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꿈을 꿨다.
나는 상단 간 무역을 보호하는 용병이었다. 어딘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라크의 티그리트나 팔루자쯤 되는 무역도시였다. 어느 날 상단의 상선이 아주 먼 곳으로부터 도착한 물건들을 받아 하역하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구름처럼 먼지를 일으키며 지프차가 몇 대 다가왔다. 뭐냐,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는 순간 탕! 하고 저 편으로부터 총알이 날아왔다. IS인지 뭔지 확실치는 않았지만 우선 대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황급히 소총을 들고 저 편을 조준하는 찰나, 두두두두 소리가 들리며 등 뒤의 석조계단에서 돌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헉, 이건 5.56mm가 아니다. 최소한 7.62mm. 기관총이다.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순식간에 수많은 상인과 민간인들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나는 대응을 포기하고 계단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가렸다. 기관총을 상대로 고작 머리를 가리다니. 스스로를 힐난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때였다. 별안간 내 옆의 청년이 흐느꼈다. 그가 동료였는지, 상단의 선원이었는지, 뭐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난다. 다만 곁눈질로 본 외모만은 또렷하다. 장발에 굽슬굽슬 탐스런 머리칼. 야, 임마 지금 울 때가 아니잖아. 고개라도 숙이라고. 난 한심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쟤가 무서워서 정신이 나갔나?
다시 총알세례가 주변을 훑고 지나갔고 난 더 납작 엎드렸다. 그 와중에도 그의 울음소리는 똑똑히 들려왔다. 가만, 그런데 그 소리엔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공포가 아니라 비탄의 농도가 아주 높았던 것이다. 북 밭치는 슬픔을 게워내는 그런 종류의 울음이었다. 뭐지?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봤다.
Jesus.
그는, 예수였다.
별 거룩한 개꿈을 다 꿨네.
#. 2
생각해보면, 예수는 종종 울었다.
나사로의 죽음을 대하여 울었고, 사랑을 주었으나 그 사랑이 외면당할 때 울었고, 인간으로서 삶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해서 울었다.
그는 내 꿈에서 또 울고 있었다. 하긴, 내 무의식의 세계에는 사랑이 없었고, 오로지 죽음과 위기만 가득했던 것이다.
예수의 최대 아이러니는 영원한 생명(비유든 상징이든 믿음이든 간에)을 소유했음에도 이 유한하고 볼품없는 삶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다는 것에 있다. 그는 신성을 가졌으나, 인간으로서의 구차한 삶을 끝내 버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이었다.
사람다운 예수의 모습은 예수 사후에 근접한 문서일수록 더 사실적으로 드러난다. 반면 사후 오랜 시기 후에 형성된 문서일수록 가필되고 채색된 느낌이 강하다. 사후 90~100년에 편찬된 요한복음은 그야말로 요란하다. 태초에, 로고스에, 빛과 어둠까지 등장한다. 영지주의자들의 사상으로 편집된 예수의 모습이다. 예수 사후 60여년 경 작성된 누가복음은 로마 코스모폴리탄의 관점으로 쓰였다. 누가복음보다 20년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마태복음은 유대교의 지평에서, 거기서 또 20년쯤 더 이전으로 소급하는 마가복음에는 갈릴리 지평에서 예수를 조망한다. 요한복음에서 마가복음으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드러나는 것은, 투박하지만 진솔한 예수의 모습이다.
마가복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수 사후 40여년경 성립된 경전이다. 정보화 시대에 사는 우리도 한 세대 전의 일에 깜깜한데 그 시절은 오죽했을까. 그래서 학자들은 예수의 모습에 가까운 더 선대의 자료를 찾아 헤맸고 '마태'와 '누가'에 포함된 '마가자료'를 소거하고 남은 공통된 예수의 어록에 주목했다. 아마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편집자들이 참고한 예수의 어록 자료가 있지 않을까? 성서문헌학자들은 이 것을 Q자료라고 불렀다. (‘Q’는 Quelle, ‘자료’라는 말이다.)
그러다 지난 세기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다. 퇴비 찾던 농부가 발견한 이 꾸러미에는 ‘도마복음’이 포함되어 있었고 도마복음은 학자들이 추정했던 Q문서의 35%를 포함하고 있었다. 다소 이견이 있으나 도마복음의 성립연대는 마가복음의 성립연대인 예수 사후 40여년보다 10~2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전승이 아니라 진짜 예수를 만난 자가, 예수의 입에서 나온 진짜 얘기를 실제로 적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문서가 나타난 것이다.
도마복음의 예수는 말한다. “너희가 살아있을 동안에 살아있는 자를 주의 깊게 보라. 죽어서는 아무리 살아있는 자를 보려고 하여도 그를 볼 수 없을 터이니.” 소박한 그의 이야기에는 허망한 과거도 허황된 미래도 없다. ‘지금’, ‘여기’, ‘우리’가 있을 뿐이다. 이 ‘현실의 지평’에서 쓰인 몇 장의 문서는 철학적 거대담론도 가필된 종교적 독선도 침묵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너희가 빛 속에 거하게 되었을 때, 과연 너희는 무엇을 할 것이냐.” 담담하게 ‘구원’ 그 이후를 질문하는 사람의 아들에게 오늘날 교회는 어떤 역량으로 무엇을 대답할 수 있는가.
도마복음과 Q문서의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는 기적을 만들어 내는 마법사도 아니고, 신화적 영웅도 아니다. 갓 잡은 생선 살처럼 날 것 같은 얘기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싱싱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평온해지는 마음을 천국이라고 생각한다. 기성 교회의 기준에선 이단 심판 감이겠지만.
그러고 보면 빌어먹을, 이천년이 넘도록 인류는 예수를 착취하고만 있지 않은가. 권력투쟁으로 간추려 모은 성서 꾸러미들을 전가의 보도처럼 들이밀고 그럴듯하게 포장된 해석을 강요해 왔다. 그들의 예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이고, 영생의 아이콘이다. 혹은 문화적 우월감의 상징이며, 또 돈벌이의 수단이다. 그의 이름을 간판처럼 걸고 국경을 나누고, 교파를 나누고, 심지어 인종을 나눠 싸웠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고 있다.
예수가 티그리트로 돌아왔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IS무리들의 학살 장면을 목도한다면,
물론, 울겠지.
#. 3
어제, 노인과 저녁을 먹으면서 꿈 얘기를 했다.
“글쎄 그 남자가 예수였지 뭐야?”
노인은 조금 심드렁했다.
“그랬구나.”
삶은 계란 세 개가 식탁에 올라왔길래 물었다.
“근데 웬 삶은 계란이야?”
약간 한숨 섞인 목소리.
“부활절이잖아.”
.. 오.
#. 4
오래, 그를 떠나 있었다.
앞으로도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다.
도마복음의 그는 말한다.
“방랑하는 자들이 되어라” (Juses said, "Be passersby")
이것이 나의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