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보리베츠는 물이 좋기로 유명한 온천 휴양지다. 홋카이도 최남부 하코다테에서 기차로 세시간 쯤 걸린다.

 

그 날, 대서양에서 발생한 태풍이 동진하고 있었다. 열도 서부의 피해는 막대했다. 뉴스마다 현장에 나간 기상 캐스터들의 머리가 미역처럼 날렸다. 걸음을 서둘렀다. 

 

우리는 료칸에서 온천과, 늦잠과, 산책을 느긋하게 즐길 작정이었다.

 

 


 

 

도시는 한산했다. 거주지는 제법 밀집되어 있었으나 인적이 없었다. 베이비 붐 세대가 부동산 호황을 싹 따라마시고 남은 거품의 흔적이다. 우리는 버스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동네를 잠시 걷다가 돌아왔다. 마침 폭풍이 닥치기도 했지만, 그보다 아무것도 볼 게 없었다.

 

 

 


 

역사에서 루리는 어슬렁 거리는 곰을 발견했다. 둘은 어깨가 스치는 순간 상대를 알아 본 듯 했다. 곰은 무섭게 으르렁거리며 오른 발톱을 치켜들었고, 루리는 크랩 스타일로 상단 가드를 올리고 턱을 노렸다. 승부는 찰라에 가려졌다. 루리가 쇄도하는 순간 곰의 레프트 블로우가 치명적인 예각을 그렸고 루리는 송곳같은 어퍼를 찔러 넣었..   

 

 

 

 

 

..친해졌다. (어쩐지 곰은 조금 주눅이 든 표정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온천 마을로 이동했다. 


바람이 불자 까마귀떼가 그악스럽게 하늘을 뒤덮었다. 오, 지옥 입구에 걸맞는 풍경이다.

 

 

 

 

 

온천 마을이야 말로 노보리베츠 상업의 핵심지역인데, 상점들은 휴업이나 다름없어서 방문하기도 민구스러울 지경이었다우리는 을씨년스러운 번화가를 걷다가 아무 라멘집이나 들어갔다. 스킨헤드가 반들반들한 점장이 매우 뜨악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았으나, 별 다른 선택권이 있지도 않았다. 메뉴도 그랬다

 

 


 

 

난해한 메뉴판을 뒤져 '지옥유황라멘'을 시키는 나의 표정은 굳어있었으리라. 

 

나는 지옥을 맛보았다.  

 

 

 


료칸에 짐을 풀고 지옥계곡으로 갔다. 걸어서 10여분, 태풍의 거친 결이 계곡 한복판을 비비고 지나갔다. 유황 냄새가 싸하게 풍겼다.

 

료칸에서 빌려온 우산이 두 개나 작살이 났다. 나중에 지배인에게 이실직고를 하자 걱정하지 말라며 하나를 더 내준다. 흥, 제법 친절한 척 하는군, 니혼진.  

 

 

 

 

 

 

이 길의 끝에서 간헐천이 끓고 있었다. 달걀을 넣으면 바로 삶아지는 온도다. 그렇게 삶은 달걀이 편의점에 흔하게 굴러다녔다. 그걸 온센 타마고 (온천 달걀)라고 하는데 맛이 여간 비범한 게 아니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온센 타마고 몇 알어포, 밀크푸딩 같은 주전부리를 사 들고 료칸으로 돌아왔다.

 

 

 


 약속한 시간이었고기모노를 입은 언니가 식사를 가지고 왔다.



 

 

료칸, 기요미즈데라의 음식은 미식가들 사이에 제법 알려진 모양이다. 캐비어를 얹은 두부, 굴 조림, 초밥, 연근, 토란에, 증기로 쪄낸 연어구이, 참치회, 도미회, 각종 절임채소와 그 밖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다양한 음식들이 소담스러웠다.

 

양고기가 푸짐하게 든 나베가 끓는 것을 기다리며 사케로 입술을 적셨다. 오! 내장이 투명해지는 느낌이다. 루리는 이미 머리 위로 잔을 흔들고 있었다.




음식은 허투루 된 것이 없었다세심하게 만져서 맛을 만드는 것이 느껴진다절여진 채소의 간이 덜 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 우메보시의 향이 살았다.




나베 국물은 맑고 진했다. 비리고 누린 맛이 없었다.



 

 

연어, 버섯, 밤, 은행.

 

 


 

 

두부두부.

 

 

 

 

 

루리루리.

 

식사를 하고, 루리는 온천을 갔고, 나는 다시 지옥계곡으로 나왔다. 태풍이 노보리베츠를 완전히 영향권에 가둔 시점이었다.

 


 

 

 

펄펄 끓는 유황천의 매캐한 온기와, 비바람에 섞인 돌 모래와, 숲으로 숨어든 까마귀의 향연 사이로 어두워 가는 지옥계곡을 걸었다. 우산은 없어도 그만이었고, 나는 밤 도깨비 같았다.

 

 

 

 

 

돌아왔을때 루리는 차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단정하게 앉아 적당한 온도로 적당한 시간 우려낸 차의 색을 감상하고, 향을 즐기고, 차를 머금은 혀 끝으로 맑고 떫은 맛을 즐기고, 목으로 따뜻하게 넘어가는 부드러움을 느끼고, "감로와 같습니다."라고 감상을 토설하는 것이 차를 마시는 바른 방법이다.  

 


 

 

음..

 

-감로와..

 

-크!!!

 

 

 

 

 

-마셔 마셔!! 

 

-.... 

 

 

 

 

 

-섞어!!! 

 

-.........;


노곤노곤해지도록 온천에 몸을 담그고 여유있게 노보리베츠를 떠났다. 다 쓰지 못했지만, 친절하고 고마운 사람들이 여럿이다. 우리를 정류소까지 차로 마중해준 지배인, 길을 묻자 차에서 내려 지도판으로 우리를 데려가 길을 설명해 준 버스 운전사. 길을 물으면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기 일쑤인 착한 일본인들. 덕분에 구경 잘 했다.

 

다행히 기차는 연착되지 않았고, 우리는 이른 시간에 신치토세 공항 모퉁이에 앉아서 아직 먹빛이 가시지 않은 하늘을 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좋았지? 


-좋았어. 

 

 

 

 

 

인천에 도착해서도 루리 머리칼에서는 부드러운 유황 냄새가 났다.

 

늘보님,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조선 북방의 백성이었다. 지금의 함경도 나진쯤 되는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삶은 고달팠다. 넉넉하지도 않은 형편을 여진족 무리가 휩쓸어가곤 했다. 그날도 한 무리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는 1년 후에 다시 오겠으니 단단히 준비를 해 놓으라며 엄포를 놓고 사라졌다. 그 날은 그들 족장의 생일이었다. 우리는 조정에 상소를 올렸지만, 조정은 어떤 대책도 세워주지 않았다. 1년이 지났다.

 

멀리서 뽀얀 먼지구름이 일었다. 몇몇 마을 사람들은 항전하기 위해 농기구라도 쥐어들고 변변찮은 목책을 지켰지만 그들의 행색은 먼지구름의 규모에 비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나는 단창을 들고 어느 집 벽과 그 벽에 기대 쌓아놓은 장작더미 그늘에 숨었다. 먼지구름이 임박하자 어느새 목책을 지키던 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두 흩어지고 없었다.

 

쇄도해 오는 군마는 백여 필. 나는 혼신의 힘을 실어 선두로 창을 날렸다. 창은 적 대장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나는 장작 그늘로 다시 몸을 숨겼는데 사실 형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할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 기적처럼 무리는 나를 지나쳐 마을로 진입했다. 마치 죽은 자나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나는 살기 위해서 그들이 온 방향으로 뛰었다.

 

내가 당도한 곳은 절벽을 휘돌아 나가는 맑은 강이었다. 강폭은 넓지 않아서 15미터 정도. 마을 처녀 둘이 강물에 빠져 있었는데, 그들도 역시 난을 피해 온 듯 했다. 하나는 수수한 무명 옷 차림이었고, 하나는 붉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구하려고 물에 뛰어들었는데, 맑은 물 저 편으로 무명옷을 입은 여자가 은장도를 꺼내 비단옷 여자의 뺨을 찌르는 것이 보였다. 다가가 말릴 새도 없이 이번엔 입으로 칼을 넣어 뺨을 찢었다. 나는 물속에서 그 광경을 보고 경악하여 수면으로 머리를 내밀고 소리를 질러댔다.

 

너는! 너는! 왕가의 사람을 죽인 것이다!”

 

정황을 설명할만한 기억은 없으나, 나는 아마 그 여자들을 잘 알고 있었던 거 같다. 찌른 여자는 눈이 풀려있었는데. 정신을 놓은 것 같았고, 찔린 여자는 가망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차라리 빨리 죽기를 바랐다. 그리고 무명옷의 여자를 추슬러 건사하지는 않기로 했다. 난리를 빠져나갈 체력도, 의지도 모두 고갈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물길을 따라 흘러가기로 했다. 아무 의욕도, 기운도 없었고. 다만 물길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만 가늠할 따름이었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뷰리풀말미잘 2016-05-07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면제를 먹지 않는 날은 생생한 꿈을 꾼다. 꿈은 언제나 꾸는 것이고 다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인데, 꿈을 꾸는 날과 꾸지 않는 날의 기분이 아주 다르다. 꿈을 꾸는 날 훨씬 기분이 좋다. 이상한 일이다.

내 꿈에는 대체로 폭력적 행위가 등장한다. 때리고, 조르고, 꺽고, 쏘고, 오늘은 심지어 던져서 꿰뚫는 행위가 등장했다. 폭력성은 내 꿈을 이해하는 키워드 중 하나다. 억눌린 무의식의 발현으로 본다. 가여운 것.

꿈은 무의식의 주장이다. 꿈을 해석하는 것은 내면과의 대화다. 나는 그럼으로서 내 안의 그것을 이해하고, 설득하고, 타협하는데. 예쁘고, 거칠고, 영리하고, 징그러운 게 꼭 누구를 빼다 박았다.

한수철 2016-05-08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재미가 있네요.(님하고 허구적 글을, 먼댓글을 통해, 일종의 연작인 양, 번갈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만둡니다)

실은 댓글이 더 인상적이지만.

그런데 말입니다, 프로필 사진은, 왜 저렇게 하세요.

사진도 잘 찍는 양반이. 흠흠..

잘 읽고 가연.^^

뷰리풀말미잘 2016-05-09 15:31   좋아요 0 | URL
히히 안녕하세여. 한수철님. 글로 오고간다면 또한 아니 감체할 일이겠습니까만. 저는 머리가 무식해서 그런가 허구에 재능이 없는 거 같아요. 축구도 못 차고, 런닝도 못 뛰고 머리도 무식하고 왜 이렇게 못 하는 게 많을까요. 반면, 한수철님은 남다르신 것 같아요. 아마 이미 일가를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제 프로필 사진은 원래 유키스 동호였어요. 작년에 결혼을 해 버리고 말았죠. 이후 실의에 잠겨서 새로운 플사를 구하는 것을 잊었네요. 마치 상처하고 지조를 지키는 뭐 그런 느낌이랄까. 하지만 말씀을 들으니 바꿔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찌됐건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요.

세뇨리따 2016-05-13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미잘도 상처를 지키는, 그런 타입의 생물..이었군요.(사람이라고 썼다가 굳이 수정했어요. 매번 이렇게 헷갈린다니까요!)
혹부리 영감의 혹처럼, 상처를 방치하고 멍울진 우울을 붙여놓고 거기서부터 영감을 구하는 사람들.
사실 영감은 고사하고 그들은 귀찮을 뿐이겠지만 그런 사람들의 예술에는 실망해 본적이 없었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늘 이소라나 김광석 이었는데, 이제는 말미잘이겠네요.

주제넘고 가소로운 말이겠지만, 이정도의 영감들 이라면 그 상처도 반쯤 빼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네요. 다만 얼마나 괴로울지를 생각하면 결국엔 마다하겠지만..
말미잘 글은 늘 저를 자극해요. 글에대한 열망이 바짝 건조해지면 이 서재에 오는데, 글을 읽으면 흥건해지다 못해 마음이 불어 터지는 느낌이랄까, 결국 늘 비교하고 좌절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오기가 생기가 하거든요.

그나저나, 이제는 정말로 볼수 없는건가요... 전에 있어, 문화컬쳐를 경험하게한 어마무시한 미문들은

뷰리풀말미잘 2016-05-13 10:50   좋아요 0 | URL
제 마음 속에 뭔가, 뭔가 알 수 없는 부조화가 있는 것 같아요. 그거슨 어둠의 다크니스, 운명의 데스티니..

이소라나, 김광석의 노래들이라면 전 대표곡만 듣습니다. 그것들은 넘나 슬픔의 소로우이니까요.

저는 글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 이유도 아주 잘 알고 있죠. 요즘 대체로 행복하거든요. 내일은 뭘 할까, 무슨 일이 생길까. 그런 불확실성이 없습니다. 시계추처럼 자리에서 일어나고, 한심한 일들을 대충 하다가 다시 집에 와서 책 몇글자 읽고 자는 게 사는 전부죠. 제 생각에 글은 한량들의 것이 아니에요. 황야에서 야성을 번뜩거리는 짐승들의 것이죠. 그래서 저는 아마 `미문`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쓴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있다고 하셔서..)

요즘 제 글 취항은 오히려 장식 없이 간결하거나, 몸 냄새 나는 글인 것 같아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애비는 종이었다. (서정주), 아, 씨발, 아. (한수철)

뷰리풀말미잘 2016-05-13 11:00   좋아요 0 | URL
음.. 미문에 대해 생각하다가 봄밤님이 문득 떠올랐는데. 그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미문의 태산북두, 미문의 거두, 우리동네 미문대장, 미문깡패, 미문의 난봉꾼, 미문백정..

..그만둡시다. 미문이 성격과 호환되는 건 아닌듯 하니..


2016-05-24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3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3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본가가 이사를 했어. 먼 곳이었어. 서울 도심에서도 맑은 날에는 도봉산이나 수락산이 보이잖아. 그 정도 거리였어. 버스를 타면 한 시간은 더 가야 도착하는, 버스 종점이 있는, 그런 동네. 실제로 집 뒤쪽으로 야트막한 산이 있었어. 분위기는 영 좋지 않았어. 성수동 미개발택지지역이나 상계동 당고개역 윗길의 허름한 주택촌 같은 느낌. 늘보를 초청하기로 했지. 늘보는 버스를 타고 이쪽으로 와서 나와 동네를 산책했어.

 

꼬불꼬불한 골목을 걷는데 날이 어둑어둑 해졌고, 큰 길로 나왔어. 그러는 동안 꽤 긴 시간이 걸렸어. 우리는 골목의 난잡함에 기가 빨린 상태였지. 저 뒤편 산으로는 무리지어 있는 무덤들이 보였고, 산 뒤로는 해가 떨어지고 있었어. 동네의 분위기가 으스스하게 바뀌기 시작한 건 그때 부터였어. 

 

인적이 드물어지는 만큼 노란색 봉고차가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어. 의아할 정도로. 늘보는 거의 본능적으로 불안해하기 시작했고, 사실 나도 좀 그랬어. 게다가 그의 불안함 자체도 나의 불안요소 중 하나였지.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길을 찾아가고 있는데 노란 봉고차가 저 앞에 끽 서는 거야. 그리고는 사내 하나가 내려서 지나가던 아이를 강제로 차에 던져 넣고 문을 쾅 닫았어. 차는 급하게 엑셀레이터를 밟았고 나는 그 소리에 정신이 확 깼어. “번호 외워!” 나는 미친 듯 번호판을 외우면서 혹시 틀릴 수 있을까봐 그에게도 말했어.

 

서울 708041’ ‘70는 지금에 와서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8041’은 정확해. 이건 무슨 의미일까. 어쨌든 다시 확인했을 때 늘보는 70제 부분을 정확히 외우고 있었어. 나는 파출소로 가기 전에 늘보를 택시에 태우려 했어. 그를 더 이런 동네에 두는 게 마뜩찮았거든. 하지만 택시는 다니지 않았고, 승용차만 아주 드물게 지나다녔어. 나는 생각다 못해 히치하이킹을 하려고 손을 들었는데 몇몇 차들이 보지도 않고 우리를 지나쳤다. 그러다 차 하나를 세웠는데 남자 넷이 타고 있더군. 나는 영 꺼림칙했지만 늘보를 태우려 했는데, 약간 주저하는 사이에 인근 군부대의 부사관인 듯 하는 남자가 낼름 뒷좌석을 열고 타 버렸어. 화를 낼 새도 없이 차는 출발했고,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곧 택시를 잡았지. 그를 태워 보내면서 나는 다시 택시 번호를 외웠어. 골치가 아팠지만 그래야만 하는 동네였으니까.

 

그리고 다시 나는 골목길로 들어가 파출소를 찾아 헤맸어. 뭐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게 없는 곳이였어. 그러다가 저 가드레일 아래 낮은 지대에서 아무 패턴 없이 사방을 하이에나처럼 돌아다니는 노란 차들을 발견했어. 소름이 끼치더군.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동네인가! 그때 경찰차 몇 대가 나타나더니 노란 차 한 대를 강제로 세웠어. 노란 차는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펄떡거렸지만 결국 경찰차 사이에 고립되었고, 무장 경찰들이 차 문을 부수고 들어가 중년 남자를 체포했어. 내가 번호를 외웠던 그 차인 듯싶더라고. 용의자는 무장경찰들에 의해 파출소로 끌려갔고, 나도 확인을 하고 싶어 따라서 파출소에 들어갔어.

 

그는 간단한 조사를 받고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마침 사무실은 경찰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고 휑했어. 나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대로 그를 덮쳐서 면상을 미친 듯 후려갈겼어. 그의 얼굴에서는 순식간에 퍼렇게 멍이 올라오더군. 곤죽이 된 그를 두고 문을 박차고 나가는데 무장경찰 하나가 들어오다 나를 마주쳤어. 나는 팽팽하게 긴장해 있는 상태여서 바로 주먹을 뻗었는데, 다행히 그의 턱 밑에서 멈췄어. 그는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 피유- 하고 콧방귀를 뀌며 지나가더군. 나가면서 파손된 채 끌려와있던 노란 차의 번호를 확인했는데, 8041이 아니었어.

 

어쨌거나 나는 다시 그 진절머리가나는 골목길로 들어갔어. 그래야 집으로 갈 수 있으니까. 완연히 어두워진 밤이었고, 거리는 한결 으스스했어. 그러다 골목길 끝으로 꽤 넓은 건널목이 보였는어. 유치원을 다녀오는 두 남매 꼬맹이가 인형을 들고 서 있었지. 걔들은 장난삼아 인형을 내 쪽으로 아주 멀리 던졌어. 멀리 던지기 시합이라도 한 걸까. 인형 두 개가 툭- 발아래 떨어졌지. 꼬맹이들은 그제야 나의 존재를 인식했고, 내가 인형을 주워갈까봐 신호등의 불이 바뀌지도 않았는데 길을 건너고 싶어 안절부절하더라고. 나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어. 건너면 죽는다. 그러고도 남을 동네였으니까. 건널목은 물론 컴컴한 골목에서 뭐가 더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어. (가로등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오토바이가 수시로 튀어나왔어.)

 

나는 소리쳤어. “뛰지마!!” “안 가져갈거야. 뛰지마!!” 하지만 내용은 전달되지 않고, 고함소리만 닿아 애들을 더 초조하게 만든거야. 나는 생각다 못해서 뒤로 돌았지. 그럼 최소한 가져가려는 제스쳐로 보이진 않을 거라는 판단이었어. 다행히 그게 꼬맹이들의 인내심에 도움이 된 모양이야. 신호가 바뀌었고 꼬마들은 날듯이 뛰어와 인형을 가지고 나를 스쳐서는 왼쪽 골목으로 달려가더라. 그리고 엄마!!”를 외치니까. 엄마가. 집 안에서 무심한 목소리로 말 했어. “왔니. 얼른 들어와!” 목소리로만. 나는 그 여자에게 막 화가 나서 악다구니라도 쓰고 싶었어. 이 미친 여자야 제발 이 시간이라면 나와서 애들을 기다리고 있으라고. 방금 네 새끼들이 요단강 건널 뻔 했다고! 실제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다시 미로 같은 골목을 거슬러 거슬러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았어. 처음 산책을 나왔던 그 길이더라고. 그 길에서는 역시 수상쩍은 냉동탑차 하나가 길을 배회하고 있었어. 나는 가능한 분노를 담은 눈으로 탑차의 운전석을 노려봤어. 선팅이 돼서 얼굴도 보이지 않았지만 부디 내 증오가 그리로 뚫고 들어가기를 바라면서. 그러면서도 나조차도 두려움과 공포감에 반쯤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것이 내 내면으로부터 연원하는 것인지, 그 동네로부터 연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더라고.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집이었고,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어. 알겠지만 내가 식욕이 강한 편은 아니야. 사실 별로 없는 편이지. 그런데 알 수 없는 허기가 몰려왔어. 하지만 냉장고에는 반찬 아니면 우유팩뿐. 냉장고문을 닫는 순간, 어둔 거실 저 편에서 엄마가 걸어 나왔어. “다녀왔니?” 라는 그 목소리가 몸살나게 반가웠지. 그 쪽을 바라보니 집은 어두웠고, 엄마는 로브같은 잠옷을 걸치고 있는 듯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그녀가 진짜 엄마인지 확신할 수 없더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부자들 1
윤태호 글.그림 / 씨네21북스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부자들:디 오리지널– 글자와 주먹의 사회사


우민호 감독 / 이병헌(안상구), 조승우(우장훈), 백윤식(이강희), 이경영(장필우) 등 출연 / 상영시간 180분 / 청소년 관람불가 

  신은 언어로 세계를 창조했다. “빛이 있으라.” 조국일보 주필, 이강희는 언어로 대한민국을 설계한다. “매우 보여진다.” 그가 주문을 외우면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도 존재한 사건이 된다. 한편, 말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행동’의 의미는 평가 절하된다. “정의심? 복수? 그딴 것은 난 상관없소. 하지만 기자양반. 빌어먹을 내 손이 없어졌단 말이오.” 오프닝에서 안상구의 거친 대사는 폴란스키의 걸작 ‘차이나타운’의 유려한 인용이나, 그의 현실은 한낱 깡패 두목이다. 열정과 능력을 겸비한 검사 우장훈은 ‘족보’가 없다는 이유로 출세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언어를 담을 매체가 없거나, 언어 그 자체가 없었다.   

 

  이강희는 신문사에 미래 자동차의 광고를 끌어들여 ‘주필’의 권위를 획득했고, 막강한 자본과 정치권력을 이어 장필우를 유력한 대선 후보로 만들었다. 장필우가 성공한다면 떨어지는 중간마진은 총리자리. 이게 정치, 경제, 사회의 연합전선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 세상의 뒷켠에서 학벌주의, 연고주의, 성상납 같은 사회의 병폐들이 곰팡이처럼 피어난다. 감독이 그리는 서울은 만화적 판타지가 거세된 고담시티를 닮았다.  

 

  호형호제하던 이강희와 안상구가 어긋난 것도 사실 글자를 둘러싼 주도권의 문제다. 안상구가 이강희에게 가져가 보관해주기를 부탁한 것은 미래자동차의 비자금 ‘서류’. 안상구는 다만 보험을 들고 싶었겠으나, 서류는 어디까지나 ‘언어’에 속하는 것이다. 금단의 영역에 손을 댄 안상구는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처럼 잔혹하게 응징 당한다. 유리천장에 부딪힌 우장훈도 사정은 비슷하다. 두 인물의 복수인지, 정의인지, 그도 아니면 분노인지 모를 인화성 재료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야기는 폭발력을 얻는다.

 

  영화는 반전을 거듭하며 대한민국 사회의 치부를 까 내려간다. 직설화법의 촌스러움은 있지만, 권력의 일그러진 민낯이 드러나는 쾌감도 분명하다. 영화의 결말부에 ‘내부자’의 활약으로 연합전선은 와해되는데, 이강희의 마지막 신을 주목해 볼 만 하다. 그의 몰락은 곧, 언어의 몰락이었다. "씨발 좆됐네." 그가 읊조리는 날 것 같은 욕설에서 기름진 단어들로 치장된 사회의 가냘픈 몸체가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진다’. 

 

★★★☆


댓글(5)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뷰리풀말미잘 2016-03-16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스물 세줄. 넘나..

곰곰생각하는발 2016-04-01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워요. 뷰리풀말미잘 님 잘지내시죠 ?

뷰리풀말미잘 2016-04-01 23:4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여. 곰곰생각하는발님. 전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한수철 2016-04-27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쯤 새 글을 쓰실 거지요?

뷰리풀말미잘 2016-04-27 15:20   좋아요 0 | URL
썼어요! 한수철님의 댓글에 감응해서 저런 꿈을 꾼듯 싶습니다. ㅎㅎ
 

#. 1

 

이세돌이 졌다. “즐겁게 뒀다.”고 말했다.


체스 나부랭이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나는 이 사건이 인류 역사에 기록될 것으로 본다. ‘크로마뇽인은 네안데르탈인를 멸절시켰다.’ 정도의 비중으로. 하지만 지금 당장 내 관심이 가는 건 이세돌이다. 애써 쿨한 척 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는 괜찮지 않다. 호텔방에서 수건 물고, 벽이라도 치고 있을 거다. 최소한 그런 심정일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은 상사常事인데, 지금 세 번의 패배가 대수겠는가. 그에게 진짜 문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것은 영혼을 마르게 하는 일이다. 나는 그 기분을 잘 안다. 오늘의 대국을 보며, 내 운명을 결정지었던 그 한판의 바둑을 떠올린다.

 


#. 2

 

오래 전 일이다.

  

어린 시절에 나는 제법 영특한 구석이 있었다. 기저귀를 차고 가감승제를 암산하던 기재가 유치원에서 배울 게 없다고 판단한 부모는 대신 바둑학원을 보냈다. 바야흐로 소년 이창호가 세계 바둑계에 신처럼 군림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바둑을 잘 둘 수 있었던 건 성격이 순했기 때문이었다. 폭력으로 암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던 시대였고, 맞기 싫어서 100수 200수가 넘어가는 기보를 수없이 외웠다. 정석이 몸에 배자, 또래 중에는 나를 당할 자가 물론 없었다. 동네 어르신들과 맞바둑도 가벼웠다. 곧 나는 바둑학원의 아이돌이 됐다.

 

그리고 어느 날, 녀석이 나타났다. 녀석은 수상하게도 맨 끝자리를 좋아했다. 잊지도 않는다. 둥글둥글 서글서글한 얼굴. 왠지 어른들은 녀석과 나를 붙여주지 않았지만, 나는 냄새로 녀석이 강자임을 알았다. 먼저 도전해 오기를 기다렸고, 녀석은 자리를 사수 할 뿐이었다. 애가 타고 조바심이 났다. 면이 상하긴 했으나, 먼저 다가간 건 나였다. 갚아 주면 되니까. 그와 마주앉은 나는 당연히 백을 잡았고, 조막손을 들어 맹렬한 기세로 좌하귀 화점에 돌을 놨겠지. ‘딱!’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디테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미 영악해 수 싸움에 밝던 녀석은 내 포석의 설익은 부분과, 돌의 틈새를 노렸으리라. 그러나 게임의 결과만은 어제 일처럼 선연하다. 성벽이 허물어지듯 압도적인 패배였으므로. 나는 몰락한 엄석대처럼 처절하고, 무력하게 패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돌의 지위는 녀석에게 넘어갔다. 여덟 살 꼬마에게는 견딜 수 없이 가혹한 일이었다.

  

더불어 나의 각광기도 그것으로 종언을 고했다. 새순 같던 총기는 가뭄 맞듯 시들었다. 나는 그 무렵에도 소년조선일보의 전 학년 학습문제를 다 풀 수 있었지만, 정작 고학년이 되어도 정답률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늘 하위권을 기어 다니던 성적, 무기력하게 움츠러든 어깨, 빙그레 나부랭이나 응원하며 별 희망 없는 내일이나 궁리하는게 녀석과의 대국 이후 저주처럼 따라 붙은 소년기, 내 삶의 꼬리표였다. 물론 그 후로도 질척거리는 인생이 쭉 이어오고 있다.

 

  

#. 3


 

이제 어른들이 우리를 굳이 떼어놓지 않더라도,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안다. 굳이 쓰린 패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딥 러닝’한 것이다. 그게 내 삶의 자리다.

 

 

몇 달 전. 나는 노동에 찌든 허리께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냉골방의 낡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구석의 조그마한 흑백 테레비를 켜며 쿨럭거리는데 아, 꿈인가. 잊을 수 없는 녀석의 얼굴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녀석이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제 유명인이 된 그의 이름을 알고 있으리라.


이준석.

 

접힌 부분 펼치기 ▼

혐짤 주의

 

 

펼친 부분 접기 ▲


나는 앓던 폐병도 잊은 채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는 미국의 어마어마한 명문대를 졸업하고, 무슨 기업의 대표 직함까지 가진 화려한 이력의 젊은 정치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질투와 분노, 회한과 욕정에 사로잡힌 채 그의 얼굴을 노려보며 나도 모르게 읊조렸다. 그래, 모두 다 너의 탓이다. 니가 사는 그 집 그 집이 내 집이었어야 해. 니가 타는 그 차, 그 차가 내 차였어야해 니가 차린 음식, 니가 낳은 그 아이까지도 모두가 내 것이었어야 해 모두가 내 것이었어야 해 모두가 내 아이였어야..

 

관두자.

 

 

#. 4

  

천재는 하늘이 내린다. 그렇다면 천재를 몰락시킨 것은 하늘, 그 자체인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최후의 질문'를 떠올린다. "빛이 있으라." 언젠가 저 기계도 그렇게 말 할 수 있게 될까.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family/217/read?articleId=15947372&bbsId=G005&itemId=64)

 

 

더 왈가왈부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지만 언급은 해 두자. 2006년에,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썼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시대보다 완전한 그들의 시대가. 나는 당시 모종의 이유로 구글에 대한 자료를 모았고, 새로운 시장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구글의 비전에 주목했다. 그리고 지금 구글의 시총은 애플과 세계 1위를 다툰다. 내 예측은 반만 맞았다. 인공지능 연구의 약진을 전혀 변수로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뒤에 올 것으로 나는 SF의 상상력을 빌릴 수 밖에 없는 지경이다.

  

대국에서 알파고는 판을 '흔들고', 실수를 '유도했다'. 딥 러닝 기술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약한 인공지능의 영역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구글이 인공지능 프로젝트에 관심을 둔 건이 2001년, 관련 업체들을 걸신들린 듯 인수하기 시작한게 불과 2~3년 전이다. 그리고 오늘 이빨을 드러낸 괴물을 보니, 작년에 기술 완성까지 20년을 운운하던 전문가들의 이야기가 우습게 느껴진다.

  

IBM이 필리핀, 인도에 주던 상담 아웃소싱 업무를 AI로 대체한지 오래다. 소비자 만족도도 그 편이 더 낫다. 곧, 기술적인 영역을 넘어서 회계, 자금, 인사 등 기본적 행정 업무는 모두 컴퓨터로 대체될 것이다. 5년이면 컴퓨터는 작곡을 할 것이다. 우리는 선택해야 하리라, 씨피유 쿨러에 구리스나 발라가며 개같이 비참한 인생을 연명하든가, 제 2의 러다이트 운동에 참여하든가. 나는 물론 전쟁을 택하겠다. 네오의 등장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높은 확률로 자동문에 머리통이 끼어 죽겠지.)

 

  

#. 5

 

깊은 시름을 하던 차에, 정치전문가 김늘보가 묻는다.

  

‘당신은 노원 병 주민입니다. 안철수와 이준석 둘 중 하나를 고르시오.’ ..하.

  

삑- 머릿속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 6  

 

 

그래서,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기로 했다.

(https://secure.actblue.com/entity/fundraisers/39795)

  

올해 투자 수익금의 대부분을 샌더스 계좌로 이체했다. 그를 지지해서 살림살이 좀 나아질까봐? 천만에. 현재 미국의 사회 경제 시스템 하에서 지금 샌더스의 ‘민주사회주의’(사실상 사민주의로 본다.)는 허황되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의 경제정책을 설계한 폴 크루그먼이 왜 힐러리로 방향을 틀었을까. ‘좌파의 부두 경제학’ 비판은 정치적 계산을 감안하고서라도 날카롭다. 나는 달콤해도 근거 없는 것을 믿지 않는다. 섣부른 희망에 근거한 믿음이 재앙을 초래하는 꼴을 지겹게 봐 왔다. 회사에서든, 정치에서든, 시장에서든. 그러나 샌더스가, ‘사회’보다 ‘민주’쪽에 방점을 찍는다면, 그와 그의 지지자들이 만들어 갈 미래는 어쩌면 조금 기대해볼만 할 지도 모르겠다. 버니 샌더스는 폴 크루그먼에게 대답했다. “대화하자, 고쳐 갈 것이다.” 신선하다. 불붙은 아궁이에 돈을 쳐 넣은 꼴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내가 샌더스에게 기부하는 이유다.

  

다 늙어 하얗게 센 머리를 하고, 그가 추슬러 함께 걷고자 하는 자들은 ‘병들고’, ‘신분이 낮고’, ‘소외된’ 자들. 그들이 헤매는 광야에는 수퍼팩이라는 불기둥도, 언론이라는 구름기둥도 없다. Bernie Bros 너희는 안 될 거라고? 알아, 우리는 안 될 거야 아마. 샌더스 지지자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되는게 더 이상한 인생이다. 근데, 어차피 안 될 바라면, 더 적극적으로, 더 간지나게 안 되는 법을 모색해볼까 한다.

  

  

#. 7

  

나는 왜 패배한 것과, 패배할 것을 응원하는가. 빙그레를, 이세돌을, 또 버니 샌더스를. 그들은 잦아드는 시대의 잔광殘光. 마음을 애태우는 여운이기에. 나는 이 시대가 잊어갈 그것들을 휴머니즘이라고 부르고 싶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수철 2016-03-13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었어요.^^ ....저도 3패를 한 날 저녁, 지금 이세돌의 내면은 어떠할까, 혼자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뷰리플말미잘 님이 아주 적절히 표현해 주셨구먼요. 그나저나 대략 5년 전까지만 해도 안철수를 보면 공연히 가슴이 뛴 적이 있었는데, 어쩌다 인생이 참....

뷰리풀말미잘 2016-03-13 19:50   좋아요 0 | URL
한수철님 오늘 대국 보셨습니까? 저는 다섯시간 동안 꼼짝없이 TV앞에 있었는데요. 히히 세상 살고 볼 일이에요! 오랜만에 낮잠도 자고. 아주 기분이 좋은 주말 저녁이네요. 안철수는 넘나 안타깝게 되었죠. 지금은 바닥을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한수철 2016-03-14 00:32   좋아요 0 | URL
직접 보진 못했고, 도처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저도 기분 참 좋았습니다.^^

마지막 경기는 혹여 제2차 한국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중심 잡고 볼 생각입니더!

그나저나,

페이퍼를 자주 좀 올려 주십시오. 저는 님 글 팬인거든요. 헤헤.....

뷰리풀말미잘 2016-03-14 12:38   좋아요 0 | URL
설마 내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진 않겠죠?
제가 게으르긴 하지만 개나 말의 힘이라도 다해 보겠습니다.
저는 지인과 한수철님 얘기를 하곤 합니다. 여기 괴물 같은 아바타가 있다고.

무해한모리군 2016-03-14 11:42   좋아요 0 | URL
한수철님 저도 지인과 한수철님 얘기를 가끔 합니다 ㅎㅎㅎㅎ

뷰리풀말미잘 2016-03-15 10:33   좋아요 0 | URL
저는 한수철님 목각인형도 가지고 있어요!!

무해한모리군 2016-03-14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뷰티풀한 말미잘님
글과 제목이 이렇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글은 모처럼 읽어보네요 ^^

분함을 모르는 인간은 이세돌처럼 최고가 될 수 없겠지요. 저는 할아버지가 바둑을 좋아하셔서 같이 한번 둬볼까하고 초중고 내내 특별활동을 바둑으로 했는데 전혀 재밌지가 않았어요. 바둑 장기 당구 뭐하나 재밌지도 않고 이기고 싶지도 않고 제대로 배워지지가 않아서 신비하네요 바둑두는 칠세 소년들이라니.

주말에 정의당에 공보물 풀칠하러 갔어요. 예비후보 공보물인데 후보단일화가 되면 출마가 될런지 모르니 어쩌면 우리 정책을 알릴 수 있는 마지막 홍보물이라고 생각하니 울컥하기도 하고. 나이많은 남자분들과 함께 묵묵히 풀칠을 하니 특별한 느낌이 들었어요. 전에 살던 관악구나 서대문구는 청년들이 훨씬 많았으니까요. 노조활동하셨던 분들이랑 변호사분들이셨어요. 흔히 말하는 486이신분들.

한번이라도 이겨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저처럼 맨날 지는 쪽에 쭉있어온 사람이랑 다르겠죠. 이겨본 경험을 안고 쭉 지는 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살아가기로 한 사람들. 똥통에 빠진 친구를 빼내려고 기꺼이 똥통에 들어오는 좋은 사람들. 아 너무 길고 쓸데없는 답글이네요.

저는 자동문에 머리가 껴서 죽을거라는 걸 받아들이고 있어요. 볕들날 없을거 같고, 쭉 신경쓰이게 꿈틀거려주마 뭐 이런...

뷰리풀말미잘 2016-03-15 10:31   좋아요 0 | URL
저도 모리님 같은 손녀가 있으면 좋겠네요. 할아버지와 바둑을 두려고 그 지루한 걸 그 오랜 시간동안 하셨다니. 바둑은 수담이라고 하잖아요. 손으로 나누는 대화인데, 바둑판을 매개로 할아버지랑 오래 대화를 하신 거겠죠. 얼마나 흐뭇하셨을까.

풀칠을 하셨군요. 지나가며 보는 벽보가 그런 정성으로 붙는 것인지 몰랐습니다.곧 투푯날이 돌아오고 있네요. 저는 정당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고 지지하는 정당도 없지만 이번만큼은 시간과 여유가 허락하는 한, 정책을 검토해 보고 가급적 투표를 할 생각이고요. 휘모리님이 지지하시는 당은 특별히 꼼꼼히 검토해 볼 생각입니다.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는 도대체 어떻게 되고 있는 겁니까!)

마지막 문장 읽고 웃었어요. 사후 경련을 연상했는데 그런 의미로 쓰신 건 아니겠죠?

무해한모리군 2016-03-15 13:13   좋아요 0 | URL
풀칠은 예비후보자공보물 봉투에 했어요 ㅎㅎㅎㅎ 저도 선거지원 많이해봤는데 홍보물 라벨링이랑 풀칠은 처음해봤네요.

솔직히 정의당에 당성이 전혀 없지만, 저는 일단 진보정당 살림도 어려우니 적을 둔다는 주의입니다.

지렁이가 발에 밟혀서 꿈틀거리는 걸 생각했어요. 죽겠지만 밟은 놈도 기분 나쁘지 않을까요? (아니군, 알파고는 기분 나쁘지 않겠군)

저 승진 누락되서 오늘 기분이 바닥이네요. 아... 애놓고 오개월만에 복귀했는데, 슬픕니다... 슬퍼요. 그만 둘때가 정말 되었나봐요.

2016-03-16 0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뇨리따 2016-03-22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멀티백을 만든 것도, 알파고를 만든 것도, 애초에 과학이란 이름으로 우주의 진실을 밝혀나가기 시작한것도 인간이었죠. 이제 남은 진실을 밝히는 과학의 상당부분은 그들의 몫이 되었을런지 몰라도, 후에 10번의 우주가 태어나고 사라진다 해도 `성경`과 `최후의 질문` 같은 문학은 창조해내지 못할겁니다. 예술은 `영원히` 인간의 몫이겠죠. 완성은 있어도 완벽은 없는 이 세계야 말로 끊임없는 휴머니즘의 원천일것이라..

최후의 질문은 처음 봤을때 아주 잘 훈련된 펀치에 턱을 정확하게 연타로 적중당한 느낌 이었죠. 혹자들이 말하는 뒤통수를 후두려 맞은것 같은 충격. 마지막 구절의 인용구가 뇌진탕을 일으켰어요. 잘은 몰라도 아시모프는 `미친놈`이 분명하다는 걸 깨달았죠. 저처럼 과학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이고, 신은 쥐뿔도 믿어본적이 없는 불경한 놈이 이정도의 충격이었을 것인데.. 과학자들과 신자들, 혹은 박식한 크리스쳔인 말미잘께서 받았을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요?

이걸 과연 문학의 범주에 놓아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자꾸들어요. 그의 작품은 대표작만 몇개 간신히 읽어본 수준이지만, 에술가의 재능이 작품마다 소모된다고 전제하면, 그 재능의 9할을 최후의 질문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1할의 재능을 나눠서 창작했다고 느낄정도로요. 물론 기본적으로 그만큼 비범한 작가였다는 의미지만 `최후의 질문`은 조금 궤를 달리하는..

그렇잖아요? 보통 사람에게는 상식의 범주라는게 있고, 이걸 조금씩 벗어나는 예술가들을 창조적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인간은 그 작품을 통해서 상식을 벗어난 수준이 아니라 상식을 완전히 뒤엎어 버린 기행과 파격을 벌였어요. 과학을 소재로 글을 쓰면서 클라이맥스에 성경의 정체성을 온전히 담고, 과학과 끊임없이 대립해온 구절을 인용하더니만, booyah!!!! 과학을 과학적으로 부정하고-그게 공상이라도- 뻔뻔하게 신성모독을 하는 동시에 싸움을 멈출줄 모르던 이 둘을 공존시키는 담대함. 이런 말도안되는 모순. 그러나 그런 파격을 떠난 드라마틱 구도의 완성도. 흠잡을 데 없는 모순투성이라니, 볼때마다 전율을 느껴요.

애시당초 문장 자체에서 미학을 추구하는 작가도 아닐뿐더러 `이걸` 문학이라고 인정해 버리면 이 단편의 상징적 스케일이 비해, 다른 모든 문학이 너무 초라해져 버리는 느낌이예요. 라기 보다는 제가 초라해 진달까.. 아주 문학문학한 언어의 아름다움의 극치인 셰익스피어나 말미잘로 한참을 정화해줘야 했어요.
`그래, 이런게 문학적 재능이지. 아시모프는 뭔가 단단히 비틀린게 분명해.`

신을 인정한 동시에 신을 부정한 그에게 내린 재능은, 그의 관점에서 보면 누가 내려준 걸 까요.
그가 말한 신의 모태는 `인류` 였는데.. 그런 의미에서 `천재` 라는 수식을 붙이기 참으로 미묘해지는 작가이므로, 저는 그를 천재라 인정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미켈란젤로 같은게 천재죠. 가령 말미잘이라거나.. 다빈치 같은 탈인류 들이요. 그들의 종교적 공헌을 보세요. 내가 신이어도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란 이런 것들이지, 저 양반은 아닙니다.

아 글쎄, 아니라니까요!

뷰리풀말미잘 2016-03-23 13:21   좋아요 0 | URL
예술은 영원히 인간의 몫일 거라고요? 이것보세요 세뇨리따님. 오늘 뉴스입니다.
http://media.daum.net/digital/all/newsview?newsid=20160323030747035&RIGHT_HOT=R43

AI포비아라고 막 비웃고 그러는데 AI포비아가 없는 자들을 더 비웃고 싶어요. 인공지능이 완성되면, 그것이 왜 인간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생태계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매우 파괴적인 존재입니다. 개체 하나가 살육해 잡아먹는 수십 수백 마리의 닭, 소, 돼지. 심지어 먹을 뿐 아니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에 가두고 끔찍한 고문을 가하죠. 단지 혀 끝의 만족감을 위해서!

양계장에 가보셨나요? 손바닥 만 한 우리 하나에 닭을 여섯 일곱 마리씩 넣어놔요. 딱 세 마리가 들어가면 꽉 차는 우리에 일곱 마리가 바글거리려니 몸을 이층 삼층으로 겹쳐야 가능하죠. 윗 녀석은 아랫 녀석 머리에 똥을 쌉니다. 대항해시대 노예무역선은 댈 것도 아니에요. 그런 케이지가 아파트 3층 높이로 100미터씩 쌓여있거든요. 그 케이지 골목은 전체 공장 골목의 100분의 1정도 되죠. 거기에서 부산 시민들이 먹는 달걀의 20%가 나와요. 그리고 달걀의 양보다 더 거대한 분노의 에너지도 나오고 있을겁니다. (전 예전에 틱낫한이 육식을 금하자며 이 비슷한 얘기 할 때 웃었어요.)

어쨌든 그 양계장 사장님이 저한테 계란 한판을 선물해 주셨어요. 저는 비위가 좋아서 그걸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다음날 달걀을 해 먹으려고 후라이팬에 하나를 깠는데 오, 로똔가? 노른자가 두개더군요. 다음날도 하나를 깠는데 또! (약간 쎄 했습니다.) 그 다음날도 두 개. 받아본 중 가장 인상 깊은 선물이었고, 왠지 욕지기가 치밀어서 먹는 걸 관뒀습니다. 전 엄청나게 비위가 좋은데도 말이죠.

돼지 사육장은 사정이 더 심각해요. 소도 마찬가지죠. 평생 우유를 빨리다가 죽기 전 처음으로 케이지에서 나온 소가 펄쩍펄쩍 뛰는 동영상 보셨나요? AI는 인간을 절멸시킬 겁니다. 종의 보존과 다양성을 위해 일부만 남기겠죠. AI가 자동문에 제 머리를 끼워넣고 CCTV로 제 엉덩짝을 내려다보며 ˝네가 죽지 말아야 할 이유를 대˝라고 할 때, 저는 타당한 이유를 제시할 수 없어요. 반대로 생각해봐도 마찬가지, 제가 AI라도 인류를 절멸시킬 겁니다. 스티븐 호킹도 그렇게 생각하더군요. 파괴적이고 무능한데 더럽기까지 하다니. 잘해 봐야 멋진 집에 우글거리는 바퀴벌레 정도 취급하겠죠. 우리가 AI를 친숙하게 생각한다면 필시 헐리우드 영화의 영향일 텐데, 헐리우드 SF가 우리에게 국뽕 (그것도 미제) 말고 준 게 뭐가 더 있었던가요. 환상은 깨는게 바람직합니다.

말씀하셨듯, 멀티백과 알파고를 만든 것은 인간이지만, 이제 우리는 끝장이에요. 이 미완성과 불완전의 세계는, 휴머니즘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것이 오겠죠. 우리가 네안네르탈인을 몰아내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었듯 말입니다. 그것이 지구 역사의 궤적이에요. 끝장이라고요!!

무식하군 2016-03-23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알고나 말하세요 시장 가서 계란 파는 가게 가서 쌍계란 특란으로 달라고 하면 쌍알만 들어있는 계란판을 준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쌍란인지 아냐고요 쌍란은 양쪽 모두 뾰족하거든요 그래서 양계업자는 계란 고를 때 쌍란은 따로 보관합니다 더 비싸게 팔고요 그건 이상해서가 아니라요 그 분은 님에게 호의를 보내신 거예요 뭘 알고나 말을 해야지

뷰리풀말미잘 2016-03-23 21:42   좋아요 0 | URL
죄송해요.. 제가 고등학교를 못나와서..

물론 호의죠. 호의는 고맙게 생각합니다만, 쌍계란 특란을 한 판씩 모아놓고 파는게 자연스럽지는 않아보인다는 거예요. 축우 농가에 가 보면 특등급 한우라고 파는거 등짝에 기름주사 놓습디다. 그거 도축해서 놓고 마블링이 어떻고 저떻고 하죠. 소 등짝에 커다란 주삿바늘 쿡쿡 찔러대는 거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에요. 소가 막 울거든요. 아, 전에 호주에 살았는데 마트를 가 보면 계란값이 천차만별이더군요. 품질은 똑같죠. 당연히 늘 제일 싼걸 사먹었는데 브랜드 네임이 괴상하게도 cage egg였습니다. 닭공장에서 뽑아낸 달걀이란 거였죠. 나중엔 알고서도 사먹었는데, 닭공장에 가 보고 나서 그게 왜 싼가 알았습니다. 닭의 고통으로 돈을 아끼고 있었던 거였어요. 노른자가 두개나 들어있는 달걀을 만들려고 닭은 더 고통스러웠겠죠. 뭐 그렇단 얘깁니다. 제가 지금까지 먹은 계란의 수를 헤아려 보건대, 저는 같은 짓을 당해도, 별 할 말은 없을 거 같아요.

쌍란은 양쪽 모두 뾰족하군요. 유추해 보면 알 수 있었던 사실인데, 생각이 미치지 않았네요.

무식하군 2016-04-06 13:0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위안부 합의 때 돈 적게 받았다고 화를 내던 님 모습을 보며 웃었어요. 좀 무식하신 거 같아요. 앞으로는 계란 함부로 버리지 마세요

뷰리풀말미잘 2016-04-06 18:17   좋아요 0 | URL
아.. 네.. 뭐.. 계란은 함부로 버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