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라, 말해라, 말해라. 그녀는 그저 사람들이 자기를 가만히 내버려 두기만 바랐다. 어울리지 않는 시대에 태어났다. 이 끝없는 수다. 그녀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먼 옛날을 상상해 보았다. 다른 세기에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골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말이 거의 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더라면. 새벽 여명에 일어나 외양간에 가서 음매 소리를 내며 반기는 소의 젖을 짜는 일. 분홍빛 젖꼭지를 쥔 채 양동이에 떨어지는 젖줄기의 속삭임과 파리의 윙윙거림에 귀를 기울이는 일, 비, 발아래의 부드러운 풀, 겨울에는 뽀드득거리는 눈, 우물의 텅빈 메아리. 그녀는 우물에서 울리는 소리를 좋아했다. 지금 수도꼭지 대신 우물이 있어서 기뻤다. 아연 양동이가 우물로 내려가 춤출 때면 들려오는 금속성 노래. - P70

 크리스티나는 병원에 잘 적응했다. 부모님은 그녀에게 다시 공부를 시작하거나 적어도 다른 일자리를 찾으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녀는 부모님의 바람과 달리 부모님보다 늘 몇 시간 일찍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5킬로미터 떨어진 병원으로 가서 청소도구 수레를 밀며 복도를 지나다녔다. 그녀는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 다른 뭔가가 올 거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청소 일은 이 다른 뭔가를 향한 기다림이었고, 깨어나 귀를 기울이는 공간이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거의 2년 동안 일했다. 그런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 - P72

 세상에는 우리에게 오는 열쇠를 지닌 사람이 있다. 우리 안에 있지만 우리가 한 번도 들어가지 않은 방을 열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과 우리는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성별이 같고 연령도 어느 정도 맞으면 사랑에 빠진다. 다른 경우에는 마법에 걸린다거나 종속된다거나 표현이야 어떻든 하여간 그런 상황이 되지만, 사실은 두 경우 모두 똑같다. 나에게 안네 마리는 이런 열쇠를 지닌 사람이었다. 내가 처음 만난 사람.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그다지도 큰 의미가 있었다. 반면 안네 마리에게 나라는 의미는 그 정도로 크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사라질까봐 늘 두려웠다. - P84

 조선소 노동자는 벽에 단열 장치를 했다. 그는 1년 내내 오두막에서 그림을 그리려고 조선소를 그만두었지만 예술가의 삶은 살지 못했다. 술에 빠져들면서 마을과도 마찰이 생겼다. 그는 그저 오두막에 누워 술을 마시며, 속도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죽어갔다. 그 뒤로 오두막은 비어 있었다. 권리를 주장하는 상속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 P103

 크리스티나는 오두막의 첫 겨울을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경험했다. 안개에 싸여 잠든 경작지, 안개 고동의 외로운 울부짖음. 자연이 보여주는 다양한 노란색과 갈색, 내리기는 하지만 제대로 쌓이지는 않는 눈, 절벽을 거대한 털짐승처럼 보이게 만드는 축축한 서리, 밤새 얼었다가 파도에 부서지고, 다음날 밤에 다시 얼어붙는 만(灣)의 얼음. 차가운 공기 중에 떠도는 자작나무 향기.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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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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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1-12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 아이디어 신선합니다!!
벌써 연말, 이란 말이 나올 때가 되었군요. 새 달력도 나왔더라고요.

베텔게우스 2023-11-12 17:18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귀여운 젤리곰입니다.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아요.. 하나 다행인 점은 올해 겨울은 더 따듯하게 느껴질 것 같다는 것입니다. 3년간의 거리두기가 끝나서요,^^
 
사회과학 에센스
김동환 지음 / 북코리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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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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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 많은 자의 용기 - 지켜야 할 최소에 관한 이야기
이문영 지음 / 삼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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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 많은 자의 용기,
얼마나 값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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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삼 교수의 중국철학 강의 예문서원 강의총서 5
모종삼 지음, 김병채 외 옮김 / 예문서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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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머우쭝싼(모종삼, 1909-1995)이 홍콩대학교에서 철학에 관심을 가진 일반 사회인들을 대상으로 <중국철학의 특질>을 주제로 열두 차례 강의했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강의 시점은 알 수 없으며, 강의록은 1974년 대만에서 출판되었다.

부록은 <중국문화선언>(중국문화에 관해 세계의 인사들에게 알리는 선언, 부제: 우리들의 중국 학술 연구 및 중국문화와 세계문화의 전도에 대한 공통 인식)으로, 모종삼•서복관•장군매•당군의 네 학자가 1958년 1월 1일에 공동으로 발표한 것이다.

지은이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은 중국철학을 처음 공부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특히 유불도, 그 중에서도 유학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20세기 서양철학을 흡수하여 새롭게 재해석된 유학을 당대신유학 또는 현대신유학이라고 한다.

머우쭝싼은 중국철학이 무엇보다 중시하는 것으로 ‘주체성‘과 ‘내재도덕성‘을 꼽는다. 특히 기독교와 대비하여 유학이 가진 종교정신을 선명히 드러낸다. 그 밖에 ‘자연생명적 창조성‘과 대비되는 ‘도덕생명적 창조성‘, ‘과학과 민주‘와는 다른 방면의 학문으로서의 ‘심성지학‘, ‘논리적 성취‘에 대비되는 ‘인격적 성취‘를 드러낸다.

강의록과 선언을 읽으면서, 특히 20세기 중반이라는 저작 시점을 유의하여야 한다. 서양의 침탈과 그로 인한 청나라의 몰락, 과학기술의과 민주주의라는 소위 선진화의 두 가지 요건에서의 뒤처짐, 전통문화를 모조리 부정하고자 했던 신문화운동, 그리고 대륙을 휩쓴 중국 공산당의 돌풍. 그들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겪은 이후, 여전히 중국 본토가 처한 상황을 암울한 것으로 인식하고, 중국 전통문화를 재조명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그래서인지 논의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다소간 서양에 대비하여 중국철학의 우위를 내세운다는 인상이 없지 않다. 나의 의견을 말하자면, 철학 간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만, 일정한 기준을 두고 비교하며 장단점을 논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여하간 한국 독자에게는 한국 독자의 관점이 있는 것이며, 그것 역시 국가뿐 아니라 개인에 따라서도 각기 다를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독자분께서 직접 판단하시기를 바란다).

철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서양철학과 중국철학을 각기 다른 특징으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면 한국철학도 그러할 것이다. 한국철학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질문은 이것이다. 결국 우리의 관심사는 한국철학이 아닌가.

(23. 11. 05. 11:2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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