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 지적 열정을 추구한 나의 삶, 나의 길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5년 1월
구판절판


인생에는 여러 가지 살아가는 길이 있고 인생에는 많은 종류의 할 일과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인생의 보배를 모두 다 동시에 소유할 순 없다. 우리는 모든 만물과 똑같이 어떤 우연의 소산인 것으로밖엔 생각할 수 없다. 일단 생명을 갖게 된 동물로 나는 생명을 지속하려는 본능에 의해 살고, 역시 우연의 결과로서 의식을 갖게 된 인간으로서 나는 내 삶의 모든 행위에 의미를 찾고 가치를 부여하려는 의욕 속에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20쪽

모든 학문, 모든 사유는 철학으로 통한다는 말에는 깊은 일리가 있다. 모든 학문은 반드시 어떤 원칙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 모든 사유, 즉 이치도 반드시 어떤 전제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그 전제의 옳고 그릇됨이 따져지고 설명되기 전에, 이미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전제를 가짐으로써 비로소 그 사실이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은 다른 학문이 받아들인 전제를, 즉 원칙 자체를 비판하고 설명하려 한다. ... 다시 말하자면 철학은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고 있는 원칙 자체를 명석하게 이해하고 설명하고 비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은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서 갈 수 있는 한까지의 철저한 이해르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학문이고 깊이 추구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철학적인 사색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26쪽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항상 스스로를 새롭게 변화시킴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다. 어머니의 젖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도 젖 대신에 밥을 먹어야 하며,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도 어른으로 변신할 수 밖에 없다. 늙고 싶지 않아도 늙을 수 밖에 없고, 죽고 싶지 않더라도 때가 되면 죽어야 한다. 삶은 부단한 변화의 과정, 즉 길 위에 존재한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정해진 길을 따라 변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나들이길에 나선 순례자이며, 그의 삶은 곧 끝없는 순례의 과정이다. -62쪽

인간은 자연의 물리적 자연 법칙에 지배되는 동시에 규약적 규범에 묶여있다. 규약은 언어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인간 존재는 필연적으로 언어적이다. 언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의미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에 지나지 않으며, 거꾸로 인간이 의미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인간의 삶의 양식은 텍스트 쓰기이며 그러한 인간의 삶은 텍스트로 볼 수 밖에 없다.-70쪽

허무주의는 모든 존재 특히 인간 존재와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부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반허무주의적 주장의 밑바닥에 허무주의가 숨겨져 있는 것을 지적해 낼 수 있다. 인간과 인생에 대한 사물적 관점의 테두리 안에서 허무주의를 부정하는 태도는 이성적 사유가 도달한 결론이 아니라 본능적 저항에 지나지 않는다. 허무주의를 부정하게 되는 이유는 허무주의와 삶에 대한 본능이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삶에 대한 동물적 욕망보다 더 강하고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든 현상을 사실적 관점에서 대하는 한 철학적으로 허무주의는 역시 옳다. 그것은 전통적 기독교적 교리와 상충됨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이에게 지동설은 역시 옳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72-73쪽

인간은 언어적인 존재로 그냥 있지 않다. 그가 접하는 모든 것을 언어화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의식 대상의 관계는 언제나 의미적이며 의미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언어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인식론의 혁명이 보여주었듯이 인과적이 아니라 해석적이며, 자연중심적이 아니라 인간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미다스 왕의 손에 비유된다. 미다스 왕의 손에 닿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바뀌듯이 인간의 의식이 닿는 모든 대상, 행위,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의미로 변하게 마련이다. 문화를 인간에 의한 자연의 인간화 즉 의미화로 정의할 수 있고 또한 인간의 의식이 닿는 모든 것을 의미화한다면 자연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문화적 즉 의미적 존재로 이미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언어적 존재로서 인간이 모든 것을 문화화 즉 의미화할 수 밖에 없고, 언어를 떠난 '의미'가 있을 수 없고, 언어적 작업이 글쓰기이고 그렇게 써놓은 글을 텍스트라 한다면, 인간의 삶은 텍스트 쓰기에 지나지 않고 바로 그러한 점에서 인간의 삶의 과정과 그의 일생은 필연적으로 '의미'를 갖게 마련이다. -78쪽

모든 인간의 삶의 과정을 텍스트 쓰기, 모든 인간의 일생이 각기 자기가 써서 남긴 텍스트라는 말은 모든 인간이 똑같은 글쓰기를 하며, 똑같은 내용의 텍스트를 쓴단든 말이 결코 아니다. 인간의 존재 양식은 플라톤의 경우처럼 '이데아'라는 보편적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p,q,s,t' 등의 이름이 붙은 개별적 실존자로만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인간과 완전히 동일할 수 없다. 모든 '나'는 각자 다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다 같이 텍스트를 쓰고 모든 텍스트가 다같이 의미를 갖지만 그들의 텍스트와 글쓰기의 스타일은 각자 필연적으로 다르고 따라서 그 텍스트의 의미도 필연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마치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작가마다 다르고, 한 작가의 개별적 작품들이 저마다 다른 것과 같다. -78-79쪽

한편으로 의식, 즉 인지되지 않은 존재는 의미가 있을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 언어 이전의 다양한 의식 즉 지각, 경험, 세계, 존재 그리고 의지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세계와 독립해 존재하며 세계를 표상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 자체가 이미 언어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언어에 의해 구성되기 전의 존재, 세계 그리고 경험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이른바 언어 이전의 '객관적' 존재들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말할 수 없는 혼돈상태로 '무의미한' 채로 어둠 속에 남아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어둠은 언어의 빛으로 밝아지고 비로소 '의미의 질서'를 갖고 인간 앞에 '나타나게'된다. -89쪽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우리의 경험이나 생각을 기록해 두거나 타인에게 더욱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서다. 경험이나 생각이 비가시적 의식의 활동인데 반해서 그것을 기록하거나 전달하는 언어는 가시적인 객관적 현상이다. 경험/사고는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언어에 선행하며 그것들은 서로 분리할 수 있는 독립된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험/사고와 언어는 완전히 독립할 수 없고 경험/사고는 그것이 곧 언어적 활동이며, 글을 쓰는 이유는 기존의 경험/사고의 표현이나 전달에만 있지 않다. 글로 써지기 전까지의 경험/사고가 의식 활동이니만큼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유동적이며 불확실하며 막연한 채 남아 있으며 오래 지속될 수 없다. ... 글쓰기가 가장 중요한 근본적 이유는 좀 더 잘 생각하고 세계와 인생을 좀더 잘 인식해보자는 데 있다. 글을 쓰면서 우리는 더 정확히 생각하고 더 세계를 잘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글쓰기에 대한 욕망의 근원에는 진리에 대한 깊은 숨은 욕망이 깔려 있다. 문학이나 철학은 다른 어느 지적 활동보다 각별한 언어활동이니만큼 작가나 철학자는 일반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지적 활동을 직업으로 삼는 다른 지식인/학자보다도 진리를 추구하고 세계를 투명하게 보고자 하는 욕망이 많은 종족에 속한다. 나는왜 시를 쓰려 했고 문학을 하려고 했으며 철학을 하고 있는가? 나는 왜 글쓰기를 하는가? 나 자신과 세계를 더욱 투명하게 파악하려 하기 때문이다. -91-92쪽

내가 진심으로 저 깊은 속에서부터 갈구하고 있었던 것은 앎 자체, 앎의 투명성 자체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영원히 해답이 없는 삶의, 그리고 모든 존재의 궁극적 으미에 목말라 있었다. 나의 근본적 문제는 지적인 것을 넘어서 아니 그 이전에 종교적인 것이었다. 물론 지적인 문제와 실존적 문제는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깊이 따지고 보면 구체적 한 인간에게 있어서 지적 가치와 실존적 의미는 서로 뗄 수 없는 역동적 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으로 지적으로 투명해지지 않는 실존적 가치는 착각이거나 맹목적일 수 있고, 실존적으로 그 가치가 체험되지 않은 지적 투명성은 공허함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146쪽

진리가 재현이 아니라 구성이라는 사실과 철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발견이 아니라 세계의 관녀적 건축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철학으로서 이에 대한 학문의 가치의 궁극적 평가는 그것이 가져오는 삶에 있어서의 실천적 가치에 비추어서만 도구적 관점에서만 평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세계에 대한 탈. 도구적이고 즉 순수한 지적 탐구가 선행되지 않는 소망과 이상적 꿈 역시도 충족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적 탐구로서의 철학의 원초적인 동시에 궁극적 의미와 가치는 그것의 사념성이 아니라 실천성에 있다.

-190쪽

꽃이 진다고 해서 그 꽃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조만간 죽어 흙이 되고 벌레의 밥이 되게 마련이라고 해도 삶 일반, 특히 인간의 삶은 아름답고 귀하다. 아니 우리가 머지 않아 사라지기 때문에 그만큼 더 우리들의 삶은 보람을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삶의 존엄성, 절대적 가치를 의식하고 삶에 대한 경외, 삶의 성스러움을 새삼 깨달을 필요가 있다. 시들시들한 꽃보다 생생한 꽃이 더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로 적극적 삶, 인텐스한 삶은 그만큼 더 귀중하다. -222쪽

자기기만의 현상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자기기만이라는 현상은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남의 가치관, 다른 사회의 이념은 나의 이른바 객관적 관점에서 비판될 수 있고 개혁될 수 있다. 하나의 주관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나의 객관성이라는 명목하에 일률적으로 남의 가치관이나 다른 사회를 비판하려 한다면 그것은 자칫하면 남의 자율성, 다른 사람들의 인격을 무시하는 독단주의적 독선의 길로 뻗어 가기 쉽다. 우리들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에 대해서, 다른 사회의 이념에 대해서 항상 반성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비판되고 개혁되어야 한다.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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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7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ood 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