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명강 동양고전 - 대한민국 대표 인문학자들이 들려주는 인문학 명강 시리즈 1
강신주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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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모든 책을 자기계발서로 받아들이는  같다. 독서를   책에서 익혀 실생활에서 써먹을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중점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서 태도의 장점으로는, 대부분의 문장을 꼼꼼히 읽고 숙고함으로써  내용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하다 것 있다. 그러나, 이는 뒤집어 생각해보면, 저자와 작품에 대한 동정적 이해에 그칠  있다는 말도 된다. , 책에 대한 나의 태도와 의견을 부각하지 않고 저자의 논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때가 많으며, 설령 전개상 다소 미흡한 부분일지라도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러이러한 내용이었을 거야하며 나름대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수용 태도로는 작품에 대한 적절한 비평이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  내용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이, 작가, 그리고 작품과의 진정한 소통 방법은 아닐 것이다. 이러니 내가 서평을 쓰기 어려울 수밖에. 나는 아직도 입시를 위한 주입식 학습에 익숙하여서, 일반 독서에도 그런 독서 방식을 은연중에 적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민이다.


"인문학이 자칫 개인의 덕성 함양으로 흐를 수 있는데, 이것은 원래 인문학이 추구했던 정신에 위배됩니다. 문학, 역사, 철학으로 구성되는 인문학은 탁월한 개인을 만들기 위한 처세의 방편이 아닙니다. 인문학적 성찰의 결과를 시민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시도입니다. 인문학은 학문적으로 깊이 심화되어야 하지만, 또 이러한 심화된 인문학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확산되어야 합니다."(p10)


 위 문장이 나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 또한 무조건적 수용? 주체적 수용과의 차이점은 뭘까? 고민..!

일찍이 북송시대의 대大철인 장횡거張橫渠는 진정한 학문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하였습니다.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고, 인류를 위하여 도의를 확립하고, 옛 성인을 위하여 성현의 학문을 계승하고,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연다." - P6

인문학이 자칫 개인의 덕성 함양으로 흐를 수 있는데, 이것은 원래 인문학이 추구했던 정신에 위배됩니다. 문학, 역사, 철학으로 구성되는 인문학은 탁월한 개인을 만들기 위한 처세의 방편이 아닙니다. 인문학적 성찰의 결과를 시민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시도입니다. 인문학은 학문적으로 깊이 심화되어야 하지만, 또 이러한 심화된 인문학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확산되어야 합니다. - P10

공자는 사람과의 연대에 대한 꿈, 사람은 배움을 통해서 끊임없이 바뀔 수 있다는 변화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전쟁보다는 평화의 공동체를 일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동아시아를 형성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공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나 싶습니다. - P69

오늘날 우리는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편리하고 풍성한 삶을 살지만 의미 있는 삶, 향기로운 삶, 멋있는 삶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몸보다도 마음이 삶의 방향을 잡아 주고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마음이 편안하며 의미 있고 향기로운 삶을 살게 해 주는 학문이 성학입니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기계공학 등의 학문은 이름만 들어도 무엇을 공부하는 학문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성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성학은 성인이 되는 학문입니다. 성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거나 과학적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우리가 성인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퇴계 이황은 『성학십도』를 통해 어떻게 해야 성인이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고자 했습니다. - P92

공자孔子에게는 ‘네 가지‘가 없었습니다. 이를 "자절사子絶四"라 합니다. 네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의意‘입니다. 사족partial인 욕망이나 트라우마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필必‘입니다. 의지로 미친듯이 돌진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고固‘입니다. 반복되는 경향이나 패턴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아我‘, 즉 자아나 성격이 없었습니다.
사적인 욕망 혹은 충동이 생기면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데, 그것이 계속 반복되면 패턴이 됩니다. 이때 독특한 반응과 충동의 구조가 생기는데 이를 우리는 성격이라고 합니다. 공자는 사람들의 반응과 충동이 오염되어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다들 반응이나 충동이 오염되어 있다는 걸 잘 모릅니다. 특히나 18세기 이후 근대 산업사회에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부르짖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을 최대한 구현시켜 주겠다, 이것을 프롬은 ‘위대한 약속the Great Promise‘이라 불렀습니다. - P136

『철학 이야기』라는 책을 쓴 윌 듀랜트Will Durant는 평생에 걸쳐서 초인적 노력으로, 문명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는 철학을 ‘지혜, 혹은 깨달음의 추구‘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지혜는 살아가는 기술이며 그 최종 목표는 행복이라고 말했습니다. 거기 이르는 길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게 아니고 오직 자기 덕성을, 자신을 완성시키는 곳에 있다고 단언합니다. 사회적으로 무엇을 얻고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는 모든 조건이 다 있다 하더라도 자기 내면의 덕성을 기르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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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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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모를 만나보고 싶다. 물론 나에게도 모모는 기쁘게 자신의 시간을 써서 이야기를 들어 줄 것이다. 나도 이런 모모와 같이, 남들에게 기쁘게 나의 시간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기쁨과 슬픔을 서로 나누는 데 시간을 쏟으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바쁘다는 건 뭘까? 누구를 위해서 나는 이렇게 바쁜 것일까? 왜 나는 바빠야만 하는가? 바쁘면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없다. 나는 모모에게서 여유로움을 배웠다. 아름다움을 느끼고 사랑할 수 있는 여유가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모모에게 감사하다.


199 "운명의 시간이 뭔데요?"
모모가 묻자 호라 박사가 설명했다.
" 음, 이 세상의 운행에는 이따금 특별한 순간이 있단다. 그 순간이 오면, 저 하늘 가장 먼 곳에 있는 별까지 이 세상 모든 사물과 존재들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미쳐서, 이제껏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애석하게도 인간들은 대개 그 순간을 이용할 줄 몰라. 그래서 운명의 시간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 버릴 때가 많단다 허나 그 시간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아주 위대한 일이 이 세상에 벌어지지." - P199

208 모모는 계속해서 안경 속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얼굴이 잿빛이에요?"
호라 박사가 대답했다.
"죽은 것으로 목숨을 이어 가기 때문이지. 너도 알다시피 그들은 인간의 일생을 먹고 산단다. 허나 진짜 주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간은 말 그대로 죽은 시간이 되는 게야.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거든. 시간은 진짜 주인의 시간일 때만 살아 있지." - P208

217 "그럼 시간 도둑들이 사람들한테서 더 이상 시간을 훔쳐 가지 못하도록 조정하실 수는 없나요?"
"그럴 순 없어.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는 문제는 전적으로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니까. 또 자기 시간을 지키는 것도 사람들 몫이지. 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나누어 줄 뿐이다."
모모는 홀을 빙 둘러보고 물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시계들을 갖고 계신 거예요? 한 사람마다 한 개씩요. 그렇죠?"
"아니야, 모모. 이 시계들은 그저 취미로 모은 것들이야. 이 시계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 속에 갖고 있는 것을 엉성하게 모사한 것에 지나지 않아. 빛을 보기 위해 눈이 있고, 소리를 듣기 위해 귀가 있듯이, 너희들은 시간을 느끼기 위해 가슴을 갖고 있단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없어져 버리지. 장님에게 무지개의 고운 빛깔이 보이지 않고, 귀머거리에게 아름다운 새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같지. 허나 슬프게도 이 세상에는 쿵쿵 뛰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눈 멀고 귀 먹은 가슴들이 수두룩하단다." - P217

281 기기는 기진맥진해서 손으로 눈을 쓸어내리며 짤막하게 씁쓸한 웃음을 웃었다.
"보다시피 나는 이 꼴이 되었단다. 아무리 원해도 다시 돌아갈 수가 없어. 난 끝장이 났어. ‘기기는 기기인 거야!‘ 모모, 이 말 생각나니? 하지만 기기는 기기로 남아 있지 못했단다. 모모, 얘기 하나 해 줄까?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건 꿈이 이루어지는 거야. 적어도 나처럼 되면 그렇지. 나는 더 이상 꿈꿀 게 없거든. 아마 너희들한테서도 다시는 꿈꾸는 걸 배울 수 없을 거야. 난 이 세상 모든 것에 신물이 났어.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 P281

283 모모는 진심으로 기기를 도와 주고 싶었고, 그랬기 때문에 정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기의 말대로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기기는 다시 기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모모 자신이 이미 모모가 아니라면 기기를 절대 도울 수 없다는 것을. 모모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모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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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철학과 위진현학 노장총서 12
정세근 지음 / 예문서원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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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진현학시대의 두 주인공을 꼽으라면 왕필(王弼, 226-249)과 곽상(郭象, 252-312)이라 하겠다. 왕필과 곽상은 명교(제도)파다. 왕필은 명교(제도)가 자연(본성)에 바탕을 둔다고 하였고, 곽상은 명교가 곧 자연이라고 보았다. 위진현학에 대해 공부하면서 문득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에서 읽었던 ‘유전자 결정주의’가 떠올랐다. 유전자는 곧 위에서 말한 본성의 의미에 가깝다. 즉 곽상은 자크 모노식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비록 다른 시대 다른 공간이었지만, 동양철학에서도 서양과 유사한 자유의지에 대한 사상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나는 왕필과 곽상의 각각의 입장이 곧 의지론과 결정론을 대표한다고 본다. 사실상, 동양에는 자유의지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이는 외형적으로 ‘제도와 본성의 관계‘에 대한 논의로 전개되었다.

 인간은 사회 제도를 만들고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이를 꿀벌에 비유하자면, 꿀벌이 육각형 벌집을 짓고 그 곳에서 살아가는 것과 인간이 제도를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보는 것이 곽상식의 관점이다. 곽상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곧 본성이라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꿀벌의 육각형 집은 자연물이라고 말하지만, 인간이 만든 각종 도구나 상품들을 우리는 흔히 인공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말한다면, 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지만, ‘제도는 자연에 근본을 둔다‘라고 하는 명교에 대한 왕필의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꿀벌 비유는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에서 빌려 온 것이다).

 한편, 내가 제도와 본성에 관한 논의를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로 보는 까닭은 각 입장에서의 인간의 역할 차이와 관련이 있다. 만일 곽상이 제도를 보는 관점에서처럼 ‘제도가 곧 본성‘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주체적 의지가 개입할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 왕필의 주장대로 ‘제도는 (인위이지만) 자연에 근본해야 한다‘라는 당위적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을 그의 의지로 볼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여러 철학사상을 자꾸 접하다 보니, 철학의 거대한 흐름 중 하나는 ‘의지론이냐, 결정론이냐’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접한 철학들은 위 기준에 의해 두 가지로 분류가 가능했던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22 철학의 주제라는 것이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몇천 년이 지나도 사람의 본질이 바뀌지 않듯이 현학의 문제도 이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타당하다. 그것이 바로 이를 테면 ‘제도와 본성’에 관한 논의와 같은 것이다. 과연 우리는 본성적으로 제도를 만들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본성은 제도 속에서 희생되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제도를 완전히 벗어난 순전한 인간 본성의 발휘와 합리적인 제도의 수립을 위한 본성의 억제는 모순되지 않는가를 우리는 묻는다. 제도는 철저히 전체를 위한 구상이고 본성은 분명히 개인을 위한 설정이다. 전체와 부분, 집단과 개인 사이의 알맞은 장치의 고안은 이와 같은 철학적 토론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고민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 P22

168 그런데 이 모습을 곽상은 "작은놈이 큰 것을 바라니 자기를 잃는다"라고 풀이함으로써 ‘큰놈은 큰 데서, 작은놈은 작은 데서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 분명 장자의 뜻은 우물보다 큰 바다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곽상은 ‘우물 속에서 뛰노는 즐거움’과 ‘바다의 큰 즐거움’을 같이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투라면 우물 안 개구리의 뜻은 ‘좁은 소견을 지닌 자’가 아니라 ‘분수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자’가 되고 만 169 다. 이른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마는 것이다. - P168

173 한마디로 대소와 생사를 초월하는 소요야말로 참 소요라는 주장이다. 곽상의 이론구조는 사실상 매우 간단하다.

(가) 전체의 세계가 있다.(一)
(나) 상대성으로는 전체를 볼 수 없다.(待)
(다) 그런 세계는 한쪽에 불과하다.(方)
174 (라) 따라서 전체를 하나로 할 수 있어야 한다.(齊)
(마) 그것이 바로 소요이다.(遊)
(바) 그때서야 자기의 본성이 펼쳐진다.(性)

대략적으로 곽상의 어휘에서 (가)에는 ‘아우름’이, (나)에는 ‘대소’, ‘생사’ 등이, (다)에는 ‘유무’가, (라)에는 ‘크게 통함’이 있고, (마)에는 ‘얻음’이, (바)에는 ‘몫’, ‘능력’ 등이 속한다. 결국 곽상이 바라는 세계는 그의 표현대로 ‘제일성’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곽상의 이러한 해석은 문제가 많다.
첫쨰, 그는 「소요유」를 「제물론」으로 풀고 이다. 장자의 「제물론」은 이와 같은 제일성의 논의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고, 「추수」는 이에 버금간다. 그런데 곽상이 벌이고 있는 「소요유」에 대한 해석에는 ‘소요’는 없고 ‘제물’만 있다.
둘째, 평등으로 자유를 억압한다. 평등한 세상이라고 해서 자유로운 개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곽상은 평등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개성은 제일성 속에서 포기된다. 개체는 전체 속에서 함닉되고 말아, 독자적으로 설 자리가 없다.
셋째, 과연 무엇이 본성이란 말인가? 곽상은 본성에 대한 깊은 반성이 없다. 타고난 것이 모두 본성이라면,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본성대로 한 일이라는 것인가? 임금은 임금의 본성을, 노예는 노예의 본성을 타고났다는 말인가? 성인은 성인의 본성을, 악인은 악인의 본성을 타고났다는 말인가? 이러한 주장에는 함양이나 공부, 나아가 학습이나 교육과 같은 용어가 개입될 여지가 조금도 없다.
175 ‘각자 자기가 타고난 마당(自得地場)에서 본성을 실현하면 된다’는 이러한 곽상의 주장은 도가판 결정론으로 본성이 바뀔 여지가 조금도 없다. 바꾸려고 하다가는 다칠 뿐이다. "본성은 각자의 몫이 있다. 똑똑한 사람은 똑똑함을 지켜 끝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음을 안고 죽음에 이르니, 어찌 그 성을 도중에 바꿀 수 있겠는가!"
이런 해석에 불만을 갖은 역대의 주석가들은 하나둘이 아니다. 현대 판본 가운데에서 가장 정치한 『장자집석』의 저자조차 곽상의 「소요유」 첫 주부터 "곽상(향수)의 주가 다하지 못했다"라고 밝히고 있을 정도이다. 특히, 위에서 말한 세 번째 논의는 불가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만일 인간의 본성이 곽상식이라면 수행이고 성불이고 아무것도 필요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곽상이 주장하는 이른바 ‘적성설適性說’의 최대 난점이다. - P173

180 지둔이 곽상에게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만일 붕새와 참새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가에서의 수행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리 중생인 참새는 부처인 붕새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른바 ‘성불’이라는 목적이 인간들에게 부여되고 있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적성이란 허울로 사람을 잣대질한다면, 부처는 부처의 적성이 있고, 보살은 보살의 적성이, 아라한은 아라한의 적성이 있을 뿐, 아귀와 수마에 빠져 사는 내가 부처가 될 길은 아득하다. 건달, 낭인, 한량 그리고 카사노바와 같은 바람둥이도 자신의 적성에 충실할 뿐이다. 슬프지만 적성설에 지독히 충실하다면, 2004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도 지둔의 말처럼 적성일 뿐이다. 괜히 중국 고대의 임금과 도둑의 임금을 181 거들먹거릴 필요도 없다. - P180

214 그리고 현학은 절대의 자유와 절대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며, 더욱이 행복의 동산에서 낭만적 정신을 갈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풍우란은 그것을 바로 서구의 낭만적 정신과 빗댈 만한 중국의 ‘풍류風流’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중국철학의 짧은 이야기』에서는 『중국철학의 정신』 215 보다도 더욱 현학의 낭만성을 강조함으로써 현학자들의 ‘추상과 초월’이 부각된다. 심지어 그는 일시적인 충동이나 자극에 따라 살고, 금욕적 요소가 강하긴 하지만 성性(Sex)의 미화된 모습을 현학자들에게서 발견하기도 한다.
물론, 풍우란은 ‘신도가’를 향수나 곽상과 같은 ‘합리주의자’(The Rationalists)와 풍류를 즐기는 혜강이나 완적과 같은 ‘감각주의자’(The Sentimentalists)로 크게 나누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는 이성과 감성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표준으로 위진의 사상가를 나누었다기보다는, 오히려 현학자들의 이성적인 모습을 선대의 명가와의 관련이나 제도에 대한 궁극적인 긍정 태도에서 간신히 발견하는 듯하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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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장자 - 무위와 소요의 철학 인문정신의 탐구 3
이강수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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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사회의 발전은 이성의 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질서와 규범, 제도가 있기에 사회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로써 인간 사회는 지속적인 발전을 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제도와 도덕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개개인의 자유가 침해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노자는 기존의 귀족 중심 질서가 해체된 혼란스러운 전국 시대에, 제도와 도덕을 중시하는 유묵과는 대조적으로 사람들 개개인이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세상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제도와 도덕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변화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많은 전문가들은 현대를 두고 사회 변화가 그 어느때보다도 빠른 시기라고 지적한다. 일관적이며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굳센 마음으로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삶의 자세를 가진 이는 지금의 빠르고 거대한 일련의 변화들을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이다. ‘단단하고 강한 것은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노자의 말이 이 시대에는 더 적합하게 느껴진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보다 우울증과 그로 인한 자살로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태도는 무엇일까? 노자의 견해와 같이, 부드러운 자세로 끊임없이 다양한 변화에 응대하며 헤쳐나가는 것은 아닐까? 설령 실패하더라도 유연하게 대처하며, 타격을 입더라도 금세 회복하고 일어나 변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헤쳐나가는 삶의 태도가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는 직업을 최소 여섯 번은 바꿔야 하는 시대를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린다. 극심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요한 것은 일관된 초심을 유지하는 것보다, 실패 앞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아닐까? 요컨대 ‘회복탄력성‘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한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노자의 ‘상반상성’ 사상에서 드러나듯이, ‘괴로움이 없다면 행복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것이다.’

(2019. 6. 18. 오후 4:38 수정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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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9월부터 시작한 뚜레쥬르 아르바이트가 9개월차에 접어든다. 처음엔 이렇게 오래 할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다만 그만둘 때는 그만두더라도 최대한, 무조건 오래 버티자고 마음을 먹었다. 손님을 직접 응대하는 식음료 제공 서비스직에서 맡은 바를 잘 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스무살 때 처음 했던 3개월간의 아웃백 아르바이트 경험과 연관이 있다. 당시 사회생활 근력과 신체적 근력 모두가 부족했던 나는, 강도 높은 업무량을 견디지 못하고 금세 일을 그만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껏 아웃백 알바 경험은 나로서는 꼭 극복하고픈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뚜레쥬르에서 일을 하는 것은 여러 장점이 있다. 우선 케이크와 빵을 많이 먹을 수 있다. 시간 지난 빵이나 케이크가 있으면 매니저님들이 나누어 주신다. 둘째로 스케쥴 조정이 자유로운 편이다. 나 말고도 일하는 직원이 많은 매장이기 때문에 급한 사정이 생기면 서로 협의하여 근무시간 조정이 가능하다. 다음으로 또래 알바생들 및 매니저님들, 사장님과 사모님 모두 참 괜찮은 사람들이라,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소득은, 근무 시간동안 내가 일 인분의 업무를 원만하게 처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9개월차인 현재 웬만한 빵 이름은 숙지하게 됐다. 음료는 모두 제조 가능하다. 매장 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도 많이 길렀다. '아웃백 트라우마'가 극복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곳에서 일을 하면서 나의 일상도 다소 변화되었다. 이제까지는 커피를 한 잔만 마셔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탓에 카페와는 통 인연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는 친구들과 카페에 가서 곧잘 시간을 보내고, 혼자 밀린 일을 처리하러 노트북을 들고 찾아가기도 한다. 아마 카페라는 공간이 내게 많이 친숙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카페에 가서 주방을 관찰하는 버릇도 생겼다. 이 매장은 어떤 원두 기계를 쓰나, 우리 매장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등을 잠깐이나마 생각해보게 되었다. 많이는 아니지만 커피도 더 자주 마시게 되었다. 또한 커피 자체에 대해서 더 공부하고 싶어졌다. 아래와 같은 책들에도 요즘엔 관심이 간다. 예전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책인데...







 


 본래 책과 무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적을 생각이 없었는데, 9개월간 지속한 뚜레쥬르 알바에 대한 생각을 한번쯤 정리해보고 싶어서 적어보았다! 어... 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ㅅ^(사진은 마감 끝난 어느 날 사장님이 챙겨주신 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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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6-05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르바이트를 9개월동안 지속해서 하기가 쉽지 않은데 베텔게우스님 대단하세요!^^:)

베텔게우스 2019-06-05 21:37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 읽어주시고 칭찬까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처음엔 많이 힘들었는데 인간은 역시 적응의 존재인가 봅니다ㅎㅎㅎ 경제적으로 스스로 자립하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앞으론 소비도 지혜롭게 잘 하게 되었음 좋겠습니다ㅋ :)

서니데이 2019-06-06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바로 위의 겨울호랑이님이 하신 말씀과 이하동문입니다.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들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특히 일이라면 여러가지 힘든 점도 많을테니까요.
트라우마를 극복하셨다니, 다행입니다.

현충일 휴일은 잘 보내셨나요. 밖에 비가 오고 있어요.
베텔게우스님, 편안한 밤 되세요.^^

베텔게우스 2019-06-07 00:05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알바랑 보강 수업 마치고, 집에서 푹 쉬었습니다.^^
두 분께서 마음 써 주신 덕택에 댓글로 큰 위로를 받았어요. 자신감이 생기네요! 감사드려요.
빗소리가 좋네요. 서니데이님도 편안한 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