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 스무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여행의 의미
박정석 지음 / 시공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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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두 종류의 나를 만난다. 책에다 밑줄을 긋는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다.

 

1)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멋진 문장을 만났을 때

2) 내가 원하는 문장을 만났을 때

 

내게 독서란 단순히 작가의 생각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온 세상을 여행하는 행위다라고 했던 앙드레 지드의 말을 긍정하며 독서를 여행에 비유한다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비로움을 느끼는 것은 1)의 경우일 것이고, 낯선 장소에서 익숙함을 발견하는 것은 2)의 경우일 것이다. 여행에서는 1)2) 모두 중요하다. 1)로만 가득한 여행은 쉽게 지칠 수 있으며, 2)로만 점철된 여행은 여행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방문일 것이다.

 

책을 읽을 때에도 두 가지가 곁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2)의 문장들은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안도감을 준다. , 이 사람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었구나. 반면에 1)의 문장들은 우리의 생각을 넓혀준다. 절대 건너지 못할 것 같은 냇가에서 징검돌 역할을 해준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2)의 문장들만을 찾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2)의 문장만을 찾게 된다면, 독서는 쉽고 간편해진다. 새로운 걸 찾을 이유는 없다. 알고 있는 걸 확인하면 된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증거를 찾기만 하면 된다. 책을 읽는 것이 발목을 잡게 된다.

 

소설가 김중혁이 위즈덤하우스 문학 연재 블로그에 연재했던 글의 일부이다.

 

 

이 책은 나에게는, 전적으로 2)에 일치하는 책이었다. 읽으면서 마치 내 생각을 그대로 뒤집어놓은 것 같은 문장, 미처 알고는 있었지만 말로는 표현 못했던 것들을 남이 써 놓은 문장으로 확인할 때 사이다같은 청량함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치려다가 포기했던 것은 이 책이 밑줄로 점철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고, 정작 책을 다 읽고 나서 며칠이 지난 지금은 신기하게도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이 책에서 내가 감탄했던 문장들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처음에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제목 때문이었다. 화내지 않기, 그리고 핀란드까지.

아직 핀란드를 다녀온 지 만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일상에 점점 희미해지지만 사진을 꺼내 보면 다시 그 때의 감동이 생생히 되살아나는 시기. 구태여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최근 개봉한 공유와 전도연이 출연한 영화 남과 여의 영향이었다. 영화 예고편을 보면서 내가 겪어보지 못한 핀란드를 겪고 싶다는 생각과, 여행의 추억을 떠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교차하다가,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이 책을 집어들었고, 목차에 나온 저자의 여행 목록에서 핀란드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들이라는 생각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편안했다. 깊이 행복했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들인데도 그곳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놀랍게도 익숙했다. 마치 내가 다녀와서 쓴 것처럼. 그리고 안도했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어. 그리고 놀랍게도 책을 다 읽고 나서 내 머릿속을 오랫동안 꽉 잡고 있는 문장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희미하게 내용이 떠오르는 것 같기는 한데, 구체적인 단어나 묘사는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든 비 오는 날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익숙한 그리움, 친숙한 외로움으로 평화로웠다. 그리고 물론 화도 내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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