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저래 나를 돌아볼 기회가 생겼고, 부족해도 많이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혜도, 지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나를, 나는 실제보다 더 이쁘게, 멋있게, 화려하게 바라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고등학교 때 교장선생님이 교장실로 불러 훈화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내가 철학과를 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인데, 그때 그 분 왈, 거기 나오면 다 꾸질꾸질 하게 하고 다니고 맨날 길거리에서 하늘 땅 쳐다보면서 어쩌고 저쩌고 그러셨는데, 철학과 못가게 하려고 그러신거지. 고등학교 1학년 짜리가 그런 어처구니 없는 말을 그대로 믿었을까.

  결국 고등학교 3학년 홀로 기나긴 방황이 대학에까지 이어지고, 고민 끝에 현실과 타협(?)해 경제학과에 갔던 나는 과감히 철학과로 전과를 했다. 철학은 내가 막연하게 원하는 것이었고, 뭔가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철학과'라는 타이틀 아래 나머지 대학 3년을 다녔는데, 사실 공부는 제대로 한 게 없다. 하지만 생각은 많았다. 내가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도 강하게 들었다. 철학이 나를 변화시켰다고 믿고 있고, 후회하지 않는 길을 걸어왔노라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요지는, '철학'이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전과를 했고, 3년을 다녔지만, 그 타이틀을 내게 붙이기엔 내가 너무 부족한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른 이들에게 철학은 경쟁력 없고, 점수 안되는 애들이 오는 별거 없는 과인지 모르겠지만, 내겐 다가갈 수 없는 거대한 산이었다. 내게서 철학이라는 레떼르를 떼기로 했다. 뗀다고 떼어지고, 붙인다고 붙여지는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나에게서 떼어버린다. 작은 의미로 마이리뷰의 카테고리도 '인문/철학'이었던 것을, '인문'으로 바꿔버렸다. 마저 있는 '인문'마저 '인문/사회/과학'으로 통합시켜버릴까도 생각 중이다. 하나의 개인으로서, 하나의 사람으로서, 고민과 방황을 더 해야할 필요가 있단 생각이다. 부담스러웠던 딱지를 떼어버리니 한결 후련하다.

* 특별히 무슨 일이 있는건 아니고, 이번 논란에서 제게 속삭이는 여러 댓글, 또 어떤 공개된 댓글, 어떤 페이퍼 등에서 느낀 바가 많아 그런 거랍니다. :)

     


댓글(2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Jade 2007-10-10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고민과 방황말고 연애를 하세요! ㅎㅎ

마늘빵 2007-10-10 00:15   좋아요 0 | URL
연애는 머 혼자서 하나 =333

turnleft 2007-10-10 02:59   좋아요 0 | URL
맞아, 누구 소개도 안 시켜주면서 연애 하라는 분들 밉지 않아요?
(Jade 님, no offence~ ^^;)

마늘빵 2007-10-10 07:32   좋아요 0 | URL
그럼 제이드님이나 좌회전님이 소개시켜주는 일만 남았군요. ('' )( '')

Jade 2007-10-10 11:23   좋아요 0 | URL
ㅋㅋ 아프님은 눈이 너무 높아서 당최 소개를 시켜드릴수가 없어요!

마늘빵 2007-10-10 16:30   좋아요 0 | URL
'혜교'는 잊어. '혜교'는.

Jade 2007-10-10 19:36   좋아요 0 | URL
ㅋㅋ 혜교가 아니라도 페이퍼에 올라온 아프님 취향을 종합해보면.....사이보그를 만드시는게 어떠신지...??? :p

마늘빵 2007-10-10 20:22   좋아요 0 | URL
나는 이상형 같은거 없어욤. ('' )( '')

비로그인 2007-10-10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위 점수가 높고 낮은 과는 언어 계통에도 존재하기에, 중국어과에서(당시 제가 다니던 학교 top이었어요) 독일어과로 전과를 한 친구가 참 신기하다는 사람이 많았어요. 뭐 어때요. 사람마다 호오의 차이가 나뉘고 그 경우가 내가, 혹은 내 주위의 누군가가 될 수도 있는 것을.
저의 이 댓글에는 철학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흐흐

마늘빵 2007-10-10 08:50   좋아요 0 | URL
^^ 저도 경제에서 철학으로 왔을 때, 과에서 역사상 두번째라고 했었어요. 신기하게 바라봤어요. 같은 시기 철학에서 경제, 경영으로 간 사람도 몇 있었거든요. 결국 맞트레이드한건가. 요즘엔, 독일어, 프랑스어의 인기가 더 내려갔다고 얼마전 기사를 본 거 같아요.

2007-10-10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0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10-10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그런데 어쩝니까. 저는 아무리 중국어의 인기가 드높다 하여도 당최 배우질 못하겠어요. 처음으로 `나 바보 아닐까' 심각하게 생각해 본 것이 중국어와 일본어였으니까요. 하지만 영원한 제 사랑은 독일어와 폴란드어, 영어입니다. 공부하고 있노라면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자신의 적성 아닐까요? 역사상 두번째 축하드립니다.

마늘빵 2007-10-10 09:43   좋아요 0 | URL
저도 당췌 영어엔 정이 안갑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뭣모르고 했고, 잘한다 소리도 들었지만요. ^^ 그렇담 독일어, 폴란드어, 영어를 하신다는거잖아요. 폴란드어를 하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재밌겠군요.

드팀전 2007-10-10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댓글 안달려고 했는데...이런 자학에는 또 안 달 수가 없어서요..^^
'철학을 공부하는 것'과 철학을 하는 것'은 다릅니다.도식적으로 나누자면 대학의 '철학과'는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지요.하지만 '철학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고 해야하는 문제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전 '철학'을 공부하진 않았지만 '철학하기'는 하고 있습니다.그렇기때문에 '철학'을 공부했는데 '철학'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철학'을 철회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또한 그런 자괴감때문이라면 '철학'에 대한 마음을 조금 너그럽게 가지시면 별 문제없을 듯 합니다.물론 이래저래해도 '철학'이러나 글자를 넣어서 부담스러우면 페이퍼에서 그것 삭제한다고 뭐가 큰 일이나겠습니까...본질적인 것은 그래도 유지되는데....(나 이제 진짜 잠수다.내 리뷰에 댓글도 안달아야지...아듀)

마늘빵 2007-10-10 09:47   좋아요 0 | URL
자학이라뇨. ^^ 네 저도 물론 철학을 '공부'하는 것과 '철학'하는 것의 차이야 알고 있죠. 대학에서 철학과 3년을 통해 제가 변화한건, 철학하지 않는 삶을 살다가 전과를 계기로 철학하는 삶을 살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하는거랍니다. '철학'하는 삶은 누구나 해야하는 거죠. 근데 이 글을 쓴건, '철학'하는 삶을 살지만, 자기성찰력이나 지혜가 제가 스스로를 바라봤을 때보다 아직 부족하다고 판단했기에 뺀거랍니다. 크크. 드팀전님 제가 댓글 달도록 자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2007-10-10 0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0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0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tonight 2007-10-10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중학교때 사촌언니가 대학생이었는데 그언니가 철학과였어요.
그때는 지루하고 인기없는 과! 막 비난-_-했는데
나중에 좀 커서 보니까 철학 너무 어려운 과목... -_-;;
(막 비난해놓고 저도 딱히 멋진-_-과 가지도 못했다는..)

마늘빵 2007-10-10 16:30   좋아요 0 | URL
음, 알고 보면 별 거 없는데,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죠. ^^
적어도 제게 있어선, 아직까지도 거대한 무엇으로 존재합니다.
과 이야기 나오니 무슨과인지 궁금해지는군요. :)

비로그인 2007-10-10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자들을 존경합니다.
평범한 이야기이겠지만 정치, 경제계의 인물들은 치지도외합니다.
김태길, 박이문, 윤사순 선생님..
부모님 빼놓고 제일 존경하는 분들입니다.
우연찮게도 세 분 모두 철학하시는 분들입니다.
윤리학, 분석철학, 유학..
아프락사스님도 철학을 하신다니 은근히 경외하지요.
젊은 학자, 아프락사스님의 장래를 기대합니다.
젊다는 것은 곧 가능성이므로..


마늘빵 2007-10-10 20:25   좋아요 0 | URL
한사님 오랫만이여요. 음, 근데 저는 학자의 길을 걸을 건 아닌지라 경외의 대상은 안될 듯 합니다. 하핫. 학자보다는 그냥 철학애호가로 머물고 싶어요. 김태길 선생의 <윤리학>은 유명하죠. 한편으론, 너무 지나치게 임용시험에 있어서 그 책이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학계의 영향력이란게, 뛰어난 학자라서보다는 간판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아서, 분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단 생각이에요. 박이문은 저도 좋아합니다. 윤사순 선생의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네요. ^^ 다 유명하신 분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