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혓바닥처럼 산다. 사랑은 뜨겁고, 사람은 맵다. 돈은 짜고, 일은 쓰다. 날씨까지 더워지니 빼 문 살덩어리만 점점 길어지는데, 그나마의 위안은 바야흐로 냉면의 계절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좋아, 냉면을 먹자. 그런데 냉면이란 무엇이지? 찬물에 국수 말았다고 다 냉면인가. 품격을 갖춰야 냉면이다. 들척지근한 설탕국물에 식초와 겨자소스를 버무린 함흥냉면은 보여주지 못해 안달하는 스트리퍼 같다. 품격이 없다. 진주냉면 소수파가 아니라면, 우리에겐 최후의 선택지가 남는다. 물론, 평양냉면이다.
슴슴한 평양냉면을 사발째 들이키면 속이 확 뚫리는 느낌이다. 살얼음에 각얼음에 애를 쓰지 않아도 내장까지 서늘해진다. 국물이 입에 고였을 때, 미각은 온갖 맛을 감당하기 위해 용 쓸 일이 없다. 아직 찬 기운을 간직한 국물이 저절로 몸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서늘해진 위장으로부터 사지로 냉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하면 삐질삐질 기어나오던 땀들은 땀구멍으로 도로 들어간다. 우리 바쁜 혓바닥들은 비로소 쉴 시간을 찾는다.
요란한 맛의 세계에서 담백함이란 그 외의 모든 맛과 구분되는 최후의 미덕이다. 당나라 시인 사공도는 이렇게 읊었다. ‘짙은 것은 다하여 메말라지나 담백한 것은 점점 더 깊어진다.’ 옛 사람들은 담박함(淡)을 최고의 맛으로 생각했다. 평양냉면은 담백한 음식이다. 온도를 절제하고, 고명을 절제한다. 잔치국수처럼 면이 안 보이게 고명을 덮지 않아도 맑은 국물에 푸짐함을 다 담아 낼 수 있다. 진정한 매력은 안달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법이다.
#. 2
냉면의 족보를 놓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아니, 뭔 냉면에 역사랄 게 있겠나. 쫄깃한 전분 면이 정석인가, 부드러운 메밀 면이 정석인가. 그런 건 없다. 밀이 많이 나는 해는 밀가루를 썼고, 메밀이 있으면 메밀을 섞었다. 메밀이 잘 되고 밀이 흉작이면 메밀 함유량이 높아졌을 것이다. 육수도 제각각이다 소 육수, 닭 육수, 돼지 육수를 되는 대로 섞어 쓰는가 하면 심지어 동치미 국물만 부어 저어먹기도 한다. 근래에 와서 지역을 나누고 역사를 추적하기도 하지만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평양 옥류관 냉면을 먹어 본 사람 말에 따르면 남한의 평양냉면과는 전혀 다른 맛이라고 한다.
평양냉면이란 무엇인가. 다만, 국물이 맑고 차가우며, 간이 슴슴하고, 질긴 전분 면을 배재한 면 요리를 나는 평양냉면으로 정의한다.
#. 3 서북면옥- 청빈한 선비의 육수
그럼 어디 냉면 먹어본 얘기 좀 해 볼까. 비록 좁은 견문이나마 내가 먹어 본 중, 가장 평양냉면 같은 평양냉면을 만드는 집은 서북면옥이다. 소위 말하는 4대 면옥, 5대 냉면집은 아니지만 60년이 넘게 한 곳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온갖 음식점이 별빛처럼 명멸하는 시대에 보통 내공으로는 어림도 없을 일이다.
서북면옥은 구의동 귀퉁이에 조그맣게 버려지듯 놓여있다. 90년대 초반에나 달았음직한 초라한 간판을 어떻게 알아보고 오는 건지 식당에는 매일 사람이 바글거린다. 목요일 저녁도 마찬가지다. 낡아빠진 점포는 휑한 실내에 촌스러운 테이블, 뒤뚱거리는 의자 말고는 딱히 인테리어랄 것도 없다. 볼 것도 없다. 다만 벽에 조잡하게 붙어있는 ‘大味必淡(대미필담-가장 좋은 맛은 반드시 담백한 것이다.)’라는 문구만 시선을 잡아끈다.
처음 이 집 냉면을 먹었을 때, 머리가 뎅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풍덩. 찬 물을 기대하고 다이빙을 했는데 웬걸, 발바닥에 마른 수영장 바닥이 닿는 느낌이다. 맛이 느껴질 자리를 지나쳐가는 심심한 국물에 어안이 벙벙했다. 비주얼도 심플 그 자체. 하얀 무채 몇장, 양지 고명, 삶은 계란 반개에 면 한 덩어리 뿐. 하지만 아무 자극 없이 목구멍을 쭉 따라 넘어가는 국물은 놀랍도록 깨끗하다. 뒷맛으로 초봄의 산들바람 같은 육향이 혀끝을 잠시 머물다 갈 뿐. 미원 몇 알 들어가지 않은 청정한 국물이 개운하다.
‘중용’ 읽다보면 신독(愼獨)이라는 말을 만난다. ‘홀로 있을 때 삼간다’는 말이다. 골방에서도 책 읽는 선비는 허리가 곧다. 의복은 남루하나 기개는 청청하다. 서북면옥의 냉면은 청빈한 선비의 냉면이다. 가난하나 정성을 다하자 문리가 터지듯 맛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다른 음식은 냉면만큼 좋지 않다. 딱딱한 오돌뼈가 박힌 돼지 수육은 육즙이 빠졌고, 김치는 별 맛이 없다. 수육과 함께 나오는 무채만 좀 먹을 만하다. 사람 많을 때 가면 합석을 시키기도 하는데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겠지만 영 못마땅하다. 흥.
별 다섯 만점에 별 넷.
#. 4 을밀대- 품격과 여유를 갖춘 소박함
내가 가장 높게 평가하는 냉면은 마포 을밀대다. 을밀대를 말하면 목이 마른다.
가난한데 표 안내기 어렵고, 부자인데 티 안내기 어렵다. 두 경우 모두 격과 여유를 갖춰야 가능한 일이다. 서북면옥이 청빈한 선비의 육수라면, 을밀대는 검소함의 미덕을 잃지 않은 대갓댁의 육수다. 무명옷만 입고 저잣거리에 나서도 지체 높은 양반은 태가 나는 법. 냉면도 마찬가지다.
서북면옥에 비해 조금 기름지다. 가장 드라이한 서북면옥에 비해 기름지다는 것이지 부담스러운 고기맛을 말하는 건 아니다. 메밀면수를 많이 넣어, 비 온 뒤 풀냄새 스치듯한 메밀향이 먼저, 부드러운 육향이 뒷맛으로 남는다. 그릇의 내부는 서북면옥보다 조금 더 호사스럽다. 무채에 오이채, 배 조각과 제법 푸짐한 양지고명, 삶은 달걀 반쪽이 들어간다. 가격은 10000원으로 비싼 편인데, 푸짐해서 섭섭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을밀대는 재료가 좋다. 깨끗한 물을 쓰는지 거슬림 없는 국물이다. 이 집이 담아내는 가볍지만 깊은 맛을 몇 글자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궁색한 시절 도스토예프스키를 불러 한 사발 사멕이면 책 한 권쯤은 써 줄 수도 있을듯. (그는 원고료를 많이 받기 위해 한 장이라도 더 쓰려고 기를 썼다.)
이 집은 나 말고도 칭찬하는 사람들은 줄을 섰으니 짧게 쓴다.
#. 5 대동관- 담한 것과 맹한 것
http://www.siksinhot.com/P/263230
평양냉면의 허심한 맛이 유행하다 보니 비슷하게 흉내 내는 집들이 많이 생겼다. 그저 밍밍하게 간을 해서 메밀국수를 대강 말아 내 놓는 집들이다. 좋은 옷을 입어도 알맹이가 없으면 아름답지 않다. 일산의 대동관이 그렇다. 가게는 크고 시설도 좋지만 냉면은 그냥 밍밍한 국수일 뿐이다. 담한 것과 맹한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평양냉면 대동관'이라고 써 있긴 한데, 평양냉면 보다는 '어복쟁반'이 메인인 듯.
#. 6 청량리 평양냉면- 이만하면 충분하다
청량리 경동시장 입구에 가면 이상한 냉면집이 있다. 낡아빠진 건물 2층의 시장통 냉면집. 테이블 서너 개에 바닥에 퍼질러 앉는 자리 두어 개 뿐인데. 고양이까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분위기? 근 20년 내에 이런 음식점은 본 일이 없다. 마치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제작한다면 세트로 쓸 법 하다.
가격도 20년쯤 후퇴했다. 냉면 7000원에, 수육 6000원. 냉면보다 싼 수육은 처음 본다. 생각해보니까 만원 하는 서북면옥보다 오히려 양도 많은 것 같다. 인심 하나는 좋다. 맛은 오묘하다. 국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딱 알아챌 수 있다. 미원도 넣고 다시다도 넣는다. 그런데 그 맛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오십년쯤 전에 노인은 남편을 잃었다. 군대에 간 남편은 맞아죽었다. 치약을 짜 먹는 배고픔에 시달리던 몸으로 골병을 이길 수 없었다.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올거요.’그런 시시껍적한 말만 남기고 남자는 갔다.
노인은 서른 살이 되던 해, 여덟 살 여섯 살 난 새끼들을 떼 놓고 서울로 왔다. 동생들 학교 보내느라 정작 본인은 숫자를 배울 수 없었다. 버스 표지판도 못 읽어서 용산에서 경동시장까지 팔 물건을 머리에 이고 걸어 다녔다. 그래도 하루 세 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는 성실함으로 돈은 제법 모았다. 그런데 그렇게 모은 돈을 어느 놈이 돈을 빌려가서 도망갔단다. 자식 대학 학비로 쓸 돈이었다. 아무리 쫓아다녀봤자 작정하고 숨은 놈을 무슨 수로 찾나. 발이 부르트게 돌아다니다 문득 몇 끼나 굶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리고 시장 골목 냉면집에 들어갔다. “세상에, 그 냉면이 어찌나 시원했던지.”
노인도 이런 냉면을 먹었던 걸까. 다른 곳 보다 조금 짭짤한 맛이 노인의 땀 냄새처럼 정겹다. 여름에 아무라도 들어와서 “아줌마! 빨리 냉면 한 그릇 주세요!” 하고는 후루룩 들이부어 땀을 식힐 것 같은 그런 맛이다. 어 시원하다. 하고 부른 배를 몇 번 두드리면 들어올 때 보다 조금 더 신난 발걸음으로 저 문을 나섰겠지.
쟁쟁한 면옥 같진 않아도 또, 먹을 만한 맛이다. 아마 양지를 좀 삶고, 간을 보다 부족한 부분은 조미료를 넣어 보탰을 것이다. 그렇게 끓인 육수에 면수와 동치미 국물을 넉넉하게 섞고 부드럽고 두툼한 국수는 인심 좋게 크게 한 움큼. 싸구려 고명 몇 점 올리면 그런대로 번듯하다. 냉면이 이만하면 충분하다. 굳이 별점이 필요할까. 한 여름, 뜨거운 혓바닥을 식혀주기에 충분한 맛이다.
#. 7
식탐 없는 것 치곤 입맛이 예민한 편이다. 그렇다고 음식을 가리지는 않는데, 간혹 선택권이 주어지면 면 요리를 고르는 편이다. 가장 선호하는 면 요리는 평양냉면이다.
오래 전, 압구정 강서면옥에서 처음 평양냉면을 먹었을 때 미각으로 놀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대단한 맛은 아니었으나, 조미료와 각양각색 진한 양념에 길들여진 내 혓바닥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식문화의 코페르니쿠스적 반전이 일어났다. 맵고 짜고 뜨거운 음식을 배재하고 가급적이면 투박해도 조용한 맛을 찾기에 이르렀다.
애써 음식점을 찾아다니는 건 적성에 맞지 않지만 우연히라도 소문난 냉면집을 찾게 되면 들러보는 편이다. 명성보다 더 좋은 집도, 이름값 못하는 집도 있었다. 종종 괜찮은 곳을 발견하게 되면 끄적거려 볼까 한다.
덥다. 냉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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