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기억해야 할 죽음이 많아지는 일인가. 올해만 신영복을 보냈고, 움베르토 에코를 보냈다. 필자들의 망령으로 휩싸여가는 책꽂이를 보며, 늙지 않는 나도 늙어가는 쓸쓸함을 짐작한다.

 

만약, 세상에 나의 서재만이 남았고, 신이 나를 미워해 불이라도 낸다면, 맨 먼저 품을 책은 장미의 이름이다. 거룩한 그레고리오 성가의 단성 음률이 궁륭을 울리고, 성서를 필사하는 수사들의 펜촉 소리만 사각거리는 이태리 어느 수도원. 피비린내는 무슨 연유일까.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수상쩍은 죽음들. 그 비밀은 오래된 장서관에 있었으니, 아드소와 숨 죽여 회랑을 걸을 때 문자향은 더욱 아득했다. 이 아름다운 도서관을 지은이는 고집스런 맹인 소설가였으되, 숨결을 불어넣은 이는 구라파의 현자였구나.

 

침대 귀퉁이에 쪼그려 앉아 밤을 새운 건, 스무 살의 어느 날. 이 소설을 읽고, 중세역사로, 기호학으로, 철학으로, 신학으로 생각을 틔워나갔다. 시절 모를 나의 지학(志學)이었으리라. 나는 공자의 이 말을 마음에 서재를 만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늦게나마 에코를 읽고 소박한 책꽂이를 채우기 시작했으니, 그는 나의 선생이었다. 한양의 추사가 연경의 담계를 사모했듯, 나는 그를 사모했노라.

 

2015. 2. 19 바벨의 도서관으로, Umberto E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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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오래 난독에 시달렸다. 


예전같지 않은 집중력과, 공감능력의 부재를 탓했다.


소설을 잃고, 


나는 더 외로워졌다.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였다. 


이응준, 천명관, 박현욱. 개가 시간마다 빈 그릇을 핥듯, 꾸준히 페이지는 넘겼으나, 


마른 모래만 씹는 기분이었다.   


오늘, 꼬박 두 시간 이 책을 읽으며, 내내 활자의 의미를 골몰했고, 행간에서 머뭇거리지 않았다.


치매에 걸린 살인자가 되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제 알았다. 


내가 읽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소설가, 너희가 쓰지 못했던 것이었구나. 


소설을 찾았고,


오랜만에 리뷰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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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車書 2016-02-10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저도 비슷한 난독 상태인데 아직 두 시간 독서는 힘들어요. 부러워요.^^

뷰리풀말미잘 2016-02-10 13:00   좋아요 1 | URL
오거서님은 책이 아니어도 영혼을 풍요하게 해 줄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 )

비로그인 2016-02-10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즐감하고 갑니다 ^^

뷰리풀말미잘 2016-02-10 13:05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시인님. 꾸미고 가감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뼈만 남아서 말이 되고 삶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연휴가 끝나가고 있어요. ㅠ

한수철 2016-02-10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얘야, 소설도 어지간히 쓰면 달 500은 번다더라..이런 말이 전국의 어지간한 부모의 입에서 나올 정도가 되면 인재들이 무수히 문학판(?)으로 유입될 텐데 말이지요...그런 농담을 몇 번 했던 기억이 납니다. 잘 읽었습니다, 짧고 임팩트 있고, 흐음.

뷰리풀말미잘 2016-02-10 20:11   좋아요 0 | URL
작가입장에서 책값은 아무리 비싸도 싸고, 독자 입장에서 책값은 아무리 싸도 비싸니 수요과 공급이 서로 사맞디 아니할쎼 어린 글쟁이가 니르고져 홇베이셔도 마참내 제뜨들 시러펴디 못할노미 세종께서 맹가신 스물여듫짜가 죽도 밥도 안되는 상황입니다, 봄모님에게 남친을 고름에 있어 흑인과 시인만은 멀리하라고 충언을 드린 바 있는데.. 500은 번다더라 하는 세상은 정말이지 소설에서나 가능할 것 같네여.. 작가라면 듕귁어로 글을 쓰든가 해야지. 시장도 너무 쬐깐하고.

세뇨리따 2016-02-15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분발해 줬으면 싶네요. 소설가들도, 말미잘님도. 아, 저는 소설보다는 말미잘 취향이라서..

뷰리풀말미잘 2016-02-16 09:00   좋아요 0 | URL
ㅠ_ㅠ 분발할게요..
 


아침, 하코다테 항구에서 루리는 먼 바다를 보고 있었다. 푸른 해원의 기척을 피부로 감지하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고. 



 


-뭐해? 


-기다려.


-누구?  


-바다로 나간 남편. 


-..어.




루리가 오른손에 든 옥수수로 말할 것 같으면, 홋카이도 산 옥수수. 익히지도 않은게 설탕처럼 달다. 


홋카이도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식량자급률이 200%를 넘는 지역이다. 국토의 80%가량이 산지인 일본에서는 드문 옥토다. 비옥한 땅과 부지런한 사람들이 얻어낸 결실일까. 루리는 옥수수 세 알을 하사했다. 


 


햇살 사이로 전차가 다닌다. 




오오누마 코엔으로 가는 길. 다시, 특급 호쿠토. 




레일 양 편으로는 이런 예쁘고 여유 넘치는 동네가 흩어져 있었다. 나서지 않으면서도 개성을 잃지 않는 지붕들. 그 위로는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다. 시선은 걸림 없이 지평선에 닫는다. 




오오누마 코엔역은 '설국'이나 '철도원'에 나올법한 작고 예쁜 시골 기차역이다. 기차는 1시간이나 두 시간 쯤의 텀으로 드문드문 지나갔다. 




우리는 이곳이 핫스팟임을 직감했고, 찍고자 하는 자와 찍히고자 하는 자의 몸부림이 약 20여분간 이어졌다.     




팔.. 부러진거니? 




자전거를 빌려 호수길을 달렸다.




1시간에 천엔이었던가 저렴한 요금은 아니었다. 너무도 상쾌한 바람과, 미칠듯한 체력 덕분에 30분 만에 15km를 달렸다.


-아, 이제 30분 만에 돌아가지 않으면 요금이 두배네.


-아.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하코다테 에키벤. 청어 스페셜. 880엔.


맛은 뭐 그냥 뭐.  








시리게 맑았다. 모국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이곳에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루리야, 모델J가 가르쳐준 사진 잘 나오는 방법이 있어.


-뭔데?


-중요한 건 시선이야. 


-어떻게? 


-지그시 어깨의 끝을 내려다 봐. 


-이렇게? 


-좀 더 내면의 페이소스를 끌어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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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본 포스팅은 여행전문가 김늘보의 후원과 조력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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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6-02-01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센스 대박.

ㅎㅎㅎㅎㅎㅎㅎ

˝홋카이도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식량자급률이 200%를 넘는 지역˝
˝나서지 않으면서도 개성을 잃지 않는˝

이 문장들 앞에선 공연히 끄덕끄덕.

잘 보고, 잘 읽고

조니 부러워하다 나감니다...

뷰리풀말미잘 2016-02-02 10:03   좋아요 0 | URL
히히. 한수철님과 더불어 고즈넉한 홋카이도의 시골길을 막 달려보고 싶네요. 막.

2016-02-02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2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뇨리따 2016-02-02 0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말미잘님도 사실 매를 버는 스타일이신거죠? 이렇게 예쁘게 찍고 그렇게 훌륭한 필력을 가졌으면서, 팔... 부러진거니? 이 포스팅 후 행여 말미잘님 팔은 괜찮으신가요?

뷰리풀말미잘 2016-02-02 10:00   좋아요 0 | URL
제가 또 소신 있는 성격이라 할 말은 하는 편이라고 할까요.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상소 깨나 올렸을겁니다.

Mephistopheles 2016-02-02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만봐도 여행 끝나고 말마질님 등짝은 루리님의 시뻘건 손자국이 군데군데 나있을 것 같은데...

뷰리풀말미잘 2016-02-02 10:02   좋아요 0 | URL
루리가 귀엽게 손바닥 같은 걸 사용할까요?

Mephistopheles 2016-02-02 10:19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지금 병원에서...손가락 하나로 자판을 치고 있다는.....

뷰리풀말미잘 2016-02-05 16:19   좋아요 0 | URL
흑흑..
 

 

 

스파이크 존즈 감독/ 호아킨 피닉스(테오도르), 에이미 아담스(에이미), 루니 마라(캐서린), 스칼렛 요한슨(사만다 목소리) 등 출연/ 상영시간 126/ 18세 관람가

 

재치 있는 말솜씨에 탁월한 업무능력. 사만다는 성실한 비서이자 상담자로 주인공의 삶 속에 들어온다. 편지 대필가인 테오도르는 영리한 그녀 덕분에 출판 작가로 성공하게 되고, 별거중인 아내에게서 느낄 수 없는 상냥함과 사려 깊음에 감정은 점점 깊어간다. 퇴근 이후의 무료한 시간은 핑크빛으로 밝아진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눈을 감고 거리를 걸을 때 두근거리는 감각이 온 몸을 가득 채우고, 즐거운 대화로 늘 마음은 풍요롭다. 그런데, 주인공 옆에 그녀의 모습은 카메라에 비치지 않는다. 어디에 있을까? 완벽한 그녀가 유일하게 갖지 못한 것은 바로 인간의 육신. 사만다의 정체는 최초로 개발된 인공지능 OS.

 

현실에서도 인공지능이 성큼 다가왔다. 최근 IBM은 인도, 필리핀에 아웃소싱하던 전화 상담사를 컴퓨터 상담사로 대체했다. 뉴스에 따르면 수학적, 기술적인 몇몇 난제가 풀려 20년 후에는 약한 인공지능, 50년 후에는 완전한 자아를 갖춘 강한 인공지능이 출현할 것으로 예상된다. 강한 인공지능이 탄생하면 우리의 삶은 혁명적 전환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은 엄청난 속도로 세계의 정보를 흡수할 것이고, 인간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세계를 조직할 것이며,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발명품들을 내놓으리라. 소설을 쓰는 기계. 그래서 강한 인공지능을 ‘Our Final invention’, 인류 최후의 발명품이라고 부른다.

 

장차 인류는 인공지능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그와 그녀의 달콤 쌉싸름한 연애의 양상을 통해 기술만능주의는 우아한 실루엣 속 허상을 드러낸다.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달랐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보다 훨씬 먼 거리에 그들의 감정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테오도르는 연애편지 전문 대필가면서도 한 번에 641명의 사람과 진심이 담긴 러브레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연인을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럽다.

 

최근, 일본에서는 인간보다 키스를 잘 하는 키스로봇이 개발됐다. 기술은 이제 인간의 감각까지 지배할 수 있게 되었으나, 과연 감정을 공유하는 영역에 다가갈 수 있을까. 최소한 테오도르의 핑크빛 바탕화면에는 삑- 블루 스크린이 나타났다. ‘당신 인생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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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6-01-20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인간 감정이라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하냐 그런 생각도 드는 아침입니다. 소수의 특출난 인물들을 과감히 차치한다면...

뷰리풀말미잘 2016-01-20 15:04   좋아요 0 | URL
객관적으로는 한낱 티끌같은 것이고, 주관적으로는 온 우주같은 것이겠죠. 음.. 어쨌든 한수철님은 ‘과감히 차지’하고 생각해야 할 1인인 듯.
 

 

  

 

말릭 벤젤룰 감독/ 로드리게즈 등 출연/ 상영시간 86/ 전체 관람가

 

외무부 선정 여행유의국가에 빛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치안은 악명이 자자하다. 호신용 돌격소총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면 습격당할 리 없다며 맨손으로 호텔 밖으로 나간 여행자가 속옷 차림으로 돌아왔다는 씁쓸한 해프닝도 전한다. 94년 넬슨 만델라와 평화주의 세력이 집권에 성공한 이후로 조금씩 나아지는 추세이나, 17세기부터 시작한 흑백 갈등과, 인종차별의 후유증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후유증이 이럴진대, 그 험난한 투쟁의 과정이야 말해 무엇하리. 영화는 그 고단한 역사에서 남아공 시민들의 든든한 벗이 되어준 그 사나이 로드리게즈와 그의 음악을 조명한다.

 

슈가맨 어서 와줘. 이 풍경은 너무 지겹거든. 푸른 동전을 줄 테니, 내 무지개 색 꿈을 돌려줘.’ 로드리게즈가 읊조리는 애잔한 가사는 서정적인 포크락 멜로디에 실려 수백만 시민들의 마른 심장을 뛰게 했다. 그의 노래는 폴리스 라인 너머,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이정표였다. “그런 감동적인 가사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당시 밥 딜런 말고는 없었죠.”

 

미국에서 유입된 그의 음반은 남아공에서 스테디셀러가 되었고, 수백만이 슈가맨을 합창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 불거졌다. ‘그런데 그는 누구지?' 노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사람들은 가수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정작 음유시인의 정체는 베일에 가려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떤 이유일까?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방식으로 이 놀라운 미스터리를 추적하지만, ‘디트로이트의 마약쟁이’, ‘콘서트 마지막 곡을 마치고 권총으로 자살한 가수등 각종 무성한 소문만 주인공의 정체를 얼비출 뿐, 음반의 경로나, 배급사의 자금 경로 추적에도 성과는 전무했다. 단서의 씨가 마르자 그를 찾는 사람들의 당혹감은 점점 커져갔다. 그는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자신이 수퍼스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까?

 

아주 오랜 세월동안 먼 거리에서 서로를 그렸던 스타와 팬들의 만남은 결국 이루어 질 수 있을까? 영화는 힌트도 없는 전개로 오래 관객들의 애를 태우나, 엔딩은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이다. 그의 자리를 비워 놓고 음악을 연주하는 남아공 음악가들. 촉촉한 포크락 사운드에 전설의 목소리가 실리고, 진심을 담은 노래가 모든 섣부른 가설을 압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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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6-01-21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대 대한민국이었다면...백종원씨가 슈가맨이겠군요...그렇츄....

뷰리풀말미잘 2016-01-21 18:19   좋아요 0 | URL
이게.. 마흔 넘으면 기승을 부린다는 후천성 개그 결핍증인가.. ㅠ_ㅠ 흑.. 메피님..

Mephistopheles 2016-01-22 09:57   좋아요 0 | URL
에휴...이거 참 늙으면 죽어야지..

뷰리풀말미잘 2016-01-22 23:17   좋아요 0 | URL
메피님도 참. ㅎㅎ 날씨가 무척 춥네요. 옷깃 꼭꼭 여미고 다니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