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철학 스케치 2 - 이야기로 만나는 교양의 세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 풀빛 / 2007년 2월
절판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실학사상이다. 사람은 발을 땅에 딛고 걸어 다니는 동물이다. 동물에게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급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을 때 예의도 차릴 수 있고 자존심도 지킬 수 있다. 우리 속담에 '사흘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넘는다'고 했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가르치려면 우선 굶주리지 않도록 국가가 경제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하는데 성리학은 이를 등한시했다. 실학은 당시 성리학자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논쟁만 일삼고 백성들이 겪고 있는 여러 어려움에 대해서 좋은 해결 방법을 내놓지 못한 것을 비판하면서 일어난 새로운 사상이다. -13쪽

"부자의 땅은 끝없어 경계가 서로 잇닿을 지경이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하나 꽂을 만한 땅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하게되어 마침내 부자는 천하의 토지를 모두 갖게 되고 백성들은 굶주린 식구를 이끌고 떠돌아다니다가 부잣집 머슴살이로 들어간다." (유형원)-19쪽

이익은 원래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양반들은 놀고먹으며 사치스럽게 생활하는 것을 고치고 능력 있는 양반이 나서서 나랏일을 맡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당파에 따라 일을 맡기지 말고 능력에 따라 일을 맡겨야만 국가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문제는 벼슬도 하지 않으면서 놀고 먹는 양반이었다. 그는 "벼슬이나 돈은 몸에 지니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임금으로부터 농민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없기는 마찬가지다."라고 하면서 일을 하지 않는 양반은 노비보다 못하다고 못 박았다. 양반이라고 거드름을 피우며 특권 의시게 사로잡혀 있을 것이 아니라 생산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익은 양반의 신분적 특권 의식을 거부하고 조선 후기 사회가 안고 있던 사회 구조적인 핵심 문제를 건드렸다. -27쪽

정약용은 인간에게는 두 가지 기호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마음에 관계된 것으로 착한 것을 즐거워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며, 착한 일을 하기를 좋아하고 나쁜 일을 한 것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이것을 인간만이 가지는 도심이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몸에 관계된 것이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빛깔을 좋아하고 맛있는 음식을 즐겨 하며, 따뜻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을 인심이라고 하며 인심은 사람과 동물이 모두 가지고 있다.
즉, 정약용의 생각을 정리하면 인간은 도심과 인심을 모두 가지고 있고 도덕적인 마음만이 아니라 인간의 몸과 감정 또한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옳은 것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도 인간에게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36쪽

정약용은 "인간은 도심과 인심을 다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는 착한 것과 나쁜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좋아하고 하고 싶어하는 일이 착한 일인지 구별할 수 있다." 라?ㅏ면서 인간이 선악을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곧 아무리 악한 짓을 일삼는 사람일지라도 선한 행위를 일깨워 줄 때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누구라도 도둑질을 자랑스레 드러내 놓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누구나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경향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정약용은 "선을 행하는 것은 자신의 공이고 악을 행하는 것은 자신의 죄다"라는 말과 함께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은 얼마든지 인정하지만, 도둑질 같은 악한 행동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37-38쪽

사람이 사물에게 이름을 만들어 붙인 것은 사물을 가리켜 구별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름 때문에 사물의 본래 모습이나 성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이 젖고 불이 타는 것은 물의 성질, 불의 성질에 있는 것이지 물과 불이라는 이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이름을 붙일 때 불을 물이라고 이름 지었다면 우리는 타는 것을 물이라고 부를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이나 사물을 경험할 때 이름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본래 모습이나 성질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사물의 이름만으로는 그 사물의 본래 모습이나 성질을 분명히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최한기는 이름이나 글자만 가지고 하는 공부는 사람의 눈과 귀를 가리는 것이요, 사람의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공부를 오래 하면 할수록 잘못된 앎이 쌓인다고 경고했다. 옛날 학문은 실제 사물에 대해 연구할 때 직접 실험하고 관찰하는 것보단느 글을 가지고 따졌기 때문에 잘못된 공부 방법이라고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하늘에 대해 연구하려면 망원경을 갖다 놓고 매일 변화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최한기)-67-68쪽

사상은 단순한 생각의 나열이 아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 시대의 사회 현실을 정확하게 알고 그에 맞는 해결 방법으 ㄹ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사상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아서 생명력을 잃은 나무는 큰 의미가 없다.
실학사상은 성리학이 현실 문제와 동떨어진 논쟁만 일삼는 데 반대했다. 그리고 시급한 사회 경제 문제에 대해 효과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그러한 해결책의 밑바탕이 되는 새로운 사상을 전개했다.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했고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성리학적인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물성 동이 논쟁과 예학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이 조선 후기 사회가 부딪친 여러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미흡했기 때문에 시대를 이끌어 나갈 수가 없었다. 살아있는 철학은 바로 사회를 이끌어 가는 깨어 있는 시대정신인 것이다. -72-73쪽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분명 유교적인 하늘님의 의미와 차이가 난다. 유교에서의 하늘님은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오히려 도덕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중용>이란 책머리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란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하늘이 명령한 것이 본성이라는 뜻이다. 하늘이 인간에게 명령한 본성은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도덕성이다. 그러니까 하늘은 인간이 마땅히 도덕적 삶을 살아야만 하는 당위성을 말하는 개념이다. 인간이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학에서 하늘과 인간의 관계는 기독교처럼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니다. 또한 유교에서는 천주교나 기독교처럼 사람이 죽고 나면 새로운 세계로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유교는 철저히 현실 세계 중심의 사상이다. -152쪽

"진실로 한 나라의 부강을 이루어 모든 나라들을 대항하려면 임금의 권리를 다소 약화시키고, 인민이 마땅한 자유를 얻어 각기 나라에 이바지해서 점차 문명화해야 한다." (박영효)-191쪽

동도란 유학의 인의예지신과 효제충신 등 우수한 정신문명을 가리키며, 서기란 서양의 앞선 물질문명과 과학 기술을 말한다. 즉 동도서기론이란 우리의 장점은 지키되 서양의 앞선 물질문명을 수용하자는 논리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서기를 수용해서 새로운 세계의 흐름에 대처하고 경제 부강을 이룩하고자 했다.
결국 개화의 대상은 정신이 아니고 기술과 과학이므로 서양에서 배울 것은 바로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몸짓은 마음이 드러난 것이듯 서양의 과학 기술은 중세와 다른 근대적 사고와 발맞추어 발전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의 시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과연 유학의 윤리 의식을 지키면서 서양의 물질문명만을 수용하는 식의 '따로 또 같이'가 가능할까?
과거 우리 조상들은 식사를 할 때 음식을 차려 먹는 밥상을 사용했는데 집안의 어른이나 가장은 별도의 밥상을 받았다. 그래서 집집마다 가장 어른이신 할아버지가 잡수시는 밥상이 필요하고, 다음에 아버지가 잡수시는 밥상이 필요하고, 나머지 식구들은 큰 밥상에 여러 밥그릇을 올려놓고 먹었다. 경우에 따라 여자들은 밥상에서 못 먹고 부엌에서 나중에 따로 먹기도 했다. 그런데 요즈음 각 가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식탁을 살펴보자. 할아버지 식탁, 아버지 식탁 등으로 따로 나누어져 있는가? 보통은 가족 모두 같이 식사를 하게 마련이다. 이 식탁이란 물건은 서양에서 온 것이다. 여기에는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이 누구나 같은 자리에서 평등하게 먹는다는 정신이 깔려있다. 물건 따로, 정신 따로는 없다. 곧 물건에 정신이 따라간다는 것이다. -203-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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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26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의 경영이념으로서의 유학의 생명은 "대한제국'의 처참한 몰락과
그 운명을 같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공맹과 주희의 극단적으로 충실한 제자였던
'조선'의 성리학이 현실을 해석하고 민중의 삶을 평안하게 하려는
'유학 본연의 권능'을 잃었을 때 유학의 운명은 이미 그 역할을 다한 셈이지요.
'실학'은 그러한 대세를 거슬러 볼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지만 역부족이었지요.

그렇다면 현대의 유학은? 저와같은 유학의 사도는?
현대의 유학은 철학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윤리학'입니다.
철학으로서의 유학은 아주 또는 꽤나 '매력적'이랍니다. 아프락사스님.
하하


마늘빵 2007-04-26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철학'에 대해서는 사실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 뭐 다른 철학분야도 마찬가지만 한국철학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래서 머리 속에 한국철학을 그리기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이 책을 접했습니다. 매우 쉽게 한 눈에 들어오더군요.

한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유학이 본연의 권능을 잃었을 때 운명을 다 한게지요. 오늘날 한국의 철학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식인 이라 칭할 이들은 꽤 있지만, 한국의 철학자라 칭할 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중국, 서양의 철학을 세례받은 이들이 각자의 해석으로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바라보는 의견을 내놓고 있지만, 독창적인 한국의 철학이라 할 만한 꺼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시야가 좁은 탓에 못 보는 것일 수도 있구요.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보일지도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