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한국철학 - 인물들과 함께 떠나는 한국철학 시간여행
황광욱 외 지음 / 동녘 / 2007년 3월
절판


우리나라에 오묘한 진리(현묘지도 玄妙之道)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한다. 그 가르침을 세우게 된 근원은 선사에 자세히 실려있다. 실질적 내용은 곧 유교, 불교, 도교를 포함하고 있고 뭇 생명과 접촉하여 교화한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가 효도하고 밖에 나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고,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며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근본이며, 모든 나쁜 것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한 것을 받드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다.
(최치원 中)-42쪽

최익현은 의복이 중화와 오랑캐의 문화를 구분하고 귀함과 천함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기본 형식이라고 본다. 최익현은 조선의 의복제도가 비록 옛 제도에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지만 중화문물을 상징하는 것이고 동방 풍속의 자랑거리라고 보았다. 그래서 전통식 복제를 회복할 것과 김홍집과 유길준 등 을미개혁의 주도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한다. 개화파가 주장하는 '개화'란 중화의 제도를 오랑캐 제도로 바꾸고, 인류를 짐승으로 타락시키는 행위라고 여긴 것이다.
의복과 두발은 단순히 외양을 꾸민다는 의미가 아니다. 특히 효를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조선사회에서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가장 큰 불효였다. 또, 복식은 신분질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에 신분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은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일이다. 이에 최익현은 전통 의복과 두발을 반드시 보존하려 노력했고, 반대로 개화파는 이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후진성을 탈피하는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최익현 中)-87쪽

초가 하나 타고 있다고 하자. 초가 타는 것은 '고체로서의 기'가 '기체로서의 기'로 변화(운동)하는 과정에서 불꽃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럴 때 기는 있음(有)에서 없음(無)으로 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서경덕의 생각이다.
... 중략 ...
서경덕은 우리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세계와 감각을 넘어선 세계를 구분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인식할 수 있는 세계다. 우리의 감각 능력과 범위에 드어오지 않는 초음파나 수억 광년 떨어져 있는 행성도 모두 이 세계다. 그것을 서경덕은 '후천(後天)'이라고 부른다. 후천은 기의 운동성이 발휘되어 생극을 통해 전개되는 세계다. 그리고 촛불은 마치 눈앞에서 타서 없어지는 것 같지만 실은 '태허'로 돌아가는 것이다. 태허의 세계는 인식을 넘어서 있는 세계며, '선천(先天)'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후천의 기와 선천의 기가 다른 것이 아니다.
(서경덕 中)-138-139쪽

선악의 문제를 개인의 도덕심으로만 다룰 수는 없다. 사회란 개인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는 각 개인의 차원과는 다른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른 운영원리와 조직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개인에 있어서건 사회에 있어서건 선악은 '때(상황)'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초상집에 문상 갔을 때 슬퍼하는 것은 선이지만 친구의 결혼식에 가서 슬퍼하면 악이다. 슬퍼하는 것은 같지만 때에 따라 선악이 갈리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감정이 '때에 맞으면' 선이고 사단이라고 보는 것이 이이의 견해다. 이황이 사단과 칠정을 분명히 구분한 것과 대비된다. 이이는 마음에 사단이라는 줄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사단은 칠정의 감정이 때와 절도에 맞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이 中)-167쪽

정제두는 '마음과 이치는 하나다'라는 주관적인 측면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천(天)을 끌어들여 주관과 객관을 동시에 만족시키려 했다. 그는 '성이 곧 리이다. 리는 하늘이 조리있게 통하는 것이니, 바로 하늘의 다른 이름이며, 사람 마음의 본체가 이것이다.'라고 말하여 마음만이 아니라 성도 리라고 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정제두가 말하는 '성이 곧 리'는 마음, 리, 성이 분리된 '성즉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을 매개로 '마음과 이치의 일원적 관계'를 주장한 것이다. 이는 주희의 '성즉리'와 다르다. 주희는 마음과 성을 구분했다. 정제두에게 있어 성은 사람 마음속에 들어있는, 하늘이며 명덕이다. 그러므로 성은 본래 마음을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 성은 마음 속에 들어있는, 하늘로부터 받은 리이며 도의 핵심이고 구체적으로는 명덕이다. 따라서 성은 마음속에서 선한 부분 곧 진리를 가리킨다. 정제두는 성이 마음의 본체이고 마음이 성의 작용이라고 하여, 마음의 본체인 성 곧 선이 마음의 작용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근거로 삼았다. 따라서 정제두는 주관적인 심체(心體)와 객관적인 성체(性體)를 합일시킴으로써 임정종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논리를 구축했던 것이다.
(정제두 中)-183-184쪽

몇번의 사화를 거치면서 모범을 보여야 할 훈구 지배층이 타락해 정의와 도덕이 문란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두 가지다. 첫째는 '분배의 정의'라는 측면이고, 또 하나는 '사회지도층의 역할'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서로 떨어진 문제라기보다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첫째의 측면과 관련해, '분배'는 결국 의의 실현이고 그것은 가진 자의 책임문제기도 하다. 분배와 정의는 결국 의와 이의 문제다. 의와 이의 관계에 관한 유학의 기본적 관점은 '의주이종'이지만 주종이 서로 상쇄되는 관계가 아니다. 의의 실현은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고, 이의 추구는 의를 근본으로 해야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지함이 의와 이의 관계를 상보로 본 것은 민생과 도덕 두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겨 한 것이다. 의만 강조하면 민생문제를 가볍게 보게 될 것이고, 이에 치중하면 도덕의 타락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지함의 의이상보론(義利相補論)은 지금 사회에서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이지함의 경제관이 뛰어난 것은 산업진흥책을 제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를 추구하면서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 있다는 문제까지 함께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지함 中)-234-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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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 버클리 :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지식인마을 2
최훈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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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까지 아주 확실하다고 받아들였던 것들은 감각으로부터 또는 감각을 통해서 얻은 것들이다. 그런데 나는 감각이 때때로 우리를 속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를 한번이라도 속인 것은 완전히 믿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데카르트 <성찰> 中)-60쪽

"이런 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깨어 있는 것과 꿈을 꾸고 있는 것을 구별해줄 수 있는 어떤 징표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이런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고, 그 놀라움이 너무커서 내가 지금 여기 깨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정도다."
(데카르트, <성찰> 中)-62쪽

20세기 초반에 버클리와 흄의 철학을 이어간 철학자들을 현상론자라고 한다. 감각 경험을 현상이라고 하고 우리와 독립적인 대상을 본질이라고 할 때, 이들은 확실한 지식은 현상에 대한 지식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물리적 대상이나 과학적 대상에 대한 지식은 현상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정의된다. 밀과 에어가 대표적인 현상론자다.
버클리도 흄도 현상론자도 상식의 견해와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의 임무가 상식을 보존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과학 이론이 상식과 어긋난다고 해서 잘못된 이론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철학 이론의 장점과 결점도 상식과 부합하느냐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다른 확립된 이론과 충돌하지 않는가, 충돌한다면 더 그럴듯하게 설명해낼 수 있는가, 그 이론 내부에 모순은 없는가 등에 따라 판단해야 할 것이다. -120-121쪽

흄은 인간 이성의 모든 대상이 두 종류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관념들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의 내용이다. 관념들의 관계는 순전히 선험적인 지식, 곧 감각에 기대지 않는 지식을 가리킨다. 이런 종류의 지식으로는 수학과 논리학의 진리들이 있다. 수학과 논리학의 진리들은 세계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수, 도형, 식, 사고들의 관계에 대한 주장일 뿐이다. 반면에 사실의 내용은 관찰 가능한 세계를 직접 다루며 감각에 의해서 알려진다. 대부분의 상식과 과학의 주장들이 여기에 속한다.
... 중략 ...
흄은 세계에 대한 현재의 우리 경험을 과거 또는 미래의 가능한 경험과 묶어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 바로 원인과 결과, 곧 인과원리라고 생각한다.
... 중략 ...
흄은 경험론의 원칙에 충실하다면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우리가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사건 다음에 또 하나의 사건이 뒤따라온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의 결과, 두 사건이 인과적 관계에 있다고 우리 머릿속으로 생각할 뿐이다. 흄은 그런 생각이 가능한 것은 순전히 습관 때문이라고 말한다. 두 사건이 항상 함께 일어나는 것을 보고, 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다른 사건이 따라 일어날 것이라고 우리는 예측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두 사건 사이에 필연적인 인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149-150쪽

여기 손이 있다는 전제는 증명이 필요 없는 분명한 것이라는 생각은 무어의 생각일 뿐이다. 그 전제 자체가 분명한지 그렇지 않은지 따져보자는 것이 회의론의 의도인데 아무 근거 없이 자신의 전제가 더 분명하다고 말하는 것은 독단적인 태도다. 아닌 게 아니라 회의론자들은 외부 세계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을 독단론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어의 회의론 반박 논증 中)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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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0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상학은 일종의 인식론이니 갑론을박의 좋은 소재가 되곤 합니다..
사르트르의'존재와 무'를 읽으며 후설의 현상학을 처음 접했는데
저의 이해능력 밖에 있더군요. 저는 얼른 포기했지요. 하하
사실은 현상학 입문서를 몇권 억지로 읽었는데도..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답니다. 하하


마늘빵 2007-05-01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상학과 해석학에 관심 많아요. 아직 저도 아는 바는 없습니다. 학부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이기 때문에. 인식론의 기본만 대충 훑었지요. 일단 지금 하고 있는 공부를 좀 해놓고 봐야겠어요.
 
아테네인 스파르타인 살림지식총서 173
윤진 지음 / 살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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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플로타르코스에 따르면 스파르타 여성들은 남자들과 자유롭게 어울리고 운동을 함께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뤼쿠르고스가 젊은 여성들이 옷을 벗고 운동하고, 행진하도록 쿠르고스가 젊은 여성들이 옷을 벗고 운동하고, 행진하도록 했는데, 그는 이에 대해 "지나친 소심함이나 밖으로 나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 여성답다고 여겨지는 모든 태도를 버리도록 하기 위함"이라 말했다. 이 놀라운 관습을 변명하기 위해 그는 곧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젊은 처녀들이 벌거 벗었어나 부끄러움이란 없었고, 정숙했으며 음탕함은 배제되었다. 이는 젊은 여성들에게 소박함과 건강에 대한 관심을 가르치고, 고상한 정신을 지니도록 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여성들도 고귀한 행동과 영광을 추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처녀들이 운동과 행진에서 벌거벗고 다녔다는 것이 사실인지는 조금 의심스럽다. -38-39쪽

이를 위해 훈련은 매우 이른 나이, 7세부터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6년간은 파이디온이라는 등급에 속해 있으며, 기초적인 교육을 받게 된다. 그리고 13세기 되었을 때,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게 된다. 이 시기부터 6년간은 아마도 헤본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머리는 짧게 잘라야 했고, 신발도 신지 못했으며, 단 한 겹의 옷만으로 사철을 견뎌내야만 했다. 잠자리는 에우로타스 강변에서 손으로 직접 뜯은 골풀로 마련해야 했고, 그리 많지 않은 식사량을 보충하기 위해 때로는 먹을 것을 훔쳐야만 했다. 그러다가 붙잡히면 심하게 얻어맞는 것은 예사였다. 훔치는 것이 나쁘다는 도덕적인 면에서의 처벌이 아니라, 단지 붙잡혔다는 이유에서였다. 19세가 되면 에이렌 등급이 되었다. 이때부터는 전투에 나가는 것이 가능했고, 소년들로 이루어진 소대의 감독자, 즉 소대장이 되었다. 24세가 되어서야 정식 전사가 되며, 30세가 넘으면 시민권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 나이가 되면 병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게 된다. (스파르타)-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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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의 역습
모집 라티프 지음, 이혜경 옮김 / 현암사 / 2005년 4월
품절


강우량이 증가한다고 해서 전 세계적으로 골고루 증가하지는 않는다. 원래 비가 많이 오던 지역에서는 더욱 많은 강우가 집중되고, 비가 적게 오던 지역에서는 강우가 더욱 줄어들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유럽에서 확인되고 있다. 북유럽의 연간 강우량은 늘어난 반면 지중해 연안에서는 줄어들고, 남유럽에서는 식수 확보마저 어려운 형편이다. 기후에는 부당한 측면이 있다. 차이가 나는 부분을 고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심화시키니 말이다. 메마른 사하라사막은 더욱 커지는 반면, 퍼붓는 빗물에 잠길 지경에까지 이르는 지역이 생길 것이다. 인도에는 태풍이 더 심해질 위험이 예상된다. -36쪽

엘니뇨는 열대 태평양의 일부 해수면 온도가 주변보다 높아지는 현상으로 평균 4년(2-7년의 준주기)마다 발생한다. '엘니뇨'는 스페인어로 '아기예수'라는 뜻으로, 매년 크리스마스 무렵에 발생하며 해수면온도가 상승하면서 물고기 떼가 사라져 어획기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페루 연안의 어부에게는 지난 수백 년 동안 계절을 알리는 신호로 각인되었다. 그런데 원래는 수개월 정도 지속되던 해수의 온난화가 1년이나 지속되는 등 수년 간격으로 심해지자 물고기들이 평년과는 달리 연초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특별히 오래 지속되는 온난화만 '엘니뇨'라고 부르고 엘니뇨현상은 수년을 간격으로 그러나 비정기적으로 반복된다. 호우 등의 극단적이고 비정상적인 기상상태를 몰고 오는 엘니뇨 현상을, 페루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아기예수'가 아니라 '악마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엘니뇨는 비가 잘 오지 않는 남부 캘리포니아에 비를 내린다. 크게 히트한 "남부 캘리포니아에는 비가 오지 않아요"라는 노래도 있지 않은가. 엘니뇨의 영향으로 겨울마다 정기적으로 큰 비가 내리고 이에 대한 예측도 가능해져서, 기와장이들은 호우가 닥치기 전에 지붕을 수리하라는 신문광고를 내기도 한다. 미국보험협회에서 만든 엘니뇨 보험 상품도 있다. -70쪽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세계기록은 미국이 가지고 있는데, 전 세계 배출량의 약 1/4을 차지한다. 독일은 전체 배출량에 있어서 선도적인 위치는 아니지만 인구 1인당 배출량은 상당히 많은 편이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인 1명이 배출하는 연간 이산화탄소의 양은 20톤 정도이고 이에 비해 독일인은 10톤 정도라고 한다. 한국은 2002년에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했고, 인구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일본, 영국, 프랑스 등을 이미 앞지른 상황이다.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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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30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니뇨....'아기예수'에서 '악마의 자식'이라니....
그 지역 사람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저리도 극단적인 표현을 썼어야 했을까.
인간이란 참...
그나저나 걱정입니다. 뭐, 이것도 자연의 섭리이겠지만.

마늘빵 2007-04-30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노한게지요. 물고기들이 돌아오지 않고 밥벌이가 힘겨워지니 원망스러웠을겁니다. 극과 극으로 변신을 했네요. 자연이 이렇게 무서워요.

암리타 2007-04-30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다른 재앙이 기후의 변화때문에 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네요 ㅜㅜ

마늘빵 2007-04-30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요즘 신문에서 많이 떠들더라고요. 그만큼 또 위험하다는 뜻이겠죠. 요즘 이 문제에 관심 많습니다.
 
한국 철학 스케치 2 - 이야기로 만나는 교양의 세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 풀빛 / 2007년 2월
절판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실학사상이다. 사람은 발을 땅에 딛고 걸어 다니는 동물이다. 동물에게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급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을 때 예의도 차릴 수 있고 자존심도 지킬 수 있다. 우리 속담에 '사흘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넘는다'고 했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가르치려면 우선 굶주리지 않도록 국가가 경제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하는데 성리학은 이를 등한시했다. 실학은 당시 성리학자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논쟁만 일삼고 백성들이 겪고 있는 여러 어려움에 대해서 좋은 해결 방법을 내놓지 못한 것을 비판하면서 일어난 새로운 사상이다. -13쪽

"부자의 땅은 끝없어 경계가 서로 잇닿을 지경이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하나 꽂을 만한 땅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하게되어 마침내 부자는 천하의 토지를 모두 갖게 되고 백성들은 굶주린 식구를 이끌고 떠돌아다니다가 부잣집 머슴살이로 들어간다." (유형원)-19쪽

이익은 원래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양반들은 놀고먹으며 사치스럽게 생활하는 것을 고치고 능력 있는 양반이 나서서 나랏일을 맡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당파에 따라 일을 맡기지 말고 능력에 따라 일을 맡겨야만 국가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문제는 벼슬도 하지 않으면서 놀고 먹는 양반이었다. 그는 "벼슬이나 돈은 몸에 지니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임금으로부터 농민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없기는 마찬가지다."라고 하면서 일을 하지 않는 양반은 노비보다 못하다고 못 박았다. 양반이라고 거드름을 피우며 특권 의시게 사로잡혀 있을 것이 아니라 생산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익은 양반의 신분적 특권 의식을 거부하고 조선 후기 사회가 안고 있던 사회 구조적인 핵심 문제를 건드렸다. -27쪽

정약용은 인간에게는 두 가지 기호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마음에 관계된 것으로 착한 것을 즐거워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며, 착한 일을 하기를 좋아하고 나쁜 일을 한 것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이것을 인간만이 가지는 도심이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몸에 관계된 것이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빛깔을 좋아하고 맛있는 음식을 즐겨 하며, 따뜻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을 인심이라고 하며 인심은 사람과 동물이 모두 가지고 있다.
즉, 정약용의 생각을 정리하면 인간은 도심과 인심을 모두 가지고 있고 도덕적인 마음만이 아니라 인간의 몸과 감정 또한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옳은 것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도 인간에게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36쪽

정약용은 "인간은 도심과 인심을 다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는 착한 것과 나쁜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좋아하고 하고 싶어하는 일이 착한 일인지 구별할 수 있다." 라?ㅏ면서 인간이 선악을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곧 아무리 악한 짓을 일삼는 사람일지라도 선한 행위를 일깨워 줄 때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누구라도 도둑질을 자랑스레 드러내 놓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누구나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경향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정약용은 "선을 행하는 것은 자신의 공이고 악을 행하는 것은 자신의 죄다"라는 말과 함께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은 얼마든지 인정하지만, 도둑질 같은 악한 행동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37-38쪽

사람이 사물에게 이름을 만들어 붙인 것은 사물을 가리켜 구별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름 때문에 사물의 본래 모습이나 성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이 젖고 불이 타는 것은 물의 성질, 불의 성질에 있는 것이지 물과 불이라는 이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이름을 붙일 때 불을 물이라고 이름 지었다면 우리는 타는 것을 물이라고 부를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이나 사물을 경험할 때 이름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본래 모습이나 성질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사물의 이름만으로는 그 사물의 본래 모습이나 성질을 분명히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최한기는 이름이나 글자만 가지고 하는 공부는 사람의 눈과 귀를 가리는 것이요, 사람의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공부를 오래 하면 할수록 잘못된 앎이 쌓인다고 경고했다. 옛날 학문은 실제 사물에 대해 연구할 때 직접 실험하고 관찰하는 것보단느 글을 가지고 따졌기 때문에 잘못된 공부 방법이라고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하늘에 대해 연구하려면 망원경을 갖다 놓고 매일 변화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최한기)-67-68쪽

사상은 단순한 생각의 나열이 아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 시대의 사회 현실을 정확하게 알고 그에 맞는 해결 방법으 ㄹ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사상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아서 생명력을 잃은 나무는 큰 의미가 없다.
실학사상은 성리학이 현실 문제와 동떨어진 논쟁만 일삼는 데 반대했다. 그리고 시급한 사회 경제 문제에 대해 효과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그러한 해결책의 밑바탕이 되는 새로운 사상을 전개했다.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했고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성리학적인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물성 동이 논쟁과 예학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이 조선 후기 사회가 부딪친 여러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미흡했기 때문에 시대를 이끌어 나갈 수가 없었다. 살아있는 철학은 바로 사회를 이끌어 가는 깨어 있는 시대정신인 것이다. -72-73쪽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분명 유교적인 하늘님의 의미와 차이가 난다. 유교에서의 하늘님은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오히려 도덕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중용>이란 책머리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란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하늘이 명령한 것이 본성이라는 뜻이다. 하늘이 인간에게 명령한 본성은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도덕성이다. 그러니까 하늘은 인간이 마땅히 도덕적 삶을 살아야만 하는 당위성을 말하는 개념이다. 인간이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학에서 하늘과 인간의 관계는 기독교처럼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니다. 또한 유교에서는 천주교나 기독교처럼 사람이 죽고 나면 새로운 세계로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유교는 철저히 현실 세계 중심의 사상이다. -152쪽

"진실로 한 나라의 부강을 이루어 모든 나라들을 대항하려면 임금의 권리를 다소 약화시키고, 인민이 마땅한 자유를 얻어 각기 나라에 이바지해서 점차 문명화해야 한다." (박영효)-191쪽

동도란 유학의 인의예지신과 효제충신 등 우수한 정신문명을 가리키며, 서기란 서양의 앞선 물질문명과 과학 기술을 말한다. 즉 동도서기론이란 우리의 장점은 지키되 서양의 앞선 물질문명을 수용하자는 논리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서기를 수용해서 새로운 세계의 흐름에 대처하고 경제 부강을 이룩하고자 했다.
결국 개화의 대상은 정신이 아니고 기술과 과학이므로 서양에서 배울 것은 바로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몸짓은 마음이 드러난 것이듯 서양의 과학 기술은 중세와 다른 근대적 사고와 발맞추어 발전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의 시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과연 유학의 윤리 의식을 지키면서 서양의 물질문명만을 수용하는 식의 '따로 또 같이'가 가능할까?
과거 우리 조상들은 식사를 할 때 음식을 차려 먹는 밥상을 사용했는데 집안의 어른이나 가장은 별도의 밥상을 받았다. 그래서 집집마다 가장 어른이신 할아버지가 잡수시는 밥상이 필요하고, 다음에 아버지가 잡수시는 밥상이 필요하고, 나머지 식구들은 큰 밥상에 여러 밥그릇을 올려놓고 먹었다. 경우에 따라 여자들은 밥상에서 못 먹고 부엌에서 나중에 따로 먹기도 했다. 그런데 요즈음 각 가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식탁을 살펴보자. 할아버지 식탁, 아버지 식탁 등으로 따로 나누어져 있는가? 보통은 가족 모두 같이 식사를 하게 마련이다. 이 식탁이란 물건은 서양에서 온 것이다. 여기에는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이 누구나 같은 자리에서 평등하게 먹는다는 정신이 깔려있다. 물건 따로, 정신 따로는 없다. 곧 물건에 정신이 따라간다는 것이다. -203-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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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26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의 경영이념으로서의 유학의 생명은 "대한제국'의 처참한 몰락과
그 운명을 같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공맹과 주희의 극단적으로 충실한 제자였던
'조선'의 성리학이 현실을 해석하고 민중의 삶을 평안하게 하려는
'유학 본연의 권능'을 잃었을 때 유학의 운명은 이미 그 역할을 다한 셈이지요.
'실학'은 그러한 대세를 거슬러 볼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지만 역부족이었지요.

그렇다면 현대의 유학은? 저와같은 유학의 사도는?
현대의 유학은 철학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윤리학'입니다.
철학으로서의 유학은 아주 또는 꽤나 '매력적'이랍니다. 아프락사스님.
하하


마늘빵 2007-04-26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철학'에 대해서는 사실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 뭐 다른 철학분야도 마찬가지만 한국철학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래서 머리 속에 한국철학을 그리기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이 책을 접했습니다. 매우 쉽게 한 눈에 들어오더군요.

한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유학이 본연의 권능을 잃었을 때 운명을 다 한게지요. 오늘날 한국의 철학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식인 이라 칭할 이들은 꽤 있지만, 한국의 철학자라 칭할 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중국, 서양의 철학을 세례받은 이들이 각자의 해석으로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바라보는 의견을 내놓고 있지만, 독창적인 한국의 철학이라 할 만한 꺼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시야가 좁은 탓에 못 보는 것일 수도 있구요.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보일지도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