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좋은데, 번역이 만족스럽지 않다. 2016년에 초판 1쇄가 나왔으면 당시까지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른 번역어를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원저는 2014년에 나왔다). 그러다 보니 키워드가 부각되지 않는다. '행동경제학'이라는 학문으로서보다는 '자기계발서' 정도를 번역한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임하신 게 아닌가 생각된다(몇 군데 강하게 의심 드는 대목이 있는데 아직 원전을 확인하지 못하여 생략한다).




  존 스튜어트 밀을 기본 삼아 그에 터 잡은 개입주의 비판의 논리들을 논박하는 내용이다. 선스틴 교수도 대체로 비슷한 논지인데, Millian의 한 사람으로서 온건한 개입주의가 밀과 배치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몰랐던 사이에 『자유론』 번역이 두 권 더 나왔다. 2020년 4월에 나온 정영하, 산수야 본은 2015년에 나왔던 것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 넛지도 보통은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라 일컫는다.


  어떤 면에서 아주 새로운 내용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2008년에 나왔던 『Nudge』의 후일담 격으로 그간의 논의를 개조식에 가깝게 정리한다. 『Simpler』도 이 책과 함께 2012년 예일대 로스쿨 Storrs Lecture가 바탕이 되었다.



  다음 책들도 예일대 Storrs Lecture를 바탕으로 출간된 것들이다. https://yalebooks.yale.edu/series/the-storrs-lectures-series




  "넛지"(사람들을 행복한 삶으로 유도하는 정부의 부드러운 개입, 사람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게 돕는 정부의 은근한 개입)가 한국사회에서 화제를 모은지 10년이 더 지났고, 2009년 4월 첫 출간 후 2018년 11월에 책을 다시 낼 정도로 책이 성공하였는데, 여전히 우리는 어떤 행동을 주로 '형벌'에 기대어 금지하거나 도출하려고만 한다. 후진적인 방식일 뿐만 아니라 효과도 떨어진다. 행태적 요인에 의한 시장실패(behavioral market failure) 때문이다. 형벌은, '취향'이나 '생각'에는 간접적으로만 개입하면서(형벌의 표현 기능) 심리적/물리적 비용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행동'에 개입한다(규제수단 중에는 형벌과 달리 '결과' 자체에 바로 개입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책 72, 101-106쪽 참조). 그러나 사람들은 단기적 이익에 집착하고, 현저하지 않은 정보를 무시하며, 낙관 편향과 가용성 편향(책은 availability bias를 '입수 가능성 편향'으로 옮겼다)을 가지기 때문에 시스템 2에 힘입은 합리적인 비용-편익 분석이 일어나지 않는다. 형벌은 집행하는 데도 비용이 많이 든다. 요컨대 여러 가능한 수단들 가운데 형벌은 받는 쪽도 부과하는 쪽도 많은 비용을 감당하여야 하게 되는데, 이것은 입법 단계에서 고심하여 줄여야 할 비용이다. '어떤 행동을 억지하거나 이끌어내려면 어떤 선택 설계가 효과적인가'에 관하여 입법자들이 별 고민을 하지 않기 때문에(비용을 들이지 않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많은 비용을 들이고도 원하는 결과를 효과적으로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정책입안자들이 얄미울 정도로 똑똑해져야 한다. 일견 입장이 선명해 보이는 분들, 당파적 이익에 충실하신 분들은 한 발 거리를 둔 냉정한 비용-편익 분석을 경시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정치가 실용적 개방성을 갖지 못하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불행을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스틴 교수는 COVID-19의 대유행 속에서도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여러 Webinar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책도 꾸준히 내고 있다. 아직 아마존에 올라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발간되지 않은 것 같은데, 곧 『Too Much Information: Understanding What You Don't Want to Know』가 나올 예정이다(페이스북에 올려주셔서 알았다). 이 분야 주제들을 그야말로 구석구석, 독보적으로 다루고는 계시지만, 반열에 오르고 나시니 간혹 썩 뛰어난 내용이 없는 것 같은 뇌피셜이라도 모두 주목하고 경청하는 것 같다. 나와있는 책 중에는 『Conformity』, 『How Change Happens』가 최근작이고, 이번 포스팅과 관련하여 『On Freedom』이라는 책도 2019년에 나왔다. 전 세계에 엄청나게 팔리는 책을 매년 몇 권씩이나 내고 계시니, 모르긴 몰라도 인세수입이 상당하실 것 같다.


 



  『Why Nudge?』는 분량이 길지 않아서 인용된 단행본이 많지 않다. 번역된 책이 꽤 있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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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이익집단을 넘어선 진정한 보수주의가 형성될 수 있을까.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본디 투명하거나 일관된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서구에서 자유주의, 사회주의와 더불어 3대 정치 이데올로기를 이루었던 보수주의는, 한국에서 존중할 만한 이념과 세력으로 존재하지 못했다. 보수주의도, 자유주의도, 사회주의도 실력과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곧잘 스스로 지리멸렬에 빠지기도 하는 동안 경쟁다운 경쟁 한 번 없이 제각각 속물 보수주의, 속물 자유주의, 속물 사회주의에 휘청거리고 있다. 물론 보수주의보다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훨씬 강력한 실체였던 우리 현실에서, 이념적으로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까지 탄압받았던 사회주의를 나머지 둘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비판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아직 우리는 유의미한 사민주의 정당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아무튼 보수주의를 자임하는 분들이 오래 전부터 해온 습관대로 공포 마케팅, 증오 마케팅에 의존하는 한, 거부감, 혐오감만 키울 뿐 차오르는 미래 세대의 선택을 받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그 반대쪽도 상대를 자꾸 닮아가다간 마찬가지의 운명에 처할 테고...


  다니엘 벨은 자신을 "경제에서 사회주의자, 정치에서 자유주의자, 문화에서 보수주의자"로 묘사한 바 있는데(책 141쪽),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발전하려면 정치에서 '자유주의적 합리성'의 회복이 절실하다. 상대가 본 것을 내가 놓쳤을 수 있다고 쿨하게 인정하는 태도 말이다. 처음에는 어떤 추상적이고 고매한 기치를 위해 복무한다고 생각하면서 시작하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상대를 섬멸하는 전쟁이 되다 보면 어느새 대의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자신들을 그 기치와 동일시하면서 결국에는 조직 보위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단이기주의, 당파주의에 빠지게 된다. 


  지은이 로버트 니스벳은 2차세계대전에 육군으로 참전한 사회학자로, 처음에는 좌파적 입장을 띠었으나 그의 첫 저작 The Quest for Community: A Study in the Ethics of Order and Freedom (1953)이 보수주의 저작으로 평가받았고, 그 자신도 후에 철학적 보수주의로의 전향을 부인하지 않았다(책 147쪽). 이 책은 '복지 보수주의'를 제안하며 마치고 있는데, '신보수주의'의 창시자로 불리는 니스벳도 더 구체적으로는 '공동체주의자'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최근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이 심상정 정의당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의외의 의기투합이 있었다는 식의 보도가 있었는데,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어쨌든 '탈진영'은 한국 정치가 바람직하게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이라고 본다). 니스벳은 자신이 수학한 U.C.버클리에서 가르치다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력을 마쳤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에드먼드 버크와 보수주의』, 『현대사회의 정신사적 기초』라는 책이 있다.




  책은 자유주의의 존 스튜어트 밀, 사회주의의 맑스에 대응하는 인물로서 에드먼드 버크를 보수주의의 태두로 중요하게 다룬다. 보수주의 철학은 1790년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니스벳은 이후 2세기 동안 전개된 보수주의의 중심 논지도 그 확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책 17쪽).


  버크에게 자코뱅 혁명은, '자의적 권력'으로부터의 해방과 "실제로 살고 있는 인간과 그들의 관습, 습관을 위하여 자유를 추구"했던 미국 독립 혁명과는 정반대였다. "실제로 살고 있는 인간 군상들에는 별 관심 없[이], 혁명 지도자들[에 의해 제조된] 평등이란 이름의 평준화였고, 자유란 명목의 허무주의였다." 버크는 "정치적 지식인들"인 자코뱅이 "혁명적 인간Revolutionary Man의 창조에 방해가 되는 모든 제도들을 기꺼이 파괴[했다]"고 비판하면서 프랑스 혁명은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기보다는 절대 권력을 위한 투쟁"이라고 보았다(책 22-23, 25쪽). 당시 공안위원회의 '혁명적 인민'에 관한 다음과 같은 언설은 후세에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익숙한 형태로 반복된다("사회주의적 인간"). "당신은 당신이 해방하고자 하는 인민을 전적으로 재창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민의 편견을 파괴하고, 그 습관을 변경시키며, 필수적인 것들을 제한하고, 그 악덕을 제거하며, 그 욕망을 순화해야 한다." (책 29쪽) 이것은 공포정치의 논거가 되었다. "혁명 시 인민 정부의 토대는 덕성과 공포이다. 공포 없는 덕성은 무기력하고, 덕성 없는 공포는 살인이다." (로베스피에르, 책 30쪽).

  어빙 배빗은 훗날 『리더십과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적 지식인 집단을 모두 염두에 두고 '민주주의적 제국주의democratic imperialism'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고도로 조직적이고 단호한 소수의 의지가 소극적이고 비조직적인 대중의 의지를 압도하는 방식을 이른바 민주주의 운동만큼 분명히 보여 준 운동은 없었다." (책 60쪽) 민주주의로 인한 대중의 창조가 전체주의 국가 탄생의 싹이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도슨, 엘리엇, 커크에 이르는 보수주의자들은 물론이고, 부르크하르트, 니체, 키에르케고르, 호세 오르테가 가세트, 피터 드러커, 한나 아렌트도 유사한 지적을 했다, 책 77, 82쪽).


  "나는 미래에 대해 전혀 희망을 갖지 않는다. 일종의 로마 제정 시대처럼 반쯤은 참을 만한 몇 십 년의 세월이 우리에게 허용될 수도 있다. 내 의견은 민주주의자와 프롤레타리아트가 갈수록 가혹해지는 전제정치에 시달리게 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 부르크하르트(책 137쪽)


  니스벳은 『성찰』에 더하여 번역되지 않은 버크의 저작 중 『궁핍에 관한 상론 Thoughts and Details on Scarcity』을 추천했다.



  니스벳은 토크빌도 중요한 이론가로 다룬다. 토크빌은 프랑스 혁명가들을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을 경멸했으며, 교묘하고 독창적인 노선에 따라 제도를 개조하는 데 취미가 있었고, 헌정 체계의 오류가 있는 부분을 바로잡으려 하기보다는 논리적 규칙과 미리 고안한 체계에 따라 전체 헌정 체계를 재구축하고자 했다. 그 결과는 재앙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학자로서 장점인 것이 정치가에겐 악덕이 될 수 있으며, 위대한 문헌을 창조할 수 있는 바로 그 재능이 파국적인 혁명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코뱅의 언어는] 주로 그들이 읽은 책들에서 차용한 것으로서 추상적인 단어, 값싼 장식적 언설, 멋을 부리는 상투어 그리고 문학적인 문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책 25쪽)

  토크빌의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이 그런 내용이라는 것은 미처 몰랐는데, 과학에서 '오컴의 면도날'이 한 기준이 될 수 있어도, 정치에서 지나치게 완벽한 논리 체계, 단순하고 선명한 구호, 미사여구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은 맞는 말 같다. 버크는 국가 조직의 '기하학적 조화'를 추구하고, 이성의 이름으로 권력을 집중시키는 프랑스 혁명정부의 조치가, 이웃들 간의 지역적 연계를 파괴하고 "하위 공동체의 유대를 갈기갈기 찢어 [] 반사회적이고 반문명적이며 서로 고립된 입자들의 혼돈 상태로 해체"하였으며, "모든 시민을 뒤섞어 하나의 동질적인 대중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표현했다(책 72, 76쪽). 니스벳은 일종의 '말의 혁명'이었던 프랑스 혁명의 수사는 루소로부터 비롯되었고, 이것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드 메스트르의 다음과 같은 말은 버크나 토크빌 같은 보수주의자들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입장을 잘 대변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반혁명이 아니라, 혁명의 반대 상태이다." (책 42쪽)

  토크빌도 버크와 마찬가지로 『빈곤에 관한 회상록 Memoir on Pauperism』이라는 책을 썼다.



  전통적으로 볼 때 사회주의, 자유주의, 보수주의는, 흔히 '개인과 국가의 정당하고 바람직한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보수주의자들은 국가주의(민족주의)와 개인주의 양 극단 사이에 있는 사회질서 내의 전통적 중간 집단, 즉 '가족', '지역 공동체', '교구', '이웃' 그 밖에 모든 형태의 '상호 부조' 집단을 중시하고 신성시한다(책 43, 160쪽). 토크빌에 따를 때 이러한 "중개적 결사들은 개인을 중개하고 함양하는 기제로서 소중하고, 그에 못지않게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완충장치로서도 소중하다." (책 81쪽) 19세기 말 메이틀런드, 피기스, 비노그라도프는 중세 이후 서구사를 국가, 법인 단체, 개인의 삼각관계적 시각에서 조망했고, 이 지점에서 헨리 메인(신분 대 계약), 오토 폰 기르케(유기적인 것 대 개인주의적인 것), 막스 베버(전통적인 것 대 합리적인 것), 짐멜(소읍 대 대도시), 쿨리(1차 집단 대 2차 집단), 퇴니스(공동사회 대 이익사회) 등의 유형론이 분출한다.


  "사회적 유기체라는 근본적 관념으로부터 중세는 일련의 다른 관념들을 연역해 냈다. 우선, 다양한 교회 및 정치 단체 내에서 개인이 점하는 지위를 묘사하기 위해 구성원이라는 관념이 발전했고 [] 그 결과 이런 단체의 구성 요소인 개인들은 산술적으로 평등한 단위로서가 아니라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그리하여 상호 차별적으로 인식됐던 것이다."


- 오토 폰 기르케(책 63쪽)


  유기적 구조의 성장에 주목하는 역사발전학파에게 가장 큰 적은 벤담주의였다(책 43-44, 72-73, 122-123쪽). 버크를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에게 근대사는 권위와 자유의 중세적, 봉건적 종합이 꾸준히 몰락해 가는 과정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들에게 중세법상 '자유'란 법인 집단의 적절한 자율성에 대한 권리를 의미했는데, 서구사의 전체 형상은 이러한 사회적, 조합적 개념이 개인들로 이루어진 대중에 의해 지배되는 개념으로 해체되는 과정이었다(책 63쪽). 버크에게 최상의 통치는 '분권화'와 '자유방임'이었다. 여기서 '자유방임'은 개인주의에 입각한 자유주의와는 다른 것으로서, 사회에 존재하는 '중개적 구조'의 풍습을 전제하는 것이다(65쪽, 개인주의에 입각한 법은 관습의 창조자라기보다는 종종 그 파괴자가 될 수도 있다. 책 86쪽). 이는 헤겔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요약하자면, "사회적 유대의 강조, 개인의 상대적 경시, 전통에 대한 애착, 위계질서, 영웅주의, [] 그리고 모든 정치적인 것을 봉건화, 분건화하려는 경향"이다(책 67쪽). 어찌 보면, 미국 헌정사 역시도 "'개인' 권리의 극대화를 주장하는 세력과, 주 및 지역 공동체의 '법인체적' 권리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세력 간 투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이에 관하여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정부'는 강하고 통일되어야 하지만, '행정'은 자유와 질서 모두를 위해서 가능한 한 분권화, 지방화되어야 하며 가급적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기술했다(책 70쪽).




  보수주의자들에게 '역사'는 그 본질에 있어 '경험'이고, 그들의 역사주의는 추상적이고 연역적인 사고에 우선하는 경험에 대한 신뢰에 기초를 두고 있다(책 45쪽). "한 국민의 진정한 헌법은 한 장의 문서가 아니라 그 제도들의 역사에 있다"는 것이다(버크, 책 50쪽). 만하임은 "보수주의자로서 진정 사물을 본다는 것은 [] 과거에 근거한 상황과 배경에서 도출된 태도에 입각해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책 46쪽). 증거가 충분히 쌓이기 전에는 경험에서 비롯된 명제를 쉽게 수정하지 않는 태도(귀무가설을 기각하지 않는 태도)를 '인식론적 보수주의'라 이름할 수 있을까. "변화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 때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고장 나지 않았으면 고치지 말라"는 것이다. 버크에게 '혁신의 정신'이란 "변화 그 자체를 위한 변화에 대한 우상숭배이고, 무한히 새로운 것을 통해 기분 전환과 자극을 추구하는 대중들에게 만연된 경박한 욕구[로서], 인간 제도에 적용될 때 특히 치명적[인 것이었다]." (책 50쪽). "진화론적 선택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지혜를 초월한 엄청난 지혜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자연적인 변화와 발전 과정에 의한 것 이상을 해내려는 사육자의 노력은 [] 터무니없는 짓이다." (책 53쪽)

  역사학자 중에는 '정확히 실제 일어난 그대로의 wie es eigentlich gewesen ist' 과거를 회복하라고 호소한 랑케가 대표적이고(책 49쪽), 오크숏Michael Oakeshott과 베겔린Eric Voegelin 역시 경험과 역사의 '구체성'을 강조한다. 이들은 합리주의자들의 '자연적', '추론적', '가설적', '논리적' 역사는 추상적 이론일 뿐 역사가 아니라고 본다. 루소의 다음과 같은 입장은 이들의 입장과 대척을 이룬다. "사실을 논외로 두고 시작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논의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가 여기서 착수하고 있는 검증은 역사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역사가의 연대기보다는 물리학자의 가설과 더욱 비슷한) 조건적이고 가설적인 추론과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책 47쪽) 과거에 대한 '주관적 낭만화'도, 미래에 대한 '진보적 발전주의'도 모두 거부 대상이다.


  "진보주의 사상은 결국 모든 것이 자신을 초월하는 것, 곧 미래의 유토피아나 어떤 초월적 규범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도출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사물의 모든 의미를 그 '배후'에 놓여 있는 것, 즉 시간상의 과거나 진화론적 기원에서 발견한다. 진보주의자는 사물을 해석하는 데 있어 미래를 사용하지만 보수주의자는 과거를 사용한다."


- 칼 만하임(책 135쪽)




  그 밖에도 짧은 분량 안에 많은 내용이 나오지만 이 정도로 정리를 마친다. 강정인 교수의 번역이 그리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덕분에 어렴풋했던 보수주의에 대한 관념이 조금 잡히는 것 같기도 하다. "신에 대한 신앙을 상실한 결과 야기되는 위험은 인간이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것이든 믿어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체스터턴, 책 114쪽)라는 견지에서 종교의 중시, "한 (원숙한 시인의) 작품에서 가장 우수하고 가장 개성적인 부분은, 죽은 시인들과 그의 선조들이 가장 정력적으로 그들의 불멸성을 주장하는 부분일 것이다. 예술가는 조국의 문학 전체에 부단히 자신을 바친다. [] 예술가의 진보는 지속적인 자기희생이며, 지속적인 개성의 소멸이다."(엘리엇, 책 132쪽)로 표현된 것과 같은 예술에서 전통의 강조도 납득이 갔지만, '재산'이나 '권위'에 관한 내용은 살짝 궤변 같기도 하고 와닿지 않았다. '반기술주의' 역시 지금 시각에서는 보수주의의 특질로 보기 어렵다.


결코 보수주의자는 아니지만, 군나르 뮈르달은 우리 시대에 이 점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보수주의 진영은 그들의 ‘현실주의‘에 의해 상당한 이득을 누렸다. 실제 활동에서 보수주의자들은 존재하는 질서 이외의 ‘자연적인 질서‘에 대한 사변을 삼갔고, 대신 사회를 있는 그대로 연구했으며, 그 결과 실제로 근대 사회 과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 P118

"자연법은 역사적 방법 앞에서는 한순간도 그 발판을 유지하지 못했다." - 메인 - P122

"진보주의 사상은 결국 모든 것이 자신을 초월한는 것, 곧 미래의 유토피아나 어떤 초월적 규범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도출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사물의 모든 의미를 그 ‘배후‘에 놓여 있는 것, 즉 시간상의 과거나 진화론적 기원에서 발견한다. 진보주의자는 사물을 해석하는 데 있어 미래를 사용하지만 보수주의자는 과거를 사용한다." - 칼 만하임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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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을 읽던 중에 가볍게 읽으려고 서재에 있던 책을 집었다. 짝의 학부 수업 교재였다. 20대에는 경제사상사가 더 재미있게 읽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훈고학은 실제 세계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사료를 바탕으로 전개한 경제사가 훨씬 낫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는 그야말로 ‘세계화 담론‘이 열풍이었다.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진실』, 『세계화의 덫』, 프랑수아 셰네의 『자본의 세계화』/『금융의 세계화』, 『세계화와 그 불만』(조지프 스티글리츠, 무려 올해 신판이 다시 나왔다.), 『빈곤의 세계화』(미셸 초스도프스키), 『전지구적 변환』(데이비드 헬드 외), 『신자유주의와 노동의 위기』, 또 한편에서는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같은 책들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또 읽혔다. 국내에서는 민주/반민주 전선을 역사적으로 해소하면서 반/신자유주의를 새로운 전선으로 세우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그런데 민주/반민주 전선을 여전히 붙잡고 있었던 이들은 도리어 퇴행하여 급기야 친일/반일 전선을 불러내고 있다).


이제 세계화는, 구태여 언급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당연한 전제가 되었고, 세계사에서 처음 맞은 명실상부한 ‘글로벌 팬데믹‘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속속들이 세계화되어 있었는지를 여실히 목도하고 있다. 동시에, 1986년 9월 우루과이에서 시작된 협상이 1993년 말 타결되어 1995년 1월 1일 WTO 출범으로 공식화된 세계화가(우리나라에서는 1994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의 호주 방문 직후에 발표된 ‘세계화 선언‘ 이후, 그 개념에 관한 혼란 속에서 갑작스럽고 산만하게 ‘세계화추진위원회‘에 의하여 ˝세계화˝가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 당면해 있다.

[트럼프가 운이 좋거나 힐러리가 졌다기보다는, 트럼프가 다수 미국민의 불만을 나름대로 대변하고 있었고 (가치판단을 일단 접어 두고라도) 모종의 새로운 ‘시대정신‘-고립주의 또는 반세계주의(?)-을 담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역사적 사명'을 띠고 트럼프가 당선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편이긴 했는데,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그 인격적 특성이 이런 식으로 세계를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촉매가 될 줄은 몰랐다.]

책은 2005년에 나온 것으로, 제목에 붙은 ˝세계화 시대에 돌아보는˝이라는 맥락이 아주 뚜렷하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분량이 짧고 주요한 맥은 잘 짚혀 있어서 별다른 준비 없이 수월하게 통독, 정리할 수 있다. (필자는 그냥 집에 책이 있었기 때문에 옛날 책을 읽었지만, 지금은 2019년 판을 읽으시면 될 것 같다.)

읽으면서 문득,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지방의 역량이 더 중요해지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방제에 준할 정도로 지방자치제가 실질화, 합리화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지방정치는 중앙정치에 비하여 훨씬 심각하게 구태의연하고 전근대적인 상태라 안타깝다. 표만 의식한 나눠먹기 식의 기계적, 도식적 분권으로 피 같은 예산을 땅에 묻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오송역을 언제까지 저대로 둘 것인지...). 지역 거점을 중심으로 각 지역이 경쟁, 성장하게 하고, 연방(중앙)정부에서는 원칙에 따라 조율해야 한다. (생존)경쟁에 몰려봐야 외국 나가서까지 추태 부리고 지역민 얼굴에 똥칠하는 수준 낮은 의원들을 도태시킨다. 당만 보고 표를 주지 않고 좋은 행정가, 좋은 정치가를 고심하여 뽑는다. 이는 통일에 대비한 준비 차원에서도 필요할 것 같다.


10여 년 동안 다른 버전의 경제사 책을 꽤 내셨다. 2005년 책이 2012년, 2014년에 이어 2019년 10월 출간작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세계화'라는 화두는 꾸준히 전면에 내세우고 계시고, 『산업재해의 탄생』이라는 책에 눈길이 간다.





대학 다닐 때는 김종현 저를 많이 읽고 경제사 교과서가 마땅치 않았는데, 찾아보니 김종현 저는 어느덧 절판되고 새로 나온 책들이 좀 있다.



이와 같은 열변이 널리 확산된 결과, 많은 논객들은 자국의 경제적·사회적 병폐가 사실은 주로 국내적인 - 대체로 정치적인 - 요인 때문임이 분명한 때조차도 일단은 무조건 글로벌 마켓 때문이라고 비난해 놓고 있는 실정이다.

- 폴 크루그먼, 『우울한 경제학자의 유쾌한 에세이』 중에서

그가 주장하는 핵심적 논지는 세계화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의 움직임이라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의 추세와는 별도로 다루어져야 할 많은 사안에 대해서도 세계화를 관련짓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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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2023-02-21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포스트 코로나 시기인 지금, 세계화가 아니라 보호무역이 담론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결국 세계화나 신자유주의, 보호무역 따위 담론은 헤게머니를 가진 국가의 생존전락, 사다리 걷어차기 일뿐이었습니다. 학자와 엘리트들은 나팔수 였을 뿐입니다. 글잘쓰시네요
 



  음양오행설이나 사주명리학은 빅데이터의 시대에 검증 또는 반증될 수 있을까.

  글을 들어가기에 앞서, '음양오행과 사주'를 특집으로 다룬 『스켑틱 제6호』를 우선 참조.




  워낙에 그 영향력이 큰 문화권에 속해있기도 하고(음양과를 시행한 성리학 왕조가 비교적 최근까지 500년을 지속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음양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3029), 이것의 '일견' 정합적인 이론체계에 대한, 수리적 미감(數理的 美感)에서 비롯된 기본적 흥미가 없지는 않다(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이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관하여 칼 포퍼가 지적한 것처럼, 그것이 반증불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최근 들어서는 강헌, 고미숙 등 진보적 작가들이 뛰어들기도 했다(『주역』은 결이 좀 다르지만 여기까지로 넓히면 황태연까지).

  혹시라도 음양오행설, 사주명리학 이론이 지금에 와서 영어로 그럴싸하게 번역된다면 상당히 잘 팔릴 소지도 있다고 본다(뭐... '진화심리학'의 '밈 이론'도 팔리기는 잘 팔리지 않는가). 진지하게 소개된 이후에는 당연히 혹독한 비판과 검증에 직면할 테고... 아무튼 중국이나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이를 더 오래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국 문화가 지금처럼 많이 알려지다 보면 언젠가는 서구에도 체계적으로 소개될 것 같다. 일단 썰 자체가 문학적으로 흥미롭긴 하므로.

 




  우리가 (그 사상이 상당히 겹치는) 피타고라스, 엠페도클레스, 헤라클레이토스 등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을 일컬어 과학이라 하지 않고,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기변동이론이나 지오반니 아리기의 '체계적 축적순환'에 관한 이론이 경제순환에 관한 기본적 사고틀을 제공하는 '썰'로서 의미가 있을지언정 과학으로서 위치를 점하지는 못한 것처럼(아리기는 페르낭 브로델의 장기순환-『물질문명과 자본주의』보다는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이나 '콘트라티예프 파동' 같은 것에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이들을 비판적으로 승계하였다. 관련하여 투자자들 사이에 여전히 자주 언급되는 '엘리어트 파동이론' 같은 것도 있다),

  또 엘리아데나 니체의 '영원회귀'를 (인)문학 차원을 넘는 과학으로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음양오행설을 연상시키는) 바슐라르를 하나의 '스타일'로서 재미있게 읽으며,

  역사에서 일정한 순환을 주장한 이븐 칼둔, 슈펭글러, 토인비의 저술을 보편적 역사법칙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관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주역』을 나머지 사서삼경과 다른 유교 저술이 그러하듯 윤리학 차원에서는 문제없이 수용할 수 있는 것처럼,

  음양오행 명리학도, 한창 잘나갈 때 교만하지 않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좌절하지 않는, 바꾸어 말해 '일희일비'하지 않을 것을 가르쳐주는 '순환적 세계관'에 관한 하나의 흥미로운 이론체계 정도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싶다.




  호호당 김태규 선생은 일찍이 2001년경부터 프레시안에 '명리학' 연재를 하셨고(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10639?no=110639), 지금은 블로그에서 꾸준히 글을 쓰고 계신데(http://www.hohodang.com/https://hohodang.tistory.com/), 2014년경부터는 '자연순환운명학'이라는 이름하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epicycle; 원의 둘레를 도는 원) 개념에 착안한 360년 순환, 60년 순환, 60개월 순환과 그보다 작은 마디들의 순환에 관하여 쓰고 계신다(이는 일반적 명리학에는 없는 개념이다. 한편 주전원은 부분이 전체를 닮은 일종의 '프랙탈'인데, 영어 문헌 중에 주전원과 프랙탈 둘을 함께 다룬 것들이 꽤 있다).

  실로 지상의 세계가 60초가 모인 1분, 60분이 모인 1시간, 24시간이 모인 하루, 30일이 모인 한 달, 12개월이 모인 1년, 또 그것은 360 + a가 모인 1년으로서 '60진법'에 따라 돌아가고 있기는 하고(원의 내각을 360도로 '규정'), 이는 바빌로니아 문명에서 발전해 나간 서양 역시 마찬가지이다.

  60진법은 어떤 '리듬'을 사고하기에 대단히 유용하다. 그것은 60이 약수(約數)를 가장 효율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는 숫자이기 때문이다(음악도 크게는 2박자와 3박자, 그것의 결합이나 배수로 나눌 수 있고, 지휘법에서도 그것이 기본이다). 즉, 60은 1, 2, 3, 4, 5, 6, 10, 12, 15, 20, 30, 60 등 12개의 약수를 가지고, 이는 1, 2, 4, 5, 10, 20, 25, 50, 100 등 약수를 9개만 가지는 100보다 3개나 많다(책 64쪽).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지구의 공전주기는 365.2422일인데('회귀년' 기준), 이를 360으로 나누면 약 1.01456167이 나오고, 여기서 1을 빼고 남는 0.01456167이 일종의 '클리나멘'으로서 '반복' 속에 나타나는 '차이' 내지 "카오스적 창발성"이라는 것이 김태규 선생의 주장이다(책 61, 284쪽, 루크레티우스와 들뢰즈는 인용자가 빌려 온 것이다. 루크레티우스의 '클리나멘' 이론은 알튀세르가 나중에 '우발성의 유물론' 내지 '마주침의 유물론'으로 정식화하기도 했다. 여기서 베르그손과 만날 수도 있을까). 그리고 이 우수리 0.01456167은 30년에 가까운 29년째에 50%를 넘어서고, 48년째에 100%를 넘어서며, 60년째에 변화율이 약 138%가 된다(책은 60년째에 남는 38%를 황금분할로 설명하고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숫자놀음'을 바탕으로 회복-확장-후퇴-수축, 또는 봄-여름-가을-겨울(24절기)로 이어지는 (경기)순환 내지 (경기)변동에 관한 이론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아래 그림은 KDI 경제정보센터 > 경제교육 > 학습자료 > 경제개념 http://eiec.kdi.re.kr/material/conceptList.do?depth01=00002000010000100010&idx=149 에서 가지고 왔다).


경제개념 이미지



  자연은 어느 정도 순환하고 있고, "차면 기운다"는 것은, 특히 크고 작은 부분순환 개념까지 도입할 경우 얼마간 탈출 불가능한(반증 불가능한) 논리이다 보니, 이러한 '사인파(sine wave)'에 입각한 변동이론 내지 "태극도설"은 끼워 맞출라 치면 한없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천하무적의 이론일 수도 있다(경제학에서도 대략 60년을 주기로 한 콘트라티예프 파동, 20년 주기의 쿠즈네츠 파동, 10년 주기의 주글라 파동, 3~5년 주기의 키친 파동 등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 개념으로 포섭할 만한 이론들이 주장된 바 있다).


  2008년에 나온 이 책이나 최근까지 블로그 글을 보면, 1972년 유신헌법의 30년 뒤로서 사인곡선의 반대편인 2002년에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이 있고, 미군 진주 후 30여 년만인 1982년에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등을 계기로 NL운동이 등장하였지만, 다시 30여 년만인 2012년이면 이른바 '종북주의'의 종언을 고할 것이라는 예언(통진당에 대하여 2013. 11. 5. 대한민국 정부는 정당해산 심판을 청구하였고, 2014. 12. 19. 헌법재판소 결정이 있었다) 등 대한민국,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또 빌 게이츠 등 여러 개인의 순환에 관한 '아주' 많은 사례가 나름의 이론을 바탕으로 분석되어 있는데, '썰'로서 흥미로우면서도 결절이 되는 사건을 어떻게 취사선택하는가에 따라 '확증편향'을 강화할 소지가 크다고 본다(책의 논리에 따르면, 1986년 우리는 사상 처음으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1987년 국운의 이른바 '하지'를 기념하는 여름 축제로서 6월 항쟁에 이은 6.29 선언이 있었고,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이를 만방에 고했는데, 30년이 지난 2016년인 '동지'에 와서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다시 원점에서 새로 올 봄을 준비하여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24년 '입춘'을 기점으로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어 점차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는 주장에는 왠지 기대어 보고 싶은 심정도 든다). 아무튼 이 책에서 부동산이나 증시의 장기추세적 하락에 관하여 쓴 부분은, 논리적인 일면이 없지는 않지만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 와서 읽으면 성급했다고 보인다(청와대 전 정책실장께서도 "부동산은 끝났다"는 주장을 과감히 하시고는 상당한 집값 상승을 누리셨으니... 여담이나, 우리 사회에서 집값 문제에 관하여 전국적 차원에서 거시적 추세를 보려는 시도는, 개개인이 처한 미시적 차원에서 '조금이라도 더 여건이 나은 집에서 살고 싶은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 한-예컨대 장하성 주중대사의 "모두가 강남 살 이유는 없다."는 마인드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 밖에도 지금은 들어맞지 않게 된 대목이 적지 않다. 물론 책 제목과도 관련하여, 주식의 수익률을 따질 때 물가상승률, 즉 '화폐착각'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내용은 당연히 문제가 없다.




  뭐 이러나 저러나 변동과 순환은 경제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에서도 흥미를 끄는 주제임에 분명하고, 그 논리와 법칙을 체계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오랜 숙원인 것 같다. 그리고 음양오행 명리학도 '윤리학'이나 '문학' 차원에서라면 쓸모나 효용이 전혀 없다고까지 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세상의 많은 인문학, 사회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대개 '썰'에 불과한데, 이들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반증할 수 없다) 하여 모조리 배척, 폐기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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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문제 - 시민의 정치적 책임
카를 야스퍼스 지음, 이재승 옮김 / 앨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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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해제가 지극히 충실하여 본문에 대한 큰 기대를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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