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반듯하게 꽂힌 서류철, 가지런히 꽂힌 필기구. 질서가 정연한 모니터 속 폴더들을 본다. 회사에서의 명성과 사회적 지위. 그간 내가 이뤄온 것들이 이토록 부질없는 것이었다니. 허무한듸! 무엇하러 나는 이 따위 것들에 집착을 해왔는가. 부질없구나. 내일 출가할 생각이다.  

 

불법에 귀의하기 앞서 속세의 연을 끊기로 결심한 사연이나 남겨볼까 한다. 


 

#. 2

 

점심시간이었다. 나의 밥 파트너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조퇴를 하자 H과장, L비서가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여자 사람 동료들이란 꼭 빈틈만 주면 이런 식이다. 흥. 하지만 한번 쯤 밥 같이 먹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나는 도도하게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제안에 응했다.

 

잠실 거리로 나섰다. 아직 깊지 않은 여름이라 뜨거운 햇살 속에서도 언뜻언뜻 시원한 바람의 결이 느껴졌다. 그런데 왜 유독 아랫도리가 더 시원하게 느껴지는 걸까. 조심스럽게 아랫도리를 바라봤고 그곳에서, 나무 관세음보살, 세상 모든 것을 긍정하듯 활짝 열려있는 나의 지퍼를 발견했다.

 

나는 우뚝 멈췄다. 아마도.. 다들 내가 왜 멈췄는지 궁금했겠지. 나는 조금 당황했고, 거기서 내 인생 최악의 히스토리컬 병크를 터뜨리고 만다. 한 손으로 바지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지퍼를 올린 것.

 

하..
 

 

#. 3

 

아직 속세의 업을 떨쳐내지 못한 채 글을 쓰려니 번뇌가 차오른다. 경으로써 이 한스러운 마음을 달래보자.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고액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콧구녕으로 들어가는지. 어쨌거나 뚫린 입이라고 밥을 쳐먹고 약국에 손 소독제를 사러 갔다. (이제 생각난 것이지만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메르스 때문에 소독제가 불티나게 팔려서 몇 개 안 남아 있었다. 나는 아까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서둘러 매대에 있는 소독제를 집었다. 하지만 왠지 그녀들은 나를 본체만체 지나쳐갔고,(그때 눈치를 깠어야 했는데) 나는 마치 갓 엑스칼리버를 뽑은 아더처럼 그걸 휘두르며 말했다. "자, 이걸로 닦으세요!"

 

뭔가 쎄한 느낌.

 

그 저주받을 것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여성청결제’


 

#. 4

 

닦긴 뭘 닦니..

 

내 인생이나 닦아버리고 싶다.

 

머리카락을 아무리 잡아 뜯어도 퇴근시간은 다가오지가 않더라.

 

 

#. 5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가자, 가자, 넘어가자 깨달음을 얻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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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5-06-15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지금까지 서재에서 나의 성별을 감추려 노력했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어떤 이들에게 남성이란 권력일 수도 폭력일 수도 있는 것이므로. 그러나 이제 그도 덧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안녕, 속세.

세뇨리따 2015-06-19 11:12   좋아요 0 | URL
말미잘은 성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감췄을 뿐 인가요?

뷰리풀말미잘 2015-06-19 12:57   좋아요 0 | URL
제가 잠시 속세의 번뇌에 시달리느라 본분을 잊었네요. 말미잘은 말미잘일 뿐. 자포동물문 산호충강 해변말미잘목의 생명체일 따름이지요. 성별은 무슨. 게다가 이미 불법에 귀의까지 한 몸이라 고추의 있고 없음 같은 것은 잊은지 오래입니다. 색은 공이고 공은 즉 색이니. 있거나 없거나는 부처님 안에서 한 가지일 따름이지요. 에이멘.

뷰리풀말미잘 2015-06-1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복을 할까도 생각해봤지만 그건 점심을 먹기 전이 적절했다.

붉은돼지 2015-06-16 10:32   좋아요 0 | URL
할복하실려면 가이샤쿠해줄 친구가 필요해요^^
검술이 뛰어나야 하구요
한칼에 댕강!!! 하고 안떨어지면 두 번 세 번 내리쳐야 해요...
으으으으으으으으으.......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려요..으으으으으으

한두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이기는 하나.....
실수가 실로 중차대하니....
부디 성불하시길.....나무 관세음보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뷰리풀말미잘 2015-06-16 18:13   좋아요 2 | URL
네, 사실 아침까지 고려하긴 했는데 검술 뛰어난 동료도 없고, 잘못하다가 미시마 유키오 꼴 날 것 같아서 포기. (여섯 번 만에 잘림) 일단 회사 결근하고 조계종 쪽으로 일자리 알아보고는 있는데.. 스님 스펙이 어떻게 되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경력직만 뽑나여.. 인턴 경험도 없고 토익도 없는데. 하지만 불심만큼은 지금 현재 기준 그 누구보다 타오르고 있습니다. 머리도 이미 밀었어요. 목탁은 1분에 5000타 정도 나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