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을 샀어
조경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차례


풍선을 샀어

 

서른일곱이라는 나이는 등에 웬 낙타 한 마리를 짊어진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하루의 삼분의 이를 자신을 위해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시간의 노예나 다름없다고 니체는 말했지만 환갑이 훌쩍 넘은 부모와 네 살짜리와 백일 된 조카가 둘 있는 집 안에서 자유인으로 살기란 정말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여전히 니체의 생활신조를 나의 생활신조로 여기고 있었다. 가볍게 잠을 자고 편안하고 여유로운 자세로 걸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명예를 탐하지 않는 것, 그리고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비상하력 하며 지산에게는 야박하게, 다른 삶들에게는 부드럽게.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다른 삶들이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친구도 없고 친구처럼 지내는 옛 애인도 없다. 스무 살이던 십 칠 년 전에도 나는 혼자였고 십 년 전에도 혼자였다. 나는 지금 서른일곱 살이나 되었는데도 처음 태어날 때처럼 혼자다.

 

나는 종종 내가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게 가족들하고 있을 때만 그런 건지 아니면 집에 있을 때 그런 건지 잘 분간이 안 가지만. 그래도 나는 공부라는 걸 십 년 동안이나 했는데 말이다.

 

"불안을 느낄 때는 확실치는 않지만 어떤 위험이 곧 닥쳐올 거라는 생각에 압도당해서 긴장될 때야. 그리고 공포는 두려운 대상이 뚜렷하기 때문에 피할 수가 있는 거고. 그 대상이 사라지면 더 이상 공포는 지속되지 않는 거야. 그러니까 무엇을 피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불안과는 구분이 되는 거지."

 

J를 만난 후 수많은 철학자들 중에서 내가 니체를 선택한 그 오래전의 이유를 다시 상기하게 되었다. 그것은 많은 철학자들 중에서 오직 니체만이, 인생의 완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의 모든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은 철학자였기 떄문이다. 나에게는 직면한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고 더러는 극복한 것도 그러지 못한 것도 있다. 철학의 힘이 아니더라도 이제 나는 나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또 그것과 화해하고 싶다. 정말로 지키고 싶은 게 생겼으니까. 그러자면 화살을 밖으로 향할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돌려야 한다.

 

병은 시간과 함께 진행된다는, 병에 대한 히포크라테스의 견해는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모든 병에는 발단이라는 게 있고 그것은 점차 심각해져서 위기라든가 절정 같은 것을 맞게 된다. 마치 소설처럼 말이다. 그 다음에는 다행스러운 결말 혹은 치명적인 결말에 이른다고 그는 말해다. 이렇게 해서 히포크라테스는 '병력'이라는 개념을 의학에 도입하게 된 것이다.

 

내가 하이델베르크를 떠나기 전에 그는 나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너의 장점은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학문을 하겠다면 그것은 아주 큰 장점으로 작용할 거야. 그런데 너는 바로 그것 때문에 고립적으로 살아갈 운명에 놓이게 될 거야, 영원히.

 

 

달팽이에게

 

'의심하라, 그리고 움츠러들지 마라'

어렸을 적에 나는 뜻하지 않은 일이나 기쁜 일, 슬픈 일, 혹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의심하라, 그리고 움츠러들지 마라, 자신에게 되뇌고는 했다.


 

형란의 첫번째 책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쓰야키 씨. 쓴다는 건 종이 위에 나를, 나의 표상 하나를 거기에 내려놓는다는 게 아닐까요.

버지니아 울프를 만났다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지만 그러나 나는 내 인생이 옳은 쪽으로 흘러가는지 그렇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완전히 혼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할 게 많아진다는 것을 뜻하는 건지도 몰랐다. 생각을 하는 것만이 지금 내 운명과 맞서는 가장 열정적인 저항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밤이 깊었네

 

누구나 어떤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지기도 한다. 나는 B라는 한 남자를 만난적이 있었다. 그의 죽음은 나에게 머뭇거리다 포기하게 한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어떤 사람은 아내가 되고 어떤 사람은 부모가 되고 배우가 되고 죽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글을 쓰기도 한다. 중요한 일을 겪고 났을 때 사람들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나의 체념은 그를 잃음으로써 완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새 희곡을 한 편 쓰기로 했다. 쓰겠다는 생각보다 쓰겠다는 의지가 더 중요한 그런 때가 온 것 같다.


 

2007, 여름의 환(幻)

 

적어도 거짓말에 관해서라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최고의 이론가이자 분석가인 것 같다. 그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를 여덟 가지로 분류했다. 누군가를 종교적으로 개심시키기 위해서, 순전히 악을 행하기 위해서, 속이는 일을 즐기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해를 주면서 누군가에게는 기쁨을 주기 위해서,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흥미를 돋우기 위해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모욕이 일어나는 일을 막기 위해서. <거짓말에 관하여>란 책을 쓴 후 그는 '어둡고 가시가 돋쳐 다루기 힘든 어려운' 텍스트를 썼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거짓말에 관해서는 쓰기도 힘들지만 하는 것도 힘들며 내 경험에 의하면 거짓말을 한다는 건 때로 지적인 노동에 속하기도 한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여덟 가지 분류 중 거의 모든 사항에 속할 만큼 다양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아무 이유가 없을 때가 많다. 나는 그것이 진정한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거짓말쟁이는 진정한 미식가처럼 혀로 음식을 맛보거나 말을 밖으로 뱉어낸 후 입술이 맞닿은 뒤에 탄성이 이어지는 정교한 소리에 큰 만족감과 기쁨을 느낀다.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거짓말이 왜 나쁜가?

 

어쩌면 거짓말의 탄생이라는 것은 나약한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태어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혼자 있을 때도 나는 약하고 둘이 있을 때도 약하고 사랑이 없을 때도 약하고 사랑이 있을 때도 나는 약하다.

 

거짓말이 필요한 순간이 있는 것처럼 진실을 진실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불편하고 때로 고통스럽다.

 

두 번뿐이기는 했지만 의사를 만난 것은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의사는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그게 다 지루해서 그런 거라고 말했다. 그때는 흘려들었던 말이 지금 생각난다. 그때 나는 내가 지루하거나 무료하거나 혹은 심심하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하지 못했으니까. 이제야 그 말이 생각난다면 어쩌면 내가 지루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더는 큰 변화가 생길 것 같지 않은 내 일상이. 여름은 너무 길잔항요. 의사가 그 말도 했던 것 같다. 일 년에 넉 달씩이나 차지하고 있으니 여름이 너무 길긴 길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알 것 같다. 여름이 없이는 가을과 겨울이 시작될 수 없고 계절은 언제나 봄 여름 가을 겨울로 흘러갈 거라는 사실을. 


 

마흔에 대한 추측

 

만약 내 구두 속에 돌멩이 한 개가 들어간 정도라면 구태여 카운스링 같은 건 필요 없었을 것이다. 구두를 벗어 그냥 흔들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 테니까.

 

타인에게 친화적이고 관대하며 게다가 능동적인 사람들을 보면 더럭 겁부터 난다. 나는 잘하는 것도 별로 없는 사람이넫 중요한 것은 꼭 더 못한다.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글쓰는 일만큼 어렵게 느껴질 떄가 많다. 특히 남녀관계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통의 관계보다 두 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일종의 생명체의 결합 같다. 글쓰기와 연애의 공통점이 있다면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잘 안된다는 것이다. 결과를 짐작할 수도 없다. 김선생이 전화를 걸어와 P라는 사람을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떠보았을 때 나는 한동안 잊고 있던, 그 관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일상의 유익한 윤활유 같은 것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그리고 책 한 권의 무게.

 

만약 누군가 나를 지켜본다면 입고 있는 옷 위에다 언제나 내가 서너 겹의 조끼를 더 껴입고 상대방과 마주 앉아 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경계심이 많다는 것은 좋게 말하면 신중하다는 뜻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편협하다는 뜻이다. 특히 대인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고치려고 애써본 적도 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단점을 지니고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게 바로 단점을 극복하는 거라는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

 

한 사람을 신뢰하게 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가. 나에게는 주로 상대방과의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한 일화를 통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이미지로부터 온다.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그게 나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더 나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확대된다. 나를 안정시켜줄 만한 것이 필요하다. 프로작은 싫다. 그날 밤, 눈에 띄는 책 중에 가장 무거워 보이는 것으로 골라 그것을 활짝 펼쳐서는 가슴 위에 올려놓고 불을 껐다. 한 시간이 지나갔다. 그도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긴 했다. 또 한 시간이 지나갔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일들도 있었다. 때로는 아무리 무거운 책도 위로가 안 될 때가 있다. 나는 440쪽 양장본에 가로세로 242X176밀리미터나 되는 움베르토 에코의 <미의 역사>를 침대 밖으로 밀쳐버렸다.

 

에니어그램이라는 것은 '아홉 개의 점이 있는 그림'을 뜻한다. 고대 수도자들 사이에서 구전되던 에니어그램은, 인간은 아홉 가지 성격 유형으로 분류되며 어떤 사람이라도 그중 하나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걸 기본 원리로 삼고 있는 심리학의 한 분야라고 한다. 그 아홉 가지란 것은,

1. 개혁가

2. 돕고자 하는 사람

3. 성취하는 사람

4. 개인주의자

5. 탐구자

6. 충실한 사람

7. 열정적인 사람

8. 도전하는 사람

9. 평화주의자

이다.

 

그렇다면 4번, 개인주의자란 어떤 타입일까.

 민감하고 안으로 움츠러드는 유형. 생각이 많고 소심함. 다른 사람들과는 기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 유지. 자신에게 특별한 재능과 특별한 결함이 동시에 있다고 여김. 사회적인 기술이 부족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사람들과는 깊은 관계를 맺기를 바라고 있음. 통찰력이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음. 자신을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함. 너무 효율적이거나 너무 행복한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함. 예술적인 작업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어두운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함. 만성적이고 장기적인 우울증과 무력감을 갖고 있음.*
 인간의 마음은 두뇌의 화학작용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내가 지금 우울하다고 느끼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 의미를 찾지 못해서일까.

*돈 리처드 리소`러스 허드슨, <에니어그램의 지혜>, 한문화, 2000

 

닥터 현은 우리가 줄곧 두려움을 갖고 행동하면 그 두려움이 현실이 되는 법이라고 말햇다. 내가 줄곧 토끼를 갖고 행동했기 때문에 토끼가 현실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와의 상담을 통해서 내 문제를 극복했거나 해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좋은 의사가 아니었을지도 모르며 나 역시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 한 이야기보다는 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헐씬 더 많았으니까. 그러나 그와의 상담을 통해서 나는 나한테 일어난 한 가지 변화에 주목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개인주의자답게, 나는 언제나 내가 가진 문제가 가장 중요했으며 타인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것,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상태를 훨씬 더 익숙하게 여겨왔었다. 닥터 현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귀를 열자, 이야기가 들렸다. 세상에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그것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닥터 현은 나에게 분석적이고 명상적이며 생각이 많다고 했다. 그것은 나의 장점이며 내가 아직 모르고 있는 나 자신의 일부라고 지적해주었다. 나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는 무엇을 피하고 싶은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다. M은 종교를 가졌으며 Y는 먼 데로 떠났고 나는 닥터에게 갔으며 수형은 에니어그램에 빠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든 것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 즉 자기 발견의 과정일 테니까.

내 나이에 다른 사람들은 뭘 하고 있을까?

 

패를 읽거나 패를 숨기는 것은 여전히 잘하지 못했지만 마작을 하고 있는 이 순간, 내 손에 쥐고 있는 이 패가 지금 이 순간으로서는 가장 현실적이며 가장 난처하기도 하고 가장 힘들고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나간 패에 미련이 남아 뒤돌아보는 순간,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이 순간을 즐기고 싶다면 지금 내 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지 않을까.

 

닥터 현이 말한 두 가지 두려움은 첫째 타인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에 대한 두려움이며 둘째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들이 바로 나를 최상의 상태에서 글 쓰는 것, 나만의 방식으로 글 쓰는 것과 내가 나인 채로 존재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라고 지적하였다. 만성적인 우울과 장기적인 무력감, 그리고 다른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하는 행동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닥터 현이 나에게 내려준 처방은 긍정적인 일과표를 만들어보라는 것이었으며 어느 날 불쑥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리지 말고 잘 안 되더라도 다시 글쓰기를 시도해보라는 것이었다. 세상과 잘 연결되어 있을 때 영감은 더 잘 떠오를 것이라는 게 닥터 현의 판단이었다.

 

나는 내가 이제 실존주의자라는 것에 동의한다. 개인적인 자유, 의미 있는 삶, 책임을 강조하는 삶. 역시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면하는 일은 언제나 불안을 야기하며 그 장애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내가 올바른 실존주의자가 된다면 내 목적은 그 일을 실천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닥터 현의 말처럼 외부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꿈에 대해 생각했다. 또한 내 질문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무엇을 얻고 싶은가.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일이 나에게 세게 부딪쳐 왔을 때 적어도 그것이 토끼 때문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될 것 같다. 좀더 유연해진다면 좋겠다. 내가 갖고 있는 신념이란 게고착되어 있다면 스스로를 새롭게 발전시켜나갈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추구하고 부딪쳐봐. 

 

 

달걀

 

한 사람은 원하고 한 사람은 그것을 원하지 않을 때, 두 사람 사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요구와 저항과 압박과 위협과 그리고 마침내 한 사람의 굴복, 그리고 그 후에는 그것들의 반복이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지금껏 내가 만난 여자들과 나의 관계였다. 이모와 나의 관계였다. 이모가 어떤 요구나 위협도 하지 않았다는 것, 압박과 질책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내가 느낀 저항과 굴복은 책임감과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건 바로 이모의 질병 때문이었고 그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었다.

 

무엇이 나를 때리고 갔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한 사람은 원하고 한 사람은 원하지 않을 떄의 경우만 생각했기 때문에 한 사람도 원하고 다른 한 사람도 바로 그것을 원할 때가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요구와 저항과 압박과 위협과 그리고 마침내 한 사람의 굴복, 그리고 그 후에는 그것들의 반복이 계속되는 관계 말고도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것으로 가득 찬 관계가 존재할지도 몰랐다. 이것이 착각이 아니라 인식이 될 수 있을까.

 


해설 원의 형상학, 책의 조재론_차미령

 

삶은 아마도 둥글 것이다.-빈센트 반 고흐

 


작가의 말

 

글 쓰는 일은 저에게는 이를테면 창문 같은 것입니다. 제가 속해 있는 공간 너머의 세상을 보여주기도 하고 또한 제가 머물고 있는 이쪽 공간을 밝혀주는, 환하디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뜨거운 책, 엄격한 책, 자유로운 책, 다 읽은 책, 다시 읽을 책 등등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은 이제나저제나 큰 즐거움입니다. 책 자체가 좋습니다. 위안과 힘이 되는 책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책을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서 저는 사랑의 가능성과 일상적인 것들 안에 감추어진 변화의 힘을 믿게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