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하는 기억들은 그립고 달콤하다. 고통과 방황의 시간마저 아름답게 채색된다. 어디 그뿐이랴,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답을 주기도 하고 선택한 것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아, 그때 그래서 헤어지게 된 거구나. 그 선택은 오히려 잘 된 것이었구나. 오직 시간이 지나서야 문제가 풀리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우리는 신의 큰 뜻은 시간이 흘러서야 알게 된다고 말한다. 신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한다면서. - P167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은 세상과 나를 연결한다는 환상을 심어주기에 나를 세상의 노예로 만들기 쉽다. 세상의 노예가 되지 않고 세상의 주인으로 사는 길은 안다는 확신을 버리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 즉 감정의 날개를 펴는 것이다. 감정의 날개는 이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감정적‘이 되라는 뜻이 아니다. 이럴 때 감정적이란 말은 이성 중심주의에서 말하는 감정의 몰입이다. 최근 심리학이나 뇌과학에서 말하는 감정의 날개란 의식과 감각의 적절한 조화를 의미한다. 의식이 전부라고 믿으면 세상의 노예가 되기 쉽고 감각이 전부라고 믿으면 몸의 노예가 된다. 자기 정체성을 세상의 기준에 맡긴 이는 과거 어느 시점에 고착되어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밝고 낙천적이면서 평화롭게 사는 사람은 마음을 자연의 변화에 맡긴다. 여행하듯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런 삶이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불행한 일을 겪으면서도 그 일에 매달리지 않는 것은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는 계절의 순환이 그렇기 때문이다. - P178
철학자 스피노자가 감정을 이성보다 열등하게 봤던 당대의 주류 사상과 정면으로 대립하면서 감정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은 대단히 뇌과학적이다. 감각 혹은 감정이 의식보다 먼저 있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결코 접근할 수 없고 오직 의식에 의해 느낄 뿐이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이 심리학이나 뇌과학이다. 아, 철학자 칸트도 이미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물자체에 접근할 수 없고 오직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라고! 그렇다면 그런 과학적 사실을 감정의 경험을 통해 연습하게 하는 길은 없는가. 칸트의 사상이 가장 성숙했을 때 나온 저서 『판단력 비판』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세 가지 자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 세 가지 자유를 프로이트의 심리학으로 풀어보자. 입맛에 맞는 것을 먹을 자유The Agreeable는 모든 동물이 누리는 자유다. 소는 풀을 먹고 사자는 고기를 먹고 인간은 이것저것 다 먹는다. 몸이 누리는 가장 기본적인 자유이며, 이드에 속한다. 그다음은 옳은 것을 주장할 자유로, 개념이 작동하는 선The Good의 영역이다. 슈퍼에고에 속한다. 사회적 구속력이 있지만 사적인 이익이 공적인 것과 혼돈될 위험이 있다. 이 둘의 중간, 동물과 인간의 양면을 포함한 중간 영역은 무엇일까. 바로 미The Beautiful가 주는 자유다. - P181
세 번째 항목인 미는 우리에게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리게 한다. 왜 그럴까. 예술작품의 감상은 사적인 것이지만 이익과 상관없이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그 사적인 경험은 타인에 대한 공감을 통해 보편성에 이른다. 작품의 형식Form을 통해 감정을 연습하고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사적이면서도 제한을 받고 모호하면서도 타인과 공유하는 경험이 된다. 안다는 확신에서 벗어나는 연습이다. 가장 공정한 주관적 보편성에 이르는 길이 예술 감상이고 그래서 예술의 ‘형식적 완결성‘이 중요하다고 칸트는 말한다. 이것이 감각과 의식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에고의 역할이다. 정지용의 「호수」는 감정 연습이라는 무한한 상상력에 관한 사이고 「대미지」는 의식이 시간의 형식이요 느낌의 형식이자 감수성의 형식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영화다. 물론 이 모든 것보다 더 절실하게 감정을 경험케 하는 것은 우리의 삶 그 자체다. 그러나 단 한 번이고, 한정된 시간이 주어졌고, 한번 실패하면 돌이키기 어려운 게 삶이기에 우리는 예술작품을 통해 미리 감정을 연습하고 판단의 오류를 줄여야 한다. 예술작품은 언제나 안다는 확신이 위험하다는 것을 경고한다. 안다는 확신은 의식의 속임수다. 감각에 접근하는 길이 이미지를 만드는 길 외에 달리 없음에도 우리가 현실에 즉각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의식은 모든 것을 아는 척, 이미지가 실체인 척한다. 믿기에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에 믿는다고 속인다. 마치 울기에 슬픈데 슬퍼서 우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과 같다. - P182
마침내 강요에 의해 마일즈의 자백을 받아내는 순간 그 아이는 숨이 막혀 그녀의 품 안에서 죽고 만다. - P184
"믿음은 없는 것을 보게 한다"는 제임스의 심리학을 따른다면 그녀의 단순한 경험에서 비롯되는 확신은 위험한 것이다. 그녀의 지나친 확신에서 오는 추궁은 마일즈의 숨을 멈추게 했기 때문이다. 185 무엇보다 그녀에게 부족했던 것은 다양한 세상과 예술작품들을 경험하면서 감정을 풍부하게 할 기회였다. 마음을 열고 세상을 호기심으로 보는 대신 그녀는 단순한 믿음을 앎으로 착각했다. 자신이나 타인의 실수를 통해 배울 기회가 없었기에 단순한 경험에서 얻은 신념은 안다는 확신으로 이어져 어린아이를 막무가내로 밀어붙인다. - P184
안다고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의식의 속임수에 그대로 노출되고 그 너머에 있는 감정을 연습할 기회를 잃는다. 호기심을 가지고 그저 모호함을 차근차근 경험하는 것이 감정을 풍요롭게 경험하는 길이다. 그러는 사이에 판단의 오류를 저지르고 실수하며 깨닫는다. 미궁에 빠지고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면서 판단의 오차를 줄인다. 감정을 미리 실습해보는 것이 실제 삶에서 부딪히는 판단의 오차를 줄이는 길이다. - P185
감정과 의식 어느 한편에 치우치면 안 된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감각보다 이미지의 편이고 의식의 편이다. 그쪽이 사회가 요구하는 견고한 질서와 법을 지키고 문화를 키우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국력을 키우고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의식의 편에 서야 한다. 효율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감각을 지키며 산다는 것, 이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게다가 효율성의 노예가 되는 만큼 반대로 감각의 노예가 되기도 쉽다. - P187
매케이와 머니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아니 그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거친 말을 타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리치와 결투를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진짜 용기는 자신에게 증명하는 것이고 남을 위한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개인의 감정이 집단의 것으로 바뀌는 것은 그 개인이 힘을 과시하는 데서 온다. 보안관 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P231
모든 동물에게 내장된 원초적 감정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생명을 지키는 강력한 감정이다. 모든 동물은 먹이를 찾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평생을 살아간다. 원시적인 포식자가 드문 현대 산업 사회에서 이는 경쟁자로 바뀐다. 먹고 먹히는 생존의 싸움은 ‘불안‘으로 내재하고 생명의 동반자가 된다. 두려움은 적을 발견하는 순간 방어하라는 의미에서 일어나는 감정이지만 문제는 그 빈도가 지나치면 건강에 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몸의 요구와 의식의 방어가 균형을 잃으면 공황장애와 같은 질병이 생긴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감정이 용기다. 두려움과 맞서 싸우는 용기다. 그래서 용기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렇기에 남에게 보이는 용기는 허세가 되고 남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사람들은 그 힘을 빌려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기 때문에 겁쟁이들의 거짓 용기가 되고 집단폭력의 근원이 되기 쉽다. 두려움이 ‘나의 것‘이듯이 용기도 ‘나의 것‘이고 자신에게 증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자존감 혹은 자긍심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 길이 개인과 사회를 개선하는 올바른 길이다. - P231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돌봄이나 놀이를 통해 기쁨이라는 긍정적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혐오감, 허영, 질투, 부러움, 죄의식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더 강렬하다. 앞의 감정들은 의식적인 시도와 노력이 요구되지만 뒤의 감정은 소리없이 잦아들어 몸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앞의 감정은 사회가 장려하고 뒤의 감정은 사회가 억압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억압하면 더 강해진다. 인정하고 살살 달래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화두가 태어난다. 비록 감정은 하부에서 상부로 진화되었고 하부가 더 강하지만 소통과 적절한 균형을 위해 상부에서 하부로 이행하는 의도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항상성을 유지하려면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감정을 키워야 한다. - P236
몇 번이나 포기하고 돌아갈까, 전과를 할까 생각할 때 나에게 용기를 준 두 작품이 있었다. 에머슨의 「자긍Self-Reliance」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Walden』이었다. "네가 밖에 나가기 싫으면 문 앞에 ‘고독‘이라는 팻말을 걸어놓고 몇 날이라도 안에 있어라"라는 에머슨의 말을 나는 "네가 영어를 못한다 해도 무슨 상관이냐, 문학을 좋아하면 되는 거야"라는 말로 이해했다. 또 한 사람이 소로다. - P245
우리는 때로 그를 돕고 싶어도 거부당합니다. 그러나 비록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를 완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 P251
마음의 근심은 뼈를 녹인다. 왜? 영어로 E-motion은 ‘생각이 몸을 움직이게 한다‘는 뜻이다. 계속 두렵다는 생각을 하면 실제로 두려운 반응이 일어나고 계속 근심하면 건강에 이상이 생긴다. 의사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는 그가 처방한 약이 가짜이더라도 때로 효력을 본다. 이것을 의학에서 ‘위약 효과‘ 혹은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라고 부른다. 생각이 실제로 몸의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계속 생각하면 없는 것이 보인다. 어떤 감정의 증상들을 의식적으로 일으키면 그 감정이 일어난다. 즐거운 추억은 행복감을 증진시키고, 긍정적인 생각은 몸을 건강하게 바꾼다. 좋은 글을 읽고 노트에 적어놓는다든지 혹은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친구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유머를 즐긴다. 그렇다면 나는 의도적인 몸의 훈련으로 감정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배럿이 조언하듯이 조용한 분위기에서 산책하고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등 의도적인 몸의 활동과 운동을 통해 불쾌한 기분을 동요와 즐거움의 기질로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다. 제임스는 말한다. 나는 흐느낄수록 슬픔을 더 강하게 느낀다. 마치 도망칠수록 공포를 더 느끼듯이. 분명히 우리는 몸의 움직임으로 느낌을 바꿀 수 있다. 계속 웃으면 행복감을 느끼고 쌓인 슬픔을 울어서 풀어버리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분노의 표정을 계속 지으면 분노가 커진다. 이것이 몸의 반응을 통해 감정을 훈련하는 방법이다. 운동으로, 얼굴 표정으로 긍정적인 감정을 연습한다. 반대로 부정적인 감정은 발산하여 풀어버린다. 그러면 그런 감정들은 시들해져서 슬며시 사그라든다. 우울증은 절대 사절이다. - P254
우울하면 몸이 느려지고 기분도 가라앉는다. 이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더 가라앉고 더 우울해진다. 숲길을 걷고 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운동하고 소통하면 우울함이 한결 나아진다. 걷기와 크게 숨쉬기, 팔다리 흔들기 등 몸의 훈련은 낙담을 즐거움으로 바꾼다. 생각이 몸을 움직이게 할 뿐 아니라 몸의 움직임이 생각을 바꾸기도 한다. 운동을 하면 좋은 호르몬이 배출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외부와 소통을 거부하고 낙담에 계속 빠지면 얼굴 표정만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다. 얼굴, 목, 목구멍은 감정 표현과 친근하게 연결되어 있다. 근심은 뼈를 녹인다는 말처럼 감정은 뼈와 근육에도 영향을 미친다. 등뼈와 신경중추는 몸과 뇌를 소통시키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온몸이 감정의 영향을 받으며 뇌는 이 감정들을 호르몬의 분비 등 몸의 반응으로 표현한다. 제임스의 감정에 대한 연구는 감정이 건강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배럿의 말처럼 마음의 건강이 곧 몸의 건강인 것이다. - P256
많은 학자는 항상성을 유지하거나 회복하는 데 예술이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감각과 인지 판단의 다리를 놓아 두 영역이 소통하고 감정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돕는 데 예술, 특히 서사 예술은 가장 이상적이다. 몸과 의식, 혹은 느낌과 인지 판단을 융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회상이라는 기억의 진화와 함께 동굴벽화가 시작된 이유다. 인간이 되는 순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술은 뇌의 진화과정을 가장 유사하게 모방한다. - P259
사랑이 보이십니까? 희망이 보이십니까?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나요? 절망해도 힘들어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뭔가 곧 밝혀질 것 같은데 밝혀지지 않고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은데 주먹은 늘 텅 비어 있다. 그래도 인간은 계속 간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 이렇게 느낄지도 모른다. 아, 결국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숭고한 유혹의 정체는 죽음이었단 말인가. 예술작품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기에 나는 계속 그 영화에 몰입하고 그 소설을 읽는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읽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그 동력은 감정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 P262
고독과 공감은 일상을 누리기 위한 생존의 조건이다. 모든 정상인은 어느 정도 불안과 우울을 느낀다. 이때 나와 세상의 균형이 깨지면 공황장애나 우울증 등 정신 질환이 생긴다. 세상이 나를 본다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은 자의식이 결핍된 것이다. 양심이나 타자의식이 없는 경우다. 반대로 세상이 나를 본다는 것을 지나치게 느끼는 사람은 자의식이 과잉된 것이다. 양심이 부족한 게 아니라 유행에 민감하고 과시하며 자신을 부풀린다. 그리고 정도가 심하면 폭력이나 광기, 우울증 등 정신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고독과 공감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병이 되듯이 나와 세상도 치우치면 병이 된다. 앞서 반복했듯이 감정이라는 뇌의 하부와 전두엽이라는 상부가 연결되어 느낀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정상적인 인지요 판단이다. 소통과 균형이 중요하며, 똑같은 맥락에서 공감이 일어난다. 공감은 고독한 인간에게 신이 내린 축복이다. 우리가 그림이나 음악, 이야기 등을 창조하고 감상하는 상상력은 바로 감정과 인지의 균형 및 소통을 돕는 공감능력에 다름아니다. - P322
칸트의 법을 믿었던 독일인들이 그토록 잔인하게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법을 밀어붙일 때 잉여인 사도마조히즘의 쾌락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법과 쾌락, 현실원칙과 쾌감원칙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기에 어느 한쪽을 밀어붙이면 다른 쪽으로 빨리 옮겨간다. 선배 프로이트를 다시 읽은 라캉의 독창성이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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