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트 오브 킬링
안와르 콩고 외 감독, 하지 아니프 외 출연 / 하은미디어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 1

 

 

하이데거와 나의 견해가 일치하는 드문 부분. ‘한나 아렌트’. 담배피우는 모습이 섹시한 그녀는 그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다. 2차 세계대전, 나치즘의 광풍 속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한나 아렌트는 1960년 생포된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청한다. 그리고 절대악이라 믿었던 자의 범상함에 충격을 받는다. 이럴 수가, 그는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노인이었고, 좋은 가장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우리의 삶과 행동에 침잠한 ‘일상의 악마성’과 마주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도 악이 될 수 있다.” 야무지기도 하지. 그녀의 결론이다.

 

여기 한 사내가 있다. ‘안와르 콩고’. 인도네시아 극우 테러단체 ‘판차실라 청년단’의 행동대장으로 천명의 공산주의자를 학살했고 중국계 상인들의 삥을 뜯었으며, 외국인 노조원들을 폭행했다. 단언컨대 영화사상 가장 화끈한 캐스팅. 그와 그의 옛 동료들이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감독은 그를 만나 그들의 입장에서 당시를 재연한 영화를 찍겠다고 했다. 주먹이 날아왔을까? 천만에, 흔쾌한 승낙을 받았단다. 그들은 악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애국’을 한 것이었으므로.

 

영화는 영화를 찍는 콩고와 동료들을 다시 찍는다. 이른바, ‘메이킹 필름 다큐멘터리’다. 콩고, 험상궂은 사람 아니다. 호리호리한 체구로, 룸바 스텝을 사뿐거리는 노인이고, 영화를 평론할 정도로 지적이며, 손주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사려 깊음마저 느껴진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때로 가해자, 때론 피해자의 입장을 재연하는데 좋은 추억을 되새기듯 사뭇 진지하고 열정적이다. 다만, 그 내용이 때론 조금 극단적일 뿐. 철사로 목 졸라 죽이고, 책상 다리로 눌러 죽이고, 베어 죽이고, 빠뜨려 죽이고… 이 선혈이 낭자한 역사가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천진난만하게 되풀이 된다. 그들도 알고는 있다. “사실 공산주의자들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어.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건 안 될 일이겠지.”

 

그들이 찍는 영화는 재연극이었다가 뮤지컬로 바뀌고, 리얼리즘을 닮았다가 때론 판타지가 된다. 그들이 가해자의 역할을 재연할 때 죽은 피해자들은 천국에서 말한다. “나를 살해해서 천국에 보내주신 것을 감사드리며….” 의미는 때론 말보다 형식에 내재한다. 영상에 얼비치는 그들의 내면을 보라,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역할이 바뀌어 피해자를 연기할 때의 콩고의 모습이다. 고문당하는 연기가 끝나고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콩고. “물 한잔 마실래요?” “아니, 마시고 싶지 않아.” 즐거움이 싹 가셔버린 그의 표정. 온 몸에 소름이 쫙 오른다. 세상에, 당신은 단 한 번도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흐르는 눈물에 당혹스러워하며 그는 묻는다. “내가 죄를 지은 건가요?” 누가 대답할 수 있으랴.

 

학살의 현장에서 진행된 마지막 인터뷰 씬에서 콩고는 헛구역질을 한다. 치미는 욕지기를 참아가며 과거의 입장을 강변하는 그의 몰골에서 처음에 없었던 어떤 당혹스러움이 묻어난다. 소설, ‘구토’에서 로캉탱이 압도적인 실존의 위기에 구토로 반응하듯, 그의 범상함도 자기 존재 자체에 깃든 어떤 부조리를 눈치 챈 것이리라. 그가 토하려 한 것은 화려한 형식으로 기만하려 했던 추악한 자신의 실존. 그러나 새까맣게 열린 콩고의 목구멍에서는 아무것도 쏟아지지 않는다. 소화된 음식이 넘어오지 않듯, 지나간 부조리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당신의 육신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냐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와 같은 경우를 한 다스씩은 알고 있다.

 


#. 2

 

 

 

안와르 콩고와 Pancasila Youth

 

인도네시아의 판카실라 청년단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얼룩덜룩한 카모플라주 패턴의 군복을 입고, 집회를 열고, 소란을 벌인다. 악랄한 가해자들의 권력이 선한 피해자들을 압도하는 묵시록적 세계에서, 선한 주인공의 역할은 나쁜 놈이 맡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서북청년단’을 생각한다. 그들은 주로 북쪽의 탄압을 피해 남하한 지주들, 기독교계 인사들, 민족주의자나 일부 친일파들로 구성된 준군사조직이었다. 이 분노로 가득한 젊은이들은 이승만의 홍위병이 되어 반대파들에게 무자비한 테러를 가했다. 고은의 시 ‘오라리’를 읽어보자. 테러는 ‘백색’이었으나 그들이 지나간 거리마다 선홍빛 핏물이 잘박거렸다.


70년이 지나고, 그들을 흉내 내는 무리들이 등장했다. 정규군은 아니나 군복을 입고 무리를 짓는다. 어설픈 대오로 어깨를 맞대 걷는 그들은 얼룩덜룩한 군복을 입었다. 소란스러운 음악을 틀고, 악다구니를 쓰고, 모여 난동을 피우는데 심지어 별 제재도 받지 않는다. 철 지난 반공이념과, 어그러진 애국을 와글거리는 그들 중, 제법 머리가 굵은 녀석 하나가 나와 새까만 입을 벌리고 말 한다. “서북청년단 같은 단체는 10개가 더 나와도 괜찮다” 가만, 이 사회는 과연 어떤 자들이 승리해온 사회란 말인가.

 

태교에 안 좋을 수 있음

 

 

펼친 부분 접기 ▲


낡은 전투복까지 꿰어 입은 그 ‘청년’ 가라사대. “길게는 2년, 짧게는 6개월 만에 나는 크게 성장해서 진출하고 있다. 즉 ‘듣보잡’이라는 용어는 낡은 386세대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한 청년의 초고속 성장의 의미가 되어버렸다. 봐라, 조만간 용어의 개념이 바뀌게 될 것이다.” 헐, ‘초고속 성장’이라니 고추에 3차 성징이라도 나타났으려나. 어쨌거나 스스로를 ‘듣보잡’이라 일컬을 만큼 범상함의 아이콘이었던 그는 ‘크게 성장해’서 국회의원 보궐선거까지 출마한단다. (최근엔 영화도 찍었다. 감독이 강의석이긴 하다.) 다만 해프닝인가. 아니면 묵시록적 사회의 전조인가. 진지하게 곱씹기엔 웃기고, 웃어넘기기엔 우리 역사가 지나온 골이 너무나 깊다.

 


#. 3


오, 듣보 범상함이여,


역사는 그대들의 심장 속에서 새카만 입을 벌리나니.


돌아보라, 반성에 게으른 범상함은 악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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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뇨리따 2015-11-24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신비하고 지루한 다큐멘터리. 이들의 폭력과 살인은 아류 느와르의 연출만큼도 세련되지 못했고, 이 영화에 대한 놀라운 찬사들에 대해 회의를 느끼던 감상은, 안와르 콩고의 목에 철사가 감길때 180 도 반전되었죠.

진짜 폭력과 살인은, 사실 그렇게 극적이지 못할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몇번 반복되어 가책이 사라질때 그들에게 그것은 일개 `막노동` 이었겠죠. 조르고, 자르고 ,누르고, 옮기고, 투닥거리하고의 반복..
수백번을 반복하는 살육중에, 그들은 영화속에서 발견한 미학을 추구해야 했을 정도니까요. 어쩌면 그 와중에 살인은 그의 내면에서 예술로 승화 되었던 것은 아닐까도 싶습니다만..

인간이 굶지 않기위해 싸우고, 살기위해 죽였을 때
그것은 야만스러울 지언정 잔인하지는 않았는데.. 미개하고도 순수했었는데..
사상이 생기고, 상대의 생각을 부정하고, 그것이 분쟁이 되었을 때, 잘 짜여진 이성에 지배받는 인간은 어디까지 잔혹해 질 수 있는지.. 어디까지 추악해 질 수 있는건지..
내가 그였다면, 나는 그와 달랐을지..
네, 그는 그저- 예민하고 흥이 많은 평범한 노친네 였으니까요.

왜 콩고 그 노친네가 가쁜 호흡으로 물한모금 넘기지 못했을때 연민하고, 눈물 흘릴때 저도 눈물을 훔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미련한 연기력 수준으로는 연출될 수 없는 토악질 속에서
그 평생을 다바쳐도 덜어내지 못할 `카르마`를 수십년간 모르고 살다가 한순간 그 노쇠한 어깨에 져야 했던 자의 중압감을 동정해서 였는지도요.

모순된 그들의 사회상과 뒤틀린 자부심은 희극적이었고,
안와르 콩고의 내면의 변화는 더 극단적일수 없는 비극이었죠.
우습고도 어설픈 3류 콩트에서 비극적인 휴먼 다큐멘터리까지-


그래서 그는 그 토악질을, 게워내도 게워내도 아무것도 게워지지 않는 그 업보를, 남은 평생 그의 정당한 살인처럼 반복하며 살아갈까요?
자유인이길 자처하던 그들이, 인간이 갖춰야할 최소한의 소양을 얻는 순간 `카르마` 라는 무거운 족쇠를 얻게된다니 이런 `웃픈` 역설, 아마 감독조차 생각하지 못한것은 아닐런지

뷰리풀말미잘 2015-11-25 17:42   좋아요 0 | URL
아니 이 싸라미, 리뷰를 댓글로 쓰면 어떡해요. 이 글은 내리지도 못하겠네. 이거, 정말이지 엄청난 영화 아닙니까. 엄청나요. 엄청나.

꿈 내용이 생각났어요. 세뇨리따님 나왔는데 cross dresser였음. 요즘 크로스 드레서 나오는 드라마를 봐서 그런가.. 닉네임은 세뇨리따인데 성별이 XY라서 그런가..

세뇨리따 2015-11-30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는 간신히 마초이스트에 미치지 못하죠. 마크 헌트에 버금가는 상남자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세뇨리따에 대해서 해명하자면, 스페인의 찐득한 억양으로 miss를 부르짖는 그 강렬한 염원을 담고싶었달까요. 특수문자의 사용이 가능했다면 세뇨뤼~따! 였을겁니다. 한결 남자적이어 보이죠? 정리하자면, 제 정체성에 대한게 아닙니다. 제 기호에 대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