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긴 만남 - 시인 마종기, 가수 루시드폴이 2년간 주고받은 교감의 기록, 개정판 아주 사적인, 긴 만남 1
마종기.루시드폴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 오랜 세월 공부 열심히 한 덕에 학위를 받게 되네요. 앞길에 대한 문제로 생각이 많을 대입니다. 음악의 길로 갈 것인지, 음악과 학문을 병행할 것인지, 그리고 귀국을 할 것인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그곳에서 당분간 사는 것이 좋은지 고민을 하게 되겠군요. 그런 문제에 나는 별로 도움을 줄 만한 실력이나 혜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나 자신이 비슷한 고민으로 젊은 시절 오랫동안 잠 못 이룬 경험도 있지요. 그 당시 내가 귀국하지 못하고 미국에 머물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나를 적극적으로 필요로 한 곳이 바로 미국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산다는 것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었고 10년 뒤, 아니 1년 뒤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 당시의 결정이 옳은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생각은 내가 아마추어라는 의식이었습니다. 나는 아직 장인이 아니다, 나는 아직 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공부를 하는 데 제일 많은 기회를 주는 곳이 어디인가, 그런 의문도 컸습니다.

그런 말 들었지요? 사람은 결혼을 해도 후회하고 결혼을 안 해도 후회한다는 말, 후회 안 하는 인생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단지 그 후회의 양과 질이 문제이지요. 천천히 잘 생각해서 모든 일을 결정하세요. 내가 혹 몇 마디 여기에 보태도 된다면, 조 군이 힘들여 공부한 생명공학을 아마추어라는 생각으로 겸손히 더 공부하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한편으로는 잠을 좀 덜 자고 내가 감당해야 할 팔자라고 생각하고, 윤석 군이 가진 음악적 재질과 열정, 그 황홀을 버리지 말라는 말도 건네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되도록 너무 늦기 전에 고국에 정착하라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이유는 명확히 말할 수는 없어요.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후회를 덜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토리노에 도착한 그 날, 영국의 학교로부터 거절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박사 후 과정도 없이 교수 자리를 지원하는 것이 난센스라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학회장에 들어서서부터 예전에 학회에 다닐 때 그렇게 재미있고 궁금하던 기분은 난데없이 사라지고, 노벨 화학상까지 탄 슈퍼스타급 연구자의 기조발표도 가서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지요. 그래서 일주일 내내 계속 토리노 시내를 돌아다니며 걷고 또 걸었습니다. 논문심사가 끝나고 시작된, 아니 사실 그간 잠시 잊고 있던 질문과 그 질문들에 대한 답과, 그 답에 대한 100여 가지는 되는 것 같은 이유들을 하나씩 들추어보면서 결국 결정을 내렸습니다. 연구를 그만두고,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이지요.

이곳에 10년, 20년을 산 것도 아니고, 고국에서 쫓겨나듯 오거나 고국이 싫어서 망명을 온 것도 아니고, 그저 여태까지 해보지 않은 공부를 좀 더 해보겠다고 자진해서 온 길이었는데....... 왜 지금 하던 연구를 그만두려는 걸까, 무엇보다 왜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걸까, 수없이 되뇌어보았습니다. 이건 급작스럽게 내린 결론일까. 아니면 여태껏 축적되어온 무언가가 결국 때가 되어 드러난 것뿐일까. 정말 로잔과 연구자로서의 인연이 다 되어서 떠날 ‘때’가 된 걸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요. 하다못해 가족들에게나 교수님에게도 납득할만한 이유를 드려야 했으니까요. 그러다가 굳이 중심에 있는 이유 하나를 끌어내보았는데, 그동안 그리 짧지만은 않았던 20대 말과 30대 초반의 외국 생활 동안 저의 내부에 끊임없이 쌓여온 어떤 내상이 이제 역으로 서서히 저를 무너뜨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가진단을 비로소 하게 되었습니다.

 

과학과 예술의 두 가지 길을 병행시키는 것은 지난한 일이기는 하지만 한평생을 걸어볼 만한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 묘한 보완 작용을 할 것입니다. 내가 만일 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시인의 길을 오래전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나는 편한 것을 좋아하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 인간에게 고난과 인내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시인의 삶이란 당치 않은 것이지요. 내가 만약 시인이 아니었다면 나같이 감정적이고 선병질적으로 외로움을 감당하지 못하는 몸으로 외국의 의사 생활을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건방진 말이지만 나는 의사로서 오랜 세월 동료 의사나 의대생의 애정과 존경을 받아왔고, 내가 살던 도시에서는 나의 은퇴를 아쉬워하며 여러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일제히 소식을 방영하기도 했지요. 윤석 군이 혹 힘들다고 소리를 가끔 지를 수는 있어도 두 가지 전공을 함께 이어가면 생의 끝에 절대로 후회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나에게는 있습니다.

 

언젠가 마음속으로 누군가가 네가 사는 목표가 뭐냐는 질문을 한다면, 저는 ‘knowing’이라고 대답하리라 생각했던 적도 있어요. 알아가는 것. 깨달아가는 것. 무언가들 수동적으로 배운다기보다는 자극에 반응하는 내 내부의 앎.

 

12년간 공학자로 살아왔지만, 공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것들은 사람들을 감동시키지도, 위로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남은 하나, 음악으로 돌아왔습니다. 유럽의 생활에서 비판적으로 그러나 깊게 깨달은 것은 ‘지금’의 중요성입니다. 왜, 영어로도 현재를 ‘present’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주어진 선물. 이 순간순간의 기쁨, 행복, 즐거움을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놓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앞만 보고 인내하고 달려가라는 프로그래밍만 되어 있지, 왜 지금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의대 본과 2학년이 되자마자 썼던 글로 의사이면서 문학자였던 사람들을 모은 글이지요. 시인이며 비뇨기과 의사인 독일의 고트프리트 벤, 소아과 의사이자 시인이었던 미국의 윌리엄 윌리엄스,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 영국 시인 존 키츠, 독일 소설가 한스 카로사 등 수십 명의 의사 문인을 열거하면서 썼는데, 편집자분들은 역사적 기록물이라고 농담을 하곤 합니다. 사실 나에게는 학생 시절, 의사가 된 뒤에도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런 사람 중에서 괜찮은 글쟁이도 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에 사전을 뒤지고 땀 흘려가며 이름을 추려냈던 슬프고 불안에 찬 시절의 산물이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