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 지적 열정을 추구한 나의 삶, 나의 길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5년 1월
구판절판


인생에는 여러 가지 살아가는 길이 있고 인생에는 많은 종류의 할 일과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인생의 보배를 모두 다 동시에 소유할 순 없다. 우리는 모든 만물과 똑같이 어떤 우연의 소산인 것으로밖엔 생각할 수 없다. 일단 생명을 갖게 된 동물로 나는 생명을 지속하려는 본능에 의해 살고, 역시 우연의 결과로서 의식을 갖게 된 인간으로서 나는 내 삶의 모든 행위에 의미를 찾고 가치를 부여하려는 의욕 속에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20쪽

모든 학문, 모든 사유는 철학으로 통한다는 말에는 깊은 일리가 있다. 모든 학문은 반드시 어떤 원칙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 모든 사유, 즉 이치도 반드시 어떤 전제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그 전제의 옳고 그릇됨이 따져지고 설명되기 전에, 이미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전제를 가짐으로써 비로소 그 사실이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은 다른 학문이 받아들인 전제를, 즉 원칙 자체를 비판하고 설명하려 한다. ... 다시 말하자면 철학은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고 있는 원칙 자체를 명석하게 이해하고 설명하고 비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은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서 갈 수 있는 한까지의 철저한 이해르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학문이고 깊이 추구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철학적인 사색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26쪽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항상 스스로를 새롭게 변화시킴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다. 어머니의 젖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도 젖 대신에 밥을 먹어야 하며,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도 어른으로 변신할 수 밖에 없다. 늙고 싶지 않아도 늙을 수 밖에 없고, 죽고 싶지 않더라도 때가 되면 죽어야 한다. 삶은 부단한 변화의 과정, 즉 길 위에 존재한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정해진 길을 따라 변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나들이길에 나선 순례자이며, 그의 삶은 곧 끝없는 순례의 과정이다. -62쪽

인간은 자연의 물리적 자연 법칙에 지배되는 동시에 규약적 규범에 묶여있다. 규약은 언어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인간 존재는 필연적으로 언어적이다. 언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의미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에 지나지 않으며, 거꾸로 인간이 의미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인간의 삶의 양식은 텍스트 쓰기이며 그러한 인간의 삶은 텍스트로 볼 수 밖에 없다.-70쪽

허무주의는 모든 존재 특히 인간 존재와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부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반허무주의적 주장의 밑바닥에 허무주의가 숨겨져 있는 것을 지적해 낼 수 있다. 인간과 인생에 대한 사물적 관점의 테두리 안에서 허무주의를 부정하는 태도는 이성적 사유가 도달한 결론이 아니라 본능적 저항에 지나지 않는다. 허무주의를 부정하게 되는 이유는 허무주의와 삶에 대한 본능이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삶에 대한 동물적 욕망보다 더 강하고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든 현상을 사실적 관점에서 대하는 한 철학적으로 허무주의는 역시 옳다. 그것은 전통적 기독교적 교리와 상충됨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이에게 지동설은 역시 옳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72-73쪽

인간은 언어적인 존재로 그냥 있지 않다. 그가 접하는 모든 것을 언어화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의식 대상의 관계는 언제나 의미적이며 의미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언어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인식론의 혁명이 보여주었듯이 인과적이 아니라 해석적이며, 자연중심적이 아니라 인간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미다스 왕의 손에 비유된다. 미다스 왕의 손에 닿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바뀌듯이 인간의 의식이 닿는 모든 대상, 행위,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의미로 변하게 마련이다. 문화를 인간에 의한 자연의 인간화 즉 의미화로 정의할 수 있고 또한 인간의 의식이 닿는 모든 것을 의미화한다면 자연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문화적 즉 의미적 존재로 이미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언어적 존재로서 인간이 모든 것을 문화화 즉 의미화할 수 밖에 없고, 언어를 떠난 '의미'가 있을 수 없고, 언어적 작업이 글쓰기이고 그렇게 써놓은 글을 텍스트라 한다면, 인간의 삶은 텍스트 쓰기에 지나지 않고 바로 그러한 점에서 인간의 삶의 과정과 그의 일생은 필연적으로 '의미'를 갖게 마련이다. -78쪽

모든 인간의 삶의 과정을 텍스트 쓰기, 모든 인간의 일생이 각기 자기가 써서 남긴 텍스트라는 말은 모든 인간이 똑같은 글쓰기를 하며, 똑같은 내용의 텍스트를 쓴단든 말이 결코 아니다. 인간의 존재 양식은 플라톤의 경우처럼 '이데아'라는 보편적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p,q,s,t' 등의 이름이 붙은 개별적 실존자로만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인간과 완전히 동일할 수 없다. 모든 '나'는 각자 다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다 같이 텍스트를 쓰고 모든 텍스트가 다같이 의미를 갖지만 그들의 텍스트와 글쓰기의 스타일은 각자 필연적으로 다르고 따라서 그 텍스트의 의미도 필연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마치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작가마다 다르고, 한 작가의 개별적 작품들이 저마다 다른 것과 같다. -78-79쪽

한편으로 의식, 즉 인지되지 않은 존재는 의미가 있을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 언어 이전의 다양한 의식 즉 지각, 경험, 세계, 존재 그리고 의지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세계와 독립해 존재하며 세계를 표상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 자체가 이미 언어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언어에 의해 구성되기 전의 존재, 세계 그리고 경험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이른바 언어 이전의 '객관적' 존재들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말할 수 없는 혼돈상태로 '무의미한' 채로 어둠 속에 남아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어둠은 언어의 빛으로 밝아지고 비로소 '의미의 질서'를 갖고 인간 앞에 '나타나게'된다. -89쪽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우리의 경험이나 생각을 기록해 두거나 타인에게 더욱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서다. 경험이나 생각이 비가시적 의식의 활동인데 반해서 그것을 기록하거나 전달하는 언어는 가시적인 객관적 현상이다. 경험/사고는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언어에 선행하며 그것들은 서로 분리할 수 있는 독립된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험/사고와 언어는 완전히 독립할 수 없고 경험/사고는 그것이 곧 언어적 활동이며, 글을 쓰는 이유는 기존의 경험/사고의 표현이나 전달에만 있지 않다. 글로 써지기 전까지의 경험/사고가 의식 활동이니만큼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유동적이며 불확실하며 막연한 채 남아 있으며 오래 지속될 수 없다. ... 글쓰기가 가장 중요한 근본적 이유는 좀 더 잘 생각하고 세계와 인생을 좀더 잘 인식해보자는 데 있다. 글을 쓰면서 우리는 더 정확히 생각하고 더 세계를 잘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글쓰기에 대한 욕망의 근원에는 진리에 대한 깊은 숨은 욕망이 깔려 있다. 문학이나 철학은 다른 어느 지적 활동보다 각별한 언어활동이니만큼 작가나 철학자는 일반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지적 활동을 직업으로 삼는 다른 지식인/학자보다도 진리를 추구하고 세계를 투명하게 보고자 하는 욕망이 많은 종족에 속한다. 나는왜 시를 쓰려 했고 문학을 하려고 했으며 철학을 하고 있는가? 나는 왜 글쓰기를 하는가? 나 자신과 세계를 더욱 투명하게 파악하려 하기 때문이다. -91-92쪽

내가 진심으로 저 깊은 속에서부터 갈구하고 있었던 것은 앎 자체, 앎의 투명성 자체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영원히 해답이 없는 삶의, 그리고 모든 존재의 궁극적 으미에 목말라 있었다. 나의 근본적 문제는 지적인 것을 넘어서 아니 그 이전에 종교적인 것이었다. 물론 지적인 문제와 실존적 문제는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깊이 따지고 보면 구체적 한 인간에게 있어서 지적 가치와 실존적 의미는 서로 뗄 수 없는 역동적 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으로 지적으로 투명해지지 않는 실존적 가치는 착각이거나 맹목적일 수 있고, 실존적으로 그 가치가 체험되지 않은 지적 투명성은 공허함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146쪽

진리가 재현이 아니라 구성이라는 사실과 철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발견이 아니라 세계의 관녀적 건축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철학으로서 이에 대한 학문의 가치의 궁극적 평가는 그것이 가져오는 삶에 있어서의 실천적 가치에 비추어서만 도구적 관점에서만 평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세계에 대한 탈. 도구적이고 즉 순수한 지적 탐구가 선행되지 않는 소망과 이상적 꿈 역시도 충족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적 탐구로서의 철학의 원초적인 동시에 궁극적 의미와 가치는 그것의 사념성이 아니라 실천성에 있다.

-190쪽

꽃이 진다고 해서 그 꽃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조만간 죽어 흙이 되고 벌레의 밥이 되게 마련이라고 해도 삶 일반, 특히 인간의 삶은 아름답고 귀하다. 아니 우리가 머지 않아 사라지기 때문에 그만큼 더 우리들의 삶은 보람을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삶의 존엄성, 절대적 가치를 의식하고 삶에 대한 경외, 삶의 성스러움을 새삼 깨달을 필요가 있다. 시들시들한 꽃보다 생생한 꽃이 더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로 적극적 삶, 인텐스한 삶은 그만큼 더 귀중하다. -222쪽

자기기만의 현상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자기기만이라는 현상은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남의 가치관, 다른 사회의 이념은 나의 이른바 객관적 관점에서 비판될 수 있고 개혁될 수 있다. 하나의 주관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나의 객관성이라는 명목하에 일률적으로 남의 가치관이나 다른 사회를 비판하려 한다면 그것은 자칫하면 남의 자율성, 다른 사람들의 인격을 무시하는 독단주의적 독선의 길로 뻗어 가기 쉽다. 우리들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에 대해서, 다른 사회의 이념에 대해서 항상 반성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비판되고 개혁되어야 한다.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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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7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ood Book!

 
낙원을 팝니다 - 지구의 미래를 경험한 작은 섬 나우루
칼 N. 맥대니얼 외 지음, 이섬민 옮김 / 여름언덕 / 2006년 9월
품절


나우루인들은 섬의 생물 다양성 상실이 자신들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아직 제대로 체험하지 못했지만, 부의 원천인 인광석은 곧 고갈된다. 고갈은 인광석 발견 당시부터 분명히 예상된 것이기는 하지만, 인광석 자체는 나우루에서 인간이 생존하는 문제와 직접 관련성을 가진 적이 없었다. 이와 달리 물은 중요한 문제다. 가까운 과거에 우물, 연못, 비 등으로 얻어지는 나우루의 담수는 가뭄이 들 때마다 공급에 제약이 따랐다. 지금은 인구가 열 배로 증가했기 때문에 물이 항상 부족하다. 담수화 시설로 부족분을 메우고는 있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인광석 운반선을 이용해 물을 수입했다. 인광석 고갈이 경제 상황 변화를 초래할 것이 예상되기는 하지만, 대수층 고갈과 채광은 나우루를 훨씬 더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들 것이다. -82쪽

1800년도 이전의 나우루인들과 마찬가지로, 곳곳에 사는 현대인들은 생명의 거미줄을 이루는 가닥들이며, 이들은 무수한 다른 가닥들이 이루는 조직에 엮여있다. 이러한 생명의 조직체, 즉 생물권은 지구를 우리가 살 만한 편안한 곳으로 만들어주는 존재다.인간이 정상적으로 생존하려면 이 조직체가 제공해 주는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 간단한 사고의 실험을 시도해보자. 자신이 오지에 혼자 살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이제 자신이 생존하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목록을 만들어보자.

먼저, 산소가 없다면 곧바로 죽게 된다. 생물 과정을 원천으로 하여 생성되는 산소는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 중략 ...

외부의 열도 인간의 생활에 필요하며, 이것이 없다면 열대 지방에서도 얼어죽게 된다. 열을 보존하려면, 태양의 빛 에너지를 통과시키고 그 중의 일부를 열의 형태로 붙잡아둘 대기가 필요하다. ... 중략 ...
에너지원도 그에 못지 않게 인간의 생존에 중요하다. 에너지원 없이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고, 산소나 열과 마찬가지로 이는 각 생물 특유의 과정에서 얻어진다. 식물은 태양에너지 일부를 변환하여 인간의 에너지원으로 쓰이는 탄수화물이나 대사 작용을 통해 에너지원으로 쓰일 수 있는 지방 따위의 화합물로 저장한다. ... 중략 ... -146-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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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 에세이 - 개정증보판 동녘선서 70
김교빈.이현구 지음 / 동녘 / 2006년 2월
구판절판


공자의 인은 사람다움을 구현하는 과정입니다. 공자는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예절을 갖추어야 무슨 소용이 있으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음악을 잘 연주해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을 낮추어 개 같다, 돼지 같다 하는 표현을 씁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아무리 겉이 번드르르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거나 훌륭한 글을 쓴다고 해도 기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제 시대, 훌륭한 글을 쓴 사람들이 한편으로 정신대나 학도병에 지원하라고 열심히 외치고 다녔던 일이 있습니다. 그렇제 좋은 일이고 옳은 일이라면, 남에게 권하기에 앞서 자신이 먼저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임이 분명하고 사람다운 행동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이 나의 임무이며, 죽은 뒤에나 그만 둘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공자편) -51-52쪽

공자의 자공의 대화

"정치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경제를 풍족하게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세 가지 중 어쩔 수 없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하시겠습니까?"
"국방을 포기하겠다"
"둘 가운데 다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하시겠습니까?"
"경제를 포기하겠다. 예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지만 믿음이 없으면 아예 사회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논어> '안연'편)-58쪽

도는 길입니다. 길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다니면 길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이 길을 넓히지, 길이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길 아닌 곳으로 가면 가시 덩굴이나 진흙탕에 빠져 고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길로 가야 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요즈음은 인도보다 차도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사람이 갈 길에 차들이 점점 쳐들어와 인도가 차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도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 중략 ...

차는 사람이 몰고 가는 것이므로 차도도 결국 인도입니다. 공자는 어진 사람이면 차를 타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바람이 치는 날, 막 뒤집힐 듯한 우산을 요리조리 가누면서 인도로 걸어가는 사람과 자가용 뒷자리에 편안히 앉아 음악을 들으며 차도로 가는 사람을 상상해 봅시다.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그러나 공자는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걸어가는 사람에게 흙탕물을 튀기지 않도록 주의하는 정도의 배려만 있다면 이런 불평등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자는 길을 넓히는 데 반대하지 않으며, 때로는 새 길을 만들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장자는 공자의 말이 그럴듯 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속임수라고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은 차도로 가도 좋고 길을 넓힐 수도 있다는 공자의 말은, '사람다운 사람'의 이름을 빌린 인간들이 길을 넓힌단든 명목으로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옹호해주고, 가난한 백성이 부역과 전쟁에 동원되어 가족과 떨어져 객지에서 죽고 마는 상황을 합리화한다고 장자는 생각하였습니다. 공자가 군대(군사력, 식량(경제력), 백성들의 신뢰(권력의 정당성) 가운데 정치가가 끝내 잃어서는 안되는 것은 백성들의 신뢰라고 한 것을 생각해보면, 장자의 비난이 지나친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장자는 '부국강병'을 외치는 법가나 '도덕 정치'를 외치는 유가나, 춥고 배고픈 백성들의 눈으로 보면 그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자편) -119-120쪽

아름다움과 추함이 구분되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추한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또 좋아함과 싫어함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선택하고, 싫은 것을 버리게 합니다. 이러한 분별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좋은 것을 차지하고 싫은 것을 벗어나려 경쟁하고 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연관되어 있고 세계가 하나임을 아는 사람을 지극한 사람, 달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가 없습니다.

(장자편)-136쪽

장자는 사람들이 미인 대회를 열어 고르고 고른 미인이라도 물고기가 보고는 물속으로 숨고, 새들에게 다가가면 날아가 버리고, 사슴이 보고는 결사적으로 도망칠 것이니, 미인 대회에서 뽑은 미인은 진정한 미의 기준에 맞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편견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동물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판단 차이를 비유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장자는 세상에서 소외된, 세상의 기준에서 비정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온전한 덕과 인간미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장자의 주장은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고, 이름 모를 풀 한 포기나 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며, 싫어하고 미워하고 싸우던 사람들이 서로를 포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장자편) -137쪽

순자는 인간의 화와 복은 오직 인간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순자의 생각은 인간의 지위와 실천을 극대화한 인물 정신의 완성이었습니다.
하늘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순자의 눈에 보인 인간의 참모습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순자의 성악설입니다. 순자의 성악설은 판도라의 상자인 셈입니다. 그러나 순자의 판도라 상자 속에는 악한 본성을 이겨 나갈 숭고한 인간의 의지가 남아있었습니다. 순자의 철학이 인문 정신의 극치를 보였음에도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본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순자는 마치 프로메테우스처럼 뒷날 많은 학자들에게 두고두고 비판받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순자편)-180쪽

"아주 옛날에는 임금도 없고 신하도 없었다. 사람들은 우물 파서 물마시고 밭을 갈아 먹었으며,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었다. 매이지 않은 배처럼 자유로웠고, 편안하며 만족했다. 경쟁이 없고 영리를 바라지 않았으며, 명예도 없고 치욕도 없었다.
만물이 서로 화합하여 자연의 도에 드렁가므로 역병이 유행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완전한 삶을 누릴 수 있었고, 마음이 착해서 욕심이 없었다. 입에 먹을 것을 물고 즐기면서 배를 두드리고 놀았다. 그들의 말은 화려하지 않았고, 그들의 행동에는 꾸밈이 없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어떻게 무거운 세금을 매겨 백성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엄한 형벌을 받아 굴에 갇힐 수 있었겠는가? "
(갈홍, <포박자> '힐포'편 : 포경언의 말)

-278-279쪽

"임금과 신하의 신분이 생기면 변화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본래 수달이 많아지면 물고기가 놀라고, 매가 많아지면 작은 새가 근심하는 법이다. 부리는 사람이 늘어나면 인민은 고통스러우며, 위에 바치는 것이 많아지면 아랫사람은 가난해진다."
(갈홍, <포박자> '힐포'편 : 포경언의 말)-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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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1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교빈의 동양철학 에세이는 "제목에 낚여" 아이들 교육용으로 한권 산적이있지요.
곧바로 쓰레기통..
한국의 고등학생용 교양목록 리스트에서 이 책이 사라지기를 희망합니다.
아프락사스님.

마늘빵 2007-05-1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저랑은 생각이 좀 다르시네요. 저는 한국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하여 볼 수 있는 괜찮은 책이라 생각했는데요. 내용이 가독성이 높지는 않고, 문장이 조금 딱딱하기는 하지만, 다른 동양철학 대중서에서 보이지 않는 농가 등의 다른 부류도 넣었다는 점에서도 괜찮았구요.
 
지구 재앙 보고서 - 지구 기후 변화와 온난화의 과거.현재.미래, E Travel 1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이섬민 옮김 / 여름언덕 / 2007년 2월
절판


"추위가 오고, 더 많은 남쪽 지역이 북극형 생물에 적합한 환경으로 변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온난한 환경에 맞는 기존 생물은 밀려나고 북극형 생물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아울러, 온난한 지역의 생물은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고 ... 기후가 다시 따뜻해지면 북극형 생물은 북쪽으로 물러가며, 온난한 지역의 종이 이들의 뒤를 바짝 쫓아간다. 그리고 산기슭부터 눈이 녹음에 따라, 북극형 생물은 동족이 북상하고 있는 동안, 해빙된 땅을 장악한 뒤 기온이 상승할수록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
(다윈 <종의 기원> '지리적 분포' 편 中)-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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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담 & 싱어 : 매사에 공평하라 지식인마을 16
최훈 지음 / 김영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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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당사자의 행복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또는 촉진시키거나 억누르는) 경향에 따라 모든 각각의 행위를 승인하거나 부인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또한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모든 각각의 행위란 개인의 사적인 모든 행위뿐 아니라 정부의 모든 법령의 작용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벤담) -63쪽

"옳은 행위의 공리주의적 기준을 성립시키는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련된 사람 모두의 행복이다. 그 자신의 행복과 다른 행복을 놓고서, 공리주의는 행위자로 하여금 공평무사한 선의의 관망자로서 엄격히 불편부당해지기를 요구한다."
(<공리주의> 2장, 밀) -63-64쪽

노직은 사람들이 이 기계(경험기계)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즐거움 그 자체보다는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현실의 인간 관계와 사회 및 자연 환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직은 이런 것을 무시하는 쾌락주의는 틀렸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본다면 공리주의도 옳지 않다. -79쪽

벤담은 감옥이 터무니없이 잔인한 고통을 주는 곳이 아니라 참회하면서 개과천선하게 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의도로 팬옵티콘을 구상했기 때문이다. 당시 감옥은 아주 비인간적이고 비위생적이었는데 벤담이 설계한 팬옵티콘은 위생적인 화장실과 환기, 중앙 냉난방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시민에게 공개되어 시민이 교도소 운영을 감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죄수들은 억압과 굶주림, 질병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었고, 이 점에서 팬옵티콘은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시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팬옵티콘은 사람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교화시키는 '교도소'의 선구적인 모델이었다. -89쪽

"나는 이제, 나 자신의 이익 대신에, 나의 결정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러한 고려는 나에게 모든 이익들을 측정해서 영향받는 사람들의 이익을 최대화할 것으로 보이는 행동을 요구한다. 그래서 적어도 어떤 수준에서 도덕적인 추리를 할 때, 나는 영향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행동을 선택해야만 한다." (싱어, <실천윤리학>(33-34쪽)) -99쪽

"공리주의는 최소한의 것이며, 이기적인 의사 결정을 보편화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첫 번째 지점이다. 우리가 윤리적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한 이러한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공리주의를 넘어서서 공리주의적이지 않은 도덕적 규칙잉나 이상을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는, 이렇게 더 나아가야 할 합당한 이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이유가 만들어질 때까지, 우리가 공리주의자로 남아 있어야 할 까닭이 있다." (싱어, <실천윤리학>(35쪽)) -100쪽

우리가 말을 하기 전까지 윤리적인 행동이라고는 기껏해야 상대방이 은혜를 갚으면 우호적으로 핥아주고, 갚지 않을 경우 으르렁거리며 위협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말을 하게 되면서 그런 행동 대신에 "왜 그런 일을 했지?" 라고 물을 수 있게 된다. 이유를 묻는단든 것은 곧 이성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102쪽

"윤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내가 단지 내가 속해 있는 사회의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면, 또한 전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이익이 내가 속해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타인들의 이익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즉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나의 사회가 여러 사회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좀 더 확대된 시각에서 볼 때 내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 구성원의 이익이 다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익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윤리적 추론은 일단 시작되면 당초에 제한되어 있던 윤리적 지평을 밀어내고 좀더 보편적 관점을 취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싱어, <사회생물학과 윤리>(216쪽))-109쪽

싱어가 공리주의자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모든 사람의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하라고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와는 성격이 다르다. 벤담이나 밀, 싱어 모두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이익을 말하지만 그 이익이 약간 다르다. 벤담과 밀에게 이익은 행복이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그들의 슬로건이었고 행복은 즐거움이 있고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말했다. 그들도 물론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불행을 최소화하는 행동을 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행복과 불행의 양을 계산하여 행복의 양이 더 크면 그 행동은 받아들인다. -115쪽

고전적 공리주의에서 가장 윤리적인 행동은 최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고통보다 즐거움을 더 많이 산출하는 행동이다. 반면에 싱어와 같은 공리주의에서는 최소한의 고통을 산출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공리주의를 부정적 공리주의라고 부른다. 또 싱어가 거론한 이익들은 우리가 바라는 바이기는 하지만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고통을 피했다고 해서, 남에게 간섭을 안 받는다고 해서 즐겁기까지 하겠는가? 그렇지만 그런 이익들은 분명히 우리가 바라고 선호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즐거움(쾌락)에 주목하는 고전적 공리주의와 달리 싱어와 같은 공리주의는 선호 공리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공리주의자는 어떤 행동이 즐거움을 산출하든 안하든 많은 사람의 욕구 또는 선호를 만족한다면 그 행동은 윤리적이라고 주장한다. -116쪽

벤담이나 싱어는 고통의 양이 똑같을 때 인간이라고 해서 우선 고려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 사람의 고통이 더 큰데도 그것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성적인 사고를 할 줄 몰라서 고통을 더 크게 느끼기도 한다.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붙잡았을 때 동물은 자신을 지금 보호하기 위해 붙잡았는지 죽이려고 붙잡았는지 구분할 줄 몰라서 훨씬 더 공포를 느낀다. 이성이 있다면 상황을 얼른 파악해서 편안함을 느낄 텐데 말이다. 인간과 동물의 고통의 양을 비교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물에게 가해지는 엄청난 고통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만이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특성이다. -164쪽

공리주의자라면 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나쁘다고 대답할까? 공리주의는 즐거움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는 경향에 의해 행위를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는 것은 비록 고통을 수반하지는 않는 죽임이라고 하더라도 현재 즐기고 있는 행복이 없어지므로 나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잘 풀리지 않는 일도 있고 고민도 있지만 내 인생을 전체적으로 계산하면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살아있는 것 자체를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죽으면 그런 행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다시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죽으면 행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는 것이 살인이 나쁜 공리주의적 이유였다. 그런데 내가 죽으면 행복을 누가 누릴 수 없는가? 내가? 나는 더 이상 없는데? 내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는데 언니가 먹어버렸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못 먹게 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그런데 '내'가 죽는다면 어떨까? 더 이상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으니까 안타깝다고? 누가?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누군가? 나는 죽어서 없어졌는데. 결국 공리주의는 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나쁜지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죽임이 왜 나쁜지 간접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다. 나에게 죽음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해보자. 나는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나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 계획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거창한 것일 수도 있고 친구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죽는다는 것은 그 계획들을 헛되게 만들고,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나의 삶을 덜 행복하게 만든다. 그런 불안이 없다며 나의 삶은 훨씬 더 행복할 수 있었으므로 공리주의에서는 살인이 나쁘다는 것이 간접적으로는 설명이 된다. 물론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종을 의미하고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는 불안감을 준다.

-187-188쪽

"감각 있는 존재는 가치있는 것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며, 그릇이 깨어진다 해도, 내용물이 파손되지 않고 옮겨질 수 있는 다른 그릇이 있는 한, 그릇이 깨어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비록 육식가들이 그들이 먹는 동물의 죽음과 그 동물들이 경험했을 쾌락의 상실을 야기시키기도 했지만, 그들은 또한 더 많은 동물의 출생을 야기시키기도 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식용으로 사육될 동물은 더 이상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식가가 한 동물에 대하여 가하는 손해는 ...... 그들이 다음 동물에게 부여한 이익에 의하여 균형을 이루게 된다."
(싱어, <실천윤리학>(154쪽)) -193쪽

"단지 먹히는 동물에 대해서라면 먹는 것을 용서받을 매우 좋은 이유가 있다. 우리는 동물을 먹음으로 인해 더 이익을 보고, 동물들도 결코 손해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오랫동안 연장되는 미래의 불행에 대한 예감을 갖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의 손에서 공통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죽음은, 자연의 불가피한 역정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죽음에 비하면 훨씬 신속하고 덜 고통스러운 것이다." (벤담) -194쪽

"다른 존재가 자의식적인가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만약 인격체를 죽이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으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존재가 인격체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실제로 의심이 간다면, 우리는 그 존재에게 의심의 이득을 주어야만 한다."
(싱어, <실천윤리학>(131쪽)) -209쪽

사냥되는 동물이 고통 없이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동물을 죽이기만 할 뿐 다른 동물로 대체하지 않기 때문이다.

싱어는 이러한 사정 때문에 비록 스스로 대체 가능성 논변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음식을 얻기 위해서 동물을 죽이는 것은 전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동물의 고기를 먹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될 때마다 이 동물이 편안하게 사육되었고 고통 없이 죽었는지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음식을 얻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은 그들을 우리가 원하는대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러할 때 그들의 삶은 우리의 단순한 욕구에 비해 가벼운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동물을 이러한 방식으로 계속 사용하는 한, 동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마땅한 방식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과제가 될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단지 그들의 즐거움 때문에 동물들을 계속 먹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사람들에게 동물을 존중하고 그들의 이익에 대하여 동일한 관심을 가지라고 고무할 수 있겠는가?" (싱어, <실천윤리학>(167-168쪽))

-211쪽

유인원 프로젝트의 기본 강령은 유인원들에게 이런 기본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을 죽이거나 이유 없이 고통을 주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것처럼 유인원을 죽이거나 이유 없이 고통을 주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지금까지 살펴본 싱어의 논의에 따르면 유인원뿐만 아니라 다른 젖먹이동물에게도 이런 권리를 줘야 하짐나 우선 유인원부터라도 그런 권리를 주자는 것이 이 프로젝트다. -215쪽

한편 개고기 비판에 대한 가장 흔한 반론인 문화상대주의도 올바른 반론은 아니다. 문화상대주의는 우리 문화가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지 우리 문화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남아 선호 사상이나 노비제가 우리의 문화였다는 사실이 그 문화가 옳음을 보여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론매체에 종종 보도가 되지만 보신탕용 개는 특히 비참한 환경에서 사육되고 잔인하게 도살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개는 몽둥이로 패서 잡아야 맛있다고 했다. 지금이야 그렇게 개를 도살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개지옥'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개들을 열악한 환경에서 기르는 모습들이 인터넷에 종종 공개된다. 개의 이익을 평등하게 고려하자는 것은 개를 애지중지 키우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개도 우리처럼 맞으면 아프고 죽지 않고 계속 살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배려해주자는 것이다. 다른 동물도 그렇지만 우선 개에게 실천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을 개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218-219쪽

사회생물학과 같은 과학은 관찰자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윤리는 참여자의 관점이다. 예를 들어서 과학자로서의 나는, 굶고 있는 사람에게 기부를 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 가족을 위해 그 돈을 쓸 것인지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들 덕분에 사람들이 내릴 수 있는 선택에 대해 가능한 모든 이론들을 갖추게 되었다고 해보자. 심지어 나와 모든 조건(재산, 가족, 성격 등)에서 비슷한 사람이 그런 상황에서는 기부를 한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면 나도 비슷한 상황에서 똑같은 선택을 할까? 수많은 이론과 자료가 있지만 여전히 갈등할 수 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기부를 한단든 지식이 나에게 도움은 될 수 있지만 그 지식이 영향을 주어 오히려 반대로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는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과학은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이론은 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바가 없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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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03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과 벤담을 읽다보면, 결국 흄을 읽게 되더군요..
싱어는 고통받는 존재의 범위를 인간에 한정하지 않고 동물까지 확장했다는 점이
특별합니다.
동정심.. 인간적 감정.. 설령 논리적이지 않더라도 윤리적 판단과 실천의 근원이리리 생각합니다.
현대의 윤리학자 중 싱어의 의견에 많은 부분 공감하고 있답니다.
특히 동물을 대하는인간의 태도 면에서,


마늘빵 2007-05-03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벤담과 밀, 그리고 흄은 뗄 수 없는 관계지요. 곧 저도 흄에 도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읽을게 참 많습니다. 흄까지 관심이 가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듯 해요.
싱어의 저서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싱어는 제 관심에서 없던 인물인데, 이번 기회에 깊이 들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