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1 - 개정판
김형경 지음 / 사람풍경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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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김형경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배용준의 영화 '외출' 때문이었다. 아마도 영화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영화를 바탕으로 소설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에피소드를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 겨울 연가 후 한류스타로 등극한 배용준의 영화, 그 자체가 화제가 되었었고, 영화가 먼저 만들어진 후 그 영화를 바탕으로 소설이 나왔는데, 소설의 작가가 신인도 아니고 무명도 아닌 작가 김형경이라는 이유로 화제가 되어 그것에 대해 언급한 신문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내가 다시 김형경의 이름을 접한 것은 그 유명한 심리에세이 시리즈 때문이었다. 내가 읽은 것은 사람 풍경, 그리고 만가지 행동. 한 권에서는 감탄을, 한 권에서는 실망을 각각 했기에 남은 두 권의 심리에세이를 볼까말까 고민하던 차에 김형경, 하면 이 책이 빠지지 않고 논해지는 것을 보고 호기심에 빌리게 되었다.

 

 사랑에 다친 동갑내기 친구 두명의 이야기가 번갈아 서술된다. 아마도 작가의 나이 또래이자, 현재 법적인 싱글로 살아가고 있는 직장 여성 두 명에는 작가 스스로가 많이 투영되었을 것이다. 물론 직접 정신분석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알지 못할 정도로 자세하게 서술된 부분을 보더라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작가 스스로가 정신분석을 받았던 경험도 있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은 깊이가 있다. 소설이 깊이가 있다는 것은 그 소설을 쓴 작가가 그만큼 외로웠고, 두려웠고, 불안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작가의 개인적인 일상이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그 작가의 작품은 독자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에 어쩌면 작가는 천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통 속에 진주를 잉태하는 조개처럼, 한평생 힘겨울지라도 내가 죽고 난 후에 작품이 끝까지 남아 이어지는 인생과 죽고 나면 그것으로 끝일 뿐이더라도 사는 내내 결핍 없이 행복한 것. 작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자의 인생을 택한 존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분석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궁금했는데 이 책으로 호기심을 많이 충족시킬 수 있었다.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구체적으로 이 부분이 내 일상이 된다면 어떨까, 생각하는 계기도 되었고.

 


 한번씩 연애를 할 때마다 인혜는 자신의 추악함과 맞닥뜨리는 시간들을 보냈다. 진찬과의 관계를 정리할 때는 처음으로 자신의 의존성을 보았다. 바위에 매달린 풍란이나 콩나무에 기생하는 실새삼처럼 남자에게 기대어, 더 많은 것을 달라고 남자를 볶으면서 한평생 보낼 자신을 보았다. 어머니의 대사 몇 가지가 생각났다. 돈만 많이 벌어다 줘봐, 뭐는 못해주겠어? 그 말은 자주 지방 소도시 역무원을 무참하게 만들었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담배를 찾아 들고 묵묵히 마당으로 나갔다.

 진찬 다음에 만난 엔지니어와의 관계에서는 내부에 있는 질투를 보았다. 길을 걷다가 그가 다른 여자를 쳐다보기만 해도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상대가 백화점 점원이거나 50대 중년이거나 상광없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분노가 엔지니어에게가 아니라 낯선 여자에게 향한다는 것이었다. 외도한 남편이 아니라 첩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아내의 심정이 그럴 것이라고 짐작했고 그것이 꼭 그만한 생존 욕망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 남자가 곧 생존 권력이기 때문에 본처도 소실도 삶을 부여잡는 절박함으로 서로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것이구나.......

 그 다음 연애에서는 내부에 있는 의심과 불신을 보았다. 남자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낱낱이 알고자 했고, 그의 행적이 잡히지 않을 때는 온갖 망상을 키웠다. 기어이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지경까지 갔다. 그 다음 연애에서는 자신의 이기심을 보았다. 남자에 대한 배려와 헌신은 그와 함께 있는 동안만이었다. 돌아서면 곧 그의 존재를 잊었고 남자를 위해 자신의 시간이나 욕망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자신을 보았다.

 사랑은 날것인 자신과 직면하게 되는 가장 에누리 없는 방식이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한 번씩 자신의 추악함을 겪고 나면 그 증세가 많이 완화된다는 점이었다. 인혜가 더 많은 사랑을 해보고 싶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인지도 몰랐다. 사랑은 분명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고,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피나게 투쟁하는 일이고, 그것을 통해 점진적으로 자아가 확장되는 것을 느끼는 일이었다. 한 사람이 머물다 떠날 때마다 내면의 공간도 그만큼 넓어졌고 그 자리에 더 많은 빛과 바람이 드나들었다. 물론 다음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도 한결 쉬웠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인혜는 넘어서야 하는 또 하나의 자기를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권력욕이었다. 어느 순간, 그 관계의 처음부터 자신이 원했던 것은 진웅이 가진 지식이라는 권력이었음을 깨달았다.......인혜는 아무래도 진웅과의 관계에서 또 한 번 자기를 보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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