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사운드 - 차우진 산문집
차우진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어쩌다 보니 음악 비평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계속할 자신은 없다. '지잡대'를 나온 주제에다 학위도 없고 4대 보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계속하고 싶다. 좋아하는 일이니까. 아직도 하루치의 마감을 하고 그저 다음 달을 걱정하는 삶을 살지만, 어쨌든 내 몫을 해내려 애쓰고 있다. (중략) 어쩄든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다. 그저 지금을 응시하면서 좋았던 혹은 나빴던 과거는 서랍 안에 고이 처박아두고, 향수 따위에 발목 잡히거나 강박 같은 것에 잡아먹히지 않는 것이다. 나도 '21세기의 위대한 음악 비평집'을 쓰겠다는 강박을 버리겠다. 무엇보다, 음악이란 그저 인생의 사소한 엔터테인먼트이고 삶에는 음악보다 좋은 게 100만 개쯤은 더 있다. 그러니 어쨌든 살아남아,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자. 쉽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또한 우리 모두에게 럭키를.

 

서문 '청춘의 사운드, 혹은 당신에게 럭키를' 중에서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대중가요는 물론이고, 팝이나 재즈,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음악이라는 것에 대해 굉장히 무지한 편인 나에게는 그렇다. 왠만한 영화에서는 어떻게든 그 영화만의 즐거움을 찾아내는 편이지만, 음악은 그게 잘 안 된다. 공부하면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대화를 하는 가운데에서도 음악 때문에 거슬렸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 규칙을 유일하게 피해가는 것이 영화 OST. 그 영화의 내용과, 분위기와, 느낌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추억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그래서 상당수 이 책에 나오는 노래 중 아예 모르거나, 제목만 알거나, 들어 봤어도 크게 임팩트가 없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만, 제로였던 특정 노래에 대한 내 관심도가 이 책으로 인해 조금은 올라갔다는 것. 책을 읽는 동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져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싫었던 행동을 무심코 할 수 있게 된 것. 특정 대상에 대한 거부감이 조금은 줄고, 호의가 늘었다는 것.

 

이 책은 음악 평론가가, 음악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적은 수필집에 가깝다. 주관화의 객관화, 혹은 그냥 주관화에 머물렀다고 해도 될 것 같다. 특정 가수는 절대 노래를 잘하지는 않지만, 매력이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가수의 프로필이 노래의 성공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 소감에 영향을 주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서 나같은 사람들이 더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편안하게.

 

한 번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그 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노래를 들어보면 어떨까, 하고 컴퓨터를 틀어 검색어 창에 누르고 클릭해서 음악을 들어보았는데, 역시, 얼마 안 되어 끄고 말았다. 꿈보다 해몽. 꼭 꿈을 꾸어야만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해설이 훨씬 더 재미있을 때도 있으니까.

 

학교가 있는 안산에서 몇 해를 보내는 동안, 나는 막연히 뭔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품고 있엇다. 이 학벌론 안 될 거야, 이 학점으론 안 될 거야, 이 집안으론 안 될 거야, 등등.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면서 세상이 어떻고 글이 어떻고 문학이 어쩌고 했던 얘기들은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부끄러웠다. 그냥 토익이나 공부하고 말지.(중략) 한국의 중심이 서울이라는 건 영화 개봉일만 봐도 알 수 있던 떄였다. 하지만 서울은 늘 가깝고도 멀었다. 거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고, 그럼에도 너무나 절실하게 그 안에 있고 싶었다. 그 점에서 <송시>의 '전과자'가 웃으라는 말에 웃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와 닿았다. 물론 그게 오히려 그들을 타자화하는 데 일조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은 한참 뒤에야 했다. 게다가 미선이는 서울대 학생들의 밴드였고, 앨범에서 풍기는 감수성이 실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애들의 흉내 내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편 재수 없엇다. 그러나 닮고 싶었다. 부러웠다. 음악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재능이 부러웠고 그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부러웠으며 동시에 이상한 박탈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게 질투였는지 동경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 둘이 대충 아무렇게나 뒤섞였을 것이다.

특정 음악이나 음악가가 한 시대를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압도적인 하나'를 기필코 찾아내 그걸 신화적인 위치에 놓고 싶어 한다. 21세기의 비평가와 언론들, 음악 팬들이 펫샵보이즈를 이곳으로 불러오는 맥락도 그렇다. 하지만 언제나 이것은 오만이고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내가 1980년대를 학생운동이나 롤라장이 아니라 너덜해진 니코보코 운동화의 뒤축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80년대의 사운드는 펫샵보이즈이기도 하고 런던보이즈이기도 하고 김완선이나 어떤 날일 수도 있다. 의미는 동일하지 않고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자의적이고 경험적이다. 그래서 대표적인 언어보다는 파편화된 언어가 더 중요할 것이다.

세상이든 사람이든 홍대앞이든 변하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변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떠난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변한 것인지도 모른다. 좋았던 시절은 다 지나가지만, 누군가에겐 지금이 가장 좋은 시절일 것이다. 이걸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 무엇도 납득할 수 없게 된다. 조금 쓸쓸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제대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장혁의 <스무살>. 책 때문에 처음 알았는데 좋다.

 

*아이유가 부른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아이유 정말 좋아하고 김창완 노래의 리메이크도 좋았지만 정말 이 노래만큼은 가을방학 원곡이 훨씬 더 좋은 것 같다. 아이유가 부르면서 지나치게 매끄럽고 뽀송뽀송해져서, 원곡의 투박하고 성긴, 탁한 그 맛이 없어진 느낌. 맑고 고운 목소리가 오히려 상상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니.

 

*맨 마지막, 에필로그와 별도로 음악 비평과 비평가에 대한 글을 덧붙인 것도 재미있었다. 종종 음악 비평의 쓸모없음과 직면하면서 무기력해지는 자신과, 순수 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암묵적인 이분법, 거기에서도 같은 대중문화에 속했다고 생각되는 영화 평론과 비교될때 상대적으로 비평이라고 부를 만한 작업이 벌어지는 공적 공간 자체가 드물다는 현실, 음악 자체로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학적인 관점의 해석이 요구되며, 본질적으로 모호한 음악이기에, 거기에 대한 해석조차도 애매하다고 느껴지는 사실, 지금의 음악 비평가는 음악 산업 안에서 약소한 권위에 기댄 홍보 담당자가 아닌가 싶을 때도 많다는 자괴감.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저런 음반을 다 사고 들어볼 정도의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느껴지는데, 사실상 현실은 그보다 너무나 팍팍해 놀랐다. 음원시장 자체가 얼어붙어 있고 상당히 치우침이 심한 한국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은 예전부터 들렸기에, 그 음악 산업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일생이 고단할 수도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냉정하게 본다면 비평이란 어쩌면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빛이 없는 우주 공간에는 그림자가 없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없듯이, 비평하는 대상이 없거나, 부실하거나, 힘이 없다면, 그 분야의 평론가들은 더 무기력해질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매우 자주, 어쩌면 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이란 그 장르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고민하고, 누군가로부터 욕을 먹으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지라도 끝까지 그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슬펐고, 한편으로는 따뜻해졌다.

 

*책 뒷면을 보니 1쇄 발행 후 보름만에 2쇄를 발행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 책이 작가에게는 사랑하는 음악을 계속 들으면서 음악 평론가의 길을 꿋꿋히 가게 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꼭 그랬으면 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작가가 이 다음에 쓸 책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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