언자들은 우리와 도덕적 호혜성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좋을 때만이 아니라 나쁠 때도, 다시 말해 그들에게 대가를 지불할 수 있을 때가 아니라 그들이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듣기 싫은 충고를 해준다. 이런 면을 로버트 라이시가 인용하는 '개인 코치' 광고의 상품화된 우정과 비교해 보라. "절친한 친구가 있다는 건 멋진 일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절친한 친구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을 함께 할 정도로 믿음이 가는 전문가입니까?" 이 수사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예스'다. 우리가 친구를 믿는 것은 우정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다.-137-138쪽

"부자와 권력자를 부러워하고 숭배하다시피 하지만 가난하고 하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성향은 우리의 도덕감이 타락하게 된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다." (애덤 스미스)-138쪽

우리한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우리의 통제력 바깥에 있다는 사실, 다시말해 우리가 겪는 많은 일들이 우리가 절대 만날 리가 없고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사람들이 내리는 경제적 선택이나 정치적 결정의 결과라는 사실은 우리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자아의 좁아터진 영역 너머에 하나의 세상이 있고, 그 세상에서 우리는 행위의 주역이 아니라 대상이다. 여기서 절망이 생긴다. -140쪽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예의를 갖추어서 내 의견을 정확히 전달하고(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내 의견을 이해시키고) 남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게 필요하다. 둘 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내 생각과는 다른 의견에도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이다. 논쟁에서는 한쪽이 승리하고 다른 한쪽이 패배하지만 애초의 의견을 바꾸지는 않는다. 대화는 어느 쪽도 패배하지 않지만 양쪽 다 변화한다. 이제는 다른 관점에서 보는 현실이 어떤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쪽도 애초에 가졌던 확신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대화가 아니다. 남의 의견도 용인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상대방도 - 내 의견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면 - 그래야 한다는 걸 깨달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이것이 다원 사회에서 공공도덕이 성립되는 방식이다. 즉 하나의 목소리가 앞장서거나 도덕 문제를 가정이나 지역 주민에게 일임하는 방식이 아니라, 차이의 경계를 넘어서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으려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만 공공도덕은 성립할 수 있다. -146-147쪽

'나'를 기꺼이 '우리'에 맞추어 형성하려는 태도에서 공동체가 이루어지듯, 사회 역시 개별 공동체의 '우리'가 기꺼이 다른 공동체들과 그들의 굳건한 믿음을 용인하려는 태도를 보여야 이루어진다. 사회는 수많은 목소리가 들리는 대화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제적 힘이라는 바람에 날리는 먼지가 아니라 미래를 함께 써가는 공동 저자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대화를 통해서다. 상대에 대한 존경과 열성이 담긴 대화, 한없는 공감과 이해가 필요한 대화야말로 차이의 존엄함이 다스리는 세상의 도덕적 형식이다.-147-148쪽

<공헌 : 시장 경제의 도덕>

시장 경제가 다른 어떤 제도보다 역사에 기여한 것은 그것이 태곳적부터 전해 오는 인간의 싸움 본능을 억제하는 힘이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18세기에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예언했다. "상업의 자연스러운 영향은 평화를 안착시키는 데 있다. 무역을 하는 나라는 서로에게 의지한다. 한 나라가 파는 데에서 이득을 본다면 다른 나라는 사는 데에서 이득을 본다. 모든 제휴와 연합은 상호 필요에 기반을 둔다. 지난 세기에 두 번에 걸친 대전쟁을 일으킨 유럽 국가들이 화폐 통합을 이룬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맥도날드 매장이 있는 두 나라가 서로 전쟁한 경우가 없다는 이른바 '글로벌 아치'이론을 만들어냈다.-177-178쪽

<자선 : 사회 정의>

이(체다카)는 점유와 소유의 차이를 강조한 유대 신학에서 나온 개념이다. 궁극적으로 세상 만물의 주인은 창조주 하느님이다. 우리는 점유하고 있을 뿐 소유한 게 아니다. 하느님이 맡긴 것을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레위기>의 말씀이 명확한 사례다. "토지를 영영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잠시 머무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5장 23절) 우리에게 절대적인 소유권이 있다면, 정의(억지로 주어야 하는 행위)와 자선(아량으로 베푸는 행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전자는 법률적으로 강제되는 의무이며, 후자는 도덕적인 의무, 자비와 연민의 촉구이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우리는 재산의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을 대신한 관리인에 불과하므로 신탁의 조건에 충실해야 하는데, 그 조건 중 하나가 우리가 가진 것의 일부를 궁핍한 자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점이다. 유대교에서는 다른 법체계에서 자선으로 간주되는 것이 법의 엄격한 요구 사항이며 필요할 때면 법정이 강제로 시행할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체다카는 흔히 '사회 정의'라고 부르는 것이니 누구나 삶의 기본 요건을 갖추며 살아야 하며 필요한 것보다 많이 가진 자들은 잉여의 일부를 덜 가진 자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열망하던 사회, 즉 누구나 존엄한 삶을 살 기본 권리를 가지고 있고 모두가 하느님의 주권 아래 언약으로 맺은 공동체에서 평등한 시민이 되는 사회를 이루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다.-195-196쪽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을 치료할 의료 수단이 없는 사람은 막을 수 있는 병과 피할 수 있는 죽음의 희생자만 되는 게 아니라, 책임 있는 인간으로서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 반노예살이나 마찬가지인 채무 노동자, 억압적인 사회에 숨이 막히는 여자 어린이, 실질적인 벌이 수단이 없는 가난뱅이 노동자들은 행복이라는 면에서도 책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여기에는 기본적인 자유가 꼭 필요하다)이라는 면에서도 모든 걸 빼앗긴 이들이다. 책임 있는 삶에는 자유가 필요하다. (아마르티아 센)

센의 말은 절대적으로 옿다. 개인의 자유는 이사야 벌린이 '소극적 자유'라고 부른 것, 그러니까 제약에서 벗어난 없는 상태(성경의 초페쉬)를 뜻한다. 집단의 자유(성경의 체루트)는 그와 다르다. 무엇보다도 나의 자유는 너의 자유를 희생하여 얻는 게 아니다. 다수가 굶는 마당에 소수가 잘 사는 사회,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좋은 교육과 적절한 의료 혜택과 쾌적한 편의 시설을 누리는 사회는 자유로운 해방의 땅이 아니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려면 억압과 압제가 없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책임 있는 시민이 되는 길을 막는 모든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198쪽

빈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그가 필요한 것을 넉넉히')는 최저 생활 수준을 가리킨다. 이는 유대 율법에서 음식과 주거와 기본 가구나 결혼식 비용 등을 의미했다. 두 번째('그에게 없는 것')는 상대적 빈곤을 뜻한다. 여기서 상대적이라 함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예전 생활 수준에 대해 상대적이라는 뜻이다. 이는 랍비들이 빈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열쇠가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사람에게는 단순한 물리적 욕구 이상의 심리적인 욕구가 있다는 인식이다. 가난은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좋은 사회는 그런 수치를 겪지 않게 하는 사회다.-203쪽

체다카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선'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자의 선의에 달린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율법이 강제하는 의무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경제 원리에 의존하는 개념은 아니다. 그것은 시장 고유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자유 시장과 양립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아래에 인용하는 조지 소로스의 말은 옳다.

"국제 무역과 세계 금융 시장은 부를 창출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평화 유지나 빈곤 완화, 환경 보호, 노동 조건 개선, 인권 보호와 같은 다른 사회적 요구, 일괄해서 '공공선'이라 불리는 것에는 신경 쓸 능력이 없다.-208쪽

극단적인 가난과 기아를 종식시키고 기본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막을 수 있는 질병에 맞서 싸우고 유아 사망률을 낮추고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실패한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경제적 잉여를 개발도상국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 그리하여 체다카가 보여주는 것처럼 가난한 개인뿐만 아니라 가난한 국가의 존엄과 독립성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시급한 요청이다. 통신과 무역, 문화의 세계화는 인간의 책임도 세계화한다. 다수를 가난과 무지와 질병의 노예로 만드는 대가로 소수의 자유를 사는 일은 없어야 한다.-209-210쪽

<창조성 : 교육의 책무>

월터 J. 옹의 말을 빌리면 "글은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구술 문화에서는 지식의 전달이 언제나 인간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즉, 특정한 때에 특정 장소에서 화자와 청자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반면에 저자는 누가 자기 글을 읽는지 굳이 알 필요가 없고 독자도 보통은 눈앞에 저자를 두고 구절마다 무슨 뜻인지 물어보며 글을 읽지는 않는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글의 모든 관행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글은 기억력의 상실과 수동적인 배움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논쟁을 낳는다. 양자가 만나서 결론에 이를 때까지 논의하지 않고 끝도 없이 서로가 쓴 글에 대해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글은 추상화하는 경향이 크다. 말은 모든 인간 집단이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적인데 반해 글은 인공적이다. 게다가 규칙과 관례가 필요하며 이것들은 의식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러나 글은 추상적 사고를 촉진하고, 이야기의 반복으로만 과거를 알 수 있는 구술 문화로서는 불가능한 방법으로 과거를 고정시킬 수 있다. -219쪽

<협동 : 시민 사회와 그 제도>

계약이 자아에 관한 것이라면, 언약은 우리가 그 안에 정체성을 키우는 보다 큰 집단에 관한 것이다. 언약 안에서 '나'는 '우리'를 발견한다. 언약의 관계는 신뢰로 유지된다.-249쪽

언약은 이해관계나 이익에 따라 묶인 유대 관계가 아니다. 언약은 소속감으로 묶인 관계다. 둘 이상의 사람이 모여 '우리'를 이룰 때 언약이 맺어진다. 언약은 제한이 없고 영속적이라는 점에서 계약과 다르다. 언약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헌신의 의미를 수반하며, 어려운 상황에도 곁에 있어 주는 신의의 개념을 내포한다. 언약은 때로 자기희생을 요구한다.-251쪽

<보존 : 지속 가능한 환경>

"우리는 윤리가 전부라는 근본적인 원리를 배우고 있다. ... 우리는 - 철부지 아이가 아니라(옮긴이) - 언약이야말로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거룩한 맹세로써 그 언약을 지켜낼 필요성을 받아들인 어른이다. ... 우리의 유전적 본성을 기계의 도움을 빌린 추론에 내맡긴다면, 그리고 신이나 된 것처럼 착각해서 오래된 유산에서 벗어나와 진보의 이름으로 우리의 윤리와 예술과 우리 자신의 의미를 그 기계적인 추론에만 맡긴다면,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에드워드 윌슨 <통섭>) -284쪽

<화해 : 세상을 바꾸는 용서의 힘>

"핍박을 받은 모든 종교는 핍박을 가한다. 어떤 우연한 사건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핍박에서 벗어나자마자 자기를 핍박한 종교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

"(민족주의는) 보통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자존심이나 영토에 가한 상처의 산물(이다)" (이사야 벌린) -294쪽

정의는 죄를 개인적인 보복 행위(복수)로 앙갚음하지 않고 비개인적인 법적 절차(응보)에 따라 취급한다. 용서는 정의만으로는 피해자의 감저을 가라앉힐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저을 바탕으로 한다. 증거를 구하고 평결을 내리고 형을 선고해도 피해자의 마음에는 고통과 슬픔의 앙금이 남아 있다. 정의는 비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며 용서는 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다. 정의는 잘못을 바로잡고, 용서는 깨진 관계를 회복한다.-307쪽

<희망의 언약>

언약은 계약이 아니다. 그것은 세 가지 점에서 계약과 다르다. 첫째, 언약은 특정한 조건과 상황에 제약되지 않는다. 둘째, 언약은 한계가 없고 오래 지속된다. 셋째, 언약은 다른 면에서는 서로 관련이 없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두 개인의 만남이라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언약은 '나'에게 정체성을 주는 '우리'에 관한 것이다. 계약에는 그것을 맺는 장소가 선행하지만, 언약은 무엇보다 우선적이고 무엇보다 근본적이다. 그것은 계약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인 상호성의 모형이다.-331-332쪽

"모든 진정한 언약은 도덕성의 기본적인 측면을 재진술하고 재확인한다. 자율적 의지 너머에 존재하는 판단의 원천에 대한 존경, 건설적인 자애심, 타인의 행복에 대한 배려가 그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특정 생활 방식의 원천을 수립한다. ... 그것은 추상적인 도덕이 아니다." (필립 셀즈닉) -332쪽

낙관은 상황이 나아지라라는 믿음이다. 희망은 우리가 힘을 합쳐 더 나은 상황을 맏늘 수 있다는 신념이다. 낙관이 수동적인 덕목이라면 희망은 능동적인 덕목이다. 낙관론자가 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338쪽

<옮긴이의 말>

부족주의와 보편주의는 둘 다 자기만이 옳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절대주의에 가깝다. 그러므로 지은이는 한편으로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주의(<문명의 충돌>)와 보편주의(<역사의 종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셈인데, 그 외줄타기의 이름이 바로 '차이의 존엄'이며 그 중심 논리는 '나도 옳고 너도 옳다'이다.

서양 근대 사상이 자랑하는 '관용'의 원칙과 비슷한 듯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니 그것은 '옳다'라는 단언에 담긴 무게이다. 관용의 원칙은 '나는 옳다'는 확신보다는 '내가 틀린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더 바탕을 둔 가치이다. 이른바 데카르트의 '잠정적 도덕'의 논리이다. 그러나 지은이에 따르면 극단적인 부족주의가 만연하는 오늘날에는 그런 정도의 원칙만으로 부족하다. 관용의 원칙은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남의 일에 상관 않는 개인주의(혹은 냉소주의, 더나아가서는 허무주의)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종교적 열정의 폭풍우를 막기 위해서는 오직 그에 못지 않은 반대 열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옳다'는 확고한 가치관 위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여러 폐해들(경제적, 정치적, 환경적)을 시정해야 한다는 확고한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자신이 속한 유대교 전통에서 여러 가지 개념들(체다카, 언약, 시장친화적 태도 등)을 뽑아내고 풀어내면서, 그가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자 시급하다고 본 인류의 대화에 참여한 것이리라. -351-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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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8-17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책 읽는 것 보다 이거 쓰는게 더 힘드셨겠어요 ㅎㅎ 공부하신다더니, 독서중에 시간 내신건가봐요 ^^

찬찬히 읽어보니, 저 책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끙 언제다읽지 -_-;; 책 소유욕도 병인데 말예요 ㅋㅋ

마늘빵 2007-08-17 15:16   좋아요 0 | URL
어 과외 안가고 뭐해요. 불량선생 :p
저 책 논문 관련해서 본건데, 약간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약간'말고 조금 더. 근데 주석정도에서 써먹을 부분도 있어서 일단 옮겨놨어요. 저 중에 몇 군데 써먹을 데가 있어보여서. 이거 치느라 힘들었어요. -_-
 
정치와 진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9
김선욱 지음 / 책세상 / 2001년 5월
절판


정치는 철학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현상 자체의 고유한 특성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 즉 이미 이성적으로 구성된 어떤 이론을 가지고 현상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무(無)이론적 태도로 관찰하여 그 현상의 가장 독특한 특성을 파악하려는 자세를 현상학적 태도라고 한다.-14쪽

동물에게도 다양한 욕구가 존재하지만 인간과 같은 복수성은 없다. 인간의 복수성은 인간 개체의 다양성에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인간은 모두 나름의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개성을 표출하기를 원하는데, 이것이 철저히 무시당할 때 견딜 수 없게 된다. 자신의 개성과 자존심을 철저히 배제하고 정치적 이해 관계를 위해 자신의 상전에게 봉사하는 사람을 비난하여 부르는 표현 중에 '주구(走拘)'라는 말이 있따. 이런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동물과 같다는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다운 행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를 드러내는 행동 간에 갈등이 일어남으로써 정치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 밑줄그은이 주 : 인간의 복수성이란 인간 사이에 생겨나는 다양한 갈등 양상들을 일컫는다. 자존심, 명예, 열등감, 정의, 체면 등등의 것들.-23쪽

우리의 행위는 언어 없이 이루어지는 행위와 언어 행위로 구별할 수 있다. 언어 없이 이루어지는 행위는 행위의 의미가 본인이나 타인에 의해 해명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이 공동 생활에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언어 행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언어없는 행위는 언어 행위에 의존하여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행위를 통해 인간의 복수성이 드러나는 것은 결국 언어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에서 진정한 정치적 행위는 언어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29쪽

정치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양상에 속하는 것이다. 마치 인간이 밥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정치적 행위를 하지 않고서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다. 인간의 노동과 작업이 인간의 삶에서 본질적인 모습인 것처럼, 개성을 표현하고 공적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공동 생활을 하는 것도 인간 삶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이렇게 정치를 이해할 때, 정치는 인간이 살아가는 한 항상 존재하는 것이며 또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32-33쪽

공적 시선을 받지 마라야 할 것이란 인간의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 생리적 필요에 부합한 것 등이다. 밥하기, 밥먹기, 성행위 등과 같이 동물로서의 인간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은 공적인 시선 속에서 행해질 필요가 없다. 이런 활동은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즉 가정이 사적 영역으로 존재했다. 가정은 생존에 가장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 사적 경제의 차원에 해당하는 문제가 해결되는 장소였다. 따라서 가정 안에서는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가부장의 권한이 절대적이었다. 경제 문제가 절실한 만큼, 그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의 지도를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가정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오이코스는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일차적인 것이 경제활동이라는 사실에서, 경제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다.

* 밑줄그은이 주 : 위와 같은 의미의 사적 영역은 '고대'의 의미. 현대는 이와 달리 해석된다. -41쪽

한편 공적 영역은 아고라처럼 정치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말한다. 이는 개인의 차이, 인간의 복수성을 핵심으로 하는 행위가 이루어진 장소였다. 개성을 드러내는 행위는 다른 사람이 보아주고 들어줄 때 의미가 있따. 이는 마치 무대에서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것과 같다. 관객이 있음으로써 배우의 연기가 의미 있어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공동의 세계가 계속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야 정치가의 드러내기 활동이 계속될 수 있고, 이를 통한 공동의 생활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41-42쪽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은 각각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위한 자리로서 마련된 것인데, 이런 구분이 필요한 것은 사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활동이 공적 영역을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중략 ...

생의 필요와 욕구를 해결하는 사적 영역인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은 생의 필연성의 기준에 따라 평가되고 인정된다. 필연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사적인 문제를 공적인 영역에서 다루게 되면, 필연성의 힘에서 그보다 약해 보이는 공적 문제들은 뒷전으로 물러나 앉게 된다. 자유의 문제보다 빵의 문제가 더욱 시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제는 사적 영역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이다.-42쪽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는 노예제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이 구체적인 생산 활동에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중세의 봉건제 사회는 영지 내의 생산활동 구조가 정치 구조와 직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적인 것과 구별되는 공적 영역에서 민주적 토론에 의한 정치 영역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중세의 봉건적 사회국조에서는 왕을 정점으로하는 수직적, 경제적 생산 관계가 곧 정치 관계를 의미한 것이다. -44-45쪽

현대에서는 사적 문제와 공적 문제의 구분이 불분명해졌고, 개인 생활에서 개인의 중요성까지도 변화되어 버렸다. 이제 오늘날 사적인 문제란 더 이상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프라이버시 문제로 전환되어 버렸다. 그러나 가장 주목해야 할 현상은, 사적인 관심과 보호 대상인 사유 재산이 공적 관심의 대상으로 전환되어버린 현상이다. 즉 경제 문제가 공적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45쪽

자본은 재산과는 달리 소비를 통해 없어지지 않는 일종의 항구성을 갖고 있다. 자본의 항구성은 정적인 구조를 가지지 않고 과정의 특성을 가진다. 지속적으로 자본을 움직이는 과정을 유지하지 않으면 자본은 다시 소비되어 소멸하고 만다. 즉 돌고 도는 돈은 계속 돌려야 한다. 따라서 자본은 자기 유지를 위한 끊임없는 과정을 수행하면서 우리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게 된다. 이로써 공적 관심이 자본 유지와 존속에 대한 관심으로 기울어지는 현상, 즉 공적 관심이 사적인 것에 몰두하게 되는 현상을 낳는다.-46쪽

사적인 것이 공적인 영역에 들어왔다고 해서 공적인 것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공적 영역을 사적인 것을 위해 기능하는 것으로 전환시켜버리고, 이와 더불어 공적 영역에서만 가능한 인간의 복수성에 바탕을 둔 인간의 활동을 잠식하고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47쪽

정리하자면, 올바른 척도가 있어 이를 기준으로 답을 끌어내는 부분이 사회적인 것이고, 이와는 달리 개성과 인간의 복수성이 드러나는 부분이 정치적인 것이다.-55쪽

철학은 확실한 진리의 준거를 가지고 정치 영역으로 들어오지만, 정치는 그러한 준거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진리의 준거가 존중되는 것은 사회적인 것에서이다. 준거와 기준이 존재하는 한 복수성은 존중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학은 말을 잃어버릴 정도의 놀라운 경험에서 시작된다. 모든 언어 활동은 진리 발견 과정에서는 중요하지만 지닐 발견과 더불어 언어 활동은 중지된다. 진리가 등장하는 곳에서 정치적 인간인 쏘온 로곤 에콘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따라서 정치 영역은 진리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79쪽

정치가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고 주장할 때 이때의 진리 개념은 고대 그리스 철학과 관련된 것이다. 즉 눈에 보이는 세계의 배후에 진리의 세계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이 연관된 진리 개념이다. 이러한 진리 개념은 흔히 말하는 진리 판별의 두 기준, 즉 대응설과 정합설 가운데 대응설의 근본 원리와 연결된다. 대응설이란 주장된 내용이 사실과 일치하는가라는 관점에서 주장된 말의 진위를 검토하는 것이고, 정합설이란 주장된 내용 가운데 논리적인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가를 따지는 것, 즉 논리성에 대한 검토를 의미한다.-81쪽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일방적인 이해가 아니라 대화 당사자 사이의 상호 이해이며, 이는 구체적인 대화 행위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실제의 언어 교환으로 이루어지는 대화 행위에서는 사실상 두 가지 차원에서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는 말하는 내용의 교환이다. 둘째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대화 당사자들 간의 관계와 관련된 것이다. 후자는 세 가지 차원, 즉 말하는 사람의 진정한 의도, 말한 내용에 대한 말하는 사람의 입장, 그리고 이런 대화가 그 상황에 적합한지의 문제 등이다.

이 두 차원의 상호 작용을 검토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합의를 이룰 때, 세 차원에서 타당성의 검증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 밑줄그은 이 주 : '세 차원'이란, "첫째, 말을 들은 사람은 말한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 "둘째, 말을 들은 사람은 말한 내용이 실현 가능한 상황에 있는지를 따져볼 것", "셋째, 말을 들은 사람은 말한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그 말이 과연 적절하게 한 말인지를 문제삼을 것"을 지칭한다. 이는 하버마스의 형식 화용론을 요약한 것이다.-89쪽

동정은 특히 루소가 정치적 행위의 원리로 생각했던 것이다. 루소는 자신의 성선설을 바탕에 두고 이러한 동정의 힘을 신뢰했다. 그러나 동정과 감정 이입에 의한 행동이 파괴적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동정심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행동을 강요하는 것은 파시즘적인 특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변혁을 가능하게 한 혁명적 힘을 생각하면 그것이 차가운 이성적 합의보다는 정서적 합의에 의해 이룩된 것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 이는 연대가 이성보다 감정에 의한 것이라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 중략 ... 나아가 정치적 설득 또한 이성적 논증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정치적 연대 또한 이성적 합의가 자동적으로 수반되지 않는 어떤 다른 차원에서 찾아야 하는데, 우리는 이성적인 것이 아니면 모두 감정적인 차원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공동 행위자를 결속하는 것은 감정의 직접적 일치가 아니라 참여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원리'이다. 이 원리란 위대성, 명예, 위엄, 영광, 평등, 공포, 불신, 증오와 같은 것들이다.-108-109쪽

시민의 판단이 이와 같은 세계적인 차원으로까지 관점이 확장되어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시민이 판단을 내려본 후에야 알 수 있다. 실제로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 함께 대화를 나누어보지 않은 채, 선험적으로 판단의 타당성을 확보할 수는 없다. 따라서 판단을 내리는 행위 자체는 바람직한 정치 영역의 보존과 정치적 삶을 통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험한 것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는 것이다.

* 밑줄그은 이 주 : 마지막 줄 명언. 밑줄 쫙.-111쪽

세계적 연대의 싹은 시민이 내리는 정치적 판단에 이미 존재한다. 판단 자체가 지역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편파성을 극복함으로써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적 연대를 기능하게 하는 판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되어 비판받을 것을 감수하고 행하는 판단 행위 그 자체다.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이 소통되게 하는 정치 영역을 유지하는 것은 오직 판단을 내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판단 불능이나 혼자 머리 속에서만 하는 판단으로는 인간적인 삶이 가능한 세계를 만들 수 없으며 오히려 세계에서 소외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쏘온 로곤 에콘의 언어 사용을 통해 구체적으로 대화하는 것만이 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117쪽

시민은 항상 확장된 사고를 통해 세계적 차원에서의 판단을 필요에 따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을 통해 형성된 시민의 공동 행위에 의해 정치가 이끌어져야 한다. 다수의 의지와 괴리된 법은 수정되어야 하고 저항을 받아야 한다. 시민의 준법 정신이 투철해야 하는 만큼 시민의 저항정신도 투철해야 한다. 맹목적인 법 준수와 판단의 중지는 간접적으로 제도적 폭력에 참여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121-122쪽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며, 법은 진리 자체가 아니다. 정치의 목적은 복수성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개성과 관점을 언어적 판단과 의견을 드러냄으로써 이룩되고, 이러한 의견과 판단을 제시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적 영역, 즉 정치 영역이 소멸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민은 의견과 판단을 제시해야 하고, 이렇게 제시하는 의견과 판단을 중심으로 공동 행위가 형성된다. 이 공동 행위가 곧 정치적 권력의 유일한 근거다. 법은 이 근거에 의존해서만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122쪽

[미주12]

"언어의 본질적 사용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 문제는 항상 정치적이다." (한나 아렌트) -133쪽

[미주61]

그러면 폭력이 불합리한 사고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것인가? 우리는 종종 폭력을 비합리성의 범주에 넣지만, 폭력 자체는 이성의 반의어가 아니다. 이성과는 무관하다. 폭력은 오히려 목적을 위한 '합리적' 계획하에 행사되기도 한다. 때때로는 격렬한 분노에서 비롯된다. 눈뜨고 볼 수 없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거나 목격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분노를 터뜨린다. 이 분노에 반대되는 것은 차가운 이성이 아니라 몰이해일 뿐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분노를 억누르거나 없애려는 것은 비인간화를 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폭력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이유는 폭력이 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이 효과적인 경우는, 마치 정당 방위로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처럼 아주 직접적이고 순간적으로 사용되는 경우일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폭력도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폭력이 전략적으로 또 제도적으로 사용될 때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될 뿐이다.-142쪽

[미주61]

폭력의 경우는 다른 정치적 행위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진다. 즉 폭력은 본질상 수단적이기 때문에 폭력을 통해 의도된 목적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따라서 예측 불가능성은 폭력 행위에서 정당성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 때문에 어떤 좋은 목적이 폭력적 수단에 의해 산출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목적이 수단에 의해 다시 쉽게 압도되어버리는 것이 폭력이다.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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