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 루리와 런닝을 하고 있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루리야, 우리 오늘은 멀리 가 보는 게 어때?”

 

하지만 초반에 오버 페이스를 한 루리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나는 루리의 신체적 건강이 조금 염려되어 말 했다.

 

게으르게 구니까 살이 안 빠지는 거야.”

 

그 순간 루리는 달리기를 멈추고 우뚝 섰다. 뭐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난데없이 휘몰아치는 레프트 바디 블로우 콤비네이션. 울면서 저항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너나 가.”

 

어쩔수 없이 울면서 혼자 먼 길로 뛰어갔다. 그리고 20여분 후, 숨을 헐떡거리며 집에 들어갔을 때, 루리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누운 채 마리텔을 시청하고 있었다.

 

오오이(おおい).”

 

왼쪽 손을 조금 들었던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나는 골난 눈빛으로 루리를 쏘아봤지만. 상대는 루리였다. 일상적인 주말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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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5-08-26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데없이 휘몰아치는 레프트 바디 블로우 콤비네이션˝

여기서 의문....

루리의 펀치력이 약한 것인가요. 아님 말미잘님의 맵집이 강한 것일까요?

그걸 맞고 런닝을 계속했다는 건 이 둘중에 하나...같은데 말이죠,

뷰리풀말미잘 2015-08-26 18:50   좋아요 0 | URL
루리의 주먹이 약할리 없으니깐 제 맷집이 좋다는 결론이...
 

 

Alexi Murdoch - Orange Sky

 

Well I had a dream
I stood beneath an orange sky
Yes I had a dream
I stood beneath an orange sky
With my brother standing by
With my brother standing by
I said Brother, you know you know
It's a long road we've been walking on
Brother you know it is you know it is
Such a long road we've been walking on

And I had a dream
I stood beneath an orange sky
With my sister standing by
With my sister standing by
I said Sister, here is what I know now
Here is what I know now
Goes like this..
In your love, my salvation lies
In your love, my salvation lies
In your love, my salvation lies
In your love, in your love, in your love

But sister you know I'm so weary
And you know sister
My hearts been broken
Sometimes, sometimes
My mind is too strong to carry on
Too strong to carry on

When I am alone
When I've thrown off the weight of this crazy stone
When I've lost all care for the things I own
That's when I miss you, that's when I miss you, that's when I miss you
You who are my home
You who are my home
And here is what I know now
Here is what I know now
Goes like this..
In your love, my salvation lies
In your love, my salvation lies
In your love, my salvation lies
In your love, my salvation lies
In your love, my salvation lies
In your love, my salvation lies
In your love, my salvation lies
In your love, in your love, in your love

Well I had a dream
I stood beneath an orange sky
Yes I had a dream
I stood beneath an orange sky
With my brother and my sister standing by
With my brother and my sister standing by
With my brother and my sister standing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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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벽에 깼다. 나는 울고 있었다. 축축해진 수면 안대를 벗고 벽에 기댔다. 눅눅하고 차가웠다. 내가 운다는 사실도, 등으로 느끼는 벽의 촉감도 낯설었다. 한쪽 벽에 나란히 세워둔 책장들이 파도처럼 덮쳐오고 있었다. 문고리를 잠가 세계로부터 유폐된 내 방에서 불안과, 불면과, 우울만이 익숙했다.

 

꿈에서 P의 트위터가 다시 열려있었다. 죽은 그 대신 그의 아내가 그를 가장해 글을 올리고 있었다. 링크한 유투브 동영상으로 그가 가르치던 제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낯익은 자들도, 그렇지 않은 자들의 모습도 있었다. 일상적인 풍경이었는데, 왜 그게 그렇게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

 

방에는 시계가 없어서 몇 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스마트폰 불빛으로 잠을 깨고 싶지 않아서 한참 웅크리고 있었다. 작은 짐승처럼 보였을까.


 

#. 2

 

사실, P는 생전에 트위터 같은 걸 운영한 일이 없다. 나도 아이디 하나를 잃어버린 이후에 트위터를 전혀 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그 세계에서 내 트친들의 면면이 화려했는데 그 중에는 춈스키와 리처드 도킨스도 있었다. 사샤 그레이도 있었다! (수퍼 내츄럴에서 딘 윈체스터가 좋아하는 포르노 배우다. 앙칼진 고양이처럼 생겼다.)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는데, 그 뿐이었다. 어차피 그들의 가장 정제된 이야기는 책과 영상으로 볼 수 있으니까. 일주일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다가 비번을 까먹고 말았다.

 

며칠 전에는 다음에 접속이 안 됐다. 비밀번호를 잘못 입력했나. 다섯 번, 열 번, 스무 번, 백번을 입력해도 마찬가지였다. 전화번호, 핀번호 비밀번호 찾기로도 실패. 고객센터에서도 영문을 모르겠단다. 아이디는 존재하는데 개인정보가 다르다고. 해킹 가능성을 말하자 그럼 사이버 수사대에 수사를 의뢰하는 게 낫단다. 몇 가지 옵션이 있긴 했지만 불법에 가깝고, 무엇보다 영 귀찮다. 그래서 17년을 넘게 사용된 나의 메일 계정은 저 세상으로 사라졌다. 입력된 친구들의 주소록도, 설문조사 패널로 참여하던 정부기관 연락처도, 재즈피아노 같은 추억의 카페들도 접속할 길이 없어졌다.

 

영원한 Log Out.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빌 게이츠는 죽음을 log out으로 표현했단다. 나의 죽음도 이렇게 불현듯 찾아오게 될까. 아마 그럴 것이다.


 

#. 3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의 입을 빌려 "죽음이란 삶의 대극對極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내가 죽음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 것은 바로 그 구절의 영향이었다.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의 인간’. 다치바나 다카시의 ‘임사 체험’.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 셀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같은 본격적으로 죽음을 다룬 저작들은 죽음을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줬고, 유학의 사상가들이나, 불교의 몇몇 경전들, 스타니슬라프그로프 같은 의학자들에게도 힌트를 얻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죽음에 익숙해질 수 있게 도와준 것은 꿈이었다. 꿈은 내게 수 없이 많은 죽음을 시뮬레이션 해 줬다. 남의 죽음도, 나의 죽음도. 나는 꿈에서 남의 죽음보다 나의 죽음에 관대한 편이었다. 꿈은 간혹 내게 죽음에 대한 선택권을 부여했는데 꿈이 내게 죽음과 견주어 선택하게 하는 것들은 명예나, 대의나, 자존심 같은 관념적인 것들, 혹은 다른 누군가의 목숨처럼 소중한 것들이었고, 나는 그런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주 내 목숨을 버렸다.

 

닥터는 이 점을 자살충동과 연관시키곤 했다. (물론 그렇게 얘기하진 않았지만, 쉽게 알 수 있었다.)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삶의 의지마저 약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녀에게 납득시키기 어려웠다.

 

누군가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낮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하긴, 열여덟 살 때였던가. 내가 장기기증 서약을 하고 우편으로 스티커를 받아왔을 때 가족들은 식사 자리에서 그걸 자랑하는 내 모습에 깊은 빡침을 느꼈다. “내 말 좀 들어봐, 죽음이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까지 말 했을 때, 전례 없는 속도로 밥숟갈을 휘두르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하다.

 


#. 4

 

불을 켜고, 책을 한 권 빼 왔다.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요즘 페미니즘 관련도서가 잘 나가는 모양이다. 듣자하니 ‘이갈리아의 딸들’까지 순위권으로 올라왔다고. 페미니즘 단체에서는 일베에게 공로상이라도 줘야 할 것 같다.

 

이 책의 제목은 영, 정이 가지 않는다. 어감이 아름답지 않다. 여덟 명의 필자들의 글을 엮었는데 임옥희 선생이나 정희진 선생처럼 반가운 이름들도, 시우, 나라, 루인처럼 새로운 필자들의 이름도 보인다.

 

책은 전반적으로 기획에 실패한 느낌을 준다. 책의 제목이 필자들의 논점과 관점을 포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의 윤보라, 임옥희, 정희진이 보수적인 페미니즘 진영(다른 표현 없나)을 대변한다면, 글과 뒤의 시우, 루인, 나라는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성 소수자 입장을 대변한다. 뒷쪽 양반들은 앞쪽 양반들의 젠더 이분법적 페미니즘 논의에 불만이 많다. 이들이 보기에, 마치 가부장제가 여성을 소외시켰듯 기존 페미니즘 진영은 성 소수자들을 소외시켜왔기 때문이다. 책은 비록 기획에는 실패했으나, 충돌하는 생각들이 불꽃을 만들어 내듯, 덕분에 더 반짝반짝해졌다.

 

임옥희 선생의 ‘주체화, 호러, 재마법화’는 성실하지만 식상하다. 학문적으로 보기엔 범상하고, 그렇다고 대중적이지도 않다.

 

정희진 선생의 ‘언어가 성별을 만든다.’에서는 여성혐오를 보는 시각 뿐 아니라 젠더에 대한 대중들의 무지와 몰이해에 대해 강한 피로감이 느껴진다. “여성혐오에 대응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은 그답지 않다. 그녀가 '여성학 연구가'에서 '평화학(?) 연구자'로 타이틀을 바꾼 것도 같은 맥락일까. 뭐, 이해한다. 흔한 일이다.

 

기성학자들은 지지부진했으나 새로운 필자들의 펜 끝이 매섭다. 특히, 루인은 ‘트렌스 젠더 퀴어, 바이섹슈얼 그리고 혐오 아카이브’에서 기존 페미니즘 논의에서 소외된 바이섹슈얼의 문제를 당돌하게 제기한다. “임옥희가 비非트렌스 페미니즘의 문제를 트랜스젠더 퀴어에게 덮어씌웠듯..”

새로운 필자들의 문제제기가 편협한 젠더 이분법과 교조적 습속에 갇힌 페미니즘의 한계를 확장시키기를 기대한다. 물론 쉽지 않은 투쟁이 될 것이다.


 

#. 5

 

B는 진중권과 페페페 논쟁에 대한 글을 읽어보라고 했다. 받은 링크에서는 더 긴 얘기였던 것 같은데 그걸 찾기는 귀찮고. (http://pinobook.com/hot1/74320)

 

진중권의 히스테릭한 반응이 지나치게 보이면서도, 또 어떤 맥락인지 짐작이 가기에 이해한다. 페페페의 유치함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일베니 뭐니 하는 애들이 세상을 15년쯤 후진시켰으니, 15년 전 쯤 페미니스트들의 덜 여문 사고방식이 튀어나오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때, 페미니즘을 말하는 자들은 참 절박했다. 그래서 논쟁이 필요한 자리를 공감으로 대체했고, 근거가 있어야 할 위치에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소중했기에 반론대신 박수를 받았다. 한국의 페미니즘 논의에 젠더 이분법적이고, 대결적 관념이 배태된 것은 아마 이 시기의 영향일 것이다. 너무도 협소한 외연을 급성장 시킨 부작용이다.

 

이제, 페미니즘은 외연을 넓혀서 대중적인 것이 되었다. 누구나 페미니즘을 이야기 하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지만 문제는 덩치 뿐 아니라 문제까지 함께 확장되었다는데 있다. 게다가 계몽과 극성맞은 교조주의 사이에서 적절한 포지션을 잡지 못했던 것이 오늘날 페미니즘에 대한 역풍을 가져 온 것으로 보인다.

 

월장사태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이슈파이팅이라면 진창을 마다하지 않았던 역전의 용사 '진병장'도(그땐 그렇게 불렀다) 그들의 교조성에 대해 학발을 뗀 것일 게다. 젠더문제에 남근처럼 꼿꼿한 깃발을 꽃아 놓고 모든 의제를 선점했다고 믿는 자들의 모습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생각하는 것보다 공감하는 것이 익숙하다고 모든 문제를 감정적인 것으로 치환하고, 그 긴 글에서 "페미니즘은 관점의 문제다"한 구절을 찾아내 그게 전부인 것처럼 인용해 놓는 모습은 사려 깊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단지 분노할 것인가, 아니면 정의로울 것인가.

 

수많은 선행연구가 있지만 그 흔한 데이터 하나 인용하는 자가 없다. 가시 돋친 말들은 사실 본질을 겨냥할 생각조차 없어보인다. 허무한 말의 사체들이 사막 모래처럼 황량하게 쌓여갈 뿐. 이런 시대에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기보다는 정희진의 말처럼 “‘을’의 위치를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약한 자가 되어 성실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낫다. 정희진처럼 나도 “그것이 같은 삶이기를 바란다.”

 

 

#. 6

 

누군가는 이 책이 유독 알라딘에서 잘 팔리는 이유를 키링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웃픈 얘기. 자신의 정체성을 뱃지로 표현하는 사람들의 특성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성매매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으나 지겹고, 마음이 심히 우울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젠더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깨고 넘어가야 할 화두다. 젠더, 계급, 계층, 경제, 역사의 문제를 모두 포괄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알라딘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기로 하겠다. 육신이 소멸하더라도 의미는 남는 것처럼, 나의 페미니즘은 이제 삶과 실천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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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5-07-19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씬6, `존나` 공감이오.

키링이 뱃지인가 보죠? 그러니까 그거를 달면... 음...ㅎㅎ

`나의 페미니즘은 이제 삶과 실천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긴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입장정리라는 생각입니다.

잘 읽었어유...

뷰리풀말미잘 2015-07-19 22:1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한수철님.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벌써 일요일 저녁이네요. 오늘도 한잔 하고 주무실라나요.
 
빅매치
최호 감독, 보아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전국의 오락실을 횡 스크롤 액션게임이 풍미했던 시대가 있었다. ‘원더 보이’, ‘파이널 파이트’, ‘캐딜락&다이너소어’ 기라성 같은 게임들이 어린이들의 호주머니를 호시탐탐 노렸다. 조이스틱 두들기는 손맛에, 캐릭터 꼬물꼬물 움직이는 재미에 어디 털리는 줄이나 알았으랴.

 

잔재미는 모두 달랐지만 스토리야 사실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시작과 동시에 누군가가 납치되고, 분노한 주인공은 납치당한 연인을, 혹은 가족을 구하기 위해 길고 장대한 여정을 나선다. 모니터에 얼굴을 박은 채 감정을 이입하고 결연한 표정으로 버튼을 연타하던 동지들. 제 어머니에게 귀 잡혀 끌려 나가기도 부지기수였으나, 또 다음날이면 꿋꿋이 자리를 사수했다. 횡으로 난 외길을 무인지경 하는 고수들을 우리는 얼마나 동경했던가. 오, 바야흐로 의義와 협俠의 시대였다.

 

그러나 호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바람의 나라’, ‘리니지’ 같은 MMORPG가 등장하자, 조이스틱 앞에서 함께 울고 웃었던 동지들은 변절하여 PC방의 알량한 키보드 아래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방대한 네트워크 속에서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고, 대화할 수 있는 게임들이 대세가 되자, 단순한 횡 스크롤의 시대는 저물어갔던 것이었던 것이다.

 

빅 매치는 영락없이 횡 스크롤 액션게임을 닮았다. 뜬금없이 나타나서 형을 납치해 간 악당도, 달랑 두 주먹 불끈 쥐고 혈혈단신 악당의 뒤를 쫓는 주인공도, 영락없이 ‘파이널 파이트’에서 툭 튀어나온 캐릭터다. 정신없이 덤벼드는 조무래기들과, 제각기 개성을 뽐내는 중간보스들, 최후의 스테이지에서 득의만만하게 기다리는 최종보스에, 외길을 노 브레이크로 직진하는 액션까지. 순간순간 느껴지는 아련한 추억들이 고향처럼 정겹다.

 

하지만 이런 일방통행식 이야기의 단점은 시작과 동시에 결말까지 스캔하듯 예측할 수 있다는 것. 네트워크 시대, 복잡다단해진 관객들의 감수성을 만족시키기는 쉽지 않은 방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익숙함에 굴한 적 있던가.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다 알면서도 그 무수히 많은 동전을 구멍에 쑤셔 넣었다. 뻔하다고? so what. 우리의 주인공, 익호의 두 어깨에 감정을 이입하고 왕 깰때까지 전진, 또 전진할 뿐. 이것이 그 따분했던 시대, 조이스틱 아래서 의리로 대동단결했던, 횡 스크롤 액션 게임 세대의 영화감상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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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새벽이고, 나는 좀 취했다.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그에겐 개인적인 얘기를 여기다 풀어놓는 게 맞을까. 아니, 이건 내게도 개인적인 얘기다. 그런데 블로그는 사유적 사유의 공간인가. 모르겠다. 지금 나는 그렇게 인식한다. 불편하면 뒤로가기 누르시라. 한 뭐시기라는 개새끼와 페미니즘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한다.

 

 

#. 1

 

조독마였던가 진보누리였던가 아무튼 벌써 10년도 훨씬 더 전의 일이다.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아흐리만을 기억한다. 조선일보 논술 대상을 거부하고, 서울대 철학과를 간댔나. 나는 당시에 고등학교도 못 나온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런지 그가 좀 똑똑해 보였던 것 같다. 군대 백일 휴가 들어가는 길에 칼럼 한 편을 적어올리던 성실한 친구였다. 영리해서 어떤 글이든 핵심을 알았고, 문장의 고갱이가 단단해서 글 읽는 맛이 났다. 논리가 정합했고 문장마다, 문단마다 핵심이 있었다. 주장이 분명하고 명료해서 좋았다. 그와 밤 새 글을 적어 올리던 밤에 진심으로 즐거웠다.

 

그 후로, 나는 이렇게 저렇게 살다 보니까 무슨 주의, 무슨 철학 따위를 주절거리지 않게 되었고, 비겁하게 일신을 보전하느라 바빠 세상의 이슈에 별 관심을 두지 않게 됐다. 그는 잘 커서 여전히 좋은 글을 쓰고 더러 책도 내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류의 책들을 사 모으지 않게 됐지만 어쨌거나 똑똑한 애가 똑똑한 책을 썼을 거라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 2

 

여자 친구를 때렸단다. 그것도 몇 년 간. 얼마 전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뭔 패널로 나왔다면서. 주제가 나는 페미니스트다.’였다면서

 

 

#. 3

 

나는 월장이후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너무 많은 싸움을 했다. 스스로를 마쵸라고 규정하는 자들도 있었고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는 자들도 있었다. 전선은 이론의 영역 모두를 포괄할 만큼 광대했고,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대로 말은 말 속에 꼬리를 물어 결국, 오해와 곡해가 뒤엉키고 피아가 식별되지 않는 상황이 빈번했다. 사람을 잃고서야 나조차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말하기를 멈췄다. 조금 멀어지니 그제야 전선의 윤곽은 명확해졌으나. 다시 그 판에 끼고 싶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지긋지긋하다. 아주 지긋지긋하다.

 

이 인구의 숫자만큼 다양한 모습이듯 페미니즘도 계급, 계층, 문화, 지리에 따라 전개되는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는 심지어 남자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주장도 있고. 여자친구를 두들겨 패고 나는 페미니스트다를 이야기 하는 한윤형도 있다. ‘김정일 개새끼 해봐처럼 페미니스트냐 아니냐를 결정하라고 윽박지르는 알라디너도 있다. 2000년대, 그 지리한 참호전 끝에 내부는 비교적 평안을 찾은 모양이지만 경계에서는 아직도 혼전이 벌어지고 있다. 임옥희 교수는 나는 페미니스트다선언하는 해시테그 페미니즘을 보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는데, 그 불안을 이해한다.

 

얼마 전 친구 하나는 나를 비난했다. 내가 특정 젠더문제(pek0501님의 글이었다. 관련글: http://blog.aladin.co.kr/717964183/7485583)를 성별이라는 진영논리를 넘어 객관적 시선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이기 때문에 객관적일 수 없고,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다고 했다. 객관성은 아무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페미니즘이란 출발부터 인간 해방 기획이었다.’ 그는 이 점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그러니 페미니즘이 특정 젠더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주장은 객관성을 잃고 마음 속에선 여성성/남성성을 갈라 가족오락관 재방을 찍고 있는 거다. 2015년에. 별 특별할 것도 없는 글을 읽고.

 

페미니즘은 사회적 고정관념을 해체하며 성장해왔다. 몸과 정신을, 가부장제의 부조리함을, 남성의 페니스 파시즘을, 여성성이라는 지옥 같은 껍데기를. 그가 페미니즘이 인간 해방 기획임을 이해할 때 그가 소중히 여기는 감성 감정이 곧은 이성의 무릎 위에 올바로 설 수 있으리라. 그 때, 호기심으로 Revenge porn본 얘기를 천연덕스럽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여성의 성노동이 옳은지 그른지 비로소 분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말 해봤자 불편하구나. 역시 나는 그냥 닥치고 있는 편이 속 편한 것 같다.

 

 

#. 4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해 그것을 되물림 했다는 한윤형의 변명은 다분히 프로이트적이다. 배운-새끼라 그런지 지랄도 제법 철학적 구조를 갖췄다. 근데, 그 나이먹도록 노쇠한 아비조차 해체하지 못했다면 철학공부는 왜 했나.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고추라면 그냥 자르는 편을 추천한다. 최소한 페니스 파시즘 소리는 안 들을게 아닌가.  

 

학문은 윤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 논객이랍시고, 글 깨나 쓰는 무슨 블로거랍시고 인터넷에서 함부로 나불거려도 좋다. 언어의 자유만큼 중요한 가치도 또 없으니까. 그러나 최소한 '이즘'을 말하는 자는 '보편적 입법의 원리'를 궁구해야 한다. 이성의 검증을 회피하고, 도덕적이기를 포기한 이즘은 오직, 파시즘Fascism 뿐이다.

 

내가 신뢰했던 한 개인의 부조리에서 나약한 먹물들의 내면이 얼비친다. 머리만 영근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오래전 세계의 부조리에 핏대를 세우던 그 청년은 늙어 부조리 그 자체가 되었구나. 이런 것이었나.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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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1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21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