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은 영군에게 사과해야 마땅했다. 영군을 무단 유포자로 오해한 것뿐 아니라 쓰기의 폭을 좁게 생각한 것에 대해서도. 초롱에게 논문같이 문학이 아닌 글은 문학에 밑도는 글이었다. 사과할 것은 넘치는데 사과할 기운이 없었다. 그래서 초롱은 뻔뻔하게도 영 85 군이 자신을 한번 봐줬으면 했다. 영군이 한 번만 용서를 꿔줬으면 했다. 그러면 언젠가 초롱도 푸지게 자서 피부가 맑고 마음이 순한 날, 자신에게 죄지은 사람을 마냥 용서하겠다고 다짐했다.
"미안해요."
초롱이 눈물을 터뜨렸다.
"영군씨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내가 너무 못 자서. 너무 못 자니까 마음에 마귀가 들어서."
"다음은요?"
영군이 초롱의 울먹임을 가볍게 무시함으로써 은근한 용서를 베풀었다. - P84
당신도 말의 시간차공격을 당하는가? 나는 요새 자주 말의 시간차공격을 당한다. 오래전에 들은 별것 아닌 말이 멀쩡히 몸을 돌아다니다 갑자기 내장을 찢는다. 그러면 나는 시간차공격을 당한 배 234 구 선수처럼 속수무책이다. 상대편 공격수가 뛰어서 나도 뛰었는데, 어느새 공격수는 사라지고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다음 공격수가 스파이크를 때려넣는 것 같다. 말의 강타. 나는 그저 당할 뿐이다. 도끼날 아래 장작처럼. 게다가 배구와 달리 말의 이차 공격은 수년, 심지어 수십 년 후에 비로소 시작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남이 나에게 했던 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색무취였던 말이 뒤늦게 악취를 풍겨 때늦은 앙심을 품게 했다. 그러다 다행히—계속됐다가는 유치원 시절 문방구 아주머니를 수소문해 칼을 들고 찾아가게 된다—점차 내가 남에게 했던 말 때문에 괴롭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은 오묘하다. 오묘하게 치사한 것이다. 분명 내가 남에게 한 악담인데 마치 내가 들은 악담처럼 느껴진다. 과거로 돌아가 이번에는 내가 상대가 되어, 어린 내가 하는 나쁜 말을 꼼짝 못하고 듣는 것이다. 내가 한 말에 나 자신이 상처받는 격으로—오, 몹쓸 중년이여, 거지같은 회상이여— (하략) - P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