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년만에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랑 친한 다른 녀석과 따로 만났다가 이 녀석에게 붙들려(?) 그 자리에 담게 되었는데, 역시 10년만이라 그런지 참 반갑더라.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 오래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 그들과 나는 참으로 여러면에서 참으로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두들 공부 꽤나 했던 애들이고 실제로 다들 목표하는 곳에 잘 갔고, 번듯한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이 서울대를 갔고, 이름과 얼굴만 아는 한 친구는 의대를 갔고, 3학년 때 내 짝궁이었던 친구는 고려대를 갔구나. 그리고 지금은 소위 대기업이라고 하는 곳에 머물고 있고, 두 친구는 석박사통합과정에, 한 친구는 레지던트 3년차. 

  다들 이과였던지라 자연대, 공과대, 의과대로 진학했고, 나만 마지막 순간에 방향을 틀어 상경계열에 진학했다가 또 방향을 틀어 인문계열로 몸을 옮겼다. 그러니 다들 연구원 아니면 대기업 사원, 의사가 된 것. 그 중 대기업에 있는 한 친구가 결혼을 한다하여 청첩장을 주었다. 자리에 있던 친구들 중에는 제일 먼저 결혼하는건데, 이미 준비는 다 끝낸 것 같더라. 

  옛날 지하독서실 이야기, 학교 선생님들 이야기, 결혼 이야기, 회사 이야기 등으로 화제가 전환되다가 삼성 특검 이야기가 나왔는데, 삼성이 아닌 다른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 曰, 비리 없는 기업이 어디있어, 이런 식으로 다 잡아내면 사실 기업 못하지. 삼성 치면 우리나라 경제가 휘청거리는데 이렇게 하면 안되지, 라는 통에, 내 의견을 말하려다 그냥 말았다. 10년만에 만난 자리인데, 논쟁으로 이끌 필요는 없는지라 그냥 가만 있었다.

  그러니까 거기 있던 애들은 흔히 말하는 대한민국 사회의 엘리트 과정을 그대로 밟고 그들이 경험한 것 또한 거기서 머물러 있는 친구들인데, 그렇게 말하는게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오히려 대기업에 있는 친구들이 사회 정의니 빈부격차 해소니 비정규직 문제니 하는 것을 논하는게 더 이상하긴 하다. 그런데 말이지, 난 좀 그랬으면 좋겠다. 대기업에 있는 친구들이 자발적으로 이런 사회적 문제에 관심도 갖고 정의를 부르짖었으면 좋겠다.  

  어제 그 친구는, 같이 갔던 다른 친구에게 듣기로, 중소기업 하청업체를 상대하는 부서에 있는지라 이런저런 떡고물들이 많이 떨어지는거 같은데 - 돈은 아니고 - 좋은 음식이며, 좋은 술이며, 좋은(?) 여자까지 대접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글쎄 결혼 앞둔 친구가 결혼할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건 아닌거 같은데, 몰래 그러고 다니는게 마음에 걸리진 않는건가. 근데 그 일을 계속 하는 한 결혼 이후에도 계속 그렇게 될 게 뻔한데, 한편으로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여자분이 좀 안됐다 싶기도 하고.

  내가 일차만 하고 먼저 나온 것은 이런 여러가지 측면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모종의 불편함 때문이었다. 처음엔 반가움이 앞섰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말해야 할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하는 상황에 내 진심으로 즐거워하지 않았고, 그럴 바에야 그냥 나오자 싶었던게다. 계속 만나온 친한 사이라면 내 생각을 그대로 내보여줬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내가 싫었고,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싫었다.

  업소 여자들을 만나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을까. 이 여자는 왜 여기에 있는걸까. 중소기업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접대를 받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을까. 왜 이 나이 많은 분이 나에게 이렇게 굽실굽실 하는걸까. 한 박사과정 친구가 한달에 120만원씩 생활비를 받는다고 했을 때 그거 가지고 어떻게 사냐, 고 받아치면서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없었을까. 한달에 120만원도 못받고 생활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하고. 오는 길에 내 머리엔 물음표만 가득했다. 아마도 나를 그 자리에 데리고 갔던 그 친구만이 나의 이런 마음을 알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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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2-08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랑이 아닐진데 그러한 자기 보직을 떳떳하게시리 떠드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 기업문화의 단단히 잘못된 한 단편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 친구분을 비난하고 싶진 않지만 자기돈으로 그 음식 그 술 그여자를 취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엔 100% 아니다 라는 정답은 불을 보듯 뻔하니까요. 아울러 세상에 공짜 없듯 어느 기업이나 지나치게 접대를 밝히면 결국 자기 직장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로까지 발전하더군요.^^ 아울러 아프님의 마지막 문항은 감히 판단하건데 너무나 유토피아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순오기 2008-02-08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리트 코스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죽었다 깨어나지 않는 한 모를 일입니다.>.<
우리의 슬픈 현실이지요~~~ㅠㅠ

hnine 2008-02-08 0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제가 엘리트 코스를 따라서 산 사람을 싫어하지도 않지만, 굳이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 아닙니까 ^^ 그런데 '모든' 엘리트 대기업 사원들, 이라고 묶어생각하지는 말아야겠지요.

마늘빵 2008-02-08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 네. '모든'이라고 하면 위험하지요. 제가 알고 있는 전혀 그렇지 않은 대기업 사원들도 있으니까요. 알라딘에도 계시고. 10년만에 본 친구라 반갑긴 했지만 그런 발언들이 불편했습니다.

순오기님 / hnine님 말대로 '모든'으로 보면 안 되겠지만, 성공의 출세가도를 곧장 달려 앞만 본 사람들은 너무 주변의 상황을 모르는거 같습니다. 자기가 걸어온 길을 다른 사람들도 모두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거 같아요. 경사로 없는 평탄한 아스팔트 길이 아닌 경사로 45도의 수많은 바위길, 진흙탕길을 걸어 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메피스토님 / 같이 간 친구말로는 자신의 기업의 비리를 말해줬다는데 그게 뭔지도 한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스스로 비리가 많다고 할 정도면, 보이지 않는 건 더 하겠죠. 그러면서 기업의 비리는 의당 당연한 것이고, 김용철 변호사 같은 사람을 그냥 배신자로 치부해버리는 그런 발언은 영 받아들이기 힘들더군요. 저는 유토피아를 지향해야 한다고 봅니다. 유토피아를 지향해야 현실의 문제도 깨닫게 되고, 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려는 여러 사람들의 열망이 반영돼 사회가 조금씩 변화 하는거 아닐까요. 현실에 시선을 두되 머리와 마음은 이상을 향해야 한다고 봅니다.

푸하 2008-02-08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에 관한 감각, 자존감, 만남에 대한 욕구('만남' 이 단어는 김상봉 선생님의 말씀이었지요.) 등등... 사람들의 보편적 심성이기도 한 거 같아요. 물론 자유를 억압하고 존엄을 억누르고 뒤틀린 관계를 맺는 것도 사람들이 선택한 측면도 있는 거 같구요. 어쨌든 세상이 이런 모습이 된 건 사람들의 의지가 작용한 거고 그러기에 미래에 대한 일말의 책임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해요. 자유롭고 좋은 관계맺음을 위해 새해해도 화이팅.! 하자구요.^^

웽스북스 2008-02-08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들을 만날 때 세월을 가장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저도 10년 친구들 얼마 전에 오랜만에 만났는데 느낌이 새롭더라구요~ 특히나 나이가 으흑 ㅜㅜ

마늘빵 2008-02-08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님 / 넵! 김상봉 샘의 '만남'을 위하여. :)

웬디양님 / 아무래도 걸어온 길이 다르다보니. 그리고 10년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외면과 내면 모두 너무나 달라져있기 때문에 다들 좀 놀래더라고요. 내면은 거의 안보여줬지만.

춤추는인생. 2008-02-08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저도 저번주에 살짝 이런거 느끼고 왔는데 ^^ 전 그애를 아주좋아하는데. 이제 이렇게 갈라져버린 우리의 인생처럼 생각도 그만큼 달라져있더군요. 나 참 너때문에 외롭다. 술기운에 그랬는데. 그말이 그말인줄 알고나 간지 모르겠네요.

마늘빵 2008-02-08 23:48   좋아요 0 | URL
저는 친한 친구였다면, 계속 보아온 친구였다면, 그냥 내 마음에 있는 말들을 풀어놓았을 거에요. 그치만 그런 말을 하기엔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을 비워두었고, 저는 그냥 마음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어요. 비난하고 싶진 않아요. 그냥 안타까울뿐. 친한 친구분이라면 그냥 속시원히 말해봄이 어때요. 그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감정을.

깐따삐야 2008-02-0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똑같은 하늘을 지붕 삼아 살고 있지만 다들 추구하는 가치들이 저마다 다르죠. 예전의 저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반박할 이야기도 이제는 그냥 조용히 입에 지퍼를 채운다는. 마음의 순정함을 조금이라도 간직한 채 나이 들어가는 사람을 보면 그래서 무턱대고 반가워져요.^^

마늘빵 2008-02-09 12:06   좋아요 0 | URL
저는 지금은 입에 거품을 물지는 않아도, 때에 따라 심장에 펌푸질하기는 한다는. 그리고 심장에 펌푸질은 나이를 많이 먹은 뒤에도 여전히 계속 됐으면 좋겠다 싶어요. 때와 장소와 상대에 따라서 냉정함으로 일관할 때도, 머뭇거리기도 하고, 아니면 펌푸질을 하기도 하고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