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일 선현경의 신혼여행기 2
선현경, 이우일 지음 / 황금나침반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이렇게 살 수도 있을까

 

결혼은 언제 할까? 그는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게 내가 받은 프러포즈이다. 영화나 드라마의 프러포즈는 늘 근사하던데, 역시 내 삶은 좀 코미디 같은 데가 있는 모양이다. 언제나 중요한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간다. 아무튼 우린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떠나기로 결심했다.

당시 남편은 취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몹쓸 병에 걸려 있었다. 그는 술에도 취해 있었고, 사회에도 취해 있었다. 그럭저럭 돈 벌고, 그럭저럭 쓰며, 그럭저럭 사는 데 취해 있었던 것이다.

잠시도 아니고 몇 달이 될지도 모르는 기간을 비우고 나면 분명 일감이 떨어질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나면, 그의 빈자리는 금방 메워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가겠다고 했다. 당장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가 문제라며, 이렇게 취해서 사는 인생을 청산해 보겠다고 했다. 물론 그렇게 다녀와서 당장 어떻게 먹고살 건지에 대해서는 조금은 걱정되는 게 사실이었다. 돌아와서 둘 다 할 일도 없이 빈둥거리면 어떻게 밥을 먹고 사느냔 말이다. 하지만 한 번 사는 인생, 무슨 부귀와 영화를 누리겠다고 하고 싶은 일도 못하며 아등바등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좀 길긴 하지만 미래를 위해 일단 떠나보기로 했다. ‘뭐 인생이 장난이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인생은 장난이다. 재미있게 살려면 물불 안 가리고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게 인생이다. 난, 아니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책갈피에 적혀 있는 선현경의 이 말이 책 전체를 대표한다. 남들은 보기에 장난이지만 본인들은 삶 자체에 충실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죽어라 공부하고 일하는 일들 모두가 인생의 ‘재미’를 위해서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부부야말로 가장 인생을 진지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행을 인생에, 혹은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것은 이제 식상할 정도인 표현이 되어버렸다. 입학을 앞둔 예비 대학생들의 이른바 ‘머스트 두 리스트’이자 ‘위시 리스트’에는 재학 중 배낭여행이 빠지지 않는다. 한비야의 오지 여행, 김남희의 여자 도보 걷기 여행, 이 외에도 도쿄 카페 여행, 유럽 치즈 여행, 미국 캠핑카 여행, 각종 여행, 여행, 여행이 끊이지 않는다. 이제 여행서도 지역별, 주제별로 세분화되었고, 여행자들의 여행 목적도 다양하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신혼여행을, 평생에 단 한번(이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한번이어야 할)인 이 시간을 이렇게 보낼 수 있는 간 큰 부부가 있을까?

내가 읽은 이 책은 10년 만에 복간되었다. 결혼이라는 단어에 대해 귀를 쫑긋하게 된 지 이제 얼마 안 되는 내가 무려 고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도 아니고 초등학생 때, 신혼집 얻을 돈으로 303일 동안 유럽 전역을 누빈 남녀가 있었다는 것이다. 10년 만에 복간되었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일은 아무나 못 벌린다는 것이다. 오직 이 부부만 할 수 있었기에 10년 전 여행기가 다시 나왔겠지. 몇 달만 지나도 새로운 정보가 업그레이드 되어 구식 취급 받는 것이 여행서 아닌가.

이 책으로는 최첨단 여행 정보를 얻을 수는 없다. 여행서의 특징인 총천연의 이국적인 사진도 단 한 장 없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책을 집어든 다른 독자들도 이런 것들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신혼 부부 중 ‘아내’의 시각으로 본 ‘남편’과 ‘결혼’, 그리고 ‘세상’이다.

여행사에서 아무 문제없다고 장담하던 항공권이 말썽이 되어 신혼 첫날밤을 공항에서 지내게 된 웃지 못 할 사연, 여기서도 선현경은 인생이란 때로는 타인의 실수까지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넉넉함이 자신 못지 않게 괴짜스러운(?) 남편과 별탈 없이 303일 동안 여행을 해 오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신기하게도, 이 두 부부는 크게 싸우는 일이 없다. 태평함과 유머스러움을 놓고 보면 참 천생연분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나는, 과연 이렇게 나와 딱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부러움이 함께 든다.

학생 시절 혼자 온 유럽의 한 여행지에서, 선현경은 ‘무슨 바람이 들었던지’ 지금의 남편에게 헤어지자는 엽서를 보냈다고 한다. 대학생 배낭여행을 다녀온 한 사람으로서 나도 그 ‘바람’에 공감하는 면이 있었다. 바로 그 장소를 그 사람과 함께 왔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만약 나도 결혼한 후 처녀 시절에 갔던 그 장소를 지나친다면 그 당시 떠올렸던 사람을 떠올리게 될까. 어떤 기분일까.

선현경의 다른 책들, 특히 ‘가족 관찰기’를 읽어보고 싶다. 완전한 유부녀가 된 그녀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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