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나라의 앨리스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36
루이스 캐럴 지음, 남기헌 옮김 / 책세상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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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네가 의미하는 것을 말해야지." 3월의 토끼가 말했다.
"그럴게." 앨리스가 허둥지둥 대답했다.
"적어도..... 적어도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을 의미해...... 이거나 그거나 같은 거잖아."
"전혀 같지 않아!" 모자 장수가 말했다.
" '나는 내가 먹는 것을 본다'와 '나는 내가 보는 것을 먹는다'가 똑같다는 말이니?"
"그러니까 네 말은, '나는 내가 가진 것을 좋아한다'와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졌다'가 똑같은 거구나!" 3월의 토끼가 거들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나는 잠을 잘 때 숨을 쉰다'와 '나는 숨을 쉴 때 잠을 잔다'가 똑같다는 거구나!" 겨울잠쥐까지도 잠꼬대하듯 거들었다.
"너에게나 똑같겠지!" 모자장수가 말했다. -92쪽

남기헌 : 그렇다면 혹시 부조리와 난센스-무의미는 서로 다른 것인가요? 사뮈엘 베게트는 보통 부조리 작가로 여겨지는데, 선생님은 이와 어떻게 구별된다고 보십니까?

캐럴 : 음. 부조리가 한 의미의 체계 안에서 상반되는 의미들을 대조시키는 것이라면 무의미는 전혀 다른 의미의 체계가 존재함을 전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무의미는 의미의 체계가 달라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일 뿐, 다른 의미 체계 사이에 종속 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두 의미 체계의 공존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이런 차이를 부정하고 하나의 의미 체계로 다른 의미 체계를 이해하려고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자와 저자의 가상인터뷰 '나른한 오후의 다과회' 中 ) -185-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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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2-02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와 루이스 캐럴 간의 가상 인터뷰 형식, 흥미롭네요.
 
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품절


'국민성'이라는 말 뒤에 붙는 술어는 대개 편견을 담고 있다. 개인차를 무시하고 몇몇의 예만 갖고 전체의 특성을 구성해내는 '일반화의 오류', 한 사회가 발전하는 단계에서 겪는 성장의 고통을 간단히 그 민족의 유전자 탓으로 돌리는 '인종주의 심리', 그저 문화적 차이에 불과한 것을 곧바로 미개함의 지표로 간주해버리는 '제국주의 논리' 등. 자기와 다른 인간에 대한 편견을 생산하는 기제는 다양하다. -10쪽

이 책의 의도는 ' 한국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정체성'이라는 낱말은 다분히 이념적이어서, 한국인이 마땅히 수립하고 보존해야 할 어떤 가치 체계를 함축한다. 가치관이 다양해진 시대에, 과연 한국의 문화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어떤 양식 같은 게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정체성' 담론은 종종 특정인의 주관적 가치관을 사회의 객관적 규범으로 제시하는 형식을 취한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한국인이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국민성' '정체성' 보다 이 책의 의도에 더 적합한 것이 있다면, 아마 '하비투스'라는 개념일 것이다. 우리말로 흔히 '습속'이라 번역되는데, 거칠게 말하면 특정 사회 성원들의 사고방식, 감정구조, 행동양식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 -11쪽

"회화가 색채의 조형예술이듯, 정치는 국가의 조형예술이다. 대중을 재료로 국민을 주조하는 것. 국민을 재료로 국가를 주조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언제나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참된 정치였다." (요제프 괴벨스, 1929) -58쪽

"옳게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은 자연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다." (데카르트 , <방법서설>) -104쪽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많은 잘못된 견해들을 참된 것인 양 받아들였고, 그렇게 불안정한 원칙들을 근거로 해서 내가 쌓아올린 것이 불확실할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학문에서 어떤 확고부동한 것을 이룩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견해를 벗어나 아주 기초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얼마 전부터 깨달았다." (데카르트, <방법서설>)-105쪽

수직적 예법의 과잉은 수평적 예법의 결여를 낳는다. 언젠가 독일문화원의 선생이 우리에게 "왜 한국인들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사를 해도 안받느냐?"고 묻는다. 자신이 "헬로"라고 해도 멀뚱이 얼굴만 쳐다볼 뿐 대꾸가 없어 민망했다는 것이다. 하긴, 독일에선 모르는 사람에게도 "구텐 탁"이라고 했던 나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한마디도 인사를 안 건넨다. 이 어색함, 이 머쓱함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주는 예법이 없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수직적 위계를 위한 예법이 매우 복잡하게 발달된 한국 사회, 수평적 교제를 위한 예법에는 이렇게 구멍이 나 있다. 원래 전통 예법 자체가 신분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데다가, 근대화마저 군대를 모델로 하여 이루어지다 보니, 예법이 주로 수직적 위계를 세우는데에 소용된 것이다. 그 결과 개인과 개인의 평등한 교제를 규제하는 품위있고, 격조 있는 시민적 예법은 발달할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낯선 사람과 마주칠 때 한국인이 느끼는 어색함은 거기서 비롯된다.-122-123쪽

한마디로 한국인은 근거리 지각에 따르는 쾌, 불쾌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 일단 내가 불쾌해야 남도 불쾌할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지 않겠는가. 자신이 불쾌하게 느끼지 않는 행동은 당연히 남에게도 별 생각 없이 하게 된다. 한마디로 이것은 '배려'의 문제이기 이전에 먼저 '감각'의 문제다. 이른바 에티켓의 전제가 되는 것은 바로 불쾌를 불쾌로 느끼는 미적 취미다. -141쪽

죄책감은 죄를 짓는 순간 발생하나, 수치심은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에 비로소 시작된다. -172쪽

한국에서는 이를 '연대책임은 무책임'이라 표현한다. 이는 똑같은 현상에 대한 군사주의적 표현이다. 신의 눈길은 인간에게 죄책감을 안겨주고, 인간들의 눈길은 사람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해준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주체 형성이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자기반성의 능력을 갖춘 '개인'의 형성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남들의 눈길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성원'의 형성으로, 때로는 연대로만 책임을 지는 '대원'의 형성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173쪽

이런 문화(남의 눈치를 보는 문화)에서 윤리를 형성하는 감정은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이다. 신 앞에 떳떳하지 않은 이도 사람들 앞에선 떳떳하고, 신 앞에 떳떳한 이도 사람들 앞에선 부끄러울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범죄의 신고율이 낮은 것은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이렇게 윤리가 타인의 눈에 맞춰져 형성된 사회에서는 죄도 드러나지 않는 한 떳떳하고, 죄가 아닌 것도 드러나는 한 부끄러운 것이 된다. -174-175쪽

한국은 뜨겁다. 개인주의가 강한 서구에서는 서로 논쟁을 벌이다가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으면 "유감이네요"하고 논쟁을 멈춘다. 하지만 모든 성원이 가치관을 공유하는 공동체 정서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견해의 차이는 참을 수 없는 것. 그 차이를 없앨 때가지 한국인은 가망 없는 논쟁을 집요하게 이어간다. 월터 옹은 구술문화에 사는 사람들은 어조가 논쟁적이라고 지적한다. 토론을 할 때 사안의 논리적 해결보다는 인격의 명예를 건 승패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인터넷 문화와 더불어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것이 이른바 '논객'들. 논객이라는 말은 어쩔 수 없이 '검객'을 연상시킨다. 구술문화에서는 어떤 이가 주장하는 논리보다,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의 솜씨에 더 관심이 많다. 이런 사회의 논쟁은 대개 '논리의 대결'이라기 보다는 ;검객의 결투'로 치러진다. 사안의 해결보다 중요한 것이 승부를 통해 결정되는 명예의 감정. 여기서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논쟁이 합리적이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인터넷은 고수들이 명멸하는 무협지 속의 '강호'. 혹은 검투자들이 사투를 벌이던 고대의 아레나다. 인터넷은 무림의 고수를 지향하는 수많은 네티즌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한국 사람이 목숨 걸고 인터넷을 하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얼마전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내 이름이 영광스럽게 거론된 기사를 발견했다. 논쟁을 바라보는 이 사회의 코드를 그대로 보여준다.
"글 싸움에서 시사평론가 진중권 씨에게 이길 사람이 없다면, 말싸움에서 유시민 씨에게 이길 사람은 없어 보인다." -194-195쪽

토론 사이트에 의견을 올리고, 홈페이지에 제 이야기를 쓰고, 사실 오늘날처럼 많은 이들이 글쓰기를 하는 시대도 일찍이 없었다. 하지만 그로써 문자문화가 강화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글쓰기는 구술문화에 가깝다. 오랜 사색으로 정제해낸 생각을 주옥같은 언어에 담는 독백적 글쓰기가 아니라, 반응이 오가는 상황에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곧바로 글자로 옮겨 적는 대화적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쓰기의 범람 속에도 글쓰기는 위기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211쪽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란 다름 아닌 이 '디지털 실어증'의 산물이다. 그 위기는 사회가 문자문화에서 영상문화로 이행하는 데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다. 21세기는 사회의 주요한 소통매체가 문자에서 영상으로 바뀌는 이른바 '도상적 전회'의 시대다.
[...중략...] 인문학의 위기는 구체적으로 '이미' 영상문화에 속하는 학생과 '아직' 문자문화에 있는 교수 사이의 세대 차이로 나타난다. 그림에 익숙한 학생들은 더 이상 선생의 문어체적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에 익숙한 선생들은 학생들의 영상적 신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2차 영상성의 문화가 텍스트와 이미지의 결합이라고 할 때, 학생과 선생 모두 어느 한쪽만을 갖고 있어 서로 결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의 뇌는 '진보'가 덜 됐고, 선생의 몸은 '진화'가 덜 됐다.
-212-214쪽

'개인'이라는 말은 in+dividual,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위라는 뜻이다. 하지만 컴퓨터에 여러 개의 창을 열어놓을 때, 정신은 다양한 관심사로 분할이 된다. 이로써 전통적 의미의 '개인'은 해체된다. 기성세대가 주의력이 산만한 젊은 세대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미디어의 홍수에 노출된 한국의 어린 세대에게서 '개인'의 해체라는 현상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속하고 파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220쪽

라이프니츠는 인간(의 정신)을 '창없는 단자'라 불렀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인간은 사방으로 창을 열어놓고 산다. 개인이 근대인의 조건이라면, 분열자는 탈근대적 인간의 조건이다. '조건'이란 거부할 수 없는 환경을 뜻한다. 현대인은 어차피 분열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중에서 디지털 통각을 가진 이는 멀티태스커로 진화할 것이고, 그것 없이 그저 산만하기만 한 이들은 넓은 정보의 바다를 표류하다가 해체되어 사라질 것이다. -221쪽

한국인의 신체가 아무리 그로테스크해 보여도 오늘의 한국을 만든 것은 바로 그 몸이다. 다만 그 신체는 급조된 근대화에 따르는 부작용으로 고통 받고 있고, 미래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서 아직도 과거의 타성에 사로잡혀 있다. 오늘의 고통을 제거하고 미래를 준비하려면 한국인의 몸을 이루는 세 가지 역사적 층위가 최적의 배합을 이루도록 재배치해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존재의 미학, 즉 요소들을 선택하는 테크네와 그것들을 배치하는 메트릭이다. -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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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0735 2007-01-31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도 많이도 치셨네~ ^^
이 책 리뷰도서로 떠서 신청하고 싶었는데... 못했습니다.
다음달쯤 여유되면 사서 읽어볼게요. 밑줄만 봐도 좋아보이는군요. ^^

마늘빵 2007-01-31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을 많이 치면 -_- 여기에 쓸 때 힘들어요. 리뷰 쓰는게 더 쉽겠어요. 곧 리뷰 써야지.

승주나무 2007-02-02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 많이 쳐주세요. 논술문제 만들 때 써먹게 ㅋㅋ
 
현명하게 세속적인 삶
복거일 지음 / KD Books(케이디북스) / 2006년 12월
품절


당연히, 우파 지식인들 사이의 논쟁들을 건전하게 만드는 일은 시급하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몇 가지 점들을 지켜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싸움에서 한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때로 논쟁의 상대방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짜증이 일더라도, 그들이 같은 편이고 그들과 심각하게 다투는 것은 진정한 적을 돕는 일임을 자신에게 일러야 한다.
다음엔, 우리는 모두 사회적 믿음과 정책적 견해에서 아주 동질적이라는 점을 잊지말아야 한다. 때로 차이가 부각되더라도, 그것이 크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일러서 지엽적 문제가 근본을 흔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논쟁을 믿음과 견해라는 비인격적 차원에서 진행해야 한다. 논쟁이 개인들의 행적이라는 인격적 차원에서 진행되면, 어쩔 수 없이 논쟁이 거칠어지고 당사자들 사이의 감정적 골은 깊어진다.
중요한 것은 믿음과 견해지 과거의 행적과 현재의 정치적 입지가 아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깨우침을 줄 수 있는 것은 당의 고승 위산 스님의 말씀이다. 그의 제자 앙산 스님이 행실에 대해 묻자, 위산은 "자네 눈 바른 것만 귀하게 여길 따름, 자네 행실은 보려하지 않네"라고 대답했다. 믿음과 견해가 올바르다면, 행적과 입지에서의 사소한 차이들은 큰 장애가 될 수 없고 거기서 나오는 의견의 편차는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논의를 통해 좁혀질 수 있을 터이다.
넷째, 논쟁에선 되도록 표현을 부드럽게 하려고 애써야 한다. 논쟁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흔히 내용보다 표현이다. 체스터필드 백작이 말한대로 "상처는 모욕보다 훨씬 빨리 잊혀진다." 화가 났을 때 나오는 대로 쏘아붙이는 대신 화를 삭이고 나서 보다 부드러운 표현을 쓰는 일은 일반적으로 인식된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40-41쪽

세계성의 시대에선 민족주의적 편향이 든 역사 해석은 특히 큰 문제들을 부른다. 해외에 나갔을 때, 자신이 받은 민족주의적 교육과 세계 현실이 너무 달라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시민들이 많다. 우리가 크게는 외교에서 작게는 외국인들과의 교류에서 서툰 까닭은 민족주의적 편향이 든 역사 해석도 큰 몫을 했다.
유난히 씁쓸한 반어는 우리 사회를 뒤덮은 민족주의적 태도가 실은 우리의 전통이 아니라 유럽의 전통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선조들은 민족에 그리 집착하지 않았고 우리보다 훨씬 세계적이었다. 지금 우리가 받아들인 민족주의는 원래 근대 유럽에서 비롯했다. 유럽 문명이 다른 문명권들로 수출한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은 기독교, 과학, 그리고 민족주의라 할 수 있는데, 그 셋 가운데 민족주의가 가장 성공적 수출품이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민족주의적 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외세에 대한 저항"이 역사 해석의 중심적 가치가 된 역사 교육을 오래 받아왔으므로, 우리는 모두 알게 모르게 그런 기준에 따라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 현실에 접근한다. 그런 편향된 판단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리에게 이로울 수 없다. -50쪽

그래서 우리는 나름으로 삶의 설명서들을 열심히 찾는다. 그런 설명서로 쓸모가 큰 것이 문학이다. 특히 소설이 그렇다. 사람들의 삶에서 본질적인 부분들을 이야기로 꾸며 들려주므로, 소설은 삶의 본질과 살아가는 길에 대해서 성찰할 기회를 독자들에게 준다.
소설 작품들은 그럴 듯한 이야기들이다. 삶에 별다른 연관성이 없는 특수한 사실들을 버리고 삶의 본질에 연관된 것들만을 뽑아냈으므로, 소설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인식된 것보다는 훨씬 큰 보편성을 지닌다. 신문 사회면에 나오는 현실이 소설 속의 현실보다 훨씬 특수하고 기괴하다. 사람들의 삶에 관해서 '보편적 진실'이라 불릴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많이 담긴 곳이 바로 소설이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소설을 거짓말과 같은 뜻으로 쓰는 우리 사회의 관행은 참으로 불행하다. "소설을 쓴다"는 표현에 "거짓말을 지어낸다"는 뜻을 처음 담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길 없지만,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무지를 드러내고 우리 사회의 비속함을 상징한다. 근대 이후에서 가장 중요했던 예술 형식을 거짓말과 동의어로 만든 사회가 어떻게 건강하고 세련될 수 있겠는가?-52-53쪽

"자연은 우리에게 장점들을 주고, 우연은 그것들이 일하도록 한다"
"혼자서 현명해지려는 것은 크게 어리석은 일이다"
(라 로쉬푸코)

"그럴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현명해져라. 그러나 그들에게 그것을 말하지는 말아라."
(필립 체스터필드) -60-61쪽

"첫째, 신과 사람에 대해 너의 의무를 해야하니, 그것 없인은, 다른 모든 것들이 뜻이 없다; 둘째, 많은 지식을 얻어야 하니, 그것 없이는 비록 네가 매우 정직한 사람일지라도 매우 경멸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매우 좋은 태도를 지녀야 하니, 그것 없이는 비록 네가 정직하고 박식한 사람일지라도 매우 마음에 맞지 않고 불쾌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필립 체스터필드) -62쪽

만일 당신이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면, 착한 사람인 척 하는 것이 긴요하다. 세상은 위선을 좋게 여기지 않는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위선이야 말로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사람은 천사도 악마도 아니다. 누구도 천성이 온전히 착할 수는 없고,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빼놓으면, 천성이 온전히 악할 수 없다. 그래서 모두 크든 작든 위선적 행동을 통해서 사회 환경에 적응한다. 위선은 사람이 자신의 비열한 천성을 극복하려는 안타까운 노력이다. 자연히, 가장 인간적이고, 그런 뜻에서, 타고난 선보다 오히려 위대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착한 천성에서든 위선을 통해서든 착한 행동을 하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실제로 조금씩 착해진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마음은 태어날 때 고착된 것이 아니라 학습을 통해서 다듬어지도록 되었다.-63쪽

"현명하게 세속적이어라, 세속적으로 현명하지 말고"
(콸스)-64쪽

상업활동을 통해서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다. 아울러 물질적 가치를 창출해서 사회에 공헌한다. 이 점에서 상업활동은 본질적으로 위치재를 놓고 다투는 정치활동과 다르다. 모두 돈을 많이 벌면, 사회적 위치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도, 물질적 풍요의 절대적 수준은 높아지므로, 가치는 창출된다.
현대 사회가 빠르게 발전하고 그런 발전에서 기업가들이 그리도 큰 역할을 한 것은 상업 활동이 직접 위치재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물질적 가치를 창출하고 사회적 지위는 간접적으로 얻어진닫는 사실 때문이다. 반면에, 위치재를 직접 겨냥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얻는 과정에서 가치를 비교적 적게 창출한다. 번영한 사회에서 기업가들이 두드러진 역할을 하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린다는 점은 우리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훌륭한 기업가들은 "현명하게 세속적"인 사람의 전형이다. 젊은이들이 기업가보다는 관료나 정치가를 선망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것은 모두가 깊이 새겨야 할 화두다. -66-67쪽

주목을 덜 받지만 정작 중요한 점은 외국의 기업가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자선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주주로 지배하고 경영하는 기업들의 자산으로 자선을 하지 않는다. 이점에서 외국의 자선가들과 우리 자선가들이 뚜렷이 대비된다.
아무도, 지배적 주주들도 최고경영자들도, 기업의 자산을 자선에 쓸 도덕적 권위를 지닐 수 없다. 기업의 목적은 주주들을 위해서 이윤을 되도록, 즉 법과 도덕에 어긋나지 않는 방식으로, 많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윤은 주주들에게 배당이나 청산을 통해서 돌아가야 한다. 자선은 그렇게 투자에 대한 보상을 받은 주주들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자선만이 정당할 뿐 아니라 원래 자선의 뜻에 맞는다. 남의 돈으로 하는 자선은 어쩔 수 없이 자선의 뜻을 덜어낸다. 기업은 법인이다. 원래 인격을 갖춘 무엇이 아니지만, 인격을 지닌 것처럼 여기는 것이 사회적으로 좋으므로, 그렇게 법적으로 인격을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법인은 마음이나 양심이 있을 수 없다. 마음도 양심도 없는 존재를 통해서 그리고 본질적으로 자신의 소유도 아닌 재산으로 이루어지는 자선이 과연 얼마나 깊은 뜻을 지닐 수 있겠는가? 자선은 남의 돈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으로 해야 하는 점은 강조되어야 한다. -70쪽

그(프리드먼)는 자본주의 사회들에서만 자선이 나올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중앙 권력이 충분한 정보를 지니고 처리해서 사회의 움직임들을 다 통제하는 사회주의 사회들에선 개인들의 판단에 의한 자선은 들어설 틈이 원천적으로 없다. 만일 자선이나온다면, 그것은 계획이 틀려서 자원이 남는 개인들과 모자란 개인들이 나왔다는 사실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사회들에선 자선이란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과 자본주의를 가장 충실히 따르는 미국에서 자선이 가장 왕성하다는 사실은 맥락이 통한다. 자선에 바쳐진 자원에서 가장 큰 성과를 얻기 위해서 현대 기업의 기법들과 기업가 정신을 결합하는 '자선자본주의'가 미국에서 출현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선은 인간의 본성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고 사회와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인 '상호적 이타주의'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을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포장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해롭다. -72쪽

좋은 참고서들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늘 지적 즐거움을 준다. 그리고 그것들을 잘 쓸 줄 아는 사람들에겐 뜻밖의 선물들도 준다. 그런 선물들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 좋은 물음을 던질 줄 아는 능력'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받은 터라, 우리 학생들은 모두 주어진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가장 중요한 지적 활동이라는 생각을 지녔다. 창조적 노력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주어진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 물음을 던지는 능력이다. 풍요로운 결과를 약속하는 주제를 고르는 일에서부터 새로운 각도에서 문제를 살피는 일에 이르기까지, 창조적 노력의 모든 단계들을 떠받치는 것은 스스로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이다.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집적된 참고서들은 그런 물음들을 찾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107쪽

우리 교과서들을 열악하게 만든 직접적 원인은 교과서의 기능과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다. 실제로 교과서에 대한 편견과 경멸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학자들이 드물지 않다. 좋은 책들을 뽑아 상을 주는 일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해보면, 심사기준이 아예 '교과서는 제외한다'는 조항이 들어간 경우도 있다.
교과서는 '어떤 주제의 원칙들과 어휘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책'을 뜻한다. 따라서 교과서들은 그 사회의 '공식적 지식 체계'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바로 거기에 교과서의 근본적 중요성이 있다. 공식적 지식 체계는 한 사회에 존재하는 가장 풍부하고 체계적인 지식 체계이며 사회의 구성과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고 효과적이다. 어떤 대체적 지식 체계도 공식적 지식 체계에 비길 만큼 풍부하고 체계적이지 못하다. 자연히, 좋은 교과서들이 존재하는 사회에선 시민들이 사회의 구성과 움직임을 잘 이해하게 된다.
교과서들은 또한 재발견의 위험을 줄인다. 이미 남들이 발견해서 잘 다듬어놓은 지식을 혼자 애써서 원시적 형태로 얻는 일처럼 딱한 일도 드물다. 지식의 발전과 축적이 점점 가속되는 지금, 재발견에서 나오는 개인적, 사회적 손실은 점점 커질 수 밖에 없다. 재발견을 피하려면, 지식이 뻗어나가는 맨 앞쪽으로 가장 빨리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 일에서 교과서는 가자 좋은 길잡이다. -113-114쪽

어쩔 수 없이 나는 복원 사업의 득실을 마음 속으로 헤아렸다. 복원에 든 비용은 작지 않을 터였다. 느닷없이 집과 생계를 잃은 가족들의 손해라는, 보이지 않는 비용은 더 클 터였다. 반면에, 얻은 것은 분명치 않았다. 실은 무엇을 얻은 것이 아니라 절터의 폐허를 그냥 잃어버린 것이었다.
폐허는 폐허 다워야 한다. 폐허마다 세월의 손길에 다듬어진 나름의 모습이 있어서 찾는 사람들에게 그 세월을 얘기해준다. 그래서 폐허다움은 폐허의 자산이다. 그것을 큰 돈을 들여 걷어내다니.
사람의 몸과는 달리, 폐허는 성형 수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젊음을 찾지만, 문화재들은 나이들었다는 점이 바로 본질적 자산이다. 지금 우리는 '문화재 복원'이란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폐허의 파괴에 너무 무심한 것은 아닌지. -134쪽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은 얼마나 하찮은가. 그러나 내가 그것들을 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볼테르) -193쪽

사람은 천성적으로 마약을 찾게 되어 있고 아주 오래 전부터 갖가지 마약들을 써왔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거의 모든 인류 사회들은 몇가지 마약들을 허용해왔다. 그렇게 허용된 마약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물론 알코올이다. 니코틴과 카페인도 대부분의 사회들에서 허용된 마약들이다. 비록 이제 니코틴은 점점 괄시를 받지만.
일반적으로, 알코올, 니코틴, 그리고 카페인을 포함하는 술, 담배, 커피, 차 같은 것들은 마약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취급은 사회적 이유 때문이지 화학적 기준 때문은 아니다. 그런 마약들이 허용되는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는 관행이 이미 사회 조직 속으로 깊이 들어가 있고 사회가 그것들의 사용에 대처하는 길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지, 그것들의 영향이나 해독이 다른 마약들에 비해 작기 때문이 아니다. -214쪽

세상이 어지러우면, 보통 사람들의 일상도 힘든 판단들의 연속이 된다. 도덕과 규칙의 필요와 정당성을 부인할 사람은 드물 터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도덕과 규칙을 가볍게 어기는 상황에선, 혼자 그것들을 지키는 것은 짐이 되고 때로는 손해가 된다. 그래서 여느 때라면 무심히 내릴 일상적 결정들이 힘든 도덕적 판단을 거치게 된다.
여기 실린 글들 밑에 자리 잡은 전언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어기는 것보다 낫다는 얘기다. 적어도, 옛 말씀에 있듯이, 도덕적 삶은 자체로 보답이다. 이 말은 부도덕한 삶에 대해선 할 수 없다.
[...] 사람은 자연선택의 효율적 손길에 의해 다듬어진 '도덕적 동물'이다.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대신 남을 속이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사람들보다 삶에서 얻는 것이 적었고 그래서 밀려났다. 우리는 모두 상당히 도덕적이었던 사람들의 후손이다. 자연히, 도덕적 삶은 우리에게 유리할 뿐 아니라 우리의 천성을 충족시켜서 깊은 즐거움을 준다.
비록 짧고 가벼운 글들이지만, 여기 실린 글들엔 그런 생각이 스며있다. 책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세속적으로 현명한' 것보다는 '현명하게 세속적인' 것이 삶의 본질에 맞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아주 어지럽다. 그래도 나는 '현명하게 세속적인' 태도가 적응적이라고 독자들에게 얘기하고 싶다. (후기에서)
-22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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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7-01-28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복거일아저씨한테 꽂혔군요. ^^

마늘빵 2007-01-28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네. 아직 한 권 더 있습니다. 안읽은거. 다른건 새로 구입해야하고요. 이 책 괜찮군요. 복거일에 대해 개인적인 관심이 없어도 괜찮은 책입니다.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SERI 연구에세이 14
복거일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5년 1월
품절


따라서 자본주의의 높은 효율만을 내세우는 주장은 자본주의를 제대로 변호할 수 없다. 자본주의가 정의롭다는 점을 주장할 수 없으면, 그래서 정의를 내세우는 자본주의의 반대자들에게 도덕적 고지를 내주면, 어떤 다른 가치들을 내세워도, 자본주의를 변호하는 주장은 밀릴 수 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자본주의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바로 그 길을 골랐다. -12쪽

자본주의와 그것을 떠받치는 이념인 경제적 자유주의가 정의롭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또렷하지 않고 길고 어려운 설명이 따라야 비로소 밝혀질 수 있다. 반면에, 평등을 내세우는 주장들은 직관적으로 옳게 여겨진다. 자본주의의 반대자들은 자본주의의 변호자들보다 늘 목청이 높았고 훨씬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다는 사정이 이상하지 않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자본주의가 효율적일 뿐 아니라 정의로운 까닭을 밝히는 일은 중요하고 시급하다. 그렇게 한 뒤에야 우리는 자본주의를 적대적 세력으로부터 지킬 수 있고, "제때를 만나 태어나기 위해 베들레헴을 향해 비척거리는 사나운 짐승"이 이땅에 태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터이다. -13쪽

자본주의가 정의롭다는 사실은 그것이 자연스럽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정의가 사람 마음에 자연스러운 무엇으로 다가오리라는 생각은 합리적이다. 자연스러움이 정의의 핵심적 특질들 가운데 하나임을 명확하게 증명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무엇이 정의로운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다. 정의감이 진화의 산물이므로, 그런 사정은 필연적이다. -14쪽

자본주의가 정의롭다는 것을 밝히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재산권이 본질적으로 정의롭다는 점을 밝혀야 한다. 자본주의가 사유재산 제도에 바탕을 두었고 사유재산 제도는 재산권을 통해 세워지고 유지되므로, 재산권은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만일 재산권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다른 면들에서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정의로울 수 없다. -22쪽

최종결과 원칙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정의롭다고 여기는 구조적 원칙들 가운데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은 물론 평등이다. 그래서 그들은 평등한 분배가 가장 정의로운 분배라고 여긴다. 자연히, 자본주의를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은 흔히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결정적 결점으로 꼽는다. 그리고 구성원들 사이의 평등을 보다 잘 이룬다는 점을 들어 대안적 체제들을 내세운다.
그러나 평등은 좀처럼 모습을 또렷이 드러내지 않는 개념이다. 그래서 그것은 정의하기가 무척 어렵고 쓰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것들을 뜻한다.
그런 혼란을 줄이려면, 먼저 평등을 기술적으로 쓰는 경우와 당위적으로 쓰는 경우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사람들의 특질이 평등하다는 얘기와 사람들은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구별해야 한다. -53쪽

로버트 노직은 <무정부, 국가, 그리고 이상향>에서 "기회의 평등에 대한 권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존재하는 것은 특정한 사물들에 대한 특정한 사람들의 특정한 권리들 뿐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기회의 평등의 정당성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다.

"모든 사람들이 기회, 생명 등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권리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과 이 권리를 강제하는 것에 대한 주요 반론은 이 '권리들'이 사물들과 물질들과 행동들의 하부구조를 필요로 하며 다른 사람들이 이것들에 대한 권리들과 자격들을 지녔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한 권리의 달성에 다른 사람들의 권리들과 자격들을 지닌 사물들과 행위들의 어떤 이용들이 필요하면, 누구도 그런 권리를 지니지 못한다. 특정한 사물들(저 연필, 그들의 몸 등등)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권리들과 자격들 그리고 그들이 이 권리들과 자격들을 행사하기 위해 하는 선택은 어떤 개인의 외부 환경과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을 확정한다. [...] 특정한 권리들의 이 하부구조와 부딪치는 권리들은 존재할 수 없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어떤 깔끔하게 다듬어진 권리도 이 하부구조와 양립 불가 관계를 피할 수 없으므로, 그런 권리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들에 대한 특정한 권리들이 권리들의 공간을 채워서 일반적 권리들이 어떤 실질적 상태로 존재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노직, 1974) -55-56쪽

반면에, 대안적 체제들에선, 공산주의든 국가사회주의든, 에드워드 윌슨이 "평등의 이념과 야만적 강제의 편리한 동거"라 부른 질서가 탄생했고, 그 질서는 사람들을 잡아먹는 괴물임이 드러났다. 그러한 질서 속에서, 평등의 이념을 실현하려면 강제적 소득 이전이 필요하고, 강제적 소득 이전을 위해선 강력한 국가 권력이 필요하고, 그런 권력은 소수 정예 집단에 집중되고, 그렇게 소수에 집중된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하므로, 결국 권력을 쥔 정예 집단만 잘 살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억압을 함께 맞는다.-66쪽

대안 공동체들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잘하면, 복잡하고 경쟁이 심한 현대 사회에서 지친 사람들이 잠시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피난처 노릇은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런 피난처가 사소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대안이라고까지 하기는 어렵다.
보다 일반적으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대안'이란 말은 너무 가볍게 쓰인다. 현존하는 관행, 질서, 풍습, 규칙, 법, 기구, 공동체 또는 사회에 대한 '대안'을 선뜻 내놓는 사람들은 현존하는 것들이 많은 대안들 가운데서 가장 나은 것들로 판명되어 사회적 진화를 통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게다가 '대안'이라고 제시된 것들은 거의 모두 이미 오래전에 시험되어 버려진 것들이다. -130-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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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06년 6월
구판절판


부자란 정말 어떤 사람들일까? 부자란 바로 부를 늘리는데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더 이상의 부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비로소 부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자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부를 지키고 이전하는데 관심이 있을 뿐 더 이상 부를 늘려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20쪽

재테크란 애써 벌어들인 자산이 시간이 흐르면서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막으려 애쓰는 행위이고, 때로는 자산을 늘리기는커녕 보험처럼 예기치 못한 위험을 방어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며, 그 중에서 일부는 자산을 지키는 것 이상의 수익을 내기도 한다. 재테크란 노동의 가치와 달라서 중간에서 새어나가는 비용들이 자산가치 증가분을 잠식하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금리 이상의 수익을 내기가 어렵다. 몇 년 째 수입 퍼센트의 수익을 내더라도 이후 서너 번만 마이너스 수익률이 되면 다시 본전이 되는 것이 투자다. 재테크에 성공하려면 연체동물처럼 유연하게 수익을 낼 때는 투자하고 상황이 나쁘면 빠질 줄 알아야 한다.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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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5 21: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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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8 14: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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