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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ㅣ 파랑새 청소년문학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롤랑드 코스 편집, 정재곤 옮김, 조르주 르무안 그림 / 파랑새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총 101쪽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맞느냐고? 맞다. 바로 그 책이다. 실직하거나 아프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등등의 일이 없으면 감히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소위 요새 유행하는 옥중, 상중, 병중, 아웃 오브 안중 의 4가지 경우에서 감옥에 가거나, 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하는 두 가지 경우라면 모를까, 어쩌면 이 책을 평범한 우리들이 읽기에는 지적 호기심에 못지 않은 지적 허영심이 강하게 들지 않는 이상은 힘들지 않을까 싶다.
살다보면 허세라는 것은 간혹 필요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조정래의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 을 전부 읽었었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이문열의 삼국지를 읽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딱히 뭐가 어떻게 된 것은 없는 것 같다. 특별히 줄거리나 장면이 뚜렷하게 기억이 나지도 않고, 아마도 책을 읽으면서 기억나는 구절 몇 개를 적어놓지 않았더라면 더 허무했겠지. 그저 다른 친구들의 부러움, 혹은 저 아이 좀 특이한데? 하는 눈빛, 그리고 나는 이렇게 특별한 아이야, 하는 내 만족감. 그런데 요즘 들어 느끼는 것은 이러한 허세가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쪽으로의 허영심은 그래도 건전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히려 좀 더 허세를 부려서 박경리의 토지도 요약본이 아니라 전부 다 읽고 펄벅의 대지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 러시아 소설가들의 숨막히는 소설들도 전부 다 읽어봤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것인지 아니면 공부가 질려서인지 아니면 진짜로 뇌가 노화하는 것인지 실생활에 관련이 없고 실질적으로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일이 아니면 순수하게 달려들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싶었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이 쓴 '프루스트가 당신의 삶을 바꾸는 방법'도 읽었고 만화로 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읽을 계획에 있다. 이 책은 있는지도 몰랐던 책인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하고는 집었다. 얇은 두께에 끌려서. 금방 읽을 수 있으니까.
롤랑드 코스라는 이름의 엮은이는 오래전부터 프루스트를 마음에 품어왔던 모양이다. 평생 한번도 읽기 힘든 그의 책을 여러번 읽고 또 읽으면서 소설 전체에서 일부 구절들을 골랐다. 그러기에 이 책은 마치 핑거 푸드를 보는 느낌이다. 작지만, 한 입 베어물면 여러가지 맛이 알차고 꼼꼼하게 느껴지고, 바라보고 있으면 모양도 예쁘고, 일단 한 개 먹고 나면 계속해서 먹고 싶어지는, 그런 느낌. 워낙 양이 적으니까, 만약에 먹었다가 맛이 없으면 어떡하지, 다 못 먹고 남기면 어떡하지, 먹다가 배부르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없이 일단 요리조리 모양만 살피고 나서 부담없이 집어들 수 있는 그런 핑거푸드 같은 느낌. 참, 이 책은 모양도 예쁘고 심지어 맛도 좋고 영양까지 고루 갖춘 특급 핑거 푸드이다.
<마들렌 과자>
이내 나는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내일도 서글프기는 마찬가리리란 생각을 하면서 기계적으로 마들렌 과자 조각을 적신 홍차 한 술을 떠서 입에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섞인 홍차가 내 입 천장에 닿자마자 내 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심상치 않은 뭔가에 저절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무슨 일인지 전혀 종잡을 수 없는 가운데,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찾아들고 따로 떼어 놓았다. 느낌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나를 소중한 정수로 가득 채움으로써 삶 자체가 하찮아 보이고, 삶이 안겨 주는 온갖 어려움이 아무렇지도 않으며, 인생의 덧없음이 무시해도 좋을 듯 느껴졌다. 그 정수는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우정>
붉은 기가 도는 금발 소녀가 산책에서 돌아온 듯, 손에 꽃삽을 쥔 채 분홍색 주근깨가 박힌 얼굴을 들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검은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오랫동안 그 때를 돌이켜보면서 그 계집아이 눈동자 색이 어땠는지 객관화시켜 볼 도리가 없었는데, 어쨌든 내가 그 눈빛을 돌이켜서 떠올리면 계집아이가 금발이었던 만큼 즉각적으로 밝은 하늘색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만일에 그 아이의 눈동자가 그토록 검게 보이지 않았더라면(처음 계집아이를 봤을 때 너무도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 때도 그랬지만 내가 그 아이의 푸른 눈에 그토록 미친 듯 빠져들지는 않았을 터였다. 나는 나가고 없는 질베르트가 이제 곧 집으로 돌아와서 몇 시간이고 나에게 말을 걸고, 내가 콩브레에서 처음 봤던 그 주의 깊고 미소 띤 표정을 지을 생각을 하니 얼마나 가슴이 벅차오르던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질베르트가 미소지을 때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얼굴뿐 아니라, 타원형 볼은 영락없는 아버지 모습이었다. 마치 부모 양쪽이 섞이면 어떤 형태가 만들어질지 궁금해서 일부러 섞어 놓은 듯했다. 질베르트의 눈에는 아버지의 선량하고 정직한 시선이 담겨 있었다. 질베르트는 바로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마노 구슬을 건네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자, 받아. 우리의 우정을 기념하는 선물이야."
<잠>
잠자는 사람은 시간의 줄과 여러 해, 여러 세계를 나기 몸 주위로 칭칭 감고 있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잠자는 사람은 깨어날 때 자기 몸에 감아 놓은 것들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는 순식간에 자기가 잠들기 전에 떠나왔던 장소며 시간으로 어김없이 되돌아온다.
<독서>
나는 거의 닫혀 있는 덧창 사이로 간신히 노란 날갯짓을 하는 오후의 햇살을 물리치면서 투명하고 연약한 신선함과 노니는 내 방의 침대에 누워, 한 손에 책을 들고 구석 한 켠에 자리 잡고 앉은 나비처럼 꼼짝 않고 숲과 유리창 사이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들었다. 나는 읽던 책을 놓고 싶지 않아, 정원 마로니에 나무 및에 에스파르트 섬유와 천으로 만든 바라크 안에 들어앉아 부모님을 찾아오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끔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 곳에 앉아 하루 종일 종소리를 듣고 책을 읽으면서 몽상에 잠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